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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3번째 2018년 3월 10일
3월 10일 3번째.txt
파일 형식: 텍스트 문서.txt
연결 프로그램: Notepad
위치: C:Documents and SettingsMY COM바탕 화면씨발
크기: 11.0KB (11,248 바이트)
디스크 할당 크기: 32.0KB (32,768 바이트)
만든 날짜: 2018년 3월 10일 오늘, 오전 9:08:48
수정한 날짜: 2018년 3월 10일 오늘, 오전 9:54:12
엑세스한 날짜: 2018년 3월 10일 오늘
특성: ㅁ읽기 전용(R) ㅁ숨김(H) ■보관(I)
내가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전혀 없겠지만, 쓸 건 써야겠다. 정말로! 아, 어차피 또 없어지려나? 하루가 돌아가면 이 파일도 사라지는 건가? 하긴, 온라인 게임도 그렇던데 이 메모장이라고 별수가 있겠어?
하지만 쓸 건 써야겠다! 씨발!
(이하 몇 줄이 짜증과 욕으로 도배되어 있다.)
내가 말이지, 진짜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느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나만 3월 10일에 멈춰 서 있는지! 왜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알려 달라고요!
이상해, 진짜로 이상해요! 눈을 뜨고 게임을 켰는데 어제 먹었던 내 레어 아이템이 사라져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운영자한테 항의했는데 그런 적이 없다네? 나 참. 운영을 어떻게 하는 거야!
뭐 이 정도까지는 좋아요. 그 정도 레어템은 3일 밤낮 정도만 새우면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글쎄! 그 레어템이 또 나온 겁니다. 그것도 어제랑 비슷한 시간에! 아휴 좋아라! 얼른 창고에 넣어 놓고, 스샷도 왕창 찍었어요! 이것만 있으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증거로 보여 주면 운영자도 분명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또 다음 날이 되니까 스샷에 아이템도 없어지고 날짜는 왜 또 3월 10일이 되어 있는 겁니까! 네? 누가 좀 알려 줘! 이러다가 미치겠어!
난 그냥 방콕 하는 프로그래머일 뿐이야! 밖이 무섭고 싫어서 자주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
이제 싫어, 3월 10일! 씨팔!
(이하 또다시 심한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간간이 의미 없는 글자도 보인다.)
* * *
격렬하게 타자를 치다가 멈춘 B는(B라는 명칭은 그가 정한 자신의 아이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손가락이 너무 아팠지만 머리가 마비되어서 뭐라도 두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영어와, 자음, 모음, 숫자, 기호, 도형 등등이 B를 울고 싶게 했다.
손가락 끝으로 부질없이 글자가 가득한 모니터를 쓸어내리던 B는 축 처진 몸으로 욕실로 걸어갔다. 어두운 방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B는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가 병적으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
B는 욕실로 걸어가면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모서리에 각이 지도록 깨끗이 접었다. 어차피 세탁기에 넣어야 할 옷이지만 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반복되는 하루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옷 바구니에 벗은 옷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B는 거울 앞에 섰다. 깔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B의 하얀 뺨에는 긴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상처와 주변이 붉은 걸 보면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보기보다는 얕은 상처라 3일이면 벌써 딱지가 앉고 부기가 가라앉았어야 했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B의 기준으로 분명 3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픈 상처가 3일 내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게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신경질적으로 상처를 손으로 긁어내리던 B는 수도꼭지를 열어서 샤워기를 틀었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로 옅은 피의 흔적이 투명한 물을 타고 배수구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어떻게든 해야 돼. 어떻게든…….”
이 일을 누구에게 상담해 보는 게 좋을까?
가정을 세워 보자.
가족? B는 가족이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천애고아니까.
경찰? 미쳤다고 B에게 욕을 퍼부을 것이 뻔했다.
무당? 돈 받아서 굿이나 한판 하고 때려치우겠지.
친구? 인터넷 친구는 쌔고 쌨지. 오프라인은 하나도 없다는 게 아쉽지만.
직장 동료? B는 온라인으로 일하는 프리랜서다. 실질적으로 연이 닿는 동료는 없다.
마지막으로 생판 남인 이웃들? 글쎄. 아는 이웃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상담이라도 해 봤을 텐데 말이지.
B는 몸을 구석구석 씻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아파트에 이사를 온 뒤로 이웃과 인사하기는커녕 만나 보지도 못했다. 집이 복도 끝에 있으니 적어도 바로 옆에 사는 이웃에게 인사라도 해 뒀다면 좋았을 것을.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실천하지 못했던 인사가 아쉬울 따름이다.
몸에 묻은 거품을 따뜻한 물로 씻어 내고 밖으로 나오자 삭막한 거실이 B를 반겼다. 욕실 앞에서 깨끗이 머리를 말리고, 꼼꼼하게 빗질까지 마친 B는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커다란 검은 가죽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버릇처럼 늘 하던 대로 깨끗하게 씻긴 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을 해도 실마리조차 찾기 힘든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깨끗한 베이지색 벽지가 발려 있는 천장과 먼지 하나 없는 노란 전등을 보고 있자니 어제, 아니 2번째 3월 10일과 마찬가지로 옆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한 번 들렸다.
원래라면 이웃에게 크게 관심이 없을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게 벌써 3번째 반복되는 하루였으니까. 어떤 일이라도 신경이 곤두서고 절로 귀를 세우게 된다.
평소에는 얌전한 이웃인지라 단순하게 아침부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했지만, 그게 3번째 반복이 되니 슬슬 궁금해진 참이다.
대체 어떤 일로 이 시각에, 늘 조용하던 이웃이 왜 저런 소리를 내는 걸까. 본래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B의 방식이지만 처지가 처지다 보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다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이웃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 이사를 왔을 때도 인사는커녕 알은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호기심만으로 방문하기에는 B의 성격상 힘든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B는 마치 밤중의 도둑처럼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베란다로 향했다. 만나러 가는 게 어렵다면 살짝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옆집과 거리는 좀 있지만 베란다라도 살피면 뭔가 건질 게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반은 긴장으로, 반은 기대감으로 애용하는 슬리퍼를 신고 베란다에 나가자, 2번째 3월 10일에서는 몰랐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B의 눈에 가장 먼저 베란다 난간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호기심에 몸을 좀 더 내밀어서 고개를 앞으로 빼자 남자의 아래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는 가느다란 아이의 팔이 보였다.
아이의 주변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아이의 손등 위에도 빼곡하게 박혀 있는 그 조각의 아래로 선명한 색의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B는 헛숨을 삼키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기대고 있던 난간이 B에 의해 흔들리면서 거슬리는 쇳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아이의 위에 올라타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B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검은 모자 아래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 탓인지, 아니면 끔찍한 상황 탓인지 유난히 흑백이 또렷하게 나뉜 얼굴은 사람이 아닌 잔인한 악마 같았다. 그런 악마의 밑에 깔린 아이가 손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그 손짓은 마치 B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처럼 보였다.
B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물건을 집어서 그리로 던져 버렸다. 아이가 위험하다.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 네모난 물체가 날아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옆에 떨어졌다. 흙이 튀면서 초록색의 매끈한 이파리들이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바닥 위로 흩어졌다.
앞을 보는 순간, 그제야 B는 자신이 남자에게 던진 것이 줄곧 아끼던 화분임을 깨닫고 아차 하는 마음에 짧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사이 검은 옷의 남자는 B가 던진 화분에 바로 몸을 일으켜 옆집 안으로 도망쳤다.
B도 남자의 행동에 놀라서 베란다에서 뛰쳐나와 현관문 앞까지 뛰어갔다. 거기까지는 B도 머릿속이 아이의 손짓으로 가득 차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본능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 나간 B는 떨리는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고 현관에 나 있는 구멍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계속 살펴보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복도로 향한 창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옆집 대문은 남자가 도망친 탓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활짝 열려 있었다. 예민한 B였기에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방금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지금 나가면 쓰러져 있던 아이의 모습을 살필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순식간에 본능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무서운 남자가 자신에게 보복하러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B는 뒤늦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현관 앞에 황급히 주저앉았다.
빨리 나가서 아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과, 밖이 무섭고 그 남자가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B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이의 안전과 목숨이냐, 아니면 오늘을 또 반복하게 될 자신의 안위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B는 결국 뒤늦게 용기를 내서 경찰에 전화를 하고 이어서 경비실에도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두꺼운 외투 하나를 몸 위에 걸친 뒤 바로 옆집으로 뛰어갔다.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가 또 반복되어 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것이 용기가 되어 B의 등 뒤를 밀어 주었다.
황급히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옆집 안으로 들어가자 온통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거실과 깨진 벽걸이 TV, 그리고 베란다 바닥에 쓰러져서 울고 있는 조그마한 남자 아이가 보였다.
어지러운 거실의 모습에 살짝 현기증이 든 B는 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내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의 커다란 손에 목이 졸렸는지 아이의 목에는 짙은 붉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 작은 손에도 옆에 있던 유리 조각 때문에 적지 않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B는 황급히 아이의 얼굴로 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끊어질 듯 말 듯 내쉬는 위태로운 숨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이대로 뒀다가는 바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았기에, B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소리쳤다.
“괜찮니? 내 소리 들려? 응?”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옆집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던 B였지만, 이런 일이 터지니 자신의 무신경함에 절로 한탄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작은 아이를 품에 안은 B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서둘러 나간다면, 아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담고 돌린 고개를 따라서 파노라마처럼 눈앞의 풍경이 느리게 지나갔다.
그리고 낯익은 검은 모자 아래로 드러난 악마 같은 얼굴이 어느새 B의 눈앞에 가까이.
귓가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얌전히 있었으면 살았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B의 몸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지만, 이내 아래에서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고개를 숙이니 거기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칼이, 배를 뚫고 손잡이와 남자의 손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기괴한 광경. 그 상황을 인지한 순간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배를 찢고 밖으로 흘러내렸다.
번뜩이는 은색 식칼이 B의 몸을 가르고 살짝 빠져나갔다. 칼날을 적신 핏물이 아이의 배 위로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 핏방울 소리만큼은 너무도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운이 없다고 생각하라고.”
남자는 잔인하게 웃으며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뒤로 뽑아내었다. 칼로 막혀 있던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온몸을 덜덜 떨며 B가 쓰러졌다. 손에서 힘이 풀려 B가 안고 있던 아이도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자는 저항도 못 하고 누워 있는 아이의 배 위에도 피가 흥건한 식칼을 가져갔다.
B의 시선이 흐릿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힘없이 떨어지는 고개를 따라서 칼도 아래로 내려갔다. 차갑게 식은 얼굴을 적시는 아이의 따뜻한 핏물을 느끼며 B는 힘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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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세스한 날짜: 2018년 3월 10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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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전혀 없겠지만, 쓸 건 써야겠다. 정말로! 아, 어차피 또 없어지려나? 하루가 돌아가면 이 파일도 사라지는 건가? 하긴, 온라인 게임도 그렇던데 이 메모장이라고 별수가 있겠어?
하지만 쓸 건 써야겠다! 씨발!
(이하 몇 줄이 짜증과 욕으로 도배되어 있다.)
내가 말이지, 진짜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느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나만 3월 10일에 멈춰 서 있는지! 왜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알려 달라고요!
이상해, 진짜로 이상해요! 눈을 뜨고 게임을 켰는데 어제 먹었던 내 레어 아이템이 사라져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운영자한테 항의했는데 그런 적이 없다네? 나 참. 운영을 어떻게 하는 거야!
뭐 이 정도까지는 좋아요. 그 정도 레어템은 3일 밤낮 정도만 새우면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글쎄! 그 레어템이 또 나온 겁니다. 그것도 어제랑 비슷한 시간에! 아휴 좋아라! 얼른 창고에 넣어 놓고, 스샷도 왕창 찍었어요! 이것만 있으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증거로 보여 주면 운영자도 분명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또 다음 날이 되니까 스샷에 아이템도 없어지고 날짜는 왜 또 3월 10일이 되어 있는 겁니까! 네? 누가 좀 알려 줘! 이러다가 미치겠어!
난 그냥 방콕 하는 프로그래머일 뿐이야! 밖이 무섭고 싫어서 자주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
이제 싫어, 3월 10일! 씨팔!
(이하 또다시 심한 욕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간간이 의미 없는 글자도 보인다.)
* * *
격렬하게 타자를 치다가 멈춘 B는(B라는 명칭은 그가 정한 자신의 아이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손가락이 너무 아팠지만 머리가 마비되어서 뭐라도 두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영어와, 자음, 모음, 숫자, 기호, 도형 등등이 B를 울고 싶게 했다.
손가락 끝으로 부질없이 글자가 가득한 모니터를 쓸어내리던 B는 축 처진 몸으로 욕실로 걸어갔다. 어두운 방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B는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가 병적으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
B는 욕실로 걸어가면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모서리에 각이 지도록 깨끗이 접었다. 어차피 세탁기에 넣어야 할 옷이지만 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반복되는 하루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옷 바구니에 벗은 옷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B는 거울 앞에 섰다. 깔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B의 하얀 뺨에는 긴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상처와 주변이 붉은 걸 보면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보기보다는 얕은 상처라 3일이면 벌써 딱지가 앉고 부기가 가라앉았어야 했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B의 기준으로 분명 3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픈 상처가 3일 내내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게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신경질적으로 상처를 손으로 긁어내리던 B는 수도꼭지를 열어서 샤워기를 틀었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로 옅은 피의 흔적이 투명한 물을 타고 배수구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어떻게든 해야 돼. 어떻게든…….”
이 일을 누구에게 상담해 보는 게 좋을까?
가정을 세워 보자.
가족? B는 가족이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천애고아니까.
경찰? 미쳤다고 B에게 욕을 퍼부을 것이 뻔했다.
무당? 돈 받아서 굿이나 한판 하고 때려치우겠지.
친구? 인터넷 친구는 쌔고 쌨지. 오프라인은 하나도 없다는 게 아쉽지만.
직장 동료? B는 온라인으로 일하는 프리랜서다. 실질적으로 연이 닿는 동료는 없다.
마지막으로 생판 남인 이웃들? 글쎄. 아는 이웃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상담이라도 해 봤을 텐데 말이지.
B는 몸을 구석구석 씻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아파트에 이사를 온 뒤로 이웃과 인사하기는커녕 만나 보지도 못했다. 집이 복도 끝에 있으니 적어도 바로 옆에 사는 이웃에게 인사라도 해 뒀다면 좋았을 것을.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실천하지 못했던 인사가 아쉬울 따름이다.
몸에 묻은 거품을 따뜻한 물로 씻어 내고 밖으로 나오자 삭막한 거실이 B를 반겼다. 욕실 앞에서 깨끗이 머리를 말리고, 꼼꼼하게 빗질까지 마친 B는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커다란 검은 가죽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버릇처럼 늘 하던 대로 깨끗하게 씻긴 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을 해도 실마리조차 찾기 힘든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깨끗한 베이지색 벽지가 발려 있는 천장과 먼지 하나 없는 노란 전등을 보고 있자니 어제, 아니 2번째 3월 10일과 마찬가지로 옆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한 번 들렸다.
원래라면 이웃에게 크게 관심이 없을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게 벌써 3번째 반복되는 하루였으니까. 어떤 일이라도 신경이 곤두서고 절로 귀를 세우게 된다.
평소에는 얌전한 이웃인지라 단순하게 아침부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했지만, 그게 3번째 반복이 되니 슬슬 궁금해진 참이다.
대체 어떤 일로 이 시각에, 늘 조용하던 이웃이 왜 저런 소리를 내는 걸까. 본래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B의 방식이지만 처지가 처지다 보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다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이웃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 이사를 왔을 때도 인사는커녕 알은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호기심만으로 방문하기에는 B의 성격상 힘든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B는 마치 밤중의 도둑처럼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베란다로 향했다. 만나러 가는 게 어렵다면 살짝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옆집과 거리는 좀 있지만 베란다라도 살피면 뭔가 건질 게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반은 긴장으로, 반은 기대감으로 애용하는 슬리퍼를 신고 베란다에 나가자, 2번째 3월 10일에서는 몰랐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B의 눈에 가장 먼저 베란다 난간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호기심에 몸을 좀 더 내밀어서 고개를 앞으로 빼자 남자의 아래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는 가느다란 아이의 팔이 보였다.
아이의 주변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아이의 손등 위에도 빼곡하게 박혀 있는 그 조각의 아래로 선명한 색의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B는 헛숨을 삼키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기대고 있던 난간이 B에 의해 흔들리면서 거슬리는 쇳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아이의 위에 올라타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B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검은 모자 아래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 탓인지, 아니면 끔찍한 상황 탓인지 유난히 흑백이 또렷하게 나뉜 얼굴은 사람이 아닌 잔인한 악마 같았다. 그런 악마의 밑에 깔린 아이가 손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그 손짓은 마치 B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처럼 보였다.
B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물건을 집어서 그리로 던져 버렸다. 아이가 위험하다.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 네모난 물체가 날아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옆에 떨어졌다. 흙이 튀면서 초록색의 매끈한 이파리들이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바닥 위로 흩어졌다.
앞을 보는 순간, 그제야 B는 자신이 남자에게 던진 것이 줄곧 아끼던 화분임을 깨닫고 아차 하는 마음에 짧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사이 검은 옷의 남자는 B가 던진 화분에 바로 몸을 일으켜 옆집 안으로 도망쳤다.
B도 남자의 행동에 놀라서 베란다에서 뛰쳐나와 현관문 앞까지 뛰어갔다. 거기까지는 B도 머릿속이 아이의 손짓으로 가득 차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본능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 나간 B는 떨리는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고 현관에 나 있는 구멍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계속 살펴보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복도로 향한 창문을 살짝 열고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옆집 대문은 남자가 도망친 탓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활짝 열려 있었다. 예민한 B였기에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방금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지금 나가면 쓰러져 있던 아이의 모습을 살필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순식간에 본능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무서운 남자가 자신에게 보복하러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B는 뒤늦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현관 앞에 황급히 주저앉았다.
빨리 나가서 아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과, 밖이 무섭고 그 남자가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B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이의 안전과 목숨이냐, 아니면 오늘을 또 반복하게 될 자신의 안위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B는 결국 뒤늦게 용기를 내서 경찰에 전화를 하고 이어서 경비실에도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두꺼운 외투 하나를 몸 위에 걸친 뒤 바로 옆집으로 뛰어갔다.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가 또 반복되어 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것이 용기가 되어 B의 등 뒤를 밀어 주었다.
황급히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옆집 안으로 들어가자 온통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거실과 깨진 벽걸이 TV, 그리고 베란다 바닥에 쓰러져서 울고 있는 조그마한 남자 아이가 보였다.
어지러운 거실의 모습에 살짝 현기증이 든 B는 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내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의 커다란 손에 목이 졸렸는지 아이의 목에는 짙은 붉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 작은 손에도 옆에 있던 유리 조각 때문에 적지 않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B는 황급히 아이의 얼굴로 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끊어질 듯 말 듯 내쉬는 위태로운 숨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이대로 뒀다가는 바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았기에, B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소리쳤다.
“괜찮니? 내 소리 들려? 응?”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옆집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던 B였지만, 이런 일이 터지니 자신의 무신경함에 절로 한탄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작은 아이를 품에 안은 B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서둘러 나간다면, 아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담고 돌린 고개를 따라서 파노라마처럼 눈앞의 풍경이 느리게 지나갔다.
그리고 낯익은 검은 모자 아래로 드러난 악마 같은 얼굴이 어느새 B의 눈앞에 가까이.
귓가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얌전히 있었으면 살았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B의 몸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지만, 이내 아래에서 느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고개를 숙이니 거기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칼이, 배를 뚫고 손잡이와 남자의 손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기괴한 광경. 그 상황을 인지한 순간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배를 찢고 밖으로 흘러내렸다.
번뜩이는 은색 식칼이 B의 몸을 가르고 살짝 빠져나갔다. 칼날을 적신 핏물이 아이의 배 위로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 핏방울 소리만큼은 너무도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운이 없다고 생각하라고.”
남자는 잔인하게 웃으며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뒤로 뽑아내었다. 칼로 막혀 있던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온몸을 덜덜 떨며 B가 쓰러졌다. 손에서 힘이 풀려 B가 안고 있던 아이도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자는 저항도 못 하고 누워 있는 아이의 배 위에도 피가 흥건한 식칼을 가져갔다.
B의 시선이 흐릿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힘없이 떨어지는 고개를 따라서 칼도 아래로 내려갔다. 차갑게 식은 얼굴을 적시는 아이의 따뜻한 핏물을 느끼며 B는 힘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