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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내 인생 최악의 날이네. 다시 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나는 켄지가 웨스트에서 가져다준 코코아 가루를 티스푼에 큼지막하게 담아서 큰 머그잔에 두 번 털어 넣었다. 스팀 밀크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마시멜로 몇 개를 집어넣고 김이 나는 전기포트를 머그잔에 기울였다. 동그란 마시멜로에 뜨거운 물이 닿자 시시식 소리를 내며 흰 물감이 풀리듯 코코아에 녹아들었다.
‘You make me happy!’라고 적힌 머그잔의 주황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글씨에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끼며 세나는 음미하듯 천천히 뜨거운 코코아를 목으로 넘겼다.
일본에서 무척이나 각광받고 있는 유럽식 베이커리 웨스트에서 가져온 코코아는 역시 다르네. 머리가 쨍하게 너무 달지도 않고 코코아에 흔히 들어 있는 싸구려 바닐라 향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알싸한 계피 향기와 씁쓰레한 다크초콜릿이 적당히 뜨거운 액체로 아름답게 만나서 폐부까지 깊숙이 진한 맛을 전해 주고 있었다.
세나는 두껍지 않은 매트리스에 두툼한 트윌 면으로 누빈 보라색 꽃무늬 스프레드를 씌운 싱글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흰 바탕에 깨끗한 빨강 도트무늬 갓을 씌운 스탠드의 불빛만이 세나의 방 안을 잠잠히 비추어 주었다. 침대에 누우니 면 이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미모사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세나는 이제 좀 더 편해지고 싶었다. 머리를 야무지게 고정시켜 주고 있던 검은색 머리끈을 풀자 가벼운 두통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었다. 하얀 베개커버 위로 흑단 같은 머리가 한가득 펼쳐졌다.
주인 할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 방 벽지는 짙은 베이지색 다마스크 문양이었다. 천장의 벽지 문양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옮겨 봤다. 아무리 생각을 털어 내려고 해도 몇 개의 장면들이 서로의 팔을 엮은 채 끊임없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켄지와의 키스. 아까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러 개의 감정이 뒤엉켜서 머릿속이 좀처럼 안정이 되질 않았다. 그의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가 키스하기 전 내게 잠시의 시간을 주었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사토 켄지는 분명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왠지 모르게 두려워. 일본 남자와 불같은 연애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빛나는 내 미래를 위해서? 결코 아니다. 가족들이 없는 완벽하게 낯선 곳에서 나란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부모 곁을 떠나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했던 그 시간들이 굉장히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를 벗어나기 위해 책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면서 공부를 하는 나 같은 자식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혹독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마음 나눌 상대 하나 없는 외로운 땅. 도저히 진심을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사람들. 그리고 한 번의 강렬한 키스로 하루아침에 재설정된 켄지와의 관계. 이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켄지와 사귄다면 그다음에는. 켄지와 연인이 되고 나서 이제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야 하나. 자기 가족도 다 내던지고 도망쳐 온 내가 졸지에 교토 정치인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건가.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분명한 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이런 불안정한 마음으로는 그와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켄지가 믿음직한 친구의 자리에 있었던 때가 몹시도 그리웠다. 이제 다시 그를 친구의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와의 키스는 너무나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던 아득한 세계.
그리고 시노하라 류우지. 그와 말을 나눴던 적은 없었지만 가끔 강의실에서 그의 옆자리를 스쳐 갈 때 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봐서 몇 번 흠칫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업에 잘 나오지 않았던 시노하라 류우지. 과제를 제출하는 날 유령처럼 등장해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보다 더 깊이 있는 리포트를 던져 놓고 유유히 사라지던 시노하라.
가끔 그가 학교에 나오는 날이면 여학생들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설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을 던지곤 했었다. 벚꽃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서 늘 시선을 밖으로만 고정시키던 그. 매사가 귀찮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던 시노하라. 일본 굴지의 기업 아들이라더니 참으로 거만한 스타일이네. 세나는 학기 초에 그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내린 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켄지와 친해지고 나서 같이 수업을 들으러 가다가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학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시노하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표정이었다. 명문가 도련님을 낚으러 온 한국의 한심한 여자를 보는 듯한 그 쏘는 눈빛. 시간으로 따지면 2초도 채 안 되었을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하지만 세나는 몹시도 불쾌했었다.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시노하라 네가 우습게 볼 정도로 가볍게 사는 인생은 결코 아니니까.
세나는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공사장에 켜켜이 널빤지를 쌓아 올리듯 생각의 나무판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그제서야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순간온수기의 온수 밸브를 열었다. 따뜻하게 흐르는 물에 포옹의 감촉도 강렬했던 키스의 기억도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며.
사토 켄지는 자신의 차에 기대어 서서 희미한 조명이 까불거리는 세나의 창문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기억하며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배려했어야 했다. 평상시의 자신이었다면 결코 이렇게 성급하게 굴지 않았을 텐데. 지금 이 모습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오늘 밤의 키스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그녀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부디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켄지는 세나의 방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는 시간만큼은 그녀가 자신을 떠올릴 것 같아서 차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 방의 8와트짜리 작은 스탠드에서 나오는 불빛에게조차 자신의 등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창문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계단을 올라가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자신을 가두고 싶었다. 황망하게 건물 안으로 사라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노하라. 그 자식은 왜 여기에 있었던 걸까.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사토는 그녀의 창에서 가늘게 새어 나오던 연겨자색 불빛이 꺼지고 네모난 창문이 까만 어둠 속의 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참 동안 그렇게 시선을 창에 고정한 채 서 있었다.
*
500밀리리터 페트병에 들어 있는 차가운 이토엔 녹차가 본격적으로 사랑받는 계절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시험이 리포트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세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 며칠만 나가면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지금 기분으로는 켄지도 시노하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세나는 작은 창문을 열고 다케오 아저씨네 노렌이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가게마다 들어오는 출입문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는 노렌은 일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오늘도 성심성의껏 손님을 모시겠습니다’란 신실한 약속을 상징했다. 이 노렌에는 주로 가게의 이름이나 집안의 문양이 들어가는데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 나가는 일본의 전통에 따라 가게마다 자기들만의 독특한 노렌을 내거는 것으로 장사의 시작을 알렸다.
다케오 두부집은 신선한 느낌을 주는 짙은 파란색 바탕에 다케오 아저씨의 할아버지가 직접 쓰셨다는 거친 붓글씨의 가게명이 한눈에 들어오는 노렌을 갖고 있었다. 이 노렌이 문 앞에 걸려 있으면 장사를 시작했으니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세나는 반가운 파란색 천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 나갔다.
“다케오 아저씨. 오늘의 두부는 어떤 맛이죠?”
“은상, 어서 와. 오늘의 두부는 검은콩과 두부콩을 3 대 7의 비율로 넣어 만든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두부야.”
“검은콩두부라. 정말 맛있겠네요. 오늘 아침도 이렇게 훌륭한 두부의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방학인가? 동경대 학생들이 방학을 하면 이 거리가 한결 조용해지겠어.”
“네. 맞아요. 이제 곧 방학이에요. 하지만 제가 이 거리를 꿋꿋하게 지킬 테니 너무 상심 마세요. 내일의 두부도 기대할게요.”
“젊은 나이에 그렇게 두부만 먹어 대면 영양 불균형이 온다고. 안 그래도 말랐잖아. 어쨌든 따뜻할 때 빨리 먹도록 해.”
“그렇게 할게요. 다케오 아저씨. 내일 봬요.”
얇은 저지로 된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초라해 보였다. 아니야. 힘을 내자. 여기는 일본이야. 엄마가 차려 주는 아침 밥상을 그리워하는 건 너무 어린애 같잖아. 씩씩해지자.
집으로 돌아온 세나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두꺼운 전공책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아직도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맑은 간장에 살짝 절여서 얇게 썰어 놓은 짭짤한 수세미절임을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다. 다케오 아저씨의 고향에서 친척들이 농사를 지어 보내 주는 콩으로 만든 이 집 두부가 없었다면 내 도쿄 생활은 또 얼마나 서글펐을까. 입 안으로 퍼지는 고소하고 달달한 맛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그녀는 모처럼 만에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목요일. 방학 때 일할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학생복지과에만 들르면 된다. 집에는 이번 여름 방학에도 못 간다고 편지를 띄웠다. 엄마 집에 보내야 할지, 아빠 집에 보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두 군데 모두 다 부치고 고민을 끝내 버렸다.
세나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부모님은 이혼을 결정했다. 아빠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엄마는 하루에도 수없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뿐하게 넘나들었다.
아빠가 없으면 침실에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자야 할 정도로 엄마는 몹시도 심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히나 밤을 무서워했는데 어둠이 깔리면 스스로 검은 어둠을 베어 내어 공포의 이불을 만들어 덮었고, 그녀 머릿속의 어떤 지점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불안의 펜이 무서운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써 내려가는 듯했다.
밤에는 뭔지 모를 공포가 무섭고 낮에는 사람이 무섭다 했다. 미세 저울처럼 예민한 엄마의 신경은 항상 종잡을 수 없이 내달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주변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작은 성취에도 과하게 기뻐하고 작은 실패에도 과하게 좌절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신이 부여한 상식의 잣대가 그녀 안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엄마의 그 타고난 불안증으로 주변 사람들의 건강한 영혼마저 병든 나무처럼 점점 말라만 갔다. 특히 아빠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기에 새벽에 텅 빈 거실에 나와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빠의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아빠는 엄마로부터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엄마에게 듣기로 아빠의 새 여자는 직장 동료라고 했다. 남자보다도 더 강한 정신으로 문제를 척척 해결해 나가는 대담한 성격의 여자. 엄마가 아무리 기절하고 고꾸라져도 이미 차갑게 굳어 버린 아빠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네. 다시 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나는 켄지가 웨스트에서 가져다준 코코아 가루를 티스푼에 큼지막하게 담아서 큰 머그잔에 두 번 털어 넣었다. 스팀 밀크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마시멜로 몇 개를 집어넣고 김이 나는 전기포트를 머그잔에 기울였다. 동그란 마시멜로에 뜨거운 물이 닿자 시시식 소리를 내며 흰 물감이 풀리듯 코코아에 녹아들었다.
‘You make me happy!’라고 적힌 머그잔의 주황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글씨에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끼며 세나는 음미하듯 천천히 뜨거운 코코아를 목으로 넘겼다.
일본에서 무척이나 각광받고 있는 유럽식 베이커리 웨스트에서 가져온 코코아는 역시 다르네. 머리가 쨍하게 너무 달지도 않고 코코아에 흔히 들어 있는 싸구려 바닐라 향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알싸한 계피 향기와 씁쓰레한 다크초콜릿이 적당히 뜨거운 액체로 아름답게 만나서 폐부까지 깊숙이 진한 맛을 전해 주고 있었다.
세나는 두껍지 않은 매트리스에 두툼한 트윌 면으로 누빈 보라색 꽃무늬 스프레드를 씌운 싱글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흰 바탕에 깨끗한 빨강 도트무늬 갓을 씌운 스탠드의 불빛만이 세나의 방 안을 잠잠히 비추어 주었다. 침대에 누우니 면 이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미모사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세나는 이제 좀 더 편해지고 싶었다. 머리를 야무지게 고정시켜 주고 있던 검은색 머리끈을 풀자 가벼운 두통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었다. 하얀 베개커버 위로 흑단 같은 머리가 한가득 펼쳐졌다.
주인 할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 방 벽지는 짙은 베이지색 다마스크 문양이었다. 천장의 벽지 문양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옮겨 봤다. 아무리 생각을 털어 내려고 해도 몇 개의 장면들이 서로의 팔을 엮은 채 끊임없이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켄지와의 키스. 아까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러 개의 감정이 뒤엉켜서 머릿속이 좀처럼 안정이 되질 않았다. 그의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가 키스하기 전 내게 잠시의 시간을 주었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사토 켄지는 분명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왠지 모르게 두려워. 일본 남자와 불같은 연애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빛나는 내 미래를 위해서? 결코 아니다. 가족들이 없는 완벽하게 낯선 곳에서 나란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부모 곁을 떠나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했던 그 시간들이 굉장히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를 벗어나기 위해 책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면서 공부를 하는 나 같은 자식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혹독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마음 나눌 상대 하나 없는 외로운 땅. 도저히 진심을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사람들. 그리고 한 번의 강렬한 키스로 하루아침에 재설정된 켄지와의 관계. 이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켄지와 사귄다면 그다음에는. 켄지와 연인이 되고 나서 이제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야 하나. 자기 가족도 다 내던지고 도망쳐 온 내가 졸지에 교토 정치인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건가.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분명한 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이런 불안정한 마음으로는 그와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켄지가 믿음직한 친구의 자리에 있었던 때가 몹시도 그리웠다. 이제 다시 그를 친구의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와의 키스는 너무나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던 아득한 세계.
그리고 시노하라 류우지. 그와 말을 나눴던 적은 없었지만 가끔 강의실에서 그의 옆자리를 스쳐 갈 때 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봐서 몇 번 흠칫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업에 잘 나오지 않았던 시노하라 류우지. 과제를 제출하는 날 유령처럼 등장해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보다 더 깊이 있는 리포트를 던져 놓고 유유히 사라지던 시노하라.
가끔 그가 학교에 나오는 날이면 여학생들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설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을 던지곤 했었다. 벚꽃나무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서 늘 시선을 밖으로만 고정시키던 그. 매사가 귀찮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던 시노하라. 일본 굴지의 기업 아들이라더니 참으로 거만한 스타일이네. 세나는 학기 초에 그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내린 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켄지와 친해지고 나서 같이 수업을 들으러 가다가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학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시노하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표정이었다. 명문가 도련님을 낚으러 온 한국의 한심한 여자를 보는 듯한 그 쏘는 눈빛. 시간으로 따지면 2초도 채 안 되었을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하지만 세나는 몹시도 불쾌했었다.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시노하라 네가 우습게 볼 정도로 가볍게 사는 인생은 결코 아니니까.
세나는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공사장에 켜켜이 널빤지를 쌓아 올리듯 생각의 나무판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그제서야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순간온수기의 온수 밸브를 열었다. 따뜻하게 흐르는 물에 포옹의 감촉도 강렬했던 키스의 기억도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며.
사토 켄지는 자신의 차에 기대어 서서 희미한 조명이 까불거리는 세나의 창문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기억하며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배려했어야 했다. 평상시의 자신이었다면 결코 이렇게 성급하게 굴지 않았을 텐데. 지금 이 모습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오늘 밤의 키스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그녀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부디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켄지는 세나의 방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는 시간만큼은 그녀가 자신을 떠올릴 것 같아서 차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 방의 8와트짜리 작은 스탠드에서 나오는 불빛에게조차 자신의 등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창문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계단을 올라가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자신을 가두고 싶었다. 황망하게 건물 안으로 사라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노하라. 그 자식은 왜 여기에 있었던 걸까.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사토는 그녀의 창에서 가늘게 새어 나오던 연겨자색 불빛이 꺼지고 네모난 창문이 까만 어둠 속의 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참 동안 그렇게 시선을 창에 고정한 채 서 있었다.
*
500밀리리터 페트병에 들어 있는 차가운 이토엔 녹차가 본격적으로 사랑받는 계절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시험이 리포트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세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 며칠만 나가면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지금 기분으로는 켄지도 시노하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세나는 작은 창문을 열고 다케오 아저씨네 노렌이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가게마다 들어오는 출입문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는 노렌은 일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오늘도 성심성의껏 손님을 모시겠습니다’란 신실한 약속을 상징했다. 이 노렌에는 주로 가게의 이름이나 집안의 문양이 들어가는데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 나가는 일본의 전통에 따라 가게마다 자기들만의 독특한 노렌을 내거는 것으로 장사의 시작을 알렸다.
다케오 두부집은 신선한 느낌을 주는 짙은 파란색 바탕에 다케오 아저씨의 할아버지가 직접 쓰셨다는 거친 붓글씨의 가게명이 한눈에 들어오는 노렌을 갖고 있었다. 이 노렌이 문 앞에 걸려 있으면 장사를 시작했으니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세나는 반가운 파란색 천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 나갔다.
“다케오 아저씨. 오늘의 두부는 어떤 맛이죠?”
“은상, 어서 와. 오늘의 두부는 검은콩과 두부콩을 3 대 7의 비율로 넣어 만든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두부야.”
“검은콩두부라. 정말 맛있겠네요. 오늘 아침도 이렇게 훌륭한 두부의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방학인가? 동경대 학생들이 방학을 하면 이 거리가 한결 조용해지겠어.”
“네. 맞아요. 이제 곧 방학이에요. 하지만 제가 이 거리를 꿋꿋하게 지킬 테니 너무 상심 마세요. 내일의 두부도 기대할게요.”
“젊은 나이에 그렇게 두부만 먹어 대면 영양 불균형이 온다고. 안 그래도 말랐잖아. 어쨌든 따뜻할 때 빨리 먹도록 해.”
“그렇게 할게요. 다케오 아저씨. 내일 봬요.”
얇은 저지로 된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초라해 보였다. 아니야. 힘을 내자. 여기는 일본이야. 엄마가 차려 주는 아침 밥상을 그리워하는 건 너무 어린애 같잖아. 씩씩해지자.
집으로 돌아온 세나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두꺼운 전공책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아직도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맑은 간장에 살짝 절여서 얇게 썰어 놓은 짭짤한 수세미절임을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다. 다케오 아저씨의 고향에서 친척들이 농사를 지어 보내 주는 콩으로 만든 이 집 두부가 없었다면 내 도쿄 생활은 또 얼마나 서글펐을까. 입 안으로 퍼지는 고소하고 달달한 맛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그녀는 모처럼 만에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목요일. 방학 때 일할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학생복지과에만 들르면 된다. 집에는 이번 여름 방학에도 못 간다고 편지를 띄웠다. 엄마 집에 보내야 할지, 아빠 집에 보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두 군데 모두 다 부치고 고민을 끝내 버렸다.
세나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부모님은 이혼을 결정했다. 아빠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엄마는 하루에도 수없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뿐하게 넘나들었다.
아빠가 없으면 침실에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자야 할 정도로 엄마는 몹시도 심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히나 밤을 무서워했는데 어둠이 깔리면 스스로 검은 어둠을 베어 내어 공포의 이불을 만들어 덮었고, 그녀 머릿속의 어떤 지점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불안의 펜이 무서운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써 내려가는 듯했다.
밤에는 뭔지 모를 공포가 무섭고 낮에는 사람이 무섭다 했다. 미세 저울처럼 예민한 엄마의 신경은 항상 종잡을 수 없이 내달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주변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작은 성취에도 과하게 기뻐하고 작은 실패에도 과하게 좌절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신이 부여한 상식의 잣대가 그녀 안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엄마의 그 타고난 불안증으로 주변 사람들의 건강한 영혼마저 병든 나무처럼 점점 말라만 갔다. 특히 아빠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기에 새벽에 텅 빈 거실에 나와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빠의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아빠는 엄마로부터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엄마에게 듣기로 아빠의 새 여자는 직장 동료라고 했다. 남자보다도 더 강한 정신으로 문제를 척척 해결해 나가는 대담한 성격의 여자. 엄마가 아무리 기절하고 고꾸라져도 이미 차갑게 굳어 버린 아빠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