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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나가 머릿속의 복잡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비우고 있는 동안 켄지의 차는 어느새 그녀의 방이 보이는 낡은 3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가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서 세나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있는 여왕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물기를 머금은 얇은 면 티셔츠는 적당히 풍만하고 굴곡이 있는 그녀의 몸매를 더 이상 감춰 주지 못했다.
다리에서부터 그녀를 훑어 나가던 켄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나의 아찔한 굴곡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물기 어린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와서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 희디흰 목덜미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조화가 한 폭의 동양화같이 그윽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키스할 수만 있다면. 사토 켄지. 완전히 미쳤구나.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세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몹시도 불편했다. 그 언제였던가. 도서관에서 처음 서로에 대한 소개를 나눴을 때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이 자동차 안이 무척이나 폐쇄적인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가 눈빛으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사토 켄지. 오늘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세나는 뭔가에 쫓기듯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젖은 옷을 파고들어 왔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 속으로 부끄러웠던 오늘 하루를 숨기고만 싶었다. 그리고 켄지의 눈빛이 닿지 않는 밤의 장막 한가운데로 어서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비 내린 거리는 고요했고 어둠이 깔린 골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역시나 이곳은 낯선 땅. 그녀의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왠지 모르게 차가운 사람들. 그리고 시노하라.
그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바보로 만들 줄이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시노하라가 던진 독하고 차가운 말들이 마치 한 무리의 물고기들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켄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나가 복잡한 심정을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니가 나한테 친구였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 첫 수업 시간에 니가 들어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내 마음은 한결같았어. 좋아해. 너를 정말로 좋아해.”
세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오늘 그의 고백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저렇게나 진지한 그의 눈빛을 어찌해야 하나.
“켄지.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지금 니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러워. 미안해. 켄지가 그런 마음인지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친해지지는 않았을 거야.”
세나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마치 광섬유의 빛처럼 예리하게 그의 머릿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미치도록 화가 났다. 그리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바로 그의 눈 아래에 그녀의 입술이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그녀를 배려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키스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난 26개월 동안 어쩌면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세나야 미안해.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심장은 터져 버릴지도 몰라.
세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가깝게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열기로 더욱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켄지의 눈빛.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그에게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압도하는 그의 눈빛 안에 그만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골목 안에는 완벽하게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로등의 노란 할로겐 불빛만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음영을 까만 밤이 선사한 흑비단 천에 흐릿하게 아로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애처롭게 명멸하는 서로의 눈빛만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던 켄지의 시간이 끝나자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에게로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자그마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따뜻한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마자 미세한 떨림이 연한 두 볼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먼저 복숭아처럼 동그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늘 그를 떨리게 했던 인형 같은 눈꺼풀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입술이 진달래꽃같이 붉고 여린 그녀의 입술을 만나는 순간 켄지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그녀는 이제 그의 품 안에 완벽하게 자리했다. 둘 사이에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세나를 자신에게로 밀착시켰다. 켄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음미했다. 촉촉한 입술에서 풀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의 품에 단단하게 갇힌 세나는 그에게 온전히 입술을 내어 주고 아득한 세상으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두 다리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켄지의 강한 팔은 그녀가 어둠 속 세상으로 미처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그러쥐고 있었다.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두 입술 사이로 자신의 뜨거운 혀를 집어넣었다. 세나는 갑작스럽게 침투한 물컹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다.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켄지의 왼쪽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의 키스는 더욱더 깊어졌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이렇게 깊은 키스는 처음이었다.
정치인 가문의 존귀한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어디 한 군데 한눈팔지도 않고 동경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반듯하게 살아온 사토 켄지였다. 그에게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미인들은 많았지만 학부 1학년 첫 시간에 세나를 본 이후로 그 어떤 여자도 마음에 품어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사토 켄지는 자신이 살아왔던 만족스러웠던 지난 생애를 전부 되돌리라 해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켄지는 자신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세나는 생각지도 않게 켄지의 키스가 깊어져만 가자 아득히 멀어졌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그의 키스를 허락하면 안 된다는 경고등이 그녀에게 켜졌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 내려 하자 면 티셔츠 밑으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켄지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 쪽 맨살을 쓰다듬었다. 이제 세나의 머릿속에서는 빨간 경고등이 확실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세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켄지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더욱 강하게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때였다. 어둠 속을 가르며 묘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사토에게도 저런 남자다운 면이 있었네. 꽤나 저돌적이야. 하지만 사토의 여왕님은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해 보이는데.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켄지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세나를 가두었던 팔의 힘을 풀었다. 세나는 재빨리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어둠 속의 남자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밝은 곳을 향해 걸어 나왔다. 세상에나. 시노하라 류우지였다.
“시노하라 너가 왜 여기에 있어?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전에 말 안 했나? 자주 가는 서점이 이 근처라고. 그 서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 좁은 골목길이라서 미안하게 됐다.”
시노하라 류우지. 오만방자한 자식. 세나는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친구로서 가장 신뢰했던 켄지와의 뜨거운 입맞춤. 그리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오만한 시노하라 자식이라니. 세나는 그저 죽고만 싶었다.
“사토,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세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어? 동경대 최고의 지성이라 칭송받는 사토 켄지의 이름이 참으로 아까워. 모범생이라 잘 모르나 본데 키스는 그렇게 강제로 하는 게 아니야. 숙녀에게 실례잖아. 처음에는 좋았을지 몰라도 후반부로 갈수록 세나도 몹시 불쾌해하는 것 같던데.”
시노하라 류우지는 살짝 홍조 띤 세나의 얼굴을 마치 뜯어먹을 듯이 노려보며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시노하라 넌 그냥 조용히 가던 길 가. 그리고 세나, 세나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니 입에서 세나의 이름이 다시 나오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꼭 명심해.”
“그건 내 쪽에서도 정중히 사양할게. 늘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것 같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여왕님의 이름 따위 나 역시도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잘해 보길 바래.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다.”
시노하라는 아직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어두운 터널 안 같은 골목길로 느릿느릿 사라져 갔다.
3. 세나의 보랏빛 하늘
그는 거리가 너무 휑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거리가 마치 히로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병원의 차가운 복도처럼 느껴졌다. 낮 동안에 내린 세찬 비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도쿄 뒷골목에 은혜라도 베푼 것일까. 거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긴 이 길이 가부키쵸의 모텔 골목처럼 더럽다고 해도 이 어둠 속에서 보일 리가 없잖아.
왜 이 거리에 왔던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히로미를 보냈던 그 복도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실로 오랜만이었다. 작은 나사못 하나도 침입할 틈 없이 촘촘하고 견고했던 생각의 얼개가 이렇게 뒤헝클어진 것은. 그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의해 보고 싶었다.
화가 나 있는 건가. 아니다.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전혀 없다. 사토의 품 안에 안겨 있던 그녀에게 실망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 녀석 정도면 훌륭한 상대다. 그녀에게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어쩌면 몇 년을 친구로 지냈던 그들이 뜨거운 연인이 되는 자연스러운 전개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었을지도. 그녀에게 놀라울 정도로 집중했던 사토였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오랜 기다림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자식처럼 다가가지 못했던 나에 대한 실망인가. 아니다. 아니다. 어차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랑 따위. 질척한 연애 감정. 나와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감정놀음 따위가 다 뭐라고.
하지만 왜 그런지 모르게 답답하다. 정의할 수가 없는 감정이다. 그냥 못 본 척 발길을 돌려서 그 거리를 나왔어야 했다. 내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는데. 사토 자식이 나를 죽이고 싶었겠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녀를 그 자식의 품에서 떼어 놓고 싶었던 걸까. 사토 켄지라면 은세나에게 최고의 상대일지도 모르는데. 그 녀석이 마치 너는 내 여자라고 각인시키듯 세나의 가는 몸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을 때 왜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던 것일까.
시노하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도쿄의 밤하늘. 그 죽음 같은 어두움이 거대한 함선의 형상으로 시노하라에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상처받은 여왕님의 얼굴이 아무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도 그냥 그것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홀린 듯이 차를 몰아서 곧장 이곳으로 내달리지 말았어야 했다.
마구잡이로 생각이 얽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도다이마에역의 후미진 뒷골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세나가 머릿속의 복잡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비우고 있는 동안 켄지의 차는 어느새 그녀의 방이 보이는 낡은 3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가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서 세나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있는 여왕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물기를 머금은 얇은 면 티셔츠는 적당히 풍만하고 굴곡이 있는 그녀의 몸매를 더 이상 감춰 주지 못했다.
다리에서부터 그녀를 훑어 나가던 켄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나의 아찔한 굴곡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물기 어린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와서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 희디흰 목덜미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조화가 한 폭의 동양화같이 그윽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키스할 수만 있다면. 사토 켄지. 완전히 미쳤구나.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세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몹시도 불편했다. 그 언제였던가. 도서관에서 처음 서로에 대한 소개를 나눴을 때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이 자동차 안이 무척이나 폐쇄적인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가 눈빛으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사토 켄지. 오늘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세나는 뭔가에 쫓기듯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젖은 옷을 파고들어 왔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 속으로 부끄러웠던 오늘 하루를 숨기고만 싶었다. 그리고 켄지의 눈빛이 닿지 않는 밤의 장막 한가운데로 어서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비 내린 거리는 고요했고 어둠이 깔린 골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역시나 이곳은 낯선 땅. 그녀의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왠지 모르게 차가운 사람들. 그리고 시노하라.
그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바보로 만들 줄이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시노하라가 던진 독하고 차가운 말들이 마치 한 무리의 물고기들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켄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나가 복잡한 심정을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니가 나한테 친구였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 첫 수업 시간에 니가 들어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내 마음은 한결같았어. 좋아해. 너를 정말로 좋아해.”
세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오늘 그의 고백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저렇게나 진지한 그의 눈빛을 어찌해야 하나.
“켄지.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지금 니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러워. 미안해. 켄지가 그런 마음인지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친해지지는 않았을 거야.”
세나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마치 광섬유의 빛처럼 예리하게 그의 머릿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미치도록 화가 났다. 그리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바로 그의 눈 아래에 그녀의 입술이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그녀를 배려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키스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난 26개월 동안 어쩌면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세나야 미안해.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심장은 터져 버릴지도 몰라.
세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가깝게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열기로 더욱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켄지의 눈빛.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그에게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압도하는 그의 눈빛 안에 그만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골목 안에는 완벽하게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로등의 노란 할로겐 불빛만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음영을 까만 밤이 선사한 흑비단 천에 흐릿하게 아로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애처롭게 명멸하는 서로의 눈빛만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던 켄지의 시간이 끝나자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에게로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자그마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따뜻한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마자 미세한 떨림이 연한 두 볼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먼저 복숭아처럼 동그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늘 그를 떨리게 했던 인형 같은 눈꺼풀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입술이 진달래꽃같이 붉고 여린 그녀의 입술을 만나는 순간 켄지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그녀는 이제 그의 품 안에 완벽하게 자리했다. 둘 사이에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세나를 자신에게로 밀착시켰다. 켄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음미했다. 촉촉한 입술에서 풀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의 품에 단단하게 갇힌 세나는 그에게 온전히 입술을 내어 주고 아득한 세상으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두 다리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켄지의 강한 팔은 그녀가 어둠 속 세상으로 미처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그러쥐고 있었다.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두 입술 사이로 자신의 뜨거운 혀를 집어넣었다. 세나는 갑작스럽게 침투한 물컹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다.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켄지의 왼쪽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의 키스는 더욱더 깊어졌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이렇게 깊은 키스는 처음이었다.
정치인 가문의 존귀한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어디 한 군데 한눈팔지도 않고 동경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반듯하게 살아온 사토 켄지였다. 그에게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미인들은 많았지만 학부 1학년 첫 시간에 세나를 본 이후로 그 어떤 여자도 마음에 품어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사토 켄지는 자신이 살아왔던 만족스러웠던 지난 생애를 전부 되돌리라 해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켄지는 자신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세나는 생각지도 않게 켄지의 키스가 깊어져만 가자 아득히 멀어졌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그의 키스를 허락하면 안 된다는 경고등이 그녀에게 켜졌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 내려 하자 면 티셔츠 밑으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켄지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 쪽 맨살을 쓰다듬었다. 이제 세나의 머릿속에서는 빨간 경고등이 확실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세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켄지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더욱 강하게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때였다. 어둠 속을 가르며 묘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사토에게도 저런 남자다운 면이 있었네. 꽤나 저돌적이야. 하지만 사토의 여왕님은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해 보이는데.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켄지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세나를 가두었던 팔의 힘을 풀었다. 세나는 재빨리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어둠 속의 남자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밝은 곳을 향해 걸어 나왔다. 세상에나. 시노하라 류우지였다.
“시노하라 너가 왜 여기에 있어?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전에 말 안 했나? 자주 가는 서점이 이 근처라고. 그 서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이 좁은 골목길이라서 미안하게 됐다.”
시노하라 류우지. 오만방자한 자식. 세나는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친구로서 가장 신뢰했던 켄지와의 뜨거운 입맞춤. 그리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오만한 시노하라 자식이라니. 세나는 그저 죽고만 싶었다.
“사토,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세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어? 동경대 최고의 지성이라 칭송받는 사토 켄지의 이름이 참으로 아까워. 모범생이라 잘 모르나 본데 키스는 그렇게 강제로 하는 게 아니야. 숙녀에게 실례잖아. 처음에는 좋았을지 몰라도 후반부로 갈수록 세나도 몹시 불쾌해하는 것 같던데.”
시노하라 류우지는 살짝 홍조 띤 세나의 얼굴을 마치 뜯어먹을 듯이 노려보며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시노하라 넌 그냥 조용히 가던 길 가. 그리고 세나, 세나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니 입에서 세나의 이름이 다시 나오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꼭 명심해.”
“그건 내 쪽에서도 정중히 사양할게. 늘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것 같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여왕님의 이름 따위 나 역시도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잘해 보길 바래.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다.”
시노하라는 아직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어두운 터널 안 같은 골목길로 느릿느릿 사라져 갔다.
3. 세나의 보랏빛 하늘
그는 거리가 너무 휑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거리가 마치 히로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병원의 차가운 복도처럼 느껴졌다. 낮 동안에 내린 세찬 비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도쿄 뒷골목에 은혜라도 베푼 것일까. 거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긴 이 길이 가부키쵸의 모텔 골목처럼 더럽다고 해도 이 어둠 속에서 보일 리가 없잖아.
왜 이 거리에 왔던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히로미를 보냈던 그 복도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실로 오랜만이었다. 작은 나사못 하나도 침입할 틈 없이 촘촘하고 견고했던 생각의 얼개가 이렇게 뒤헝클어진 것은. 그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의해 보고 싶었다.
화가 나 있는 건가. 아니다.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전혀 없다. 사토의 품 안에 안겨 있던 그녀에게 실망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 녀석 정도면 훌륭한 상대다. 그녀에게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어쩌면 몇 년을 친구로 지냈던 그들이 뜨거운 연인이 되는 자연스러운 전개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었을지도. 그녀에게 놀라울 정도로 집중했던 사토였으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오랜 기다림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자식처럼 다가가지 못했던 나에 대한 실망인가. 아니다. 아니다. 어차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랑 따위. 질척한 연애 감정. 나와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감정놀음 따위가 다 뭐라고.
하지만 왜 그런지 모르게 답답하다. 정의할 수가 없는 감정이다. 그냥 못 본 척 발길을 돌려서 그 거리를 나왔어야 했다. 내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는데. 사토 자식이 나를 죽이고 싶었겠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녀를 그 자식의 품에서 떼어 놓고 싶었던 걸까. 사토 켄지라면 은세나에게 최고의 상대일지도 모르는데. 그 녀석이 마치 너는 내 여자라고 각인시키듯 세나의 가는 몸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을 때 왜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던 것일까.
시노하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도쿄의 밤하늘. 그 죽음 같은 어두움이 거대한 함선의 형상으로 시노하라에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상처받은 여왕님의 얼굴이 아무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도 그냥 그것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홀린 듯이 차를 몰아서 곧장 이곳으로 내달리지 말았어야 했다.
마구잡이로 생각이 얽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도다이마에역의 후미진 뒷골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