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시선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다 보니 학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은근히 힘들었다.

도통 반응이 없는 B의 모습이 묘했는지 학생이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다 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죽다가 살아났으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네요. 나 같으면 깜짝 놀라서 울고 싶을 거 같은데.”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봐서, 그리고 어차피 또 살아날 테니까 그러려니 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 말을 했다간 분명히 미친놈 취급을 당할 테니까. B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두려움에 B가 대답도 없이 고개도 숙이고 서 있기만 하자 학생이 불만스러운지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별안간 깨끗한 검은 눈동자가 B를 마주하자 저절로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나 원 참. 왜 사람을 피해요? 기분 나쁘게시리……. 아, 엘리베이터 왔다.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저녁에 잠깐 들를 테니까 또 없는 척하지 말아요. 보충 끝내고 잠깐 시내 들렀다가 7시면 집에 올 거예요. 배고플 거 같으니까 저녁이나 한 끼 만들어 주세요. 은혜도 갚을 겸, 좋죠? 쪼잔하게 싫다고 하면 안 돼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황급히 올라타며 학생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기 할 말만 가득 내뱉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런 학생의 행동에 B는 휑하게 비어 버린 복도를 바라보며 얼빠진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이상한 학생이다.

처음 보는 이웃한테 자기 할 말만 실컷 하고, 심지어 멋대로 저녁밥을 차리라고 하지 않나.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오지랖이 넓은 건지 아니면 괴짜인 건지. B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뒤로 돌렸다. 옷이 더러워진 탓에 신경이 곤두서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단 그 검은 남자가 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다시 주변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엘리베이터 너머로 남자가 사라진 순간부터 시선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 앞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언제부터 나와서 봤는지 뒤에서 키가 큰 남자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깔끔하게 날이 서도록 다린, 주름 하나 없는 하얀 드레스 셔츠 위로는 매다가 만 와인색 넥타이가 목에 걸려 있었다.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은 말리다 말고 나왔는지 물기가 촉촉하다. 그리고 얼굴, B는 시선을 내리는 것도 잊은 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 잘생겼다.

아까 그 남학생을 잘생긴 일반인이라고 치면 이쪽은 평소에 가까이하기 힘든 톱 모델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에 가까웠다. 쌍꺼풀이 없고, 그 모양새가 날카로운 눈이 자신을 향하자 B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장 놀라서 얼굴 생김새만 유심히 봤는데, 이제 보니 이 사람은 저번에 반복되던 하루에서 만난 옆집의 아이 아빠 같다. 이 시간에 여기에 있고, 막 씻고 나온 상태를 보아하니 방금 소란에 옆집에서 나와 상황을 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쩌지.

그의 표정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입이 열리지 않는다. 이제는 눈도 마주치기 힘들다. 놀란 탓에 얼굴을 보고 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을 향하고, 입술이 떨리며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B가 긴장에 뻣뻣하게 얼은 채로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남자는 말리다 만 자신의 검은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B가 있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러자 B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발 보폭에 맞춰서 황급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러세요?”

“아침부터 시끄럽게 복도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아, 그건, 그건, 제가 죽을 뻔해서,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더는 안 돼.

더 말을 나눴다가는 분위기에 밀려서 꼴사납게 울다가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아까 남학생부터 시작해서 옆집 아이 아빠까지. 남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게 B에게는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고, 그 여파로 몸까지 피로했다. 게다가 생판 남인 저 남자에게 민폐까지 끼쳤다니, 이쯤 되면 어디 쥐구멍으로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한편 죽을 뻔했다는 B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 더 구겨졌다. 그 표정이 마치 미친놈을 마주한 사람의 얼굴과 흡사했다. 하긴 옆집에 누가 사는 줄도 몰랐을 텐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소란을 피우고 죽을 뻔했다는 말까지 하면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더는 버틸 수 없어서 B는 황급히 남자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서 사과를 하고 자신의 집 앞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오늘은 아이를 살리고 자시고 간에 얌전히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에 돌아올 6번째를 기약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B의 이 행동은 작은 인물의 행동으로 깨끗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앞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B가 입고 있던 검은 추리닝 바지의 끝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바지 아래쪽에서부터 뒤로 넘어가는 힘은 적었지만 정신이 없었던 B에게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붙잡힌 탓에 앞으로 쏠려서 아슬아슬했던 균형이 무너지면서 손을 앞으로 뻗은 자세로 화려하게 넘어진 B는 또다시 진득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덤으로 턱과 코, 가슴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멀쩡히 달리던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 그 시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소리가 사람 하나 넘어진 것치고는 꽤 커서 넘어진 B가 뒤에 서 있던 남자보다 더 놀란 기색이었다. B가 넘어지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에서 호통 소리가 떨어졌다.

“박다윤! 얌전히 밥 먹고 있으라고 했잖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 아저씨 넘어졌다!”

자기 아빠가 뭐라고 하건 말건, 아래에 있던 아이는 B가 넘어진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막 잠에서 일어났는지 4번째 3월 10일의 옷차림과는 다르게 깜찍한 구름이 그려져 있는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아래에는 작은 발에 크기가 맞지 않는 커다란 슬리퍼를 신은 채 바닥에 질질 끌면서, B의 앞에 선 아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또 밖으로 뛰어내릴까 봐 다윤이가 잡아 줬어요. 잘했죠?”

“……그래, 눈물 나게 고맙…… 아니, 내가 뛰어내리긴, 뭘 뛰어내려!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계수 형아가 안 잡아 줬으면 아저씨 죽었잖아요. 그쵸? 밖에 발소리가 나서 다윤이가 창문에서 보고 있었어요. 문 앞이었으면 다윤이가 도와줬을 텐데, 죄송해요.”

작은 아이의 얼굴이 살짝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름 사과한다고 하는 모습이긴 한데 어째 온몸이 아픈 탓에 밉게만 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도와주려고 했던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애써 참아 내며 B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섰다.

방금 그건 어디까지나 그 계수인지 뭔지 하는 학생의 실수였다. 물론 그거에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죽을 뻔한 B의 잘못도 반 정도는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자살이고 뭐고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다.

진짜 이번 하루는 가지가지 하는구나. 손가락으로 눈물이 고인 눈 밑을 문지르며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B는 몸속을 타고 오르는 고통에 등을 움찔거렸다.

방금 넘어진 여파 탓인지 온몸이 먼지 범벅이 되었고 팔에는 아릿한 고통까지 느껴졌다.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웃고 넘길 정도는 아니었다. 필시 이대로 두면 전신에 멍이 하나둘 생길지도 모른다.

B는 소매로 다시 눈물을 닦고 손으로 대충 먼지를 털어 냈다. 하지만 윗옷이 하얗다 보니 먼지는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결벽증 때문인지 그것만 봐도 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넘어져 아프고 창피한 것과 더불어 더러워진 모습에 신경질이 마구 솟아올랐다.

그렇게 B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자 남자가 미안함에 방금 전보다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다가와서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앞으로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 때문에…….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괜찮…… 윽.”

숨을 들이마시려고 하자 이번에는 갑자기 배 아래쪽이 아려 왔다. 다리나 팔뿐이 아닌, 창피함으로 마비됐던 나머지 아픔이 뒤늦게 밀려왔다.

고개를 숙여 몸을 이리저리 살피니 배가 눌려서 숨은 막히고, 손바닥은 까지고, 덤으로 무릎도 깨졌다.

다섯 살배기 애들도 이 정도로 화려하게 다치지는 않을 텐데.

B는 부끄러움에 수건을 받아 들고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약간 물기가 어려 있는 수건에서 부드러운 샴푸의 향이 느껴졌다. 아마도 눈앞의 남자가 머리를 말리던 수건인 모양이다.

B가 대충 얼굴을 닦고 찡그린 얼굴로 서 있자 아래에 있던 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빠를 보챘다.

“아빠, 아저씨 아픈가 봐. 아빠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 안 돼?”

병원에 갈 용기는 없다.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더는 여기에 서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기에 B는 아이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당장 자리를 비키려 했다.

“아니 병원까지야……. 그보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건은 얼른 빨아다가 말려서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윽!”

온몸이 더러워진 감각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픔 이전에 여기를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집으로 가려던 B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무릎의 상처가 심했다. 처음에는 창피함과 결벽증 탓에 몰랐는데, 이제 보니 꼭 단단한 바윗돌에 부딪쳐 깨진 것처럼 독하게 아렸다. 무릎 속에 바늘을 가득 집어넣고 쑤셔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팠다.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B가 괴로워하자, 남자와 아이가 황급히 옆에 다가와서 안색을 살폈다. 급하게 달리려던 도중이니 무릎을 세운 채 넘어지면서 아래로 강하게 찍혔을 가능성이 있다.

남자는 냉정한 표정으로 B의 모습을 살피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서 아이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러자 당연한 듯 아이가 왜 그러느냐고 질문했고, 남자는 조용히 B의 팔을 잡아 주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넘어진 것 때문에 아저씨가 다쳤는데, 아빠가 못 본 체하고 일하러 갈 수는 없지.”

“어? 아저씨 많이 다쳤어? 혹시 아까 다윤이가 붙잡아서? 정말?”

“착한 아이니까 아빠 부탁 들어줄 수 있지? 휴대폰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가져와 줘.”

“응. 가져올게!”

자기 때문에 다쳤다는 말에 놀란 아이가 후다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휴대폰을 가져오자 남자는 그것을 받아 들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그리고 너무나 우습게도 바로 눈앞에서 B가 바랐던 일이 일어났다.

“나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오후에 들어갈 테니 알아 둬. 무슨 일? ……아아, 급한 건 아냐. 오전 중에는 마무리가 될 것 같으니 급한 환자가 아니면 일단 돌려보내고, 예약 환자는 네가 대신 봐줘. 그래. 전에 했던 대로……. 알아서 잘한다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알려 준 대로 해. 알았으면 끊어.”

휴대폰 너머에 있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자는 무뚝뚝하게 할 말만 하고 통화를 일찍 끝냈다.

오후에 들어간다니.

그럼 오늘 오전에는 집에 있을 거라는 말일까.

B가 반쯤 정신을 놓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B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이렇게나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아까까지는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바지를 잡아 준 아이에게 진심으로 잘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무릎이 많이 아픕니까?”

“그, 네…… 조금.”

“당장 걸을 수 없을 정도라면 십자인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보아하니 파열은 아니고 인대 자체에 무리가 간 것 같은데, 일어설 수는 있겠습니까?”

남자가 B의 팔을 잡고 도와주려고 했으나 거의 185cm에 다다른 그의 키에 173cm의 키가 부축받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었다. 결국 팔에 그의 허리까지 간신히 잡고 일어난 B는 거의 끌려가는 모습으로 남자의 집 안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