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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1화
1. 프롤로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날 좋고 바람 좋은 5월에 발생한 교통사고 때문이었고, 서윤 또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사고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사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서윤은 사고에 대해 가장 알지 못했다. 그날, 그 사고와 관련해 그가 기억하는 건 부모님을 따라 자동차에 올라타던 때의 풍경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다였다.
유독 날씨가 좋던 그날은 느닷없는 외출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도시락도 없이 조수석에 올라탄 어머니와 운전석에 탄 아버지를 따라 자신 역시 뒷좌석에 올랐다.
아빠! 출발!
서윤이 신이 나 외쳤다. 뒤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의사는 그것을 기억 상실증이라고 불렀다. 흔히 교통사고 환자들이 겪는 후유증으로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열아홉이 된 지금도 여전했다.
몇 번의 검사와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에 불쑥 떠오른 기억은 무척이나 단편적이었다. 뚜렷하게 상황 전체가 기억나지도 않았고, 오직 손끝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것이 어머니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가락 마디의 주름과 손가락을 덮는 짧은 손톱은 분명 어머니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을 부르듯 하염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나, 기억하는 마지막까지 손가락이 자신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조차도 스포트라이트는 손끝에 맞춰 있었고, 보이는 건 어머니의 손끝과 진자 운동을 하는 듯한 손가락의 움직임뿐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꿈에서 어머니의 손은 조금 무섭다는 것이었다.
서윤은 그 감정이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의 마지막을 함께했으면서도 정작 기억하는 건 쓸데없는 것들뿐이니까. 정작 사고에 대해 신문 기사로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 한 지방 신문에 실린 부모님의 죽음은 신문의 22면 하단에 기재되어 있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칠 자리였고, 그 기사를 서윤은 누구보다도 많이 읽었다. 마치 도려진 기억을 신문 기사로 채우듯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 그때에 대해 물어본다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게 저장된 기억은 너무나도 정직해서 가끔은 타인의 이야기 같을 때도 있었다.
[오전 11시 45분경 순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남 씨가 몰던 차량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남 씨는 앞서 벌어진 3중 추돌 사고를 피하려다 3미터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 씨의 차량에는 서른아홉 살 아내 김 씨와 열다섯살 된 아들이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남 씨와 아내인 김 씨는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즉사하였으며, 열다섯 살 된 남 모 군은 현재 병원에서…….]
기사에서는 부모님의 사고를 불운이라 표현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사고에서 부모님은 유일한 희생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며칠 전 사고가 난 가드레일이 고장 난 상태여서이기도 했다.
‘운이 나빴어.’
사람들 역시 그렇게 말했다.
서윤은 제 부모님의 사고를 불운에 치부하는 그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불운에 치부하며 떠나 버린 부모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내는 동의하고 말았다. 왜 하필 부서진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는지, 또 왜 그 가드레일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일주일 전 사고가 났던 그 자리에 왜 주의 사항은 없었는지에 대해 몰랐으므로.
2. 소꿉친구 (1)
“남서윤, 너 내일부터 아는 척도 하지 마. 씨-이-발.”
그것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서윤은 식탁 위를 울리는 꾸김없는 목소리에 미끄러지듯 밥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아주 잠깐 멍을 때리듯 하고는 곧장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윤은 시선에 닿는 복부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맞았다.
평소와 다르게 은성은 인상을 가득 쓰고 있었다. 아니, 인상뿐만 아니었다. 화가 난 듯 평소 새침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왜, 하고 서윤이 눈썹을 움직여 물었고, 그에 대답하듯 은성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서윤은 들으라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곧장 거실로 간 그는 이내 2층으로 올라가 버렸고, 신경질적인 발걸음은 2층에서도 소란스레 울렸다.
남겨진 서윤은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가볍게 쥐다가 앞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곳에는 어른이 있었다. 그것도 소란을 일으킨 주인공의 부모님이 버젓이 앉아서 식사 중이었고, 두 사람 역시 서윤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눈으로 2층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쿵쿵, 바닥을 짓밟는 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서윤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좀 전과 달라진 옷차림으로 내려온 은성이 있었다. 청바지에 까만색 패딩을 껴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외출복이었다.
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외출복을? 묻지도 못할 말을 입 안에 가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은성은 유달리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한 발, 발을 떼기 무섭게 현관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찰나의 발소리가 사라지더니 큰 굉음이 울렸다.
서윤이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갔다.
“…….”
서윤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곳에는 있으라는 놈은 없고 활짝 열린 현관문만이 존재했다. 집 안에서도 훤히 보이는 바깥은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 하고 서윤이 현관까지 다가갔지만 똑같았다. 아이처럼 소리친 은성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치 연극의 한 대목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말투, 표정, 행동.
열린 현관문 사이로 찬 바람이 훌훌 나부꼈다. 태풍이 불고 간 것 같았다.
“저놈이…….”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현관문을 잡고 있던 자신의 귓가에 은성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윤이 서둘러 현관문을 닫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문을 닫고 돌아오는 찰나에 혹시라도 집 앞마당에 은성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은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윤은 예의 그 고운 얼굴로 앉아 있는 어머니를 살폈다.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 탓인지 얼굴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은성의 아버지였다. 그는 어머니와 반대로 얼굴에 이미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화롯불처럼 타오르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식탁 위로 반득하고 가지런하게 올린 주먹엔 두어 개의 핏줄이 보였다. 어쩌면 이곳이 태풍의 눈일지도 몰랐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자리에 착석했다. 텅 빈 자리에 괜스레 눈길이 갔다. 반 정도 먹기 시작한 밥과 아무렇게나 놓인 수저, 뒤로 길게 빼낸 의자까지. 신경 쓰지 않을래야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고 후 은성의 집에 살게 된 지도 횟수로 4년째였다. 뿐만 아니라 은성이와 알게 된 역사는 아주 길고 깊었다. 자신의 당대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들끼리의 역사도 짚어야 했다. 고등학교 동창생이던 자신의 아버지와 은성의 아버지는 학창 시절 절친이었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연락이 끊기게 되었고, 그 뒤 옆집 이웃으로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동갑이었던 우리 둘은 운명적인 재회를 한 후, 지금까지 항상 함께였다. 무려 12년의 시간 동안.
그런데…….
서윤은 어떻게 10년을 넘게 알고도 모르는 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다정다감한 부모님에, 삼 남매 중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은성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도. 혹,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환경적인 요인보다 본래의 성향이 더 큰 영향을 차지하는 건 아닐까. 함께 보낸 시간을 헤아리면 서윤은 더욱이 은성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죄송해요.”
서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왜냐하면 은성이 분노한 이유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서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랬던 것 같다. 은성이 이해되는 순간보다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아진 건.
“무슨 말이야. 사과를 왜 네가 해.”
그때까지도 마냥 분노에 차 있던 그의 손이 활짝 펴졌다. 허공을 가르며 휘휘 내젔더니 넌지시 입꼬리를 올려 본다.
“하려면 내가 해야지. 저놈이 어디서 저런 걸 배워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까고 보면 별것 아닐 게다. 분명 쓸데없는 거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놈이야. 저거는.”
그러면서 그가 내려놓았던 수저를 들었다. 서늘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들고 있었다.
“여보, 사춘긴가 봐요.”
잠자코 있던 은성의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서윤은 뜻하지 않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사춘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은성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춘기는 무슨. 사춘기가 무슨 감기라도 돼? 어떻게 매년 사춘기가 오냐고. 안 그러냐?”
완곡한 태도를 보인 그가 동의를 구하듯 서윤을 쳐다보았다. 서윤은 단숨에 받게 된 두 사람의 눈치에 눈동자를 번갈아 움직였다. 어느 쪽 편에도 서기가 어려웠다.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다 불현듯 떠오른 이유를 덧붙였다.
“……고3이라서 예민해져서…….”
하지만 그 말엔 부모님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다.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공부도 안 하는 녀석이 무슨 예민이야.”
“그래, 은성이가 공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니.”
그녀 역시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허물어진 분위기는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여전히 서윤은 옆자리의 빈 공간이 신경 쓰였다.
***
서윤의 부모님은 고아였다. 정확히는 어머니는 고아였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의 친척들은 오래도록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을 잃은 서윤에게 그 이야기가 가당키나 했을까 싶지만, 은성의 아버지 쪽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 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며,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을 힐난하기만 했다.
장례식장은 초라하면서도 난잡했다. 영정을 앞에 두고 원망의 소리와 고성이 오갔다. 서윤은 그곳에서 외딴 섬에 버려진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아니, 외딴 섬에 버려진 강아지가 될 뻔했다.
서윤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감쌌던 그들을 기억했다. 자신을 양자로 삼겠다는 은성의 부모님과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 은성을.
‘다 가져.’
‘내가 가진 거 다 줄게.’
‘울지 마. 내가 지켜 줄 거야.’
‘죽어도. 죽어도 네 옆에 있을게.’
다음 날, 서윤은 눈을 뜨자마자 은성의 방부터 찾아갔다.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은성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다 말고 까무룩 잠이 든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노크 소리는 작았다. 서윤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곤 벌컥 손잡이를 돌렸다.
매일 아침 풍경은 같았다. 이불에 뒤엉켜 은성이 자고 있는 모습.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누군가 깨끗이 청소를 끝낸 방 안의 모습을 갖춰 있었고, 공기조차 허전하다 못해 싸늘했다.
서윤은 난생처음 맞는 풍경에 설마 하는 생각을 가졌다. 설마 진짜 은성이 외박을 했을까. 그것은 알고 지내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각한 얼굴을 지은 서윤이 곧장 은성에게 통화를 걸었다.
규칙적인 통화음이 계속되더니 이내 기계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윤은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몇 번을 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미친…….”
뒤늦게 서윤은 전날 제게 화를 내고 나가 버린 은성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외박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어이가 없지 않았다. 서윤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텅 빈 방 안을 한 번 더 훑고는 침대 위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통통 구르던 휴대폰이 금세 침대 사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서윤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도로 줍지 않았다. 어디 당해 보라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은성의 방을 나왔다.
바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은성이 없어도 지구는 돌았고, 아침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뭐 도와드리면 돼요?”
부엌으로 발길을 돌린 서윤이 한창 아침밥을 준비하던 그녀에게 물었다.
“일어났어?”
“네.”
가볍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서윤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느긋한 주말에 맞춰 반찬이 각양각색이었다. 서윤은 접시에 곱게 담긴 반찬을 식탁으로 옮겼다.
“괜찮아. 앉아 있어.”
“아니에요. 이것만…….”
“다 했어.”
그녀는 밥그릇을 꺼내는 서윤을 말렸다. 등을 떠밀어 제 구역에서 멀찍이 떨어뜨렸고, 서윤은 마지못해 한 발 물러난 채로 서 있었다. 허전해진 손을 한번 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러다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은성의 외박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은성이는요?”
서윤은 묻고도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칼을 고쳐 쥐었다. 두부를 써는 칼이 도마 위를 탁, 하고 내리쳤다. 때아닌 공포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때에,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현관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당차게 도착한 현관문에서 마주한 건 등산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날이 꽤 춥더구나.”
그는 귀를 덮은 모자를 벗으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서윤은 은성과 닮은 얼굴을 눈으로 좇으며 더욱 은성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서윤은 처음으로 눈칫밥을 먹었다. 누가 눈치를 준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가 그랬다. 마치 훔친 밥을 먹는 듯한 기분에, 갓 한 쌀밥이 푸석푸석하게 느껴졌다.
이제 와 은성을 쫓아가지 않은 자신에게 후회가 들었다. 차곡차곡 밥알이 쌓이는 속이 따끔거렸다.
“체했나…….”
위를 두드리며 1층으로 내려왔을 무렵, 은성의 부모님은 외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안방을 기웃거리던 서윤이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다.
“나가세요?”
“영화나 볼까 하고.”
한껏 머리를 묶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같이 갈래?”
덧붙여 자신에게도 권했다.
“아니에요.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할 일 없으면 같이 가도 되는데.”
“저, 할 일 있어요. 잠깐 나갔다 오려구요.”
덩달아 권유하는 그에게까지 거절의 의사를 보이고는 방을 나왔다. 몇 분 뒤, 서윤은 외출하는 그들을 배웅하곤 자신 역시 외출 준비에 나섰다. 어젯밤 은성이 입고 나간 똑같은 디자인의 추리닝을 껴입고는 패딩을 걸쳤다. 그러곤 텅 빈 방 안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봄이라면서 바깥엔 칼바람이 한창이었다. 서윤은 이 추위에도 피기 시작한 노란 꽃들을 보며 패딩을 잔뜩 끌어당겼다.
“으, 진짜. 이은성.”
얼어 버린 입에서는 몇 번을 씹어도 부족한 이름이 자꾸만 삐져나왔다.
“생전 하지도 않던 외박을 왜 해서는.”
서윤은 버스를 기다리는 장작 20분 동안 은성을 원망했다.
버스는 따끈따끈한 히터로 가득했다. 몸이 금방 녹았고, 제일 앞 좌석에 앉아 있자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왔다. 잠들지 않기 위해 반쯤 감은 눈으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문득 이 4일 남은 방학을 이렇게 할애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구태여 찾으러 갈 필요가 있을까. 어머니 말대로 알아서 올 텐데. 하지만 번뇌는 짧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방송에 하차벨을 눌른 서윤이 찬 바람을 헤치며 빠르게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로변에 위치한 그곳은 다 낡아 빠진 낮은 3층짜리 건물에 변색된 황토색을 띠고 있을 터였다.
“……여긴가?”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바라본 건물은 촌스러운 형광 노란색 페인트로 덧대져 있었고, 유리문 앞에는 ‘휴무일’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얄궂은 팻말을 힘주어 바라보던 서윤이 다시금 간판을 살폈다.
‘우진체육관.’
“맞는데…….”
서윤이 볼을 긁적이며 유리문 안을 살폈다. 바뀐 외관도 당황스럽지만 운영하리라 생각했던 체육관이 닫혀 있는 건 더욱이나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제 예상에도 없던 전개였다.
서윤은 유리문에 바짝 고개를 들이대고는 안을 살폈다. 캄캄한 분위기가 누가 봐도 휴일로 보였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서윤은 한참이고 안을 들여다봤다. 찬 입김에 금방 유리에 서리가 끼자 서윤이 뿌옇게 변한 유리문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얼마나 청소를 하지 않은 건지 패딩 소매에 희끄무레한 먼지가 묻어났다.
“아, 진짜…….”
눈살을 찌푸린 서윤이 다시금 고개를 떼어 냈다가 유리문을 미련스럽게 흔들었다. 소꿉친구가 그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은성은 자신을, 자신은 은성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가 집돌이에 가깝지만 은성은 운동만큼은 남다를 애정을 과시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탓인지 몸도 잘 쓰고, 승부욕도 강했다. 시합이라든지 학교 행사, 시합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기는 걸 좋아했고, 그러다 가끔 지고 올 때면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은성을 달래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물론 요즘엔 그런 일은 드물었지만.
어쨌거나 서윤은 은성이 체육관에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쳇, 괜한 헛걸음했네.”
닫힌 걸 알면서도 미련스레 한 번 더 안을 살핀 서윤이 발길을 돌렸다. 올 때와 다르게 갈 때의 길은 더욱이 멀었다.
1. 프롤로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날 좋고 바람 좋은 5월에 발생한 교통사고 때문이었고, 서윤 또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사고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사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서윤은 사고에 대해 가장 알지 못했다. 그날, 그 사고와 관련해 그가 기억하는 건 부모님을 따라 자동차에 올라타던 때의 풍경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다였다.
유독 날씨가 좋던 그날은 느닷없는 외출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도시락도 없이 조수석에 올라탄 어머니와 운전석에 탄 아버지를 따라 자신 역시 뒷좌석에 올랐다.
아빠! 출발!
서윤이 신이 나 외쳤다. 뒤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의사는 그것을 기억 상실증이라고 불렀다. 흔히 교통사고 환자들이 겪는 후유증으로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열아홉이 된 지금도 여전했다.
몇 번의 검사와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에 불쑥 떠오른 기억은 무척이나 단편적이었다. 뚜렷하게 상황 전체가 기억나지도 않았고, 오직 손끝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것이 어머니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가락 마디의 주름과 손가락을 덮는 짧은 손톱은 분명 어머니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을 부르듯 하염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나, 기억하는 마지막까지 손가락이 자신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조차도 스포트라이트는 손끝에 맞춰 있었고, 보이는 건 어머니의 손끝과 진자 운동을 하는 듯한 손가락의 움직임뿐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꿈에서 어머니의 손은 조금 무섭다는 것이었다.
서윤은 그 감정이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의 마지막을 함께했으면서도 정작 기억하는 건 쓸데없는 것들뿐이니까. 정작 사고에 대해 신문 기사로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 한 지방 신문에 실린 부모님의 죽음은 신문의 22면 하단에 기재되어 있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칠 자리였고, 그 기사를 서윤은 누구보다도 많이 읽었다. 마치 도려진 기억을 신문 기사로 채우듯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 그때에 대해 물어본다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게 저장된 기억은 너무나도 정직해서 가끔은 타인의 이야기 같을 때도 있었다.
[오전 11시 45분경 순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남 씨가 몰던 차량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남 씨는 앞서 벌어진 3중 추돌 사고를 피하려다 3미터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 씨의 차량에는 서른아홉 살 아내 김 씨와 열다섯살 된 아들이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남 씨와 아내인 김 씨는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즉사하였으며, 열다섯 살 된 남 모 군은 현재 병원에서…….]
기사에서는 부모님의 사고를 불운이라 표현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사고에서 부모님은 유일한 희생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며칠 전 사고가 난 가드레일이 고장 난 상태여서이기도 했다.
‘운이 나빴어.’
사람들 역시 그렇게 말했다.
서윤은 제 부모님의 사고를 불운에 치부하는 그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불운에 치부하며 떠나 버린 부모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내는 동의하고 말았다. 왜 하필 부서진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는지, 또 왜 그 가드레일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일주일 전 사고가 났던 그 자리에 왜 주의 사항은 없었는지에 대해 몰랐으므로.
2. 소꿉친구 (1)
“남서윤, 너 내일부터 아는 척도 하지 마. 씨-이-발.”
그것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서윤은 식탁 위를 울리는 꾸김없는 목소리에 미끄러지듯 밥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아주 잠깐 멍을 때리듯 하고는 곧장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윤은 시선에 닿는 복부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맞았다.
평소와 다르게 은성은 인상을 가득 쓰고 있었다. 아니, 인상뿐만 아니었다. 화가 난 듯 평소 새침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왜, 하고 서윤이 눈썹을 움직여 물었고, 그에 대답하듯 은성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서윤은 들으라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곧장 거실로 간 그는 이내 2층으로 올라가 버렸고, 신경질적인 발걸음은 2층에서도 소란스레 울렸다.
남겨진 서윤은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가볍게 쥐다가 앞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곳에는 어른이 있었다. 그것도 소란을 일으킨 주인공의 부모님이 버젓이 앉아서 식사 중이었고, 두 사람 역시 서윤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눈으로 2층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쿵쿵, 바닥을 짓밟는 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서윤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좀 전과 달라진 옷차림으로 내려온 은성이 있었다. 청바지에 까만색 패딩을 껴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외출복이었다.
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외출복을? 묻지도 못할 말을 입 안에 가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은성은 유달리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한 발, 발을 떼기 무섭게 현관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찰나의 발소리가 사라지더니 큰 굉음이 울렸다.
서윤이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갔다.
“…….”
서윤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곳에는 있으라는 놈은 없고 활짝 열린 현관문만이 존재했다. 집 안에서도 훤히 보이는 바깥은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 하고 서윤이 현관까지 다가갔지만 똑같았다. 아이처럼 소리친 은성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치 연극의 한 대목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말투, 표정, 행동.
열린 현관문 사이로 찬 바람이 훌훌 나부꼈다. 태풍이 불고 간 것 같았다.
“저놈이…….”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현관문을 잡고 있던 자신의 귓가에 은성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윤이 서둘러 현관문을 닫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문을 닫고 돌아오는 찰나에 혹시라도 집 앞마당에 은성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은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윤은 예의 그 고운 얼굴로 앉아 있는 어머니를 살폈다.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 탓인지 얼굴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은성의 아버지였다. 그는 어머니와 반대로 얼굴에 이미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화롯불처럼 타오르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식탁 위로 반득하고 가지런하게 올린 주먹엔 두어 개의 핏줄이 보였다. 어쩌면 이곳이 태풍의 눈일지도 몰랐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자리에 착석했다. 텅 빈 자리에 괜스레 눈길이 갔다. 반 정도 먹기 시작한 밥과 아무렇게나 놓인 수저, 뒤로 길게 빼낸 의자까지. 신경 쓰지 않을래야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고 후 은성의 집에 살게 된 지도 횟수로 4년째였다. 뿐만 아니라 은성이와 알게 된 역사는 아주 길고 깊었다. 자신의 당대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들끼리의 역사도 짚어야 했다. 고등학교 동창생이던 자신의 아버지와 은성의 아버지는 학창 시절 절친이었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연락이 끊기게 되었고, 그 뒤 옆집 이웃으로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동갑이었던 우리 둘은 운명적인 재회를 한 후, 지금까지 항상 함께였다. 무려 12년의 시간 동안.
그런데…….
서윤은 어떻게 10년을 넘게 알고도 모르는 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다정다감한 부모님에, 삼 남매 중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은성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도. 혹,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환경적인 요인보다 본래의 성향이 더 큰 영향을 차지하는 건 아닐까. 함께 보낸 시간을 헤아리면 서윤은 더욱이 은성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죄송해요.”
서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왜냐하면 은성이 분노한 이유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서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랬던 것 같다. 은성이 이해되는 순간보다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아진 건.
“무슨 말이야. 사과를 왜 네가 해.”
그때까지도 마냥 분노에 차 있던 그의 손이 활짝 펴졌다. 허공을 가르며 휘휘 내젔더니 넌지시 입꼬리를 올려 본다.
“하려면 내가 해야지. 저놈이 어디서 저런 걸 배워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까고 보면 별것 아닐 게다. 분명 쓸데없는 거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놈이야. 저거는.”
그러면서 그가 내려놓았던 수저를 들었다. 서늘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들고 있었다.
“여보, 사춘긴가 봐요.”
잠자코 있던 은성의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서윤은 뜻하지 않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사춘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은성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춘기는 무슨. 사춘기가 무슨 감기라도 돼? 어떻게 매년 사춘기가 오냐고. 안 그러냐?”
완곡한 태도를 보인 그가 동의를 구하듯 서윤을 쳐다보았다. 서윤은 단숨에 받게 된 두 사람의 눈치에 눈동자를 번갈아 움직였다. 어느 쪽 편에도 서기가 어려웠다.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다 불현듯 떠오른 이유를 덧붙였다.
“……고3이라서 예민해져서…….”
하지만 그 말엔 부모님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다.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공부도 안 하는 녀석이 무슨 예민이야.”
“그래, 은성이가 공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니.”
그녀 역시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허물어진 분위기는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여전히 서윤은 옆자리의 빈 공간이 신경 쓰였다.
***
서윤의 부모님은 고아였다. 정확히는 어머니는 고아였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의 친척들은 오래도록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을 잃은 서윤에게 그 이야기가 가당키나 했을까 싶지만, 은성의 아버지 쪽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 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며,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을 힐난하기만 했다.
장례식장은 초라하면서도 난잡했다. 영정을 앞에 두고 원망의 소리와 고성이 오갔다. 서윤은 그곳에서 외딴 섬에 버려진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아니, 외딴 섬에 버려진 강아지가 될 뻔했다.
서윤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감쌌던 그들을 기억했다. 자신을 양자로 삼겠다는 은성의 부모님과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 은성을.
‘다 가져.’
‘내가 가진 거 다 줄게.’
‘울지 마. 내가 지켜 줄 거야.’
‘죽어도. 죽어도 네 옆에 있을게.’
다음 날, 서윤은 눈을 뜨자마자 은성의 방부터 찾아갔다.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은성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다 말고 까무룩 잠이 든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노크 소리는 작았다. 서윤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곤 벌컥 손잡이를 돌렸다.
매일 아침 풍경은 같았다. 이불에 뒤엉켜 은성이 자고 있는 모습.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누군가 깨끗이 청소를 끝낸 방 안의 모습을 갖춰 있었고, 공기조차 허전하다 못해 싸늘했다.
서윤은 난생처음 맞는 풍경에 설마 하는 생각을 가졌다. 설마 진짜 은성이 외박을 했을까. 그것은 알고 지내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각한 얼굴을 지은 서윤이 곧장 은성에게 통화를 걸었다.
규칙적인 통화음이 계속되더니 이내 기계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윤은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몇 번을 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미친…….”
뒤늦게 서윤은 전날 제게 화를 내고 나가 버린 은성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외박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어이가 없지 않았다. 서윤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텅 빈 방 안을 한 번 더 훑고는 침대 위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통통 구르던 휴대폰이 금세 침대 사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서윤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도로 줍지 않았다. 어디 당해 보라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은성의 방을 나왔다.
바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은성이 없어도 지구는 돌았고, 아침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뭐 도와드리면 돼요?”
부엌으로 발길을 돌린 서윤이 한창 아침밥을 준비하던 그녀에게 물었다.
“일어났어?”
“네.”
가볍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서윤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느긋한 주말에 맞춰 반찬이 각양각색이었다. 서윤은 접시에 곱게 담긴 반찬을 식탁으로 옮겼다.
“괜찮아. 앉아 있어.”
“아니에요. 이것만…….”
“다 했어.”
그녀는 밥그릇을 꺼내는 서윤을 말렸다. 등을 떠밀어 제 구역에서 멀찍이 떨어뜨렸고, 서윤은 마지못해 한 발 물러난 채로 서 있었다. 허전해진 손을 한번 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러다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은성의 외박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은성이는요?”
서윤은 묻고도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칼을 고쳐 쥐었다. 두부를 써는 칼이 도마 위를 탁, 하고 내리쳤다. 때아닌 공포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때에,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현관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당차게 도착한 현관문에서 마주한 건 등산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날이 꽤 춥더구나.”
그는 귀를 덮은 모자를 벗으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서윤은 은성과 닮은 얼굴을 눈으로 좇으며 더욱 은성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서윤은 처음으로 눈칫밥을 먹었다. 누가 눈치를 준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가 그랬다. 마치 훔친 밥을 먹는 듯한 기분에, 갓 한 쌀밥이 푸석푸석하게 느껴졌다.
이제 와 은성을 쫓아가지 않은 자신에게 후회가 들었다. 차곡차곡 밥알이 쌓이는 속이 따끔거렸다.
“체했나…….”
위를 두드리며 1층으로 내려왔을 무렵, 은성의 부모님은 외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안방을 기웃거리던 서윤이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다.
“나가세요?”
“영화나 볼까 하고.”
한껏 머리를 묶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같이 갈래?”
덧붙여 자신에게도 권했다.
“아니에요.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할 일 없으면 같이 가도 되는데.”
“저, 할 일 있어요. 잠깐 나갔다 오려구요.”
덩달아 권유하는 그에게까지 거절의 의사를 보이고는 방을 나왔다. 몇 분 뒤, 서윤은 외출하는 그들을 배웅하곤 자신 역시 외출 준비에 나섰다. 어젯밤 은성이 입고 나간 똑같은 디자인의 추리닝을 껴입고는 패딩을 걸쳤다. 그러곤 텅 빈 방 안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봄이라면서 바깥엔 칼바람이 한창이었다. 서윤은 이 추위에도 피기 시작한 노란 꽃들을 보며 패딩을 잔뜩 끌어당겼다.
“으, 진짜. 이은성.”
얼어 버린 입에서는 몇 번을 씹어도 부족한 이름이 자꾸만 삐져나왔다.
“생전 하지도 않던 외박을 왜 해서는.”
서윤은 버스를 기다리는 장작 20분 동안 은성을 원망했다.
버스는 따끈따끈한 히터로 가득했다. 몸이 금방 녹았고, 제일 앞 좌석에 앉아 있자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왔다. 잠들지 않기 위해 반쯤 감은 눈으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문득 이 4일 남은 방학을 이렇게 할애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구태여 찾으러 갈 필요가 있을까. 어머니 말대로 알아서 올 텐데. 하지만 번뇌는 짧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방송에 하차벨을 눌른 서윤이 찬 바람을 헤치며 빠르게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로변에 위치한 그곳은 다 낡아 빠진 낮은 3층짜리 건물에 변색된 황토색을 띠고 있을 터였다.
“……여긴가?”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바라본 건물은 촌스러운 형광 노란색 페인트로 덧대져 있었고, 유리문 앞에는 ‘휴무일’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얄궂은 팻말을 힘주어 바라보던 서윤이 다시금 간판을 살폈다.
‘우진체육관.’
“맞는데…….”
서윤이 볼을 긁적이며 유리문 안을 살폈다. 바뀐 외관도 당황스럽지만 운영하리라 생각했던 체육관이 닫혀 있는 건 더욱이나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제 예상에도 없던 전개였다.
서윤은 유리문에 바짝 고개를 들이대고는 안을 살폈다. 캄캄한 분위기가 누가 봐도 휴일로 보였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서윤은 한참이고 안을 들여다봤다. 찬 입김에 금방 유리에 서리가 끼자 서윤이 뿌옇게 변한 유리문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얼마나 청소를 하지 않은 건지 패딩 소매에 희끄무레한 먼지가 묻어났다.
“아, 진짜…….”
눈살을 찌푸린 서윤이 다시금 고개를 떼어 냈다가 유리문을 미련스럽게 흔들었다. 소꿉친구가 그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은성은 자신을, 자신은 은성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가 집돌이에 가깝지만 은성은 운동만큼은 남다를 애정을 과시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탓인지 몸도 잘 쓰고, 승부욕도 강했다. 시합이라든지 학교 행사, 시합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기는 걸 좋아했고, 그러다 가끔 지고 올 때면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은성을 달래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물론 요즘엔 그런 일은 드물었지만.
어쨌거나 서윤은 은성이 체육관에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쳇, 괜한 헛걸음했네.”
닫힌 걸 알면서도 미련스레 한 번 더 안을 살핀 서윤이 발길을 돌렸다. 올 때와 다르게 갈 때의 길은 더욱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