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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도쿄에서 서쪽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시노하라 가문이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고급 주택가가 등장한다. 시노하라 전자의 회장이자 류우지의 아버지인 시노하라 요시로는 이 인근 일대의 땅을 모조리 매입해서 일본에서도 최상위 계층들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 단지를 만들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저택들 사이에서 마치 중세의 성 같은 위엄을 풍기며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저택이 유독 시선을 잡아끌며 주위를 압도했다. 이탈리아 최고의 건축 팀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 고전적인 저택은 바로 시노하라 가문의 본가였다.

정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토 제일의 명장이 시노하라 가문에 대한 존경심을 얹어서 청동으로 형상화한 매화 문양의 주물 장식이었다. 그것은 시노하라 가문을 상징하는 매화꽃 인장. 대단한 영향력과 힘을 상징하는 이 인장은 고풍스럽고 육중한 철제 대문의 한가운데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노하라 요시로가 완성한 전기전자 산업 분야의 거대 기업을 이끌어 가는 대재벌가의 저택답게 이곳은 대문에서부터 알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시노하라 류우지는 조금은 거창하게 느껴지는 매화 모양의 인장을 바라보며 차의 시동을 껐다.

흑표범처럼 날렵하게 빠진 롤스로이스 팬텀의 운전석에서 시노하라 류우지는 잠시 눈을 감고 오늘 수업 시간에 있었던 작은 소동을 떠올렸다. 사토 켄지가 은세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빠져 있을 줄이야.

그의 감은 눈 아래로 긴 속눈썹이 짙게 음영을 드리웠다. 아직 세상에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는 비범한 조각가가 세심한 손길로 만든 조각품을 연상케 하는 준수한 옆얼굴 위로 석양이 내려앉았다.

사실 사토와의 불쾌했던 다툼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보기 좋게 색깔이 빠진 청바지에 연분홍색 면 티셔츠를 입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강의실 앞에 위태롭게 서 있던 은세나. 상처받은 한 마리 백조를 연상시키던 그 처연한 모습.

몇 해 전 세나의 등장은 동경대 캠퍼스를 술렁이게 했었다. 한국에서 온 여학생이라는 이유 말고도 그녀에게는 남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특별함이 존재했다.

그녀는 일본 여성에게서 느낄 수 없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천연의 먹빛을 연상시키는 전혀 탈색하지 않은 까맣고 긴 머리.

그 또래 여학생들이 짙은 아이라인에 반짝거리는 메이크업으로 온 캠퍼스를 채워도 그녀의 화장기 없는 피부 앞에서는 한순간에 빛이 바랬다.

어느 공간에 있어도 그녀의 은은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움이 마치 근사한 조명처럼 그녀 주위를 환하게 밝혀 주었다.

사실, 시노하라가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캠퍼스가 아니었다. 세나가 동경대에 입성하기 전, 그는 우연히 도다이마에역 고서점 거리를 거닐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그녀를 보았다.

그때의 세나는 지금처럼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있지 않았다. 검정 벨벳 같은 머리가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여성스럽고 우아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노하라는 그녀에게 연락처라도 물어야 할 것 같은 조금은 유치한 감정에 잠시 동안이나마 사로잡혔다는 사실에 실소하며 그 거리를 빠져나왔었다. 고양이 아가씨.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 문학부 교양 과목을 듣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나를 본 시노하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옅은 파스텔톤의 청바지가 그녀의 늘씬한 하체를 아찔하게 감싸고 있었고 풍성한 먹빛 머리는 자연스럽게 귀밑을 스치며 물결치고 있는 몇 가닥만 남기고 모두 정수리 부근에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머리를 틀어 올리니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났다. 시노하라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립글로스만 가볍게 바른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잠시 동안 시선을 빼앗겨 버린 그는 급히 창밖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시노하라 위험한데. 더 이상은.



*



오늘의 이 소동이 야마다 교수만큼이나 불쾌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이즈미 미카였다.

사토 켄지.

어렸을 때부터 켄지는 미카의 배필이 될 것이라고 어른들은 항상 말해 왔었다. 사토가와 이즈미가는 교토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정치인 가문이었다.

동경대에서 그녀가 정치학이 아닌 영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모두 켄지 때문이었다. 어느 날 정치인 가문의 장남이 뜬금없이 영문학을 하겠다고 했을 땐 잠시 아연실색했지만 미카는 조용히 같은 전공을 선택하는 것으로 켄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의 눈빛은 항상 따뜻했지만 결코 다정하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그 이상의 마음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카에게 스스럼없이 웃어 주었지만 마음의 기저에는 늘 조심스러운 예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켄지가 학기 초에 한국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유학생이 온 이후 계속 그녀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미카였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사토가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그 다정함이었다. 미카는 몹시나 허탈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주변에는 그를 경탄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았었다. 존경받는 중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 말고도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포용하는 힘이 있었다.

켄지는 양지에서 태양의 정기를 흠뻑 받고 자란 가장 크고 눈부신 해바라기 같은 남자였다. 대단한 가문의 미인들이 사토 켄지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지만 그가 곁을 내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카는 그런 켄지를 보며 위안을 받았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남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은세나의 등장으로 그 희망마저 하루하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미카는 아직도 교단에 허탈하게 서 있는 세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발표 자료를 차곡차곡 챙겨 주고 있는 켄지를 분노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사랑. 그래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켄지를 사랑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를 그녀의 인생에서 떼어 놓고 바라본 적은 없었으니.

학생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강의실에서 아직도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은세나와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켄지가 마지막으로 걸어 나왔다. 미카는 그 둘 앞에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은세나. 이런 소동은 조금 곤란해. 니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유학 왔는지는 사실 관심 없어. 영문학을 하겠다고 굳이 도쿄에 온 게 참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켄지와 연애를 하는 거라면 당당하게 밝히고 본격적으로 사귀는 게 어떨까. 너 때문에 내 수업 시간이 엉망이 되는 건 참을 수가 없거든. 매우 불쾌해.”

켄지는 미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시 한번 당황했다. 세나에게 가해지는 어이없는 공격을 두 번이나 지켜봐야 하다니. 게다가 이 공격의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막역하게 지내 왔던 이즈미 미카가 아닌가.

하지만 미카의 뼈 있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켄지와의 연애라는 단어에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세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었지만 정색하며 따지고 드는 이즈미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즈미상에게 피해가 갔다면 미안해. 하지만 켄지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 줘.”

세나의 옆에 서 있던 그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세나와 연인 사이라고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흥분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녀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자신의 지난날들이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우정으로 포장했던 것이었는데 참 어리석었네. 하지만 미카의 이런 행동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즈미. 너답지 않게 너무 무례하잖아? 은상에게 사과해. 은상이 너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사토. 내 말 똑바로 들어. 앞으로 니가 더 상처받게 될지도 몰라. 나는 사토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사토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만나. 은세나는 니 상대가 아니야. 뭘로 봐도.”

미카는 아무 사이 아니라는 세나의 말에 표정이 굳어지던 그의 반응을 보며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사토 켄지. 그녀에게 돌아오지도 않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주고 있었던 거니. 그렇다면 더욱더 용서 못 해.

세나는 도저히 이즈미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영문학과 건물 밑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풍스러운 돌계단에 내려서자마자 대지를 감싸는 촉촉한 흙냄새가 코밑으로 확 스며들어 왔다.

비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도쿄의 여름 장마가 그 시작을 알렸다. 세나는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조금은 차가워진 공기가 홍조 띤 두 뺨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발표는 엉망이 돼 버리고 켄지에게는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이즈미에게까지 미움을 받게 됐네. 세나의 도쿄 생활 참 멋지게 돌아가는구나.’

갑자기 이 지구상에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쓸쓸한 감정이 온몸을 세차게 때리는 이 비처럼 아프게 그녀에게 전해졌다.

항상 그랬었다.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뒤돌아서면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그들의 냉소. 한국인이라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묘한 서글픔과 냉대가 일본의 지성들이 모인다는 이 웅장한 캠퍼스에서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처음이었다. 도쿄에 와서 눈물이 터진 건. 거세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이 빗물로 인해 자신의 눈물이 가려져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였다. 누군가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의 몸은 그 사람에 의해 크게 회전을 하며 돌려세워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힘차게 잡고 있는 사람은 켄지였다. 세나는 빗물과 눈물에 가려 희뿌옇게 보이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분노의 감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켄지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을까.

“세나. 이 비를 맞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내가 집까지 태워다 줄게.”

미처 거절할 틈도 없이 켄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영문학과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세나가 몹시도 안타까웠다. 오늘 그녀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세나의 얇은 핑크색 면 티셔츠는 비에 흠뻑 젖었고, 틀어 올린 머리에서 흘러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실금 같은 상처처럼 붙어 있어서 그녀는 더욱더 가련해 보였다.

사토 켄지의 심장은 그의 왼쪽 가슴에 쏙 들어오는 세나를 느끼며 방망이질하듯 두근대기 시작했다. 다시는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 줄 수만 있다면.

처음에는 낯선 땅에 혼자 와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은 하루하루 깊어지며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녀에게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밀어낼까 봐 마음을 숨겼던 게 몹시도 후회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걷는 이 계단이 끝나지 않았으면.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비가 그치지 않기를.



잠시 후 세나는 켄지의 혼다 어코드 조수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흠뻑 젖은 그녀를 위해 트렁크 안에서 정갈한 향이 나는 스포츠타월 하나를 가져와 말없이 건네주었다.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켄지. 이런 느낌의 켄지는 어쩐지 낯설다.

“켄지. 나 그냥 정문 앞에서 내려 줘. 여기서 집까지 가까우니까 뛰어가면 돼. 켄지가 이런 수고를 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해.”

그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몹시 화가 난 듯 그의 볼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입술을 꽉 깨문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남자다웠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니가 뭐라고 해도 오늘은 집까지 태워다 줄 거니까.”

세나는 켄지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역시나 화가 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기분이었다.

시노하라의 독설, 그리고 켄지와의 다툼, 마지막으로 이즈미의 비난까지. 하나하나 풀어야 할 감정선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자. 그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깨끗하게 빨아 놓은 면 이불 속으로 깊게 아주 깊게 자신을 묻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