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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5번째 2018년 3월 10일
4번째 3월 10일이 끝났다.
B는 또다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흔적은 없었다. 마치 강하게 발에 밟히는 빈 캔이 된 것처럼 몸에 느껴지던 압력은 이미 희미한 기억의 잔상만 남긴 채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하얀 두 손을 내려다보며 B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들렸던 아이의 고함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B가 아래로 떨어진 뒤 아이는 검은 남자에게 살해당했을 게 분명했다.
그때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어쩌면 자신도 아이도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분함과 자괴감, 몸을 휘감는 지독한 공포심에 B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어느새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 *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B는 눈물 범벅이 된 더러운 이불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아침 8시 15분.
겉보기에 B는 멀쩡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강제로 몸을 움직였다.
애써 늘 하던 대로 아침밥을 차리고, 뉴스를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이후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B는 언제나처럼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40분. 앞으로 그 남자가 오기까지 1시간 20분가량 남았다. B는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로 향했다. 그리고 새 텍스트 파일을 만들어 차근히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1. 그 남자는 무조건 3월 10일에 온다. 10시 무렵에는 옆집으로 들어가서 아이를 죽이는 듯.
2. 목격자도 함께 죽이는 것 같다. 따라서 돈을 노리고 집 안에 들어갔다가 아이를 죽이는 게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죽이는 게 목적인 듯.
3. 9시 30분이 넘는 시간에 옆집 아이 아빠는 일하러 간다. 그런데 회사는 보통 9시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4. 그 검은 놈은 아마도 아이 아빠를 만나는 일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뒤늦게 상황을 보고 온 게 아닐까.
5.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아이는 무조건 죽는다.
6. 그런데 내가 아이를 살려 봤자 의미가 있을까?
10포인트의 작은 글자들을 바라보며 B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를 반복했다. 확실히 이렇게 쭉 나열하고 보니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는 것보다는 한결 상황 정리가 편했다.
우선 놈의 목적은 아이의 목숨이다. 만약 평범한 도둑이거나 인신매매범이었다면 아이를 납치하든지, 혹은 집 안에 있는 돈만 가져가든지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검은 놈은 처음부터 아이를 죽일 생각으로 온 잔인한 살인자로 봐도 무방했다.
따로 원한이 있든지, 아니면 아이만 노리고 죽이는 사이코패스든지, 그도 아니면 B가 모르는 다른 목적이 있을 터다.
1번에서 5번까지 바라보던 B는 6번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백스페이스를 꾹꾹 눌러서 6번을 아예 목록에서 지워 버렸다. 그 대신 비워진 자리에 다시 타자를 쳐서 다음의 내용을 집어넣었다.
6. 일단 살리고 보자.
텍스트 파일을 닫고, 컴퓨터를 끈 B는 자기 집에서 마치 도둑놈이라도 된 양 현관 밖으로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발소리에 숨소리까지 줄이고 복도로 나오니 삭막할 정도로 조용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을 두 번 정도 돌아보던 B는 한숨을 쉬고 복도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13층이라 그런지 높이가 꽤나 아찔하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머리가 깨져서 한 방에 즉사했겠지. 그 생각을 떠올리니 순간 오한에 등 뒤가 오싹했다. 씁쓸함에 B는 얼른 벽에서 몸을 떼고 주머니를 뒤져서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은 8시 45분.
어차피 10시 전에는 오지도 않을 테니 지금은 약간 여유가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옆집 문을 강력 접착제나 테이프로 다 발라 버릴까? 둘 다 오늘 하루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아니면 아예 아이를 납치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라도 해 볼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안전할 수 있게.
“……그렇게 했다간 내가 경찰에 끌려가잖아.”
살인범 피하려다가 도리어 애먼 곳에서 돌 맞는 격이 되는 건 싫다. B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닫혀 있는 옆집 대문을 노려보았다. 또다시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걸 생각하니 속이 절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역시 사람과 인사하고,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일은 너무 힘들다. 인사하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작은 아이들은 그래도 다 큰 어른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긴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B는 용기를 내어 살금살금 옆집의 대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자,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살며시 문 근처에 귀를 가져갔지만 안에서는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이 아빠를 무슨 핑계로 불러낼까?
아니 그 전에 무슨 말로 그 아빠라는 남자를 집 안에 잡아 놓지?
B는 버릇처럼 엄지손톱을 이로 질근질근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차하면 정말 그 아이를 납치할 생각도 염두에 두었다. 범죄자로 잡힐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또 3월 10일로 돌아올 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B가 계획을 세우며 스스로 안도하던 그때, 갑자기 비상계단 건너편에 있는 집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B는 자신도 모르게 등에 무언가 닿을 때까지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 벽은 현재 B가 있는 복도와 13층에 달하는 높이의 바깥을 나눠 주는 경계선이었다.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가 벗겨지며 다리 스텝이 꼬이면서 미끄러지듯 점프를 하는 바람에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원래라면 적당히 높이가 있어서 아래로 떨어질 일이 없겠지만, 다리가 꼬인 데다가 놀란 탓에 펄쩍 뛰면서 순식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B의 등 뒤를 지나갔다. 기우뚱, 하면서 넘어가는 몸에 B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랐다거나 황당했다기보다는 정말로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고작 남의 집 문 좀 열렸다고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가, 저번의 3월 10일처럼 13층 아래로 떨어지게 생겼다니. 뭔가 지독한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다.
반복되는 하루가 아닌, 보통처럼 한 번 죽고 끝나는 하루였으면 정말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다.
아아, 이번에는 9시를 못 넘겼네.
그래도 4번째까지는 늘 10시는 넘겼었는데. 허탈함에 자조하며 B가 눈을 감았다. 거의 뒤로 반 이상 넘어간 B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잠깐!”
강한 손힘과 함께 귓전으로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거의 넘어간 B의 몸이 가까스로 급하게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B가 앞으로 강하게 쓰러졌다. B는 꾹 억눌러 왔던 비명을 지르며 손이 이끌리는 방향으로 넘어졌다.
퍽, 하고 부드러운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났다. 넘어진 탓에 바닥에 깔려 있던 얕은 미세 먼지가 일어나면서 B의 성격을 건드렸다.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B는 자신의 밑에 깔린 무언가를 누르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코로 먼지가 잔뜩 들어간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신경질적으로 주변의 먼지를 손으로 흩뜨리던 B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흔들리자, 그제야 아래를 신경 쓰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으. 진짜……. 좀 빨리 일어나요.”
B의 아래에 깔려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니, 교복만 아니었다면 고등학생보다는 이제 막 입학한 대학생으로 쳐주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였다.
방금 전 일로 살짝 흙먼지가 묻은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색 재킷, 그리고 회색 교복 바지를 입은 남자는 B보다 반 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 아래로 나름 잘생겼다 할 정도로 깔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찡그린 두 눈이 유난히 짙은 검은색이라 꼭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인물처럼 보였다. 얼른 남자의 몸 위에서 일어난 B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어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죄, 죄송…죄송합니다.”
“아니 저보다 그쪽은 괜찮아요? 왜 아침부터 뒤숭숭하게 자살을 해요, 자살을.”
“……자, 자살이 아니라 실수예요.”
머리에 묻어난 먼지를 손으로 털며 B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교복 어깨 너머로 열려 있는 대문을 보아하니 저기서 나온 사람인 것 같았다.
방금 문이 열린 소리는 이 남자가 낸 것이었나 보다.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누군데 도리어 큰소리를 치니 B는 굉장히 억울했다. 문을 좀 살살 열든가, 아니면 천천히 열든가 하지 왜 사람 놀라게 갑자기 열어서 자살이냐고 설교를 하는 건지.
사실 보통 때라면 조금 놀라고 끝날 일이지만,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괴이한 일을 겪고 있다 보니 이런 일에도 괜히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B의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학생은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뭐, 됐고. 안 죽었으니 됐네요. 그나저나 여기 층에 사는 사람 아니죠?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아뇨. 저기 끝에서 삽니다.”
“어? 거기 빈집 아니에요?”
4번째 반복되는 날 옆집 애 아빠도 그렇고 이 학생까지 빈집으로 알고 있다니. B는 난감함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일부러 조용히 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이 존재감이 없었던가 싶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 쓰레기를 버리고 하느라 짧게나마 나간 적이 꽤 됐었는데. 물론 대인 공포증 때문에 사람 안 보려고 새벽에 나갔다가 얼굴을 가린 채 바람같이 후딱 돌아오긴 했지만.
B의 부정에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학생은 뭐 됐나, 라고 짧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먼지가 묻어 있는 자신의 교복 바지를 대충 허공에 털어 냈다.
“그럼 사람 사는 티를 좀 내세요. 분명 여기 이사 와서 떡 돌릴 때 아무도 안 나와서 빈집인 줄 알았다고요.”
“아, 혹시 두 달 전에 이사…… 왔던?”
“뭐야. 알고 있었어요? 벨 눌러도 사람이 안 나와서 그냥 갔었는데.”
B는 그때 그 상황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개월 전에 이리저리 시끄러운 소리가 났던 복도와 창문 아래로 보이는 이삿짐과 커다란 트럭들. 그리고 그날 저녁 자신의 집 벨을 두어 차례 누르던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안에서 숨을 죽이고 없는 척했던 일도 떠올랐다.
굳이 벨을 눌렀을 때 나가야 할 이유는 없지만, 처음 이사 온 이웃이 호의로 인사를 하러 왔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은 일이다.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며 B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그날 좀 아파서, 몸살이 심해서 누가 와도 나갈 기운이 없었어요. 나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에이, 그걸 또 사과할 것까지야. 여하튼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음에 보면 인사라도 하고 살아요. 전 학교 갈 시간이라 이만 가 봐야겠네요. 허리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벌써 9시가 다 돼 가는데…… 그, 학교에?”
자신이 학교를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시간에 등교하는 학생에게 B가 조심스레 묻자 학생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물쭈물 뒤를 따라가자 B를 힐끔 쳐다본 학생이 손가락 끝으로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꾹 눌렀다.
“당연히 지각이죠. 아침에 늦잠 잤거든요. 근데 늦잠 자길 잘했네. 사람 하나 살렸잖아요. 안 그래요?”
살리기는 개뿔.
애초에 저 학생이 일찍 집에서 나갔으면 뒤로 넘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는 B는 마지못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 5번째 2018년 3월 10일
4번째 3월 10일이 끝났다.
B는 또다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흔적은 없었다. 마치 강하게 발에 밟히는 빈 캔이 된 것처럼 몸에 느껴지던 압력은 이미 희미한 기억의 잔상만 남긴 채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하얀 두 손을 내려다보며 B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들렸던 아이의 고함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B가 아래로 떨어진 뒤 아이는 검은 남자에게 살해당했을 게 분명했다.
그때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어쩌면 자신도 아이도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분함과 자괴감, 몸을 휘감는 지독한 공포심에 B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어느새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 *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B는 눈물 범벅이 된 더러운 이불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아침 8시 15분.
겉보기에 B는 멀쩡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강제로 몸을 움직였다.
애써 늘 하던 대로 아침밥을 차리고, 뉴스를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이후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B는 언제나처럼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40분. 앞으로 그 남자가 오기까지 1시간 20분가량 남았다. B는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로 향했다. 그리고 새 텍스트 파일을 만들어 차근히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1. 그 남자는 무조건 3월 10일에 온다. 10시 무렵에는 옆집으로 들어가서 아이를 죽이는 듯.
2. 목격자도 함께 죽이는 것 같다. 따라서 돈을 노리고 집 안에 들어갔다가 아이를 죽이는 게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죽이는 게 목적인 듯.
3. 9시 30분이 넘는 시간에 옆집 아이 아빠는 일하러 간다. 그런데 회사는 보통 9시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4. 그 검은 놈은 아마도 아이 아빠를 만나는 일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뒤늦게 상황을 보고 온 게 아닐까.
5.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아이는 무조건 죽는다.
6. 그런데 내가 아이를 살려 봤자 의미가 있을까?
10포인트의 작은 글자들을 바라보며 B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를 반복했다. 확실히 이렇게 쭉 나열하고 보니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는 것보다는 한결 상황 정리가 편했다.
우선 놈의 목적은 아이의 목숨이다. 만약 평범한 도둑이거나 인신매매범이었다면 아이를 납치하든지, 혹은 집 안에 있는 돈만 가져가든지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검은 놈은 처음부터 아이를 죽일 생각으로 온 잔인한 살인자로 봐도 무방했다.
따로 원한이 있든지, 아니면 아이만 노리고 죽이는 사이코패스든지, 그도 아니면 B가 모르는 다른 목적이 있을 터다.
1번에서 5번까지 바라보던 B는 6번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백스페이스를 꾹꾹 눌러서 6번을 아예 목록에서 지워 버렸다. 그 대신 비워진 자리에 다시 타자를 쳐서 다음의 내용을 집어넣었다.
6. 일단 살리고 보자.
텍스트 파일을 닫고, 컴퓨터를 끈 B는 자기 집에서 마치 도둑놈이라도 된 양 현관 밖으로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발소리에 숨소리까지 줄이고 복도로 나오니 삭막할 정도로 조용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을 두 번 정도 돌아보던 B는 한숨을 쉬고 복도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13층이라 그런지 높이가 꽤나 아찔하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머리가 깨져서 한 방에 즉사했겠지. 그 생각을 떠올리니 순간 오한에 등 뒤가 오싹했다. 씁쓸함에 B는 얼른 벽에서 몸을 떼고 주머니를 뒤져서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은 8시 45분.
어차피 10시 전에는 오지도 않을 테니 지금은 약간 여유가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옆집 문을 강력 접착제나 테이프로 다 발라 버릴까? 둘 다 오늘 하루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아니면 아예 아이를 납치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라도 해 볼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안전할 수 있게.
“……그렇게 했다간 내가 경찰에 끌려가잖아.”
살인범 피하려다가 도리어 애먼 곳에서 돌 맞는 격이 되는 건 싫다. B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닫혀 있는 옆집 대문을 노려보았다. 또다시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걸 생각하니 속이 절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역시 사람과 인사하고,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일은 너무 힘들다. 인사하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작은 아이들은 그래도 다 큰 어른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긴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B는 용기를 내어 살금살금 옆집의 대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자,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살며시 문 근처에 귀를 가져갔지만 안에서는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이 아빠를 무슨 핑계로 불러낼까?
아니 그 전에 무슨 말로 그 아빠라는 남자를 집 안에 잡아 놓지?
B는 버릇처럼 엄지손톱을 이로 질근질근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차하면 정말 그 아이를 납치할 생각도 염두에 두었다. 범죄자로 잡힐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또 3월 10일로 돌아올 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B가 계획을 세우며 스스로 안도하던 그때, 갑자기 비상계단 건너편에 있는 집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B는 자신도 모르게 등에 무언가 닿을 때까지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 벽은 현재 B가 있는 복도와 13층에 달하는 높이의 바깥을 나눠 주는 경계선이었다.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가 벗겨지며 다리 스텝이 꼬이면서 미끄러지듯 점프를 하는 바람에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원래라면 적당히 높이가 있어서 아래로 떨어질 일이 없겠지만, 다리가 꼬인 데다가 놀란 탓에 펄쩍 뛰면서 순식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B의 등 뒤를 지나갔다. 기우뚱, 하면서 넘어가는 몸에 B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랐다거나 황당했다기보다는 정말로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고작 남의 집 문 좀 열렸다고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가, 저번의 3월 10일처럼 13층 아래로 떨어지게 생겼다니. 뭔가 지독한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다.
반복되는 하루가 아닌, 보통처럼 한 번 죽고 끝나는 하루였으면 정말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다.
아아, 이번에는 9시를 못 넘겼네.
그래도 4번째까지는 늘 10시는 넘겼었는데. 허탈함에 자조하며 B가 눈을 감았다. 거의 뒤로 반 이상 넘어간 B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잠깐!”
강한 손힘과 함께 귓전으로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거의 넘어간 B의 몸이 가까스로 급하게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B가 앞으로 강하게 쓰러졌다. B는 꾹 억눌러 왔던 비명을 지르며 손이 이끌리는 방향으로 넘어졌다.
퍽, 하고 부드러운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났다. 넘어진 탓에 바닥에 깔려 있던 얕은 미세 먼지가 일어나면서 B의 성격을 건드렸다.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B는 자신의 밑에 깔린 무언가를 누르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코로 먼지가 잔뜩 들어간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신경질적으로 주변의 먼지를 손으로 흩뜨리던 B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흔들리자, 그제야 아래를 신경 쓰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으. 진짜……. 좀 빨리 일어나요.”
B의 아래에 깔려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니, 교복만 아니었다면 고등학생보다는 이제 막 입학한 대학생으로 쳐주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였다.
방금 전 일로 살짝 흙먼지가 묻은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색 재킷, 그리고 회색 교복 바지를 입은 남자는 B보다 반 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 아래로 나름 잘생겼다 할 정도로 깔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찡그린 두 눈이 유난히 짙은 검은색이라 꼭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인물처럼 보였다. 얼른 남자의 몸 위에서 일어난 B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어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죄, 죄송…죄송합니다.”
“아니 저보다 그쪽은 괜찮아요? 왜 아침부터 뒤숭숭하게 자살을 해요, 자살을.”
“……자, 자살이 아니라 실수예요.”
머리에 묻어난 먼지를 손으로 털며 B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교복 어깨 너머로 열려 있는 대문을 보아하니 저기서 나온 사람인 것 같았다.
방금 문이 열린 소리는 이 남자가 낸 것이었나 보다.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누군데 도리어 큰소리를 치니 B는 굉장히 억울했다. 문을 좀 살살 열든가, 아니면 천천히 열든가 하지 왜 사람 놀라게 갑자기 열어서 자살이냐고 설교를 하는 건지.
사실 보통 때라면 조금 놀라고 끝날 일이지만,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괴이한 일을 겪고 있다 보니 이런 일에도 괜히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B의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학생은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뭐, 됐고. 안 죽었으니 됐네요. 그나저나 여기 층에 사는 사람 아니죠?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아뇨. 저기 끝에서 삽니다.”
“어? 거기 빈집 아니에요?”
4번째 반복되는 날 옆집 애 아빠도 그렇고 이 학생까지 빈집으로 알고 있다니. B는 난감함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일부러 조용히 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이 존재감이 없었던가 싶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 쓰레기를 버리고 하느라 짧게나마 나간 적이 꽤 됐었는데. 물론 대인 공포증 때문에 사람 안 보려고 새벽에 나갔다가 얼굴을 가린 채 바람같이 후딱 돌아오긴 했지만.
B의 부정에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학생은 뭐 됐나, 라고 짧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먼지가 묻어 있는 자신의 교복 바지를 대충 허공에 털어 냈다.
“그럼 사람 사는 티를 좀 내세요. 분명 여기 이사 와서 떡 돌릴 때 아무도 안 나와서 빈집인 줄 알았다고요.”
“아, 혹시 두 달 전에 이사…… 왔던?”
“뭐야. 알고 있었어요? 벨 눌러도 사람이 안 나와서 그냥 갔었는데.”
B는 그때 그 상황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개월 전에 이리저리 시끄러운 소리가 났던 복도와 창문 아래로 보이는 이삿짐과 커다란 트럭들. 그리고 그날 저녁 자신의 집 벨을 두어 차례 누르던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안에서 숨을 죽이고 없는 척했던 일도 떠올랐다.
굳이 벨을 눌렀을 때 나가야 할 이유는 없지만, 처음 이사 온 이웃이 호의로 인사를 하러 왔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은 일이다.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며 B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그날 좀 아파서, 몸살이 심해서 누가 와도 나갈 기운이 없었어요. 나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에이, 그걸 또 사과할 것까지야. 여하튼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음에 보면 인사라도 하고 살아요. 전 학교 갈 시간이라 이만 가 봐야겠네요. 허리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벌써 9시가 다 돼 가는데…… 그, 학교에?”
자신이 학교를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시간에 등교하는 학생에게 B가 조심스레 묻자 학생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물쭈물 뒤를 따라가자 B를 힐끔 쳐다본 학생이 손가락 끝으로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꾹 눌렀다.
“당연히 지각이죠. 아침에 늦잠 잤거든요. 근데 늦잠 자길 잘했네. 사람 하나 살렸잖아요. 안 그래요?”
살리기는 개뿔.
애초에 저 학생이 일찍 집에서 나갔으면 뒤로 넘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는 B는 마지못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