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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야마다 교수의 영미시 수업은 학생들에게 무거운 공포감을 선사하는 악명 높은 시간이었다. 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50대 후반의 이 깐깐한 교수는 자신이 쌓아 올린 학문의 금자탑을 과시하고 싶어서 매우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수업 시간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 나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그의 앞에서 부족한 대답을 하고 만 불운한 학생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그였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야마다 교수라고 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게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는 인자한 교수가 되겠다는 의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동경대가 배출한 최고의 가문이라 일컬어지는 사토와 시노하라의 자제들에게는 그의 인생에서 예외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어울리지 않는 관대함을 항상 넘치게 표현했는데, 그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이들은 사토 켄지와 시노하라 류우지였다.
시노하라 류우지. 일본의 전기전자 산업을 이끄는 시노하라 전자의 후계자임을 입증하는 ‘시노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는 늘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사토 켄지가 3대에 걸쳐서 중의원을 배출한 일본 정치 명문가의 혈통이라면, 시노하라 류우지는 동경대 출신의 할아버지가 기반을 잡고 그의 아버지가 완성한 거대한 기업을 이어받을 재벌 후계자였다.
사토가 밝고 따뜻한 기운의 사람인 반면에 시노하라는 말이 없고 항상 조용했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그에게 접근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마다 교수는 일본의 미래를 이끌어 갈 빛나는 두 명의 별이 자신의 수업 시간에 제자로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시노하라와 사토에게 의미 없는 눈인사를 건넸다. 그 후 오늘 자신의 희생물이 누가 될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교탁 위에 올려져 있는 발표 자료 표지에 적힌 이름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갑자기 그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굳어졌다.
은세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로군. 실망한 기색도 잠시, 그의 얼굴에 특유의 이죽거리는 미소가 번져 올랐다.
그런 야마다 교수의 모습을 사토가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세나는 교수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발표 주제는 바이런의 풍자시에 대한 해석이었다.
600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준비 시간이 짧았던 것일까. 도움 안 되는 울적한 감상에 빠져서 발표 준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몹시도 후회하며 그녀는 간신히 발표를 마쳤다.
매우 긴장한 상태여서인지 그녀의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살짝 물들어 있었다. 사토는 세나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야마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시노하라군, 은상의 해석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한번 말해 보겠나?”
순간 야마다 교수의 클래스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노하라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교실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시노하라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나에게 날렵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주저함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바이런의 시를 분석하기에는 그녀에게 준비 시간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바이런의 시는 좀 버거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야마다 교수의 영미시 수업을 듣는 3학년 클래스가 일순 술렁였다. 모든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시노하라가 이렇게 정면으로 세나를 비판했다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시노하라가 던진 일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세나의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생각에 몸의 한쪽이 훅 하고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으레 느꼈던 그 설명하기 힘든 배타적인 시선들이 다시 한번 쓰린 밀물이 되어 세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저에게도 발언권을 주시겠습니까?”
앞에서 세 번째 줄 창가 자리에 앉아 줄곧 뚫어질 듯이 세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토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숨길 수 없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사토군. 말해 보게.”
“은상의 발표는 시노하라군에게 이런 혹평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지 않았습니다. 바이런의 시를 해석하는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 아닙니까? 은상은 추가 자료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노하라가 야마다 교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특유의 독설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은상의 발표는 뭐랄까. 일단 바이런의 작가관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일반적이고 대중적이었습니다. 독창적인 해석은 찾아볼 수도 없었구요. 어떤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따분한 발표였습니다.”
시노하라 류우지.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와 영리하게 빛나는 이마, 조화롭게 자리 잡은 섬세한 이목구비는 일본 최고의 탤런트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시노하라 류우지에게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굴지의 기업인 시노하라 전자의 외동아들다운 거만함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움과 오만함은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형성했다.
사토 켄지는 계속되는 시노하라의 독설에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노하라군, 말이 지나친데. 너의 그 오만한 태도가 몹시 거슬려.”
“사토군이 다시 나설 줄 알았지. 여왕님의 일이라면 항상 1초도 안 걸리는군. 하지만 사토군의 여왕님은 오늘 확실히 준비가 부족해 보여.”
“시노하라,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토 켄지는 시노하라의 서슴없는 도발에 당장이라도 그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야마다 교수의 수업 시간 중에 이전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것도 야마다 교수가 가장 신뢰하고 인정하는 걸출한 가문의 두 청년이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태세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에 눌린 학생들은 그저 호기심 가득 찬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남학생들은 따분한 수업 시간에 이 무슨 흥미진진한 광경이냐는 표정들이었고,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흠모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토와 시노하라의 불꽃 튀는 승부에 몹시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특히나 그 불꽃 승부의 시발점이 한국에서 온 은세나라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수려한 외모와 영민한 지성을 갖춘 두 청년이 만들어 낸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수습한 건 바로 야마다 교수였다. 그는 특유의 냉혹한 음성으로 아끼는 두 제자에게 급히 제동을 걸었다.
“사토군 자네의 의견은 충분히 수렴했네. 그리고 시노하라군의 의견도 고맙고. 은세나상이 충분히 알아들었겠어.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두 사람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 참으로 인상적이었네.”
사토와 시노하라. 동경대를 움직이는 가장 빛나는 가문의 청년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삐쩍 마른 여학생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수업 시간에 이런 언쟁을 일으켰다는 게 야마다 교수는 몹시도 언짢았다.
2. 갑작스럽게 내린 비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의 후미진 뒷골목에 한 여자가 오목한 그릇을 들고 나타나자 까맣고 하얀 길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자는 가녀린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이제 갓 새끼 티를 벗어서 사람에 대한 경각심이 아직은 부족한 어린 고양이들 앞에 웅숭그리고 앉았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이 남긴 한 줌 햇살은 그녀의 좁은 등 위에서 사방으로 바스라졌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타고 옆으로 흘러내린 빛은 초록의 이끼가 낀 보도블록 위로 좁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고서점 골목을 우연히 지나가던 한 남자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에게 그 장면은 빛바랜 수채화처럼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제법 쌀쌀한 2월의 도쿄. 화려한 조명의 온기가 미치지 않는 쇠락한 골목에서 주인 없이 길 위에 사는 어린 길고양이들이 물과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작은 여자에게로 모여드는 모습에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어차피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갈 텐데 저런 보살핌이 무슨 의미가 있나. 계속 돌보지 못할 거라면 가여운 것들에게 희망을 주지나 말지.’
자꾸만 못된 생각이 들었다. 경각심도 없이 가녀린 여자에게 모여들던 길 위의 어린 생명들이 안쓰러웠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그 거리를 다시 찾았다. 초록색 이끼가 얼룩덜룩 낀 그 골목 앞에 이르자 일부러 딴 데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버려진 것들에게 밥과 물을 챙겨 주는 그런 따뜻한 손길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두려웠을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결심했다는 듯이 골목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나 골목은 사람의 그림자 한 조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헤친 한 여자가 작은 서점 안에서 걸어 나왔다. 길고양이들을 챙겨 주던 그 여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먹빛을 띤 층 없는 머리가 등허리 부근에서 출렁였다.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녀는 골목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걸었다.
그녀가 골목 끝에 다다르자 아직도 보송보송한 털을 지닌 어린 고양이들이 어디선가 하나둘 모여들었다.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는 오렌지빛 석양으로 나른하게 물들고 있었고 시노하라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노을이 황금빛에서 옅은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밥 주기를 마치고 서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뒤돌아섰을 때 종업원용 초록색 긴 앞치마에 가려져 있던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를 보고 시노하라는 중얼거렸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찔하네.’
야마다 교수의 영미시 수업은 학생들에게 무거운 공포감을 선사하는 악명 높은 시간이었다. 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50대 후반의 이 깐깐한 교수는 자신이 쌓아 올린 학문의 금자탑을 과시하고 싶어서 매우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수업 시간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 나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그의 앞에서 부족한 대답을 하고 만 불운한 학생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그였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야마다 교수라고 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게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는 인자한 교수가 되겠다는 의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동경대가 배출한 최고의 가문이라 일컬어지는 사토와 시노하라의 자제들에게는 그의 인생에서 예외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어울리지 않는 관대함을 항상 넘치게 표현했는데, 그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이들은 사토 켄지와 시노하라 류우지였다.
시노하라 류우지. 일본의 전기전자 산업을 이끄는 시노하라 전자의 후계자임을 입증하는 ‘시노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는 늘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사토 켄지가 3대에 걸쳐서 중의원을 배출한 일본 정치 명문가의 혈통이라면, 시노하라 류우지는 동경대 출신의 할아버지가 기반을 잡고 그의 아버지가 완성한 거대한 기업을 이어받을 재벌 후계자였다.
사토가 밝고 따뜻한 기운의 사람인 반면에 시노하라는 말이 없고 항상 조용했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그에게 접근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마다 교수는 일본의 미래를 이끌어 갈 빛나는 두 명의 별이 자신의 수업 시간에 제자로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시노하라와 사토에게 의미 없는 눈인사를 건넸다. 그 후 오늘 자신의 희생물이 누가 될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교탁 위에 올려져 있는 발표 자료 표지에 적힌 이름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갑자기 그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굳어졌다.
은세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로군. 실망한 기색도 잠시, 그의 얼굴에 특유의 이죽거리는 미소가 번져 올랐다.
그런 야마다 교수의 모습을 사토가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세나는 교수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발표 주제는 바이런의 풍자시에 대한 해석이었다.
600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준비 시간이 짧았던 것일까. 도움 안 되는 울적한 감상에 빠져서 발표 준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몹시도 후회하며 그녀는 간신히 발표를 마쳤다.
매우 긴장한 상태여서인지 그녀의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살짝 물들어 있었다. 사토는 세나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야마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시노하라군, 은상의 해석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한번 말해 보겠나?”
순간 야마다 교수의 클래스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노하라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교실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시노하라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나에게 날렵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주저함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바이런의 시를 분석하기에는 그녀에게 준비 시간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바이런의 시는 좀 버거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야마다 교수의 영미시 수업을 듣는 3학년 클래스가 일순 술렁였다. 모든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시노하라가 이렇게 정면으로 세나를 비판했다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시노하라가 던진 일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세나의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생각에 몸의 한쪽이 훅 하고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으레 느꼈던 그 설명하기 힘든 배타적인 시선들이 다시 한번 쓰린 밀물이 되어 세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저에게도 발언권을 주시겠습니까?”
앞에서 세 번째 줄 창가 자리에 앉아 줄곧 뚫어질 듯이 세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토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숨길 수 없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사토군. 말해 보게.”
“은상의 발표는 시노하라군에게 이런 혹평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지 않았습니다. 바이런의 시를 해석하는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 아닙니까? 은상은 추가 자료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노하라가 야마다 교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특유의 독설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은상의 발표는 뭐랄까. 일단 바이런의 작가관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일반적이고 대중적이었습니다. 독창적인 해석은 찾아볼 수도 없었구요. 어떤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따분한 발표였습니다.”
시노하라 류우지.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와 영리하게 빛나는 이마, 조화롭게 자리 잡은 섬세한 이목구비는 일본 최고의 탤런트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시노하라 류우지에게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굴지의 기업인 시노하라 전자의 외동아들다운 거만함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움과 오만함은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형성했다.
사토 켄지는 계속되는 시노하라의 독설에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노하라군, 말이 지나친데. 너의 그 오만한 태도가 몹시 거슬려.”
“사토군이 다시 나설 줄 알았지. 여왕님의 일이라면 항상 1초도 안 걸리는군. 하지만 사토군의 여왕님은 오늘 확실히 준비가 부족해 보여.”
“시노하라,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토 켄지는 시노하라의 서슴없는 도발에 당장이라도 그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야마다 교수의 수업 시간 중에 이전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것도 야마다 교수가 가장 신뢰하고 인정하는 걸출한 가문의 두 청년이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태세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에 눌린 학생들은 그저 호기심 가득 찬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남학생들은 따분한 수업 시간에 이 무슨 흥미진진한 광경이냐는 표정들이었고,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흠모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토와 시노하라의 불꽃 튀는 승부에 몹시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특히나 그 불꽃 승부의 시발점이 한국에서 온 은세나라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수려한 외모와 영민한 지성을 갖춘 두 청년이 만들어 낸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수습한 건 바로 야마다 교수였다. 그는 특유의 냉혹한 음성으로 아끼는 두 제자에게 급히 제동을 걸었다.
“사토군 자네의 의견은 충분히 수렴했네. 그리고 시노하라군의 의견도 고맙고. 은세나상이 충분히 알아들었겠어.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두 사람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 참으로 인상적이었네.”
사토와 시노하라. 동경대를 움직이는 가장 빛나는 가문의 청년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삐쩍 마른 여학생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수업 시간에 이런 언쟁을 일으켰다는 게 야마다 교수는 몹시도 언짢았다.
2. 갑작스럽게 내린 비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의 후미진 뒷골목에 한 여자가 오목한 그릇을 들고 나타나자 까맣고 하얀 길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자는 가녀린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이제 갓 새끼 티를 벗어서 사람에 대한 경각심이 아직은 부족한 어린 고양이들 앞에 웅숭그리고 앉았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이 남긴 한 줌 햇살은 그녀의 좁은 등 위에서 사방으로 바스라졌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타고 옆으로 흘러내린 빛은 초록의 이끼가 낀 보도블록 위로 좁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고서점 골목을 우연히 지나가던 한 남자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에게 그 장면은 빛바랜 수채화처럼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제법 쌀쌀한 2월의 도쿄. 화려한 조명의 온기가 미치지 않는 쇠락한 골목에서 주인 없이 길 위에 사는 어린 길고양이들이 물과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작은 여자에게로 모여드는 모습에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어차피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갈 텐데 저런 보살핌이 무슨 의미가 있나. 계속 돌보지 못할 거라면 가여운 것들에게 희망을 주지나 말지.’
자꾸만 못된 생각이 들었다. 경각심도 없이 가녀린 여자에게 모여들던 길 위의 어린 생명들이 안쓰러웠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그 거리를 다시 찾았다. 초록색 이끼가 얼룩덜룩 낀 그 골목 앞에 이르자 일부러 딴 데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버려진 것들에게 밥과 물을 챙겨 주는 그런 따뜻한 손길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두려웠을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결심했다는 듯이 골목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나 골목은 사람의 그림자 한 조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헤친 한 여자가 작은 서점 안에서 걸어 나왔다. 길고양이들을 챙겨 주던 그 여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먹빛을 띤 층 없는 머리가 등허리 부근에서 출렁였다.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녀는 골목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걸었다.
그녀가 골목 끝에 다다르자 아직도 보송보송한 털을 지닌 어린 고양이들이 어디선가 하나둘 모여들었다.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는 오렌지빛 석양으로 나른하게 물들고 있었고 시노하라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노을이 황금빛에서 옅은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밥 주기를 마치고 서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뒤돌아섰을 때 종업원용 초록색 긴 앞치마에 가려져 있던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를 보고 시노하라는 중얼거렸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