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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1. 본문 중에 일본어 대화는 “ ”로 한국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2. 외국 인명, 지명 및 기타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현과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3.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1화
1. 여름이 시작되는 도쿄 그리고 청춘
2007년 6월 중순. 도쿄의 악명 높은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에서 한참 떨어진 후미진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낡은 3층 건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세입자를 더 받기 위해 이미 포화 상태인 건물의 방을 빠듯하게 빼서 만든 맨 꼭대기에 자리한 세 평 남짓의 작은 방.
사실, 이 방의 용도는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원래는 욕심 많은 주인 할머니가 세입자들이 버리고 간 쓸모없는 세간살이들을 쟁여 놓기 위해서 만든 창고였다.
하지만 그깟 고물 세간살이를 챙기는 것보다 동경대에 유학 온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한 달 방세를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이겠다는 영악한 도쿄식 계산에 의해 주거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세나는 재작년 2월,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몸을 누일 수 있는 보금자리로 이곳을 선택했다.
책상 바로 옆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고 있는 네모진 창으로부터 뜨겁고 습한 기운이 들이쳤다. 행여 새벽이슬에 차가워진 바람이 들어오려나 싶어 어젯밤부터 열어 두었는데 오히려 끈적하게 더운 공기가 방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숱 많고 기다란 머리를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어서 높다랗게 고정시킨 보라색 머리끈 밖으로 세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삐져나와 있었다. 흑요석같이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세나의 목덜미를 스쳤다. 가느다랗고 하얀 목줄기를 타고 이내 땀이 흘러내렸다.
덥고 습한 공기가 자꾸 후끈하게 턱 밑을 치고 올라와서 세나는 읽고 있던 두꺼운 전공책을 그만 덮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슬슬 도쿄의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네.
세나는 책상 옆에 세워 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보았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살은 빠진 듯했다.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세나의 작은 얼굴이 더욱 조막만 해 보였다.
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 기다랗고 짙은 속눈썹이 부드럽고 촘촘한 아치를 그리며 크고 맑은 눈동자에 그윽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적당히 오뚝한 코와 작은 콧망울이 그녀에게 다소 아기 같은 인상을 부여했다. 청순함과 천진함이 공존하는 묘한 아름다움.
세나는 확실히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된 유학 생활로 인해 자신을 가꾸고 멋을 내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언제나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서울에서도 쭉 입었던 낡은 캘빈클라인 청바지. 사실 그녀는 청바지가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자신의 늘씬한 허벅지와 적당한 골반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녀가 매일같이 청바지만 입어 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늘 넘쳐 나는 과제 때문에 새벽까지 허덕이다 겨우 잠드는 생활이 벌써 얼마나 지속되었던가.
아침에 일어나서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우아한 자태로 학교에 가는 여유는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청바지를 입어도 여성스러운 라인이 살아나는 자신의 몸매에 감사해야 하는 게 더 맞는 건지도 모른다.
세나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심한 눈길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작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가난한 한국 유학생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다다미가 깔린 협소한 방과 조그맣게 딸린 욕실, 신발 벗어 놓는 곳 바로 옆에 구색만 갖추고 있는 옹색한 주방. 세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집주인 할머니는 도쿄의 기가 막힌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방이라고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짙은 파란색 노렌이 걸려 있는 ‘다케오 두부집’ 간판뿐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좀 더 고개를 내밀어 보지만 일본의 까다로운 소방법 규정에 얼추 맞추기 위해 공사가 다 끝난 후 급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대피로의 시멘트 벽에 가려서 그 기가 막히다는 바깥 풍경은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다케오 아저씨의 두부가 흰 김을 내뿜으며 그 집 장남 슈지가 들기에도 벅찬 커다란 들통에 담겨서 옮겨지고 있나 보다.
도쿄에 와서 가장 좋은 게 그저 아침마다 맡는 다케오 두부집의 고소한 손두부 냄새라니. 세나는 이 단조로운 일상에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동경대학 영문학과. 그저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했다. 고작 영문학을 하려고 도쿄까지 오게 될 줄이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8개월 전, 한정된 소수에게만 허락한다는 국비유학생 신분으로 세나는 일본에 왔다. 그러나 유학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낯선 땅에 혼자 뚝 떨어져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결행한 유학이었다. 일본에 와서 적당히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맥도날드에서 싸구려 패티나 구우며 시간제 일당을 받는 후리타족으로 빠지려고 했던 인생이 이렇게 진지한 방향으로 틀어질 줄은 몰랐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캠퍼스를 감도는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기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세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옭아매고 있었다.
한국 유학생으로서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왠지 모를 사명감에 세나는 악착같이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는 도다이마에역 고서점가에서 낡은 책들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3년이 채 안 되는 지난 유학 생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세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싸구려 식당 마쓰야에서 450엔짜리 쇠고기덮밥을 먹는 것이 유일한 호사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갑자기 우울해지려는 세나에게 핸드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켄지였다.
― 세나. 지금 덥다고 창문 열어 놓고 있는 거 아니야? 아침 식사는 역시나 다케오 아저씨네 두부인가.
세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편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켄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지금 웨스트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거 아니야? 커피 내려야 할 시간이잖아.”
― 빙고! 도도한 여왕님께서 내 스케줄을 기억해 주시다니 이거 영광인데.
“도쿄의 가장 예쁜 걸들이 모이는 웨스트에서 니가 굳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가 새삼 궁금해지려 해.”
― 여왕님께서 이제는 질투까지 해 주시는 거야? 오늘은 아키하바라에 가서 복권이라도 사야겠다. 나 지금 기분 최곤 거 알아?
세나는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켄지. 농담은 그만해. 난 오늘 하루 종일 야마다 교수님 수업 발표 준비 때문에 바이런의 시를 글자 하나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 다음 시간에는 불쌍한 우리 여왕님이 악명 높은 야마다의 거룩한 제물이 되는 건가. 오늘 웨스트의 프랑스산 밀가루가 동이 나서 파티쉐가 더 이상 타르트를 못 만들어. 얼추 오후 한 시면 끝날 것 같은데 내가 가서 좀 도와줄까?
켄지의 도와준다는 말에 세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거리를 바라봤다.
“그 제안은 내 쪽에서 사양할래. 켄지의 예리한 필력을 사냥개 같은 야마다 교수가 모를 리 없잖아. 켄지는 늑대같이 간사한 야마다 교수가 유일하게 신임하는 동경대 영문학과의 명실상부한 브레인인데.”
― 하하하. 오늘 여왕님은 정말로 관대하시네. 분에 넘치는 말이지만 나에 대한 여왕님의 호감으로 접수할게. 그럼 건투를 빌어. 야마다에게 잘근잘근 씹히는 여왕님을 보는 건 나의 가장 큰 슬픔일 테니.
사토 켄지. 동경대에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라 하기에는 조금 과한 이름이지만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돼 버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한국인 유학생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사토 쪽이었다.
켄지와 친해진 계기는 우습게도 야마다 교수의 악명 높은 과제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시에 담긴 세계관을 분석하는 어려운 과제를 받고 그녀가 도서관을 헤매고 있을 때 켄지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은세나상 맞지? 역시나 야마다 교수의 셰익스피어로 고민하고 있는 거야?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고 싶은데. 나는 은상이랑 같은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사토 켄지라고 해. 그리고 은상과 지난해부터 같은 과목을 들어 왔지.’
세나는 입학한 이래 줄곧 문학부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사토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그와 항상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사토상. 그렇게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아도 돼. 1학년 때부터 탑을 놓치지 않았던 사토를 모르는 문학부생은 없을 테니까.’
‘이거 영광인데. 도도한 여왕님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고 계시다니. 일본어 발음이 귀엽네. 그리고 굉장히 자연스러워.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한국인 특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유학생이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는걸.’
사토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강조하면서 세나의 얼굴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토 켄지에게 이런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 학부 1학년 때부터 늘 여학생들의 떠들썩한 흠모를 받아 오던 사토가 아니던가. 세나는 자신을 뚫어질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대담하게 받아 냈다.
주름 한 점 없는 베이지색 치노바지가 길게 쭉 뻗은 그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고, 브라운색 브이넥 니트 위로는 적당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가슴 근육이 살짝 드러났다. 니트 안에 받쳐 입은 고급 옥스포드지로 만든 하얀색 셔츠가 사토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를 살려 주었다.
콧대 높은 동경대 여학생들이 그렇게 수군거릴 만도 하네.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영민한 눈동자에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같은 게 느껴졌다.
사토 켄지. 남자로서 호감이 가는 인상임에는 분명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시선 교환에서 먼저 물러선 쪽은 의외로 사토였다.
‘나를 그렇게 자세하게 감상한 소감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사토가 말문을 열었다. 얼핏 보니 그의 한쪽 귀가 발갛게 물든 것도 같았다.
‘소감은 내 쪽에서 묻고 싶은데.’
세나는 평소와 달리 대담하게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하하……. 내가 도저히 못 당하겠는걸. 그 소감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앞으로 천천히 말해 주고 싶은데. 이제부터는 나를 그냥 켄지라고 불러 줘. 우리도 꽤 깊은 인연인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은세나야. 세나라고 불러도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영문학과 브레인상.’
사토 켄지와 친해진 후 그녀의 학교생활은 확실히 달라졌다. 사토란 이름은 그녀에게 두 가지의 선물을 안겨 줬다.
그 전과는 달리 남학생들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게 됐다는 것. 다른 하나는 학부의 모든 여학생을 적으로 두게 된 느낌을 종종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토를 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여학생이 불과 몇 안 된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전에 없던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그저 사토 켄지가 관심을 보인 여자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지만 여학생들의 적대적인 반응은 내심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결코 남자로 접근해 오지 않았다. 도서관에서의 아찔했던 첫 랑데부 이후 켄지는 그때의 그 열기 띤 눈빛을 다시는 보여 주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안부를 살뜰하게 챙겼지만 어디까지나 좋은 친구의 느낌이었다. 외로운 타지에서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친구의 자리에서 절대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는 켄지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폭풍 같은 사랑으로 진전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도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기에.
1. 본문 중에 일본어 대화는 “ ”로 한국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2. 외국 인명, 지명 및 기타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현과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3.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1화
1. 여름이 시작되는 도쿄 그리고 청춘
2007년 6월 중순. 도쿄의 악명 높은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에서 한참 떨어진 후미진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낡은 3층 건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세입자를 더 받기 위해 이미 포화 상태인 건물의 방을 빠듯하게 빼서 만든 맨 꼭대기에 자리한 세 평 남짓의 작은 방.
사실, 이 방의 용도는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원래는 욕심 많은 주인 할머니가 세입자들이 버리고 간 쓸모없는 세간살이들을 쟁여 놓기 위해서 만든 창고였다.
하지만 그깟 고물 세간살이를 챙기는 것보다 동경대에 유학 온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한 달 방세를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이겠다는 영악한 도쿄식 계산에 의해 주거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세나는 재작년 2월,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몸을 누일 수 있는 보금자리로 이곳을 선택했다.
책상 바로 옆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고 있는 네모진 창으로부터 뜨겁고 습한 기운이 들이쳤다. 행여 새벽이슬에 차가워진 바람이 들어오려나 싶어 어젯밤부터 열어 두었는데 오히려 끈적하게 더운 공기가 방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숱 많고 기다란 머리를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어서 높다랗게 고정시킨 보라색 머리끈 밖으로 세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삐져나와 있었다. 흑요석같이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세나의 목덜미를 스쳤다. 가느다랗고 하얀 목줄기를 타고 이내 땀이 흘러내렸다.
덥고 습한 공기가 자꾸 후끈하게 턱 밑을 치고 올라와서 세나는 읽고 있던 두꺼운 전공책을 그만 덮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슬슬 도쿄의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네.
세나는 책상 옆에 세워 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보았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살은 빠진 듯했다.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세나의 작은 얼굴이 더욱 조막만 해 보였다.
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 기다랗고 짙은 속눈썹이 부드럽고 촘촘한 아치를 그리며 크고 맑은 눈동자에 그윽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적당히 오뚝한 코와 작은 콧망울이 그녀에게 다소 아기 같은 인상을 부여했다. 청순함과 천진함이 공존하는 묘한 아름다움.
세나는 확실히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된 유학 생활로 인해 자신을 가꾸고 멋을 내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언제나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서울에서도 쭉 입었던 낡은 캘빈클라인 청바지. 사실 그녀는 청바지가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자신의 늘씬한 허벅지와 적당한 골반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녀가 매일같이 청바지만 입어 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늘 넘쳐 나는 과제 때문에 새벽까지 허덕이다 겨우 잠드는 생활이 벌써 얼마나 지속되었던가.
아침에 일어나서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우아한 자태로 학교에 가는 여유는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청바지를 입어도 여성스러운 라인이 살아나는 자신의 몸매에 감사해야 하는 게 더 맞는 건지도 모른다.
세나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심한 눈길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작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가난한 한국 유학생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다다미가 깔린 협소한 방과 조그맣게 딸린 욕실, 신발 벗어 놓는 곳 바로 옆에 구색만 갖추고 있는 옹색한 주방. 세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집주인 할머니는 도쿄의 기가 막힌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방이라고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짙은 파란색 노렌이 걸려 있는 ‘다케오 두부집’ 간판뿐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좀 더 고개를 내밀어 보지만 일본의 까다로운 소방법 규정에 얼추 맞추기 위해 공사가 다 끝난 후 급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대피로의 시멘트 벽에 가려서 그 기가 막히다는 바깥 풍경은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다케오 아저씨의 두부가 흰 김을 내뿜으며 그 집 장남 슈지가 들기에도 벅찬 커다란 들통에 담겨서 옮겨지고 있나 보다.
도쿄에 와서 가장 좋은 게 그저 아침마다 맡는 다케오 두부집의 고소한 손두부 냄새라니. 세나는 이 단조로운 일상에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동경대학 영문학과. 그저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했다. 고작 영문학을 하려고 도쿄까지 오게 될 줄이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8개월 전, 한정된 소수에게만 허락한다는 국비유학생 신분으로 세나는 일본에 왔다. 그러나 유학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낯선 땅에 혼자 뚝 떨어져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결행한 유학이었다. 일본에 와서 적당히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맥도날드에서 싸구려 패티나 구우며 시간제 일당을 받는 후리타족으로 빠지려고 했던 인생이 이렇게 진지한 방향으로 틀어질 줄은 몰랐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캠퍼스를 감도는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기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세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옭아매고 있었다.
한국 유학생으로서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왠지 모를 사명감에 세나는 악착같이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는 도다이마에역 고서점가에서 낡은 책들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3년이 채 안 되는 지난 유학 생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세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싸구려 식당 마쓰야에서 450엔짜리 쇠고기덮밥을 먹는 것이 유일한 호사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갑자기 우울해지려는 세나에게 핸드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켄지였다.
― 세나. 지금 덥다고 창문 열어 놓고 있는 거 아니야? 아침 식사는 역시나 다케오 아저씨네 두부인가.
세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편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켄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지금 웨스트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거 아니야? 커피 내려야 할 시간이잖아.”
― 빙고! 도도한 여왕님께서 내 스케줄을 기억해 주시다니 이거 영광인데.
“도쿄의 가장 예쁜 걸들이 모이는 웨스트에서 니가 굳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가 새삼 궁금해지려 해.”
― 여왕님께서 이제는 질투까지 해 주시는 거야? 오늘은 아키하바라에 가서 복권이라도 사야겠다. 나 지금 기분 최곤 거 알아?
세나는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켄지. 농담은 그만해. 난 오늘 하루 종일 야마다 교수님 수업 발표 준비 때문에 바이런의 시를 글자 하나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 다음 시간에는 불쌍한 우리 여왕님이 악명 높은 야마다의 거룩한 제물이 되는 건가. 오늘 웨스트의 프랑스산 밀가루가 동이 나서 파티쉐가 더 이상 타르트를 못 만들어. 얼추 오후 한 시면 끝날 것 같은데 내가 가서 좀 도와줄까?
켄지의 도와준다는 말에 세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거리를 바라봤다.
“그 제안은 내 쪽에서 사양할래. 켄지의 예리한 필력을 사냥개 같은 야마다 교수가 모를 리 없잖아. 켄지는 늑대같이 간사한 야마다 교수가 유일하게 신임하는 동경대 영문학과의 명실상부한 브레인인데.”
― 하하하. 오늘 여왕님은 정말로 관대하시네. 분에 넘치는 말이지만 나에 대한 여왕님의 호감으로 접수할게. 그럼 건투를 빌어. 야마다에게 잘근잘근 씹히는 여왕님을 보는 건 나의 가장 큰 슬픔일 테니.
사토 켄지. 동경대에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라 하기에는 조금 과한 이름이지만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돼 버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한국인 유학생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사토 쪽이었다.
켄지와 친해진 계기는 우습게도 야마다 교수의 악명 높은 과제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시에 담긴 세계관을 분석하는 어려운 과제를 받고 그녀가 도서관을 헤매고 있을 때 켄지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은세나상 맞지? 역시나 야마다 교수의 셰익스피어로 고민하고 있는 거야?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고 싶은데. 나는 은상이랑 같은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사토 켄지라고 해. 그리고 은상과 지난해부터 같은 과목을 들어 왔지.’
세나는 입학한 이래 줄곧 문학부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사토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그와 항상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사토상. 그렇게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아도 돼. 1학년 때부터 탑을 놓치지 않았던 사토를 모르는 문학부생은 없을 테니까.’
‘이거 영광인데. 도도한 여왕님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고 계시다니. 일본어 발음이 귀엽네. 그리고 굉장히 자연스러워.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한국인 특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유학생이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는걸.’
사토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강조하면서 세나의 얼굴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토 켄지에게 이런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 학부 1학년 때부터 늘 여학생들의 떠들썩한 흠모를 받아 오던 사토가 아니던가. 세나는 자신을 뚫어질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대담하게 받아 냈다.
주름 한 점 없는 베이지색 치노바지가 길게 쭉 뻗은 그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고, 브라운색 브이넥 니트 위로는 적당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가슴 근육이 살짝 드러났다. 니트 안에 받쳐 입은 고급 옥스포드지로 만든 하얀색 셔츠가 사토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를 살려 주었다.
콧대 높은 동경대 여학생들이 그렇게 수군거릴 만도 하네.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영민한 눈동자에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같은 게 느껴졌다.
사토 켄지. 남자로서 호감이 가는 인상임에는 분명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시선 교환에서 먼저 물러선 쪽은 의외로 사토였다.
‘나를 그렇게 자세하게 감상한 소감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사토가 말문을 열었다. 얼핏 보니 그의 한쪽 귀가 발갛게 물든 것도 같았다.
‘소감은 내 쪽에서 묻고 싶은데.’
세나는 평소와 달리 대담하게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하하……. 내가 도저히 못 당하겠는걸. 그 소감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앞으로 천천히 말해 주고 싶은데. 이제부터는 나를 그냥 켄지라고 불러 줘. 우리도 꽤 깊은 인연인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은세나야. 세나라고 불러도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영문학과 브레인상.’
사토 켄지와 친해진 후 그녀의 학교생활은 확실히 달라졌다. 사토란 이름은 그녀에게 두 가지의 선물을 안겨 줬다.
그 전과는 달리 남학생들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게 됐다는 것. 다른 하나는 학부의 모든 여학생을 적으로 두게 된 느낌을 종종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토를 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여학생이 불과 몇 안 된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전에 없던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그저 사토 켄지가 관심을 보인 여자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지만 여학생들의 적대적인 반응은 내심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결코 남자로 접근해 오지 않았다. 도서관에서의 아찔했던 첫 랑데부 이후 켄지는 그때의 그 열기 띤 눈빛을 다시는 보여 주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안부를 살뜰하게 챙겼지만 어디까지나 좋은 친구의 느낌이었다. 외로운 타지에서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친구의 자리에서 절대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는 켄지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폭풍 같은 사랑으로 진전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도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