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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전 비행은 서울에서 퀵턴. 저녁 비행으로 동경행 레이오버가 잡혀 있었다. 소영의 비행 스케줄은 10년 차 시니어 크루답지 않게 빡빡하게 차 있다. 다른 팀에 일손이 부족할 때 합류하는 조이닝 크루도 자주 한다. 목요일 동경행 저녁 비행은 그녀가 꾸준히 타 온 일정이었다. 사무장은 홍콩 사람인데, 일본어가 수준급인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해서 되도록 부탁하는 편이다. 소영이 중국어(광둥어)를 공부할 때 도움을 줬던 분이어서 그녀와 일하는 게 소영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내 서비스 준비를 마친 또 다른 캐빈 크루들이 트롤리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영은 이코노미석으로 가는 그들을 보다가 비즈니스석에서 오는 콜을 대기했다.
홍콩에서 동경까지 네 시간 반. 식사와 음료 서비스가 나갔다. 승객들의 요청도 일일이 챙겨야 했다. 위스키 주문이 들어와 트롤리를 끌고 나갔다. 늦은 시간이라 기내는 불이 꺼져 있었다. 개별 등이 켜진 곳은 한 곳이었다. 위스키를 주문한 남자는 승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노트북 화면 밝기를 낮추고 조용히 터치패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 집중한 옆얼굴이 보였다. 아, 그 남자다. 소영은 단번에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녀는 트롤리를 멈추고 안을 뒤졌다. 소다수 한 병을 꺼냈다.
“실례합니다. 위스키 주문하셨죠.”
그녀가 다가오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잔을 놓을 자리를 마련하듯 테이블에서 손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소영은 위스키가 담긴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내려놓았다. 이어 소다수 병도 내려놓았다.
“아, 이건…….”
주문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남자가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소영은 싱긋 웃으며 트롤리를 밀고 돌아갔다.
남자, 카세 료는 그녀가 두고 간 소다수 병과 위스키 잔을 바라봤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갈 때마다 이 편을 이용하곤 했다. 하이볼을 마시고 싶어서 번번이 이렇게 주문했던 게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깜박하고 위스키만 시켰다. 아차 싶었지만 두 번 불러서 정정하는 것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그냥 먹지 생각했다. 그런데 번들처럼 딸려 나온 소다수 한 병이 머쓱하게 노트북 옆에 자리했다. 그에게 웃어 보였던 승무원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떻게 기억한 거지?
카세 료는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어두운 기내를 둘러봤다. 캐빈 크루들이 머무는 벙커는 말 그대로 벙커처럼 어둑했다. 암막 커튼에 가려서 빛 한줌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다시 앉았다. 별것 아닌 친절이었지만, 기억해 주고 챙겨 주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그는 소다수를 따려고 집어 들었다. 왼손 약지에서 숨죽여 자리 잡고 있는 금반지가 묵묵히 조명에 반짝였다.
***
비행이 끝났다. 네 시간 반 동안 노트북을 노려보던 일본인도 서류 가방을 챙겨 내렸다. 소영은 그가 30센티 기내용 캐리어를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까 잔을 치우러 갔을 때 그는 그녀의 명찰을 살펴봤다. 소영은 그를 살폈다. 각 잡힌 하얀 와이셔츠에 재킷과 넥타이가 없는 쿨비즈룩이었다. 그의 것으로 보이는 코트 한 벌이 다리에 걸쳐져 있었다. 홍콩과 동경의 겨울 날씨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중에 입을 것으로 미리 꺼내어 놓은 것 같았는데. 머플러가 없이 셔츠 카라만 희게 빛나는 목이 허전하다고 소영은 무심코 생각했다. 짧은 머리카락은 왁스를 발라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남자의 눈매였다. 두꺼운 눈썹 아래 혼혈인 것처럼 눈두덩이 푹 들어갔다. 깊은 눈이었다. 검은색 눈동자를 흘깃 쳐다보다가 그녀는 빈 잔을 들고 인사한 후 벙커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영문으로 표기된 한글 이름을 생소한 듯 눈을 좁히며 한참 봤으니까.
탑승객을 배웅한 뒤 소영도 오프 준비를 했다. 비행 동안 계속 참고 있던 갈증이 어서 빨리 호텔로 가서 핸드백에 숨겨 두었던 은밀한 기호품을 꺼내 물라며 그녀를 충동질했다. 핀이 두피를 찔렀다. 유니폼을 해제하라고 아우성치는 몸의 파업 신호였다. 고작 전조 현상에도 소영은 입 안이 사막처럼 바짝바짝 말라 갔다. 트롤리에 캐리어를 넣고 그녀는 셔틀버스를 탔다.
도쿄 시내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레이오버 때 늘 묵는 곳이다. 안면이 있는 크루들과 인사를 하며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주로 2인 1실인데 소영은 이번에 조이닝 크루로 오게 되어서 혼자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침대 정리가 되어 있는 호텔방을 둘러봤다. 일본 호텔답다. 필요한 공간만 딱딱 써서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제집만 못하다.
오피스텔에 있는 스타일러를 그리워하며 소영은 진정한 퇴근 의식을 거행했다. 유니폼을 벗고 호텔에 비치된 탈취제를 뿌리고 옷장에 걸어 두었다. 버베나 향을 흉내 낸 합성 향료가 옷에 배는 게 싫어서 옷장 문은 열어 두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올 생각이었다. 편한 옷으로 환복하고 주머니에 카드와 휴대폰만 챙긴 채 소영은 로비로 내려왔다. 건물 전체가 금연 구역이었다. 입구에 흡연 부스가 있었다.
오늘은 운이 따라 주는 날이었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라서 아무도 없었다. 벨보이에게 풀메이크업을 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날을 세워 옆얼굴을 가리며 소영은 빠른 걸음으로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담뱃갑과 휴대용 재떨이를 벤치에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며 스트레칭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헤어핀을 빼냈다. 아. 습관적으로 벤치 옆을 더듬다가 여긴 홍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터가 없다. 망했다.
소영은 황망한 눈빛으로 부스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핀을 제거하자 머리카락이 풀썩 가슴께로 떨어졌다. 실타래 같은 뭉텅이가 흡연 부스로 들어온 남자에게서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남자도 누군가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는지 잠시 멈춰 섰다가 문을 마저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영은 몹시 당황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낯선 이와 뜻밖의 합석이거니와 불이 없으니 그녀의 엄중한 의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다. 지갑도 들고 오지 않아서 이대로 털레털레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사 올 수도 없다. 그녀가 초조하게 담배를 베어 물자 휴지를 베어 문 것처럼 필터에 립스틱이 붉게 묻어났다. 고문 도구를 쓴 것 같던 꽉 죄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는 쾌감도 밋밋하게 지나갔다. 그녀는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온 귀신처럼 검은 머리채를 흔들었다.
카세 료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담배가 사탕 막대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곤경에 처했음을 특유의 사려 깊은 관찰력으로 파악했다.
“괜찮으시다면 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소영은 그의 일본어에, 아니 그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을 거두며 추태를 보이던 몰골을 정리했다. 카세 료의 검은색 눈동자가 풀메이크업을 한 소영의 얼굴에 꽂혔다.
“아.”
그가 소리 냈다.
“…….”
기내에서 마주친 얼굴이다. 영어로 대화했었지. 카세 료는 제 일본어를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소영은 낯선 남자가, 아니다, 낯설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그녀는 이미 그를 알고 있지 않는가. 불현듯 담뱃불을 빌려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낯을 가리는 것보다 그녀의 의식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까놓고 보니 그는 그녀가 탄 비행에서 몇 번 본 승객이다. 그게 뭐 어때서. 건조한 목구멍을 적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면구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담배를 문 입술에 힘을 줬다. 턱이 앞으로 나왔다. 카세 료는 이것도 문화 차이인 걸까 생각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 시간을 끌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라이터를 켜서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아롱거리며 여자의 음영 낀 얼굴을 밝혔다.
달걀같이 하얀 얼굴, 과장된 눈 화장, 내리깐 눈꺼풀 위에는 산홋빛 펄이 자르르르 끼얹어 있었다. 선으로 그린 눈썹은 우아한 곡선이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 담배 끝을 빨며 입술을 벙긋거릴 때마다 붙인 속눈썹이 고혹적으로 팔랑거렸다.
카세 료는 짧으면 짧다 할, 길면 길다 할 그 순간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그의 앞에서 담배를 빨아 마시는 여자는 조르주 드 라 투르 화폭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았다.
오전 비행은 서울에서 퀵턴. 저녁 비행으로 동경행 레이오버가 잡혀 있었다. 소영의 비행 스케줄은 10년 차 시니어 크루답지 않게 빡빡하게 차 있다. 다른 팀에 일손이 부족할 때 합류하는 조이닝 크루도 자주 한다. 목요일 동경행 저녁 비행은 그녀가 꾸준히 타 온 일정이었다. 사무장은 홍콩 사람인데, 일본어가 수준급인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해서 되도록 부탁하는 편이다. 소영이 중국어(광둥어)를 공부할 때 도움을 줬던 분이어서 그녀와 일하는 게 소영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내 서비스 준비를 마친 또 다른 캐빈 크루들이 트롤리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영은 이코노미석으로 가는 그들을 보다가 비즈니스석에서 오는 콜을 대기했다.
홍콩에서 동경까지 네 시간 반. 식사와 음료 서비스가 나갔다. 승객들의 요청도 일일이 챙겨야 했다. 위스키 주문이 들어와 트롤리를 끌고 나갔다. 늦은 시간이라 기내는 불이 꺼져 있었다. 개별 등이 켜진 곳은 한 곳이었다. 위스키를 주문한 남자는 승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노트북 화면 밝기를 낮추고 조용히 터치패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 집중한 옆얼굴이 보였다. 아, 그 남자다. 소영은 단번에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녀는 트롤리를 멈추고 안을 뒤졌다. 소다수 한 병을 꺼냈다.
“실례합니다. 위스키 주문하셨죠.”
그녀가 다가오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잔을 놓을 자리를 마련하듯 테이블에서 손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소영은 위스키가 담긴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내려놓았다. 이어 소다수 병도 내려놓았다.
“아, 이건…….”
주문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남자가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소영은 싱긋 웃으며 트롤리를 밀고 돌아갔다.
남자, 카세 료는 그녀가 두고 간 소다수 병과 위스키 잔을 바라봤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갈 때마다 이 편을 이용하곤 했다. 하이볼을 마시고 싶어서 번번이 이렇게 주문했던 게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깜박하고 위스키만 시켰다. 아차 싶었지만 두 번 불러서 정정하는 것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그냥 먹지 생각했다. 그런데 번들처럼 딸려 나온 소다수 한 병이 머쓱하게 노트북 옆에 자리했다. 그에게 웃어 보였던 승무원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떻게 기억한 거지?
카세 료는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어두운 기내를 둘러봤다. 캐빈 크루들이 머무는 벙커는 말 그대로 벙커처럼 어둑했다. 암막 커튼에 가려서 빛 한줌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다시 앉았다. 별것 아닌 친절이었지만, 기억해 주고 챙겨 주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그는 소다수를 따려고 집어 들었다. 왼손 약지에서 숨죽여 자리 잡고 있는 금반지가 묵묵히 조명에 반짝였다.
***
비행이 끝났다. 네 시간 반 동안 노트북을 노려보던 일본인도 서류 가방을 챙겨 내렸다. 소영은 그가 30센티 기내용 캐리어를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까 잔을 치우러 갔을 때 그는 그녀의 명찰을 살펴봤다. 소영은 그를 살폈다. 각 잡힌 하얀 와이셔츠에 재킷과 넥타이가 없는 쿨비즈룩이었다. 그의 것으로 보이는 코트 한 벌이 다리에 걸쳐져 있었다. 홍콩과 동경의 겨울 날씨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중에 입을 것으로 미리 꺼내어 놓은 것 같았는데. 머플러가 없이 셔츠 카라만 희게 빛나는 목이 허전하다고 소영은 무심코 생각했다. 짧은 머리카락은 왁스를 발라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남자의 눈매였다. 두꺼운 눈썹 아래 혼혈인 것처럼 눈두덩이 푹 들어갔다. 깊은 눈이었다. 검은색 눈동자를 흘깃 쳐다보다가 그녀는 빈 잔을 들고 인사한 후 벙커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영문으로 표기된 한글 이름을 생소한 듯 눈을 좁히며 한참 봤으니까.
탑승객을 배웅한 뒤 소영도 오프 준비를 했다. 비행 동안 계속 참고 있던 갈증이 어서 빨리 호텔로 가서 핸드백에 숨겨 두었던 은밀한 기호품을 꺼내 물라며 그녀를 충동질했다. 핀이 두피를 찔렀다. 유니폼을 해제하라고 아우성치는 몸의 파업 신호였다. 고작 전조 현상에도 소영은 입 안이 사막처럼 바짝바짝 말라 갔다. 트롤리에 캐리어를 넣고 그녀는 셔틀버스를 탔다.
도쿄 시내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레이오버 때 늘 묵는 곳이다. 안면이 있는 크루들과 인사를 하며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주로 2인 1실인데 소영은 이번에 조이닝 크루로 오게 되어서 혼자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침대 정리가 되어 있는 호텔방을 둘러봤다. 일본 호텔답다. 필요한 공간만 딱딱 써서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제집만 못하다.
오피스텔에 있는 스타일러를 그리워하며 소영은 진정한 퇴근 의식을 거행했다. 유니폼을 벗고 호텔에 비치된 탈취제를 뿌리고 옷장에 걸어 두었다. 버베나 향을 흉내 낸 합성 향료가 옷에 배는 게 싫어서 옷장 문은 열어 두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올 생각이었다. 편한 옷으로 환복하고 주머니에 카드와 휴대폰만 챙긴 채 소영은 로비로 내려왔다. 건물 전체가 금연 구역이었다. 입구에 흡연 부스가 있었다.
오늘은 운이 따라 주는 날이었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라서 아무도 없었다. 벨보이에게 풀메이크업을 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날을 세워 옆얼굴을 가리며 소영은 빠른 걸음으로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담뱃갑과 휴대용 재떨이를 벤치에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며 스트레칭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헤어핀을 빼냈다. 아. 습관적으로 벤치 옆을 더듬다가 여긴 홍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터가 없다. 망했다.
소영은 황망한 눈빛으로 부스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핀을 제거하자 머리카락이 풀썩 가슴께로 떨어졌다. 실타래 같은 뭉텅이가 흡연 부스로 들어온 남자에게서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남자도 누군가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는지 잠시 멈춰 섰다가 문을 마저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영은 몹시 당황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낯선 이와 뜻밖의 합석이거니와 불이 없으니 그녀의 엄중한 의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다. 지갑도 들고 오지 않아서 이대로 털레털레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사 올 수도 없다. 그녀가 초조하게 담배를 베어 물자 휴지를 베어 문 것처럼 필터에 립스틱이 붉게 묻어났다. 고문 도구를 쓴 것 같던 꽉 죄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는 쾌감도 밋밋하게 지나갔다. 그녀는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온 귀신처럼 검은 머리채를 흔들었다.
카세 료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담배가 사탕 막대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곤경에 처했음을 특유의 사려 깊은 관찰력으로 파악했다.
“괜찮으시다면 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소영은 그의 일본어에, 아니 그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을 거두며 추태를 보이던 몰골을 정리했다. 카세 료의 검은색 눈동자가 풀메이크업을 한 소영의 얼굴에 꽂혔다.
“아.”
그가 소리 냈다.
“…….”
기내에서 마주친 얼굴이다. 영어로 대화했었지. 카세 료는 제 일본어를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소영은 낯선 남자가, 아니다, 낯설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그녀는 이미 그를 알고 있지 않는가. 불현듯 담뱃불을 빌려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낯을 가리는 것보다 그녀의 의식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까놓고 보니 그는 그녀가 탄 비행에서 몇 번 본 승객이다. 그게 뭐 어때서. 건조한 목구멍을 적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면구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담배를 문 입술에 힘을 줬다. 턱이 앞으로 나왔다. 카세 료는 이것도 문화 차이인 걸까 생각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 시간을 끌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라이터를 켜서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아롱거리며 여자의 음영 낀 얼굴을 밝혔다.
달걀같이 하얀 얼굴, 과장된 눈 화장, 내리깐 눈꺼풀 위에는 산홋빛 펄이 자르르르 끼얹어 있었다. 선으로 그린 눈썹은 우아한 곡선이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 담배 끝을 빨며 입술을 벙긋거릴 때마다 붙인 속눈썹이 고혹적으로 팔랑거렸다.
카세 료는 짧으면 짧다 할, 길면 길다 할 그 순간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그의 앞에서 담배를 빨아 마시는 여자는 조르주 드 라 투르 화폭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