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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어차피 창문으로 막혀 있으니 딱히 놀 만한 게 없을 텐데도 아이는 굉장히 기뻐하며 밑으로 훌쩍 내려갔다. 그리고 금세 손에 한 뭉치의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가득 들고 창문으로 돌아왔다.
무지개 색에, 파스텔 색, 원색 등등.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B로서는 꽤 오래간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밝은 색 색종이 한 장을 창문 밖의 B에게 건넨 아이는 자신도 노란색 한 장을 손에 쥐고 팔랑거렸다.
“자! 다윤이가 학 접는 거 가르쳐 줄게요.”
“그럴까?”
“응! 선생님이 다윤이가 제일 잘 접는다고 했어요. 봐요.”
좁은 창틀의 빈 공간에 색종이를 올려놓은 아이가 부스럭거리며 접기 시작하자 B는 얼떨결에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아이가 즐겁게 조잘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자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공포감이 조금씩,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머릿속도 한결 맑아진 것 같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종이 접는 데에 한참을 버벅거리던 B는 이상한 모양의 학을 완성했다. 형태는 그럭저럭 학처럼 보이긴 했지만 마무리가 허술하다. 자신보다 훨씬 못 접은 B의 종이학을 보며 아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에이! 아저씨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학이 안 예쁘잖아요.”
“……그…그러네. 학 접어 본 건 처음이라서.”
“진짜요? 그럼 동서남북이나 배도 안 접어 봤어요?”
“배는 뭔지 알겠는데, 동서남북은 뭐야?”
“보여 줄까요? 어제 다윤이가 유치원에서 접었는데.”
B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가 거실로 뛰어갔다. 자신이 접은 비뚤비뚤한 학을 내려다보며 B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성격상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다윤이처럼 귀여운 아이라면 키울 맛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자 거실에서 아이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콩콩 뛰는 소리가 상당히 경쾌했다. 아이의 소리에 B는 벽에 기대서서 웃으며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지나서, 오늘은 그 살인범이 오지 않았으면.
오늘이 또 반복되어도 좋으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일 없이 아이랑 놀다가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내일 아닌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부질없는 희망을 떠올리며 B가 웃는 얼굴로 창문 옆에 있는 벽에 서 있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그때였다.
“…….”
검은 모자에 검은 옷.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살기를 담은 희미한 시선.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없었던, 비상계단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검은 악마 같은 남자와 B의 시선이 마주쳤다. 비상계단 입구에 선 남자가 그늘 속에서 B를 섬뜩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순간, B는 저도 모르게 뱃속을 타고 올라오는 끔찍한 비명을 집어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이거예요, 동서남북! ……응? 아저씨? 왜 그러세요. 거기에 누구 있어요?”
집 안이라 방범창에 막혀 밖이 잘 보이지 않는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리에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버린 B는 가져왔던 도마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남자의 시선에 사로잡혀서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시커먼 구덩이 같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겁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날카로운 고통이 다시금 배 속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마치 그 고통을 기억한다면 당장 거기서 물러나라고 경고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도망칠까?
아니면 알량하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정의감으로 이 자리를 지킬까?
아까와는 달리 인상이 딱딱하게 굳은 B가 걱정됐는지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손이 뺨을 건드리자 B는 화들짝 놀라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이를 돌아보았다. 따뜻한 작은 손이 식은땀이 흐르는 자신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아, 아니…… 저기 그보다 다윤아. 아빠 방금 나가셨지? 다윤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다시 오실까?”
도박이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운명에 자신과 아이의 운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B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검은 모자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렸다.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바로 달려와서 배를 찌르고 아이를 죽이러 올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런 B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질문에 음, 하고 고민하던 아이는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웃었다.
“응! 아빠는 다윤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와요. 전에 감기 걸렸을 때도 회사에서 일 안하고 바로 달려왔는걸!”
“역시 그렇지? 그럼 다윤아. 아저씨가 동서남북 가지고 놀 동안 아빠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해. 이상한 사람이 집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응? 왜 그렇게 해야 돼요?”
“실은 다윤이네 아빠는…….”
이름도 모르는 오늘 처음 만난 옆집 아버님, 죄송합니다. 댁 아드님에게 처음으로 거짓말 좀 하겠습니다.
B는 그렇게 속으로 그 남자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하고 억지로 웃으며 거짓말을 이어 갔다.
“엄청난 종이접기 달인이야.”
죄송합니다. 나중에 꼭 고개 숙여 사과드릴게요.
“……아빠가요?”
“응. TV에도 나왔는데 몰랐어?”
“정말요?”
“엄청, 엄청 유명해. 어제도 나와서 아저씨는 비디오로 녹화도 해 놨는걸. 실은 아저씨가 종이접기를 너무 못해서 다윤이네 아빠를 존경하고 있었거든.”
B의 거짓말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면서 철창에 매달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모습에 B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일부러 약간의 뜸을 들였다. 그러자 대답을 기다리기 힘든지 아이가 발을 구르며 B를 보챘다.
“그래서요? 네? 이상한 아저씨랑 우리 아빠가 종이접기 달인이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다윤이가 아빠한테 전화하면 마저 알려 줄게.”
“……진짜요?”
“응. 아저씨랑 손가락이라도 걸까?”
B가 아이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손이 창문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며 거짓말하면 아빠한테 이를 거라는 깜찍한 소리까지 했다. 어지간히 자신의 아빠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다.
물론, B는 양심에 찔려서 속으로 연신 이 자리에 없는 아이 아빠에게 사과의 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럼 아빠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다윤이 오기 전까지 어디로 가면 안 돼요!”
또 한 번 침대 밑으로 쪼르르 뛰어 내려가서 빠르게 거실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B는 곁눈질로 비상계단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남자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도마로 가슴을 막고 용기를 내서 남자가 있던 곳까지 가 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거짓말로 남자를 물러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저 남자는 아무래도 ‘이웃인 B’의 개입보다는 아이의 아버지가 개입하는 걸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으슬으슬 떨리는 다리를 재촉해 다시 옆집 창문 앞으로 돌아온 B는 무선 전화기를 귀에 대고 침대로 뛰어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이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조짐이 좋다.
“아냐 아빠.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이상한 아저씨가 문 앞에 있어서 그래. 어? 지금 온다구? 아빠 회사는? ……응. 응. 다윤이도 아빠 사랑해. 그럼 조금 있다가 봐, 아빠.”
아이가 통화를 끝내자 B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고 속으로 기뻐했다. 이제 이대로만 간다면 오늘 하루 이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여기까지 했으니 자신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안전하게 몸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B의 하루는 또 돌아갈 터였다. 돌아갈지 안 돌아갈지 확실히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어제와 같은 연장선이라면 확률은 한없이 100%에 가까웠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아이는 내일 또 살해당할 텐데 뭐 하러 이렇게까지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전화했으니까 말해 주세요. 우리 아빠가 진짜 종이접기 달인이에요?”
“응. 나중에 내가 녹화해 놓은 비디오 보여 줄게. 오늘은 다윤이가 집에서 나오면 안 되니까, 음…… 내일 놀러 올래?”
“정말요? 내일 가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과연 B에게 3월 11일이라는 내일이 오기는 할는지.
씁쓸한 얼굴로 B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재차 아까처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아 냈다. 물론 오늘 일을 비밀로 부친다는 조건하에서.
“자자. 약속했으니까 꼭 지킬게. 곧 아빠 오시지? 아저씨는 이만 가 볼게.”
“응! 내일 봐요 아저씨!”
창문 너머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자 B는 천천히 자신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드르륵하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이한테 거짓말도 몇 개나 했고, 범인도 만났지만 돌려보내기까지. 오른손에는 도마를, 왼손에는 휴대폰을 쥔 B는 굳게 닫힌 자신의 현관 앞에 서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고요가 어쩐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B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느낌이 없이 누군가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그대로 2분가량 더 복도에 서 있었으나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20분 같은 2분을 보낸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 탓인가……. 일단 몸 사리고 있어야지.”
하루가 돌아가더라도 일단 칼에 찔려 죽는 건 질색이니까.
B는 차가운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돌렸다. 그러자 가벼운 쇳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긴장이 풀린 손으로 도마를 옆에 있는 신발장에 올려놓고, B는 문을 닫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서 뒤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B는 뒤를 볼 수 없었다.
돌기도 전에, 계속 피하려 했던 살기 어린 살인마의 시선이 목을 타고 B를 덮쳤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진한 검은 잔상이 보였다. 팔과 목을 강하게 붙잡혀 B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차가운 벽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벽에 얼굴이 갈려 고통이 느껴질 만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서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어 갔다.
그렇게 긴장으로 예민해진 B의 귓가에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질 뻔했잖아.”
배를 가르는 고통과 함께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남자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B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몸을 흔들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내일이 되면 살아난다지만 그 고통은 이제 정말―
“싫어!”
생각보다 B가 격렬하게 반항하자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복도로 향했다.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B의 저항은 아주 쉽게 눌려서 그대로 사라졌다.
복도에 서자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느끼는 순간 B는 불현듯 자신이 어떻게 될지 깨닫고 더 반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B를 들어 올려 13층 아래로 집어 던져 버렸다.
눈동자 너머로 순식간에 흘러가는 풍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멀어지는 소리 사이로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 B는 흐릿하게 아이의 고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차피 창문으로 막혀 있으니 딱히 놀 만한 게 없을 텐데도 아이는 굉장히 기뻐하며 밑으로 훌쩍 내려갔다. 그리고 금세 손에 한 뭉치의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가득 들고 창문으로 돌아왔다.
무지개 색에, 파스텔 색, 원색 등등.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B로서는 꽤 오래간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밝은 색 색종이 한 장을 창문 밖의 B에게 건넨 아이는 자신도 노란색 한 장을 손에 쥐고 팔랑거렸다.
“자! 다윤이가 학 접는 거 가르쳐 줄게요.”
“그럴까?”
“응! 선생님이 다윤이가 제일 잘 접는다고 했어요. 봐요.”
좁은 창틀의 빈 공간에 색종이를 올려놓은 아이가 부스럭거리며 접기 시작하자 B는 얼떨결에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아이가 즐겁게 조잘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자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공포감이 조금씩,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머릿속도 한결 맑아진 것 같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종이 접는 데에 한참을 버벅거리던 B는 이상한 모양의 학을 완성했다. 형태는 그럭저럭 학처럼 보이긴 했지만 마무리가 허술하다. 자신보다 훨씬 못 접은 B의 종이학을 보며 아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에이! 아저씨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학이 안 예쁘잖아요.”
“……그…그러네. 학 접어 본 건 처음이라서.”
“진짜요? 그럼 동서남북이나 배도 안 접어 봤어요?”
“배는 뭔지 알겠는데, 동서남북은 뭐야?”
“보여 줄까요? 어제 다윤이가 유치원에서 접었는데.”
B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가 거실로 뛰어갔다. 자신이 접은 비뚤비뚤한 학을 내려다보며 B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성격상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다윤이처럼 귀여운 아이라면 키울 맛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자 거실에서 아이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콩콩 뛰는 소리가 상당히 경쾌했다. 아이의 소리에 B는 벽에 기대서서 웃으며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지나서, 오늘은 그 살인범이 오지 않았으면.
오늘이 또 반복되어도 좋으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일 없이 아이랑 놀다가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내일 아닌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부질없는 희망을 떠올리며 B가 웃는 얼굴로 창문 옆에 있는 벽에 서 있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그때였다.
“…….”
검은 모자에 검은 옷.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살기를 담은 희미한 시선.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없었던, 비상계단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검은 악마 같은 남자와 B의 시선이 마주쳤다. 비상계단 입구에 선 남자가 그늘 속에서 B를 섬뜩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순간, B는 저도 모르게 뱃속을 타고 올라오는 끔찍한 비명을 집어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이거예요, 동서남북! ……응? 아저씨? 왜 그러세요. 거기에 누구 있어요?”
집 안이라 방범창에 막혀 밖이 잘 보이지 않는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리에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버린 B는 가져왔던 도마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남자의 시선에 사로잡혀서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시커먼 구덩이 같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겁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날카로운 고통이 다시금 배 속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마치 그 고통을 기억한다면 당장 거기서 물러나라고 경고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도망칠까?
아니면 알량하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정의감으로 이 자리를 지킬까?
아까와는 달리 인상이 딱딱하게 굳은 B가 걱정됐는지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손이 뺨을 건드리자 B는 화들짝 놀라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이를 돌아보았다. 따뜻한 작은 손이 식은땀이 흐르는 자신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아, 아니…… 저기 그보다 다윤아. 아빠 방금 나가셨지? 다윤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다시 오실까?”
도박이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운명에 자신과 아이의 운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B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검은 모자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렸다.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바로 달려와서 배를 찌르고 아이를 죽이러 올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런 B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질문에 음, 하고 고민하던 아이는 이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웃었다.
“응! 아빠는 다윤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와요. 전에 감기 걸렸을 때도 회사에서 일 안하고 바로 달려왔는걸!”
“역시 그렇지? 그럼 다윤아. 아저씨가 동서남북 가지고 놀 동안 아빠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해. 이상한 사람이 집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응? 왜 그렇게 해야 돼요?”
“실은 다윤이네 아빠는…….”
이름도 모르는 오늘 처음 만난 옆집 아버님, 죄송합니다. 댁 아드님에게 처음으로 거짓말 좀 하겠습니다.
B는 그렇게 속으로 그 남자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하고 억지로 웃으며 거짓말을 이어 갔다.
“엄청난 종이접기 달인이야.”
죄송합니다. 나중에 꼭 고개 숙여 사과드릴게요.
“……아빠가요?”
“응. TV에도 나왔는데 몰랐어?”
“정말요?”
“엄청, 엄청 유명해. 어제도 나와서 아저씨는 비디오로 녹화도 해 놨는걸. 실은 아저씨가 종이접기를 너무 못해서 다윤이네 아빠를 존경하고 있었거든.”
B의 거짓말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면서 철창에 매달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모습에 B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일부러 약간의 뜸을 들였다. 그러자 대답을 기다리기 힘든지 아이가 발을 구르며 B를 보챘다.
“그래서요? 네? 이상한 아저씨랑 우리 아빠가 종이접기 달인이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다윤이가 아빠한테 전화하면 마저 알려 줄게.”
“……진짜요?”
“응. 아저씨랑 손가락이라도 걸까?”
B가 아이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손이 창문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며 거짓말하면 아빠한테 이를 거라는 깜찍한 소리까지 했다. 어지간히 자신의 아빠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다.
물론, B는 양심에 찔려서 속으로 연신 이 자리에 없는 아이 아빠에게 사과의 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럼 아빠한테 전화하고 올게요! 다윤이 오기 전까지 어디로 가면 안 돼요!”
또 한 번 침대 밑으로 쪼르르 뛰어 내려가서 빠르게 거실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B는 곁눈질로 비상계단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남자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도마로 가슴을 막고 용기를 내서 남자가 있던 곳까지 가 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거짓말로 남자를 물러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저 남자는 아무래도 ‘이웃인 B’의 개입보다는 아이의 아버지가 개입하는 걸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으슬으슬 떨리는 다리를 재촉해 다시 옆집 창문 앞으로 돌아온 B는 무선 전화기를 귀에 대고 침대로 뛰어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이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조짐이 좋다.
“아냐 아빠.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이상한 아저씨가 문 앞에 있어서 그래. 어? 지금 온다구? 아빠 회사는? ……응. 응. 다윤이도 아빠 사랑해. 그럼 조금 있다가 봐, 아빠.”
아이가 통화를 끝내자 B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고 속으로 기뻐했다. 이제 이대로만 간다면 오늘 하루 이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여기까지 했으니 자신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안전하게 몸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B의 하루는 또 돌아갈 터였다. 돌아갈지 안 돌아갈지 확실히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어제와 같은 연장선이라면 확률은 한없이 100%에 가까웠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아이는 내일 또 살해당할 텐데 뭐 하러 이렇게까지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전화했으니까 말해 주세요. 우리 아빠가 진짜 종이접기 달인이에요?”
“응. 나중에 내가 녹화해 놓은 비디오 보여 줄게. 오늘은 다윤이가 집에서 나오면 안 되니까, 음…… 내일 놀러 올래?”
“정말요? 내일 가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과연 B에게 3월 11일이라는 내일이 오기는 할는지.
씁쓸한 얼굴로 B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재차 아까처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아 냈다. 물론 오늘 일을 비밀로 부친다는 조건하에서.
“자자. 약속했으니까 꼭 지킬게. 곧 아빠 오시지? 아저씨는 이만 가 볼게.”
“응! 내일 봐요 아저씨!”
창문 너머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자 B는 천천히 자신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드르륵하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이한테 거짓말도 몇 개나 했고, 범인도 만났지만 돌려보내기까지. 오른손에는 도마를, 왼손에는 휴대폰을 쥔 B는 굳게 닫힌 자신의 현관 앞에 서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고요가 어쩐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B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느낌이 없이 누군가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그대로 2분가량 더 복도에 서 있었으나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20분 같은 2분을 보낸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 탓인가……. 일단 몸 사리고 있어야지.”
하루가 돌아가더라도 일단 칼에 찔려 죽는 건 질색이니까.
B는 차가운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돌렸다. 그러자 가벼운 쇳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긴장이 풀린 손으로 도마를 옆에 있는 신발장에 올려놓고, B는 문을 닫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서 뒤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B는 뒤를 볼 수 없었다.
돌기도 전에, 계속 피하려 했던 살기 어린 살인마의 시선이 목을 타고 B를 덮쳤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진한 검은 잔상이 보였다. 팔과 목을 강하게 붙잡혀 B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차가운 벽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벽에 얼굴이 갈려 고통이 느껴질 만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서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어 갔다.
그렇게 긴장으로 예민해진 B의 귓가에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질 뻔했잖아.”
배를 가르는 고통과 함께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남자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B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몸을 흔들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내일이 되면 살아난다지만 그 고통은 이제 정말―
“싫어!”
생각보다 B가 격렬하게 반항하자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복도로 향했다.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B의 저항은 아주 쉽게 눌려서 그대로 사라졌다.
복도에 서자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느끼는 순간 B는 불현듯 자신이 어떻게 될지 깨닫고 더 반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B를 들어 올려 13층 아래로 집어 던져 버렸다.
눈동자 너머로 순식간에 흘러가는 풍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멀어지는 소리 사이로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 B는 흐릿하게 아이의 고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