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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2화

2. 소꿉친구 (2)





집에 도착한 서윤은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누르며 살짝 기대에 차 있었다. 어쩌면 그 사이 은성이 집에 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 역시 꿈에 불과했다, 집 안은 아침나절보다 더욱 허전할 뿐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었다. 서윤은 거실을 지나 은성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 옆에서 일부러 가져가지 않은 휴대폰을 찾아 들었지만 그것 역시도 착각이었다. 휴대폰엔 그 흔한 연락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한숨을 크게 내쉰 서윤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베이지색 천장이 낯설었다.

“……진짜 사춘긴가.”

아직도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서윤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집에 돌아온 후 서윤은 무려 두 시간이나 은성을 기다렸다. 불이 꺼진 은성의 방 안에서 은성을 기다리다 행여라도 사고가 났을까 걱정했다가 끝내는 분노가 솟았다. 가지런히 벗어 두었던 신발을 도로 신으며 서윤은 연락 한 통 하지 않는 은성에게 다짐했다. 이제는 오기였다. 은성이 오지 않으면 자신도 집에 있지 않겠다는. 또한 말도 걸지 말아야지.

추위에 견딜 곳을 찾던 서윤은 24시간으로 운영하는 중인 햄버거 집으로 향했다. 부실했던 아침 때문이기도 했고, 시간을 버티기에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점심때도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 개의 카운터에서 꽤나 긴 줄이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서윤은 그들을 보다가 왼쪽에 버젓이 걸린 ‘3일 한정 이벤트’라는 광고판을 보았다. 그러곤 자신 역시 긴 줄에 동참했다.

“서윤이 형!”

자신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서윤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듯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로도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줄지어 있었지만 개중에 아는 이는 없었다. 착각인가, 하고 돌아서려는 그때 불쑥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고, 낯이 익은 것도 아닌 또래의 사람이었다. 서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해맑게 웃는다.

“…….”

“…….”

두 눈을 끔벅거리며 서윤이 그를 살폈다. 누군지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자신에게 또래 친구는 은성이 전부였고, 자신을 아는 사람 대부분은 그다지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형, 지금 저 기억 못 하는 거죠?”

그는 눈썹을 내리며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눈이 정말이지 불쌍해 보였고, 순간 그의 존재에 의문이 든 서윤이 얼굴을 굳혔다. 괜한 생각이 들자 뒷목이 당기며 손에 땀이 났다. 설마, 하는 생각에 입을 열 무렵 답답했는지 그가 웃음기를 가신 얼굴로 말했다.

“선우현이요.”

“어?”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큰 눈을 끔뻑이며 묻는 얼굴이 이래도 기억이 안 나냐는 시선 같았다. 서윤은 물이 흐르듯 흘려보낸 1년의 시간을 돌이켜 생각했다. 단번에 그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몇 번의 되돌림 끝에 어렴풋이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반장?”

“네! 맞아요.”

그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서윤 역시 확실해진 신원에 절로 안심이 밀려왔다.

“혼자 왔어요?”

“응. 너는?”

“저두요. 아, 그렇다고 아무 일행이 없는 건 아니에요. 원래는 누나랑 만나기로 했는데, 좀 늦는다고 해서.”

스스럼없이 웃는 얼굴이 깨끗하고 반듯했다. 거기다 그는 사교성까지 좋은 것 같았다.

“주말 잘 보냈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서윤은 제 앞에 착석한 그가 어색했다.

“그냥…… 너는?”

“저는요…….”

햄버거 종이를 뜯기도 전에 그렇게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는 2주간의 방학 동안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를 얘기했다. 자신에게 하나뿐인 누나랑 어디에 갔고, 또 얼마나 즐거웠는지. 처음에는 누나의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서윤은 친누나임을 알고는 집중해서 들었다. 은성이와 은성의 누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근데, 약속 있어요?”

“……어?”

“자꾸 바깥을 확인하길래요.”

“아…….”

서윤은 말없이 햄버거를 물었다.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 놈이 가출했으며,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혹시 찾을 방법은 없는 거냐고.

“아냐, 그런 거.”

“에이. 거짓말.”

“…….”

“저, 얘기 들어 주는 거 잘해요.”

그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평소라면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럽기도, 의심도 했을 테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데에 안심이 됐다. 무엇보다 은성이 없다는 게 제일 컸겠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교우 관계는 무릇 은성이 다였다. 원래도 좁아터진 교우 관계였지만 사고 후, 그리고 고등학교가 달라진 뒤로는 더욱이 좁아졌다.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라곤 은성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런 놈이 문제였다.

지속적인 침묵에 선우현이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형, 곤란하게 하려고 한 말 아니에요. 제가 원래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듣잖아요. 쓸데없이 눈치가 없어-”

“그, 친구랑 싸웠거든?”

“……친구요?”

“응, 연락이 안 돼서 찾던 중이었어.”

선우현은 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집에는요? 집에는 찾아가 봤어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연락은요? 그러니까 형 친구 말고 친구의 친구들한테 연락도 안 된대요?”

서윤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리도 없었다.

“왜 싸웠는데요?”

“……몰라. 그게 진짜 싸운 게 아니라…….”

다시금 어제가 떠오른 서윤은 울컥 화가 났다가 은성의 부모님을 떠올리곤 금방 화를 식혔다.

“일방적으로 걔가 화를 낸 거라…….”

그것도 당장에 외박을 할 만큼의 싸움은. 아니,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서윤이 답답한 마음에 얼음이 녹은 콜라를 쭉 들이켰다.

“형이 모르는 거 아니에요?”

“뭐가?”

“화가 난 이유요. 원래 반응이라는 게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요. 혹시 형이 모르는 게 있을지도 모르죠. 형 친구가 싫어할 만한 짓을 했다거나…….”

“싫어할 만한 짓?”

글쎄, 그런 게 있었나. 서윤은 선우현의 말에 다시금 어젯밤 시간으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시간에 밥을 먹기 시작한 화기애애하던 그때로.

평소와 비슷한 하루였다. 저녁 8시쯤 은성과 자신, 그리고 은성의 부모님이 모였다. 여느 날처럼 사소한 하루의 일상을 공유했고, 이어 화제였던 모 공장에서의 폭발 사고, 모 연예인 커플의 이별 얘기를 했다. 그러다 대학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이 틀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은성은 수능을 코앞에 둔 고3이었고, 자신은 고2였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은성의 아버지는 상향 지원과 하향 지원에 대해 얘기했고, 은성의 어머니는 어떤 학과든 상관없이 그저 대학에만 가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어떤 학과를 가고 싶은지 물었다.

평소 대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왜냐하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보통 서윤은 학과보다는 학교를 더 눈여겨보는 편이었다. 그 학교의 취업률이 얼마나 되고, 거리는 얼만큼이며 기숙사는 어떤지. 그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은성이 버럭 화를 낸 것이다. 그전까지 은성은 남 일처럼 조용했다.

“아닌데…….”

한참 생각하던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선우현이 테이블 위에 놓았던 휴대폰을 재빠르게 집어 들더니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나, 다 왔어? 어디? 거기는 또 왜 갔어.”

눈썹을 찡그리며 그가 투덜거렸다. 힐긋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시선에 서윤은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의 쨍쨍한 햇볕이 유리문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수는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였다.

“형, 가 봐야겠어요.”

짧은 통화가 끝난 후 선우현이 말했다. 서윤도 더 있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와 함께 육교까지 걸어갔다. 가는 동안에 주고받은 대화 역시 은성에 대한 것이었다.

무조건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래요. 그러면 돼요. 얼굴 보고 말하자고 해요. 그리고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사과하구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육교를 오르며 휴대폰을 꺼냈고, 까만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27통이 찍혀 있었다. 발신자는 모두 은성이었다.

이제 집에 왔나 보네. 그러지 않고서야 휴대폰이 시끄러울 리 없었다. 서윤은 단순한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지는 못했다. 몸이 갑작스럽게 뒤로 넘어간 탓이었다.

서윤은 넘어질세라 허둥지둥 육교 난간을 붙잡았다. 추운 겨울날을 맞이한 쇠붙이는 몹시도 차가웠다. 그것을 쓸고 내려간 손바닥 역시 시리고 쓰라렸다.

서윤은 미친 듯 널뛰는 심장을 추스르며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괜찮아요?”

정신이 든 건 선우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때문이었다. 서윤은 그래, 하고 대답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또 한 번 몸이 중력의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서윤은 선우현의 발끝을 보았다.



서윤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잡힌 뒷목이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닭모가지를 비틀 듯 우악스러운 손짓에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가는 동안에 행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윽.”

손길은 어딘지 모를 골목길에서 떨어졌다. 내팽개치듯 밀려난 몸이 벽과 충돌했고, 서윤이 그제야 짧은 신음이 뱉었다. 그러곤 날개뼈 부근을 문지르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야, 씨. 이은성.”

예상은 했지만, 자신을 무턱대고 끌고 온 상대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의 은성이었다. 만나면 왜 화가 났는지 물어야지 했던 서윤은 그 얼굴을 대면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성이 먼저 선수 쳤기 때문에.

“씨발…… 남서윤.”

“…….”

“너한텐 내가 우스워?”

“뭐?”

“너한텐 내가 어디 굴러다니는 공이냐고!”

은성은 어제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목소리가 귓가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이어 은성이 애먼 패딩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한껏 들쳐진 고개가 아팠다.

“……야, 잠, 숨, 숨막히다고.”

춥다고 목까지 끌어다 잠근 단추 때문이었다. 목젖을 누르는 압박에 서윤이 외쳤다. 하지만 은성은 들리지 않는 건지,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화가 난 얼굴로 손에 힘을 더하고 있을 뿐이었다.

“……야, 그만, 그만하, 라니까. 숨, 숨 막힌다고.”

반쯤 조여진 목에선 쉰소리가 났다. 켁켁거리는 소리가 잔기침처럼 터져 나왔고, 서윤은 속으로 험한 욕까지 해 대며 몸을 버둥거렸다. 눈앞이 조금 흐려지다 간혈적으로 컥컥대는 낯선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진심이었다. 그것을 거짓으로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서윤은 진정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는 기분이었고, 손아귀는 더 이상 못참겠다고 생각했을 때에 순식간에 떨어졌다.

서윤이 벽을 짚고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콜록거리는 소리에 얼굴에 핏기가 차올랐다가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이 더욱 희게 질린 듯 보였다.

“너 미쳤…… 어디서, 후…… 약이라도 한 거 아냐?”

놀라 주저앉은 다리에 잠시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은성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조금 놀랐을 줄 알았는데, 은성은 좀 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서윤, 너 진짜 빡치게 할래?”

뉘우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마치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침 뱉는 그런 놈이든가.

서윤은 아직도 누가 조르는 것 같은 목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소리쳤다.

“누가 뭘 해! 지금 빡칠 사람이 누군데. 너, 지금…….”

뒤늦게 화가 오른 서윤이 외쳤다. 은성을 향해 뻗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을 꺼내기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얗던 얼굴이 이번에 빨개졌다.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는 게 누군데. 씨발.”

“……뭐?”

“씨발. 연락도 안 되서 존나 찾아다녔더니 이상하게 생긴 새끼랑 히히덕거리고 있고. 내가 지금 화 안 나게 생겼냐고!”

“뭐?”

“씨발 새끼가 나간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

중간에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서윤은 차분히 되물었다. 손은 여전히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간다고 그랬잖아!”

“나가다니? 뭘?”

“네가 나간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씨발. 이거 봐. 존나 자기가 말해 놓고 기억도 못 하지.”

또다시 목소리가 높아진 은성에게 손으로 막아선 서윤이 기억을 되새겼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랬다고? 나간다고? 그런 적 없는 거 같은데…….”

조금 떨어지나 했던 은성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듯했고, 근거리에서 야, 하고 외친 목소리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기숙사 갈 거라며.”

낮으면서도 이를 빠드득 가는 것도 같은 목소리였다. 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한 말 중에 기숙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걸 떠올렸다. 정확히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대학교 얘기였지만.

“당장 간다는 게 아니라 대학교 가면, 뭐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

“어쨌든 나간다는 거잖아.”

“…….”

“너, 작년에 뭐라 그랬어? 미안하다며? 앞으론 잘 의논하자며? 씨발. 너한텐 이게 의논이냐?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리면서 통보하는 게 그게 의논이냐고. 빙신아.”

말을 하다 보니 울컥한 건지, 울컥해서 말을 하는 건지. 은성은 앞서 지나간 일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참나, 그 얘기는 왜 또 하고 그래.”

서윤은 미안한 마음에 괜히 툴툴거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게 문제였다.

“또? 지금 또라고 했냐?”

은성은 그날을 생각한 건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좀 더 말을 보태 보려던 서윤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곱 살에 옆집으로 만나게 된 이후 12년을 함께 붙어 다녔다. 그것도 처음 8년은 친구였고, 4년은 가족에 가까운. 그 시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요즘엔 강산도 5년이면 변한다는데 서윤은 은성이와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임에도 여전했다. 물론 자신의 기준에서.

은성의 말에 의하면 작년 봄에 서로가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맞이한 이별에 불같이 화를 냈다.

딱, 오늘만큼을.

“씨발, 넌 지금 그게…….”

아직도 그때의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은성이 입술을 짓이겼다. 서윤은 은성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의 일은 은성에게도, 은성의 부모님에게도 예고도, 상의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들통 난 순간 은성이 화를 낼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마음에 담아 둘 거라곤 생각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는 멀어도 집은 가까우니까. 각자의 삶을 위한 선택에 그렇게 섭섭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나간다는 거 아니라니까…….”

서윤이 한 번 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뭐가 다른데? 어차피 결론은 나가겠다는 거잖아.”

하지만 은성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말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넌, 씨발…….”

분에 못 이긴 은성이 주먹 쥔 손을 허공에서 휘둘렀다. 서윤이 반사적으로 양쪽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실제로 주먹이 몸 어딘가를 내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볼을 꼬집을 뿐이었다.

슬쩍 눈을 떠서 본 은성의 얼굴은 묘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은데 속은 상해 보이고, 뭔가 억울한 듯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서윤은 난감한 얼굴로 꼬집힌 제 볼을 쓰다듬었다. 저런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 어떻게든 은성을 납득시켜야 할 것 같았고, 자신의 마음을 일일이 다 털어놓아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잖아.”

“뭐?”

“……계속 같이 사는 게 이상하다고.”

“뭐가? 도대체 뭐가 이상한데?”

“어, 어른이잖아.”

“……뭐?”

“그, 그러니까, 뭐 어른이니까 이제 혼자 살아 보겠다. 뭐, 그런 거지.”

은성은 그 말에 기어코 정수리를 아프게 내리쳤다.

“뭐? 어른? 어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어른이면 친구도 없냐? 어? 어른이면 친구도 아냐?”

또…….

서윤은 익숙한 패턴에 눈살을 찌푸렸다. 노래방에서 십팔번 곡이 있듯 은성에게 십팔번 말은 이거였다.

친구잖아.

친군데.

친구면서.

은성에게 친구란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사람을 뜻했고, 그에게 친구는 오직 자신이 전부였다.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다고 자신이 은성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수는 없었다. 자신과 은성이 생각하는 친구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

“씨발, 언제는 나밖에 없다면서. 친구라고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젠 겨우 친구라네.”

“누가 그렇대?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네 말이 그거지. 뭐, 어른이니까 나가? 어른이면 씨발, 친구도 없이 혼자 살아야겠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은성은 잔뜩 비꼬아 말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바뀌지 않는 패턴이었다. 힘도 힘이지만 은성이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이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