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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B가 도통 얼굴을 보일 생각을 하지 않자 또 한 번 아이의 손 그림자가 머리 위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바닥을 차고 폴짝폴짝 뛰는 소리도 들렸다. 이렇게까지 상대를 안 해 주면 솔직히 지칠 만도 한데 아이는 B의 생각보다 끈질겼다.

“아빠! 다윤이 좀 들어 줘. 아저씨가 안 보여!”

“후우.”

결국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는지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점점 창문 너머로 가까이 다가왔다. 투박한 발소리가 멈추고 긴 검은 그림자가 자신의 머리 위를 덮쳐 오자 B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부들부들 떨었다.

“안에 보여?”

“보이기는 한다만 인사를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안의 아저씨가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왜 아저씨가 무서워하는데?”

아이들은 저맘때면 무조건 부모나 남에게 묻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저 아이도 다를 게 없었는데 끊임없이 쏟아지는 ‘왜’ 세례에 무뚝뚝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가라앉았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왜 사정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왜 아빠는 모르는데?”

둘의 대화를 듣던 B는 왠지 자신이 일어서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겨우 눈만 내밀고 밖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이 아빠에게 짜증을 주기 싫었고, 무엇보다 이 상황 자체가 B에게는 곤혹스러웠다.

달랑 3cm만 열려 있는 문 사이로 회색의 천과 와인색을 띠고 있는 남자의 넥타이가 보였다. 키가 큰 모양인지 다소 높은 창문 틀 너머로 남자의 가슴팍이나 턱 끝이 B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그 악마 같던 남자와 같은 옷차림도 아닌 데다가, 결정적으로 검은색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기를 얻은 B는 떨리는 다리로 서서 창문에 있는 철창을 손으로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그 소리에 창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서 안에 있는 B를 바라보았다.

“…….”

남자와 B의 사이에서 싸한 침묵이 흘렀다. B는 차마 남자를 볼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의 일로 대인 기피증이 있는 B에게 남과 눈을 마주 보고 말하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대신 B는 시선을 내려 남자의 아래에 있는 다윤이라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제의 그 가여운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굉장히 건강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절로 입에서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옆집 아저씨 안녕하세요!”

“으…응. 안녕.”

“이 집에서 사십니까?”

형식상 인사한다는 듯 무미건조한 남자의 목소리에 B는 시선은 아래에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맞아요.”

“한 번도 보이질 않으셔서 사람이 없는 빈집인 줄 알았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이때까지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까보다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B는 남자에게 사과했다. 사실 인사를 하지 않은 것 정도로 이렇게까지 사과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B는 어쩐지 이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아마 은연중에 3번째 3월 10일에 아이를 구해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떠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B의 정중한 사과에 남자는 창문 너머에서 고개를 좌우로 살짝 저었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모범적인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밋밋한 대화들이 작게 열려 있는 창문 사이를 오고 갔다. B는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으로 조금만 열려 있던 창문의 폭을 넓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윤이가 손을 들며 통통 튀어 올랐다. 눈앞에 작은 아이의 손가락 끝이 간신히 올라왔다가 내려가자 B가 깜짝 놀라 어깨를 굳히며 움찔거렸다.

“아저씨, 아저씨. 다윤이도 잘 부탁해요!”

“응? 아, 그, 그래.”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남자는 다윤이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그의 태도에서 어딘지 모르게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출근 전이라 저런 행동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행동에 B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9시 45분.

이대로 저 아빠라는 남자가 자리를 비우면 아이가 위험하다. 반복되는 하루가 저번과 같다면, 분명 그 검은 남자가 나타나서 3번째의 날처럼 아이를 죽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순식간에 안색을 굳힌 B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에서 몸을 떼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적어도 아빠라는 인물이 집에 있게 만든다면, 3월 10일에 살해당하는 아이는 무사할지도 몰랐다.

자신 같은 겁쟁이가 그 악마 같은 미친놈을 때려잡을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하도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고 살 것 같았다.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아이를 돕고 싶고, 양심의 가책을 덜고 싶었다.

그렇기에 B는 용기를 내서 현관문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오, 오늘! 어디 나가시나 봐요?”

이 와중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남자와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남자가 B의 말에 기막혀했다는 사실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B의 귀로 낮게 혀를 차는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걸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 그냥……요. 아…아하하.”

“우리 아빠 지금 회사 가요! 다윤이가 마중 나가려고요.”

어디로 보나 수상쩍은 B의 행동에 남자는 경계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집 밖으로 나온 B를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런 아이의 반응에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아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들어가는 기색을 보니 아마 B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는 모양이다.

어디로 보나 집에서 죽은 듯이 살고 있고, 표정도 어둡고, 말도 더듬는 B는 수상쩍고 괴팍해 보였으니까. 보통이라면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B는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또다시 복도로 난 창문에 바짝 붙어 밖의 동태를 살폈다. 이상한 사람이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아이 아빠가 아이의 곁에 있거나 낯선 사람을 경계하면 안전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B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사태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9시 50분이 되자 옆집의 현관문이 열리면서 남자의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 소리에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다시 문이 닫히고, 남자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가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망했다.

아무래도 아이 아빠는 아이를 집에 두면 안전하다 판단하고 급하게 출근을 강행하려는 모양이었다. 필시 아이에게는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 주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만 해 놓은 상태일 터.

저릿저릿해져 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B는 인상을 찌푸렸다. 딱 10분만 더 저 남자가 집 안에 있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 살인범이 아이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수 없이 B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복도는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도리어 소름이 쫙 돋을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오지 마라. 오지 마.

손에 들고 있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점점 다가오는 시간을 확인하며 B는 초조함에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9시 59분.

이제 조금 더 있으면 그 남자가 옆집으로 들어와서 큰 소리를 낼 시간이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안 그래도 불안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숨이 가빠졌다. 어느새 손발이 B의 통제를 벗어나서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길게 자라난 앞머리가 눈을 쑤시자 B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위로 쓸어 올렸다.

초조하게 시간을 보며 B가 떨고 있을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끼익, 하는 음침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헛숨을 잔뜩 들이마신 B는 눈을 깜박이며 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그것이 B를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

창문에서 몇 발자국 뒷걸음질한 B는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가서 나무로 된 단단한 도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왜 하필이면 공격에 쓸 식칼보다 방어에 유리한 도마였는지, 그것은 B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방어 성향이 강한 B의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세 개의 선명한 검은 줄이 있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단단한 나무 도마를 가슴 위까지 올린 B가 재빨리 스산한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몸을 낮추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있는 중앙으로 기어가다시피 하며 걸어갔다.

그리고 막 다윤이가 있는 이웃집을 지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그 소름 끼치는 끼익 소리가 또다시 나기 시작했다. 철과 철이 마주치며 내는 그 소리는 듣기만 해도 긴장하고 있던 B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B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자, 머리 위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생각과는 다른 목소리에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 옆집 아이가 창틀 앞에 찰싹 붙어 있었다.

“푸하하! 아저씨, 여기요, 여기!”

“……어?”

창문 밑에 바로 침대나 의자가 있는지 아이가 창틀을 붙잡고 서서 웃는 얼굴로 B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삐걱거리는 소리는 창살 소리였나 보다.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 B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찔끔 나온 눈물을 손으로 얼른 닦았다. 정말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 B의 모습을 동그란 검은 눈으로 살펴보던 아이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일 안 가요? 아빠는 만날 회사에 가던데.”

“그게, 나는 집…집에서 일하니까 회사에 안 가는 거야.”

“그래요? 좋겠다. 다윤이 아빠도 집에서 일하면 좋을 텐데. 아저씨, 우리 아빠도 집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니.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으니 분명 대기업에 다니는 돈 잘 버는 아빠겠지. 그에 비하면 B는 가끔 큰 건을 맡긴 하지만 여러모로 만만한 프리랜서일 뿐이다. 살짝 부러움을 느끼며 B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반쯤 기다시피 해서 바닥에 닿아 있던 무릎에 먼지가 잔뜩 묻은지라 기분이 나빴다. 손으로 그것을 소리 나게 털어 내며 B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조용한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는 걸 깨달은 B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아이가 다시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까 뭐 했어요? 악어놀이? 뱀놀이? 그럼 다윤이는 사냥꾼 할래요.”

“그, 그보다 다윤아. 집에 혼자니?”

“응. 그래서 아빠가 절대로 문 열어 주지 말고 혼자 집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요.”

“아빠는 언제 오시는데?”

“몰라요.”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B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차가운 손으로 간신히 식혔다. 이러니까 도둑이나 미친놈이 표적으로 삼고 들어오는 게 아닐까. 원래라면 이 또한 남의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반복되는 하루 덕에 아이 아빠라는 남자가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어쩌면, 조금만 주의를 했으면 그런 살인범이 이렇게 쉽게 들어올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어린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간다는 게 살짝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없어? 일 나가셨나 보네.”

“……없어요. 엄마는 다윤이가 세 살 때 죽었대요.”

“어…… 음, 미, 미안.”

아, 이런.

무심결에 물었던 말이 상처가 될까 봐 B가 노심초사했지만 아이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그래도.”

“그보다 아저씨, 다윤이랑 놀아 주세요! 아, 안으로는 들어오면 안돼요. 아빠한테 다윤이랑 아저씨가 혼날 거예요.”

“아……. 나는 좀 바쁘…… 아, 아냐. 아저씨 안 바빠. 같이 놀자.”

남자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애절한 눈빛에 B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엄마도 없다는 말까지 들은 데다가 살인범을 생각하니 그냥 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