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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유헌은 무뎠다.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뎌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무뎌서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의 아침은 늘 같았다. 햇빛이 그대로 투과되는 남색 커튼이 오늘도 쏟아지는 밝음을 막지 못했고, 솜이 죽은 이불과 잔뜩 눌린 베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방을 뒤덮고 있는 쓸쓸한 냄새도 똑같았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같으리라 생각했다.
― 야! 이 새끼야, 너는 핸드폰을 폼으로 들고 다니냐?
유난히 시끄럽던 벨소리가 유헌의 잠을 깨우기 전까지는.
“민재 형?”
― 하이고오. 누군지 바로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열다섯 번이나 걸어야 받는 귀하신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전화예요.”
― 새벽 같은 소리 하네. 곧 있으면 12시다, 12시야.
유헌이 베개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이미 헝클어져 있는 머리를 더 엉망으로 만들고 나니 그제야 바닥에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민재의 말마따나 새벽이라 우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시간이었다.
― 유헌아. 형 부탁 좀 들어줘라.
“아니, 다짜고짜 전화해서 갑자기 뭔 부탁이에요?”
―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그래. 그리고 너만 도와줄 수 있는 일이야.
“지금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형을 어떻게…….”
해가 중천에 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잠기운이 남아 몽롱한 상태였다. 유헌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민재의 목소리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 어떤 사람이 너를 경호원으로 꼭 쓰고 싶대.
“저를요?”
― 어. 꼭 너여야 한대.
“그게 말이 돼요?”
― 말이 안 될 건 뭐야. 너 겁나 유명한 국가대표 선수였어.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유헌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민재의 말을 곱씹었다. 몇 번을 되짚어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불명예스럽게 태극 마크를 반납한 게 어언 5년 전이었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신기할 일인데, 경력까지 기억해 그를 찾는 이가 있다니. 믿기 힘들었다.
“손목 뭉개진 사격 선수를 누가 경호원으로 쓰고 싶어 해요.”
― 인마, 요즘은 총 못 쏴도 경호해. 너 뭐 대통령 경호라도 하려고 그러냐?
“아니, 총 안 쓰면 저를 경호원으로 쓰려는 이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확실한 거 맞아요?”
― 맞다니까. 나도 살짝 의심스러워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이상한 구석은 없어. 그리고 애초에 나한테 부탁한 사람도 내가 엄청 신뢰하는 형이야.
“정말요?”
― 아, 정말이라니까. 무조건 너여야 된대. 엄청나게 애타게 찾고 있대.
“아니, 왜요?”
― 그걸 내가 아냐? 근데 이쪽이 엄청 절박하게 나오는 데다가, 너한테 다 맞춘대. 해 달라는 조건 다 들어주겠대.
짧게 정적이 일었다. 민재는 유헌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유헌은 믿기지 않는 제안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고민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형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 혹시 아냐. 너의 광팬이었다던가, 이런 거일지.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 그 형이 나한테 얘기한 게 일주일 전이야. 너한테 다리 이상하게 놓는 걸까 봐 이것저것 찾느라 오늘까지 꾸물거린 거고. 확인해 봤는데 이상한 건 정말 없어.
“믿을 만한 거예요?”
― 아,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쪽이 너무 절박하대. 오늘 그 형이 거의 울 것 같은 상태로 전화를 했어. 그 의뢰인이 너를 정말 미친 듯이 만나고 싶어 한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그 사람이랑 만나야 된다고 다 죽어 가길래 내가 너 오늘 보낸다고 했어.
“아, 형!”
결국 유헌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강제로 만나게 된 상황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 유헌아. 그간 너랑 내 정을 봐서라도 한 번만 나가 줘라. 내가 다 확인했어. 이상한 거 정말 없다니까?
“아니, 형. 그래도 그렇죠. 이렇게 갑자기 다짜고짜…….”
― 내가 그 형한테 받은 게 워낙 많아서 그래. 내 체면 생각해서 한 번만 나가 줘. 문제 될 거 없을 거야. 나 이제 심사 들어가야 되거든? 만날 장소랑 시간, 문자로 보내 놓을 테니까 그거 확인해라. 끊는다?
“아, 형! 민재 형!”
폭풍이 휘몰아친 기분이었다. 유헌은 끊긴 핸드폰에 대고 몇 번이고 민재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 민재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시간과 장소만 적힌 간결한 문자였다.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다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오더니, 누군가가 간절하게 유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고,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덜컥 약속을 잡아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상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서열이 확실한 체육계에서 가능한 일이지도 않을뿐더러 민재에게 신세 진 일이 너무도 많았다.
[유헌아, 눈 딱 감고 한 번만 만나 봐. 너한테 득이면 득이지 실일 것 같지는 않다.]
[부탁한다! 나 좀 살려 줘.]
유헌은 장소에 이어 도착한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에게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낼 때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해 준 사람이 민재였다. 모두가 등을 돌린 후에도 유일하게 유헌의 곁에 남아 챙겨 준 이기도 했다. 그런 민재가 이렇게나 급작스럽게 체면까지 강조해 가며 부탁을 했으니 무시할 수 없었다.
“오후 5시. 익선동 J빌딩 915호라.”
게다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유헌을 기억하고 있는지, 대체 어떤 인연이 있기에 그렇게나 절박하게 찾고 있는지.
결국 그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헝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더럽게 구석진 곳에 있네.”
허겁지겁 샤워를 하고, 헐레벌떡 옷을 차려입고 지하철로 달려갔던 유헌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민재가 전해 준 빌딩은 꽤나 굽이진 곳에 있었다.
유난히 밝은 길눈으로도 돌고 돌아 도착한 빌딩은 이질적이었다. 고궁(古宮)을 품고 있는 동네의 고즈넉함이 잔뜩 묻어 있는 건물인데도, 이상하게 주위와 어우러지지 않았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그냥 건물 자체가 이상했다.
“915호면 9층일 텐데.”
일단 915호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가락까지 써 가며 서너 번 세어 본 건물 층수는 분명 다섯 개였다. 눈 씻고 찾아봐도 9층이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민재가 보내 준 주소지는 분명 이곳이었다. 익선동에 있는 J빌딩은 이곳 하나였고, 안내판도 이곳이 목적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꼬이네.”
유헌의 한숨이 제법 컸다. 건물의 입구를 빤히 바라만 보던 그는 결국 어렵사리 발을 뗐고, 괜히 곱아드는 손을 꽉 쥔 주먹으로 감춘 채 로비로 향했다. 작은 건물이었다.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는데 안내 데스크가 보였다.
그곳엔 각이 잡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 대신 찌든 피로가 묻어 있는 중년의 경비가 앉아 있었다. 경비는 다가오는 유헌을 보면서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용무를 물었다.
“혹시 915호가 이 건물에 있나요?”
경비의 눈빛에서 한심함이 보였다.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유헌 역시 참 바보 같은 물음이라 생각했다. 5층짜리 건물에서 915호를 묻다니. 얼굴로 열이 몰렸다.
“5층 제일 안쪽.”
“예?”
“5층에서 내려서 제일 끝.”
유헌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용건이 끝났음을 안 경비가 조금의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5층짜리 건물에 정말 915호가 있을 줄이야.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게 아니면 모르는 새에 이런 게 새로운 유행이라도 된 건가.
느릿하게 내려온 엘리베이터는 더 느릿한 속도로 올라갔다. 많이 들어 본 목소리가 5층임을 알리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모든 게 느렸다.
“제일 안쪽…….”
그새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전염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잠재의식 속의 두려움이 유헌의 발을 늦추고 있는 건지,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민재가 봤더라면 달팽이 새끼라며 혀를 끌끌 찰 만한 속도였다.
“505, 506, 507…….”
작은 건물은 생각보다 방이 많았다. 유헌의 발걸음에 따라 커지던 숫자는 끝으로 가자 형태를 아예 뒤바꿨다.
“915.”
915호는 509호 옆이었다. 처음부터 915호는 아니었는지, 호수를 알리는 푯말이 다른 방들과 달랐다.
「초인종이 고장 났어요. 두드려 주세요.」
915라는 숫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더 아래로 시선을 옮기니 단정한 글씨가 적힌 작은 칠판이 보였다.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팻말치고는 꽤나 정성이 가득했다.
“뭘까.”
유헌은 목소리를 내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듣고 나면 누구든 돌아볼 법한 매력적인 저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을 꺼내는 일 자체를 꺼렸다. 구겨진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눈에 담았다. 4시 58분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모조리 뱉어 내고 문을 두드렸다. 어느새 오른손보다 편해진 왼손 주먹이 소리를 냈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머뭇거림과 싸우다 겨우 용기를 냈건만, 몇 번이나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결국 유헌은 두드림을 멈추고 크게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마신 바깥공기가 폐부로 가득 차자 기분이 이상했다.
“누구세요?”
유헌이 모르는 새에 약속이 파투 나기라도 한 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여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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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은 무뎠다.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뎌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무뎌서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의 아침은 늘 같았다. 햇빛이 그대로 투과되는 남색 커튼이 오늘도 쏟아지는 밝음을 막지 못했고, 솜이 죽은 이불과 잔뜩 눌린 베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방을 뒤덮고 있는 쓸쓸한 냄새도 똑같았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같으리라 생각했다.
― 야! 이 새끼야, 너는 핸드폰을 폼으로 들고 다니냐?
유난히 시끄럽던 벨소리가 유헌의 잠을 깨우기 전까지는.
“민재 형?”
― 하이고오. 누군지 바로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열다섯 번이나 걸어야 받는 귀하신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전화예요.”
― 새벽 같은 소리 하네. 곧 있으면 12시다, 12시야.
유헌이 베개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이미 헝클어져 있는 머리를 더 엉망으로 만들고 나니 그제야 바닥에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민재의 말마따나 새벽이라 우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시간이었다.
― 유헌아. 형 부탁 좀 들어줘라.
“아니, 다짜고짜 전화해서 갑자기 뭔 부탁이에요?”
―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그래. 그리고 너만 도와줄 수 있는 일이야.
“지금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형을 어떻게…….”
해가 중천에 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잠기운이 남아 몽롱한 상태였다. 유헌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민재의 목소리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 어떤 사람이 너를 경호원으로 꼭 쓰고 싶대.
“저를요?”
― 어. 꼭 너여야 한대.
“그게 말이 돼요?”
― 말이 안 될 건 뭐야. 너 겁나 유명한 국가대표 선수였어.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유헌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민재의 말을 곱씹었다. 몇 번을 되짚어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불명예스럽게 태극 마크를 반납한 게 어언 5년 전이었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신기할 일인데, 경력까지 기억해 그를 찾는 이가 있다니. 믿기 힘들었다.
“손목 뭉개진 사격 선수를 누가 경호원으로 쓰고 싶어 해요.”
― 인마, 요즘은 총 못 쏴도 경호해. 너 뭐 대통령 경호라도 하려고 그러냐?
“아니, 총 안 쓰면 저를 경호원으로 쓰려는 이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확실한 거 맞아요?”
― 맞다니까. 나도 살짝 의심스러워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이상한 구석은 없어. 그리고 애초에 나한테 부탁한 사람도 내가 엄청 신뢰하는 형이야.
“정말요?”
― 아, 정말이라니까. 무조건 너여야 된대. 엄청나게 애타게 찾고 있대.
“아니, 왜요?”
― 그걸 내가 아냐? 근데 이쪽이 엄청 절박하게 나오는 데다가, 너한테 다 맞춘대. 해 달라는 조건 다 들어주겠대.
짧게 정적이 일었다. 민재는 유헌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유헌은 믿기지 않는 제안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고민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형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 혹시 아냐. 너의 광팬이었다던가, 이런 거일지.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 그 형이 나한테 얘기한 게 일주일 전이야. 너한테 다리 이상하게 놓는 걸까 봐 이것저것 찾느라 오늘까지 꾸물거린 거고. 확인해 봤는데 이상한 건 정말 없어.
“믿을 만한 거예요?”
― 아,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쪽이 너무 절박하대. 오늘 그 형이 거의 울 것 같은 상태로 전화를 했어. 그 의뢰인이 너를 정말 미친 듯이 만나고 싶어 한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그 사람이랑 만나야 된다고 다 죽어 가길래 내가 너 오늘 보낸다고 했어.
“아, 형!”
결국 유헌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강제로 만나게 된 상황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 유헌아. 그간 너랑 내 정을 봐서라도 한 번만 나가 줘라. 내가 다 확인했어. 이상한 거 정말 없다니까?
“아니, 형. 그래도 그렇죠. 이렇게 갑자기 다짜고짜…….”
― 내가 그 형한테 받은 게 워낙 많아서 그래. 내 체면 생각해서 한 번만 나가 줘. 문제 될 거 없을 거야. 나 이제 심사 들어가야 되거든? 만날 장소랑 시간, 문자로 보내 놓을 테니까 그거 확인해라. 끊는다?
“아, 형! 민재 형!”
폭풍이 휘몰아친 기분이었다. 유헌은 끊긴 핸드폰에 대고 몇 번이고 민재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 민재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시간과 장소만 적힌 간결한 문자였다.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다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오더니, 누군가가 간절하게 유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고,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덜컥 약속을 잡아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상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서열이 확실한 체육계에서 가능한 일이지도 않을뿐더러 민재에게 신세 진 일이 너무도 많았다.
[유헌아, 눈 딱 감고 한 번만 만나 봐. 너한테 득이면 득이지 실일 것 같지는 않다.]
[부탁한다! 나 좀 살려 줘.]
유헌은 장소에 이어 도착한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에게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낼 때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해 준 사람이 민재였다. 모두가 등을 돌린 후에도 유일하게 유헌의 곁에 남아 챙겨 준 이기도 했다. 그런 민재가 이렇게나 급작스럽게 체면까지 강조해 가며 부탁을 했으니 무시할 수 없었다.
“오후 5시. 익선동 J빌딩 915호라.”
게다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유헌을 기억하고 있는지, 대체 어떤 인연이 있기에 그렇게나 절박하게 찾고 있는지.
결국 그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헝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더럽게 구석진 곳에 있네.”
허겁지겁 샤워를 하고, 헐레벌떡 옷을 차려입고 지하철로 달려갔던 유헌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민재가 전해 준 빌딩은 꽤나 굽이진 곳에 있었다.
유난히 밝은 길눈으로도 돌고 돌아 도착한 빌딩은 이질적이었다. 고궁(古宮)을 품고 있는 동네의 고즈넉함이 잔뜩 묻어 있는 건물인데도, 이상하게 주위와 어우러지지 않았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그냥 건물 자체가 이상했다.
“915호면 9층일 텐데.”
일단 915호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가락까지 써 가며 서너 번 세어 본 건물 층수는 분명 다섯 개였다. 눈 씻고 찾아봐도 9층이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민재가 보내 준 주소지는 분명 이곳이었다. 익선동에 있는 J빌딩은 이곳 하나였고, 안내판도 이곳이 목적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꼬이네.”
유헌의 한숨이 제법 컸다. 건물의 입구를 빤히 바라만 보던 그는 결국 어렵사리 발을 뗐고, 괜히 곱아드는 손을 꽉 쥔 주먹으로 감춘 채 로비로 향했다. 작은 건물이었다.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는데 안내 데스크가 보였다.
그곳엔 각이 잡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 대신 찌든 피로가 묻어 있는 중년의 경비가 앉아 있었다. 경비는 다가오는 유헌을 보면서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용무를 물었다.
“혹시 915호가 이 건물에 있나요?”
경비의 눈빛에서 한심함이 보였다.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유헌 역시 참 바보 같은 물음이라 생각했다. 5층짜리 건물에서 915호를 묻다니. 얼굴로 열이 몰렸다.
“5층 제일 안쪽.”
“예?”
“5층에서 내려서 제일 끝.”
유헌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용건이 끝났음을 안 경비가 조금의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5층짜리 건물에 정말 915호가 있을 줄이야.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게 아니면 모르는 새에 이런 게 새로운 유행이라도 된 건가.
느릿하게 내려온 엘리베이터는 더 느릿한 속도로 올라갔다. 많이 들어 본 목소리가 5층임을 알리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모든 게 느렸다.
“제일 안쪽…….”
그새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전염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잠재의식 속의 두려움이 유헌의 발을 늦추고 있는 건지,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민재가 봤더라면 달팽이 새끼라며 혀를 끌끌 찰 만한 속도였다.
“505, 506, 507…….”
작은 건물은 생각보다 방이 많았다. 유헌의 발걸음에 따라 커지던 숫자는 끝으로 가자 형태를 아예 뒤바꿨다.
“915.”
915호는 509호 옆이었다. 처음부터 915호는 아니었는지, 호수를 알리는 푯말이 다른 방들과 달랐다.
「초인종이 고장 났어요. 두드려 주세요.」
915라는 숫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더 아래로 시선을 옮기니 단정한 글씨가 적힌 작은 칠판이 보였다.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팻말치고는 꽤나 정성이 가득했다.
“뭘까.”
유헌은 목소리를 내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듣고 나면 누구든 돌아볼 법한 매력적인 저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을 꺼내는 일 자체를 꺼렸다. 구겨진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눈에 담았다. 4시 58분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모조리 뱉어 내고 문을 두드렸다. 어느새 오른손보다 편해진 왼손 주먹이 소리를 냈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머뭇거림과 싸우다 겨우 용기를 냈건만, 몇 번이나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결국 유헌은 두드림을 멈추고 크게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마신 바깥공기가 폐부로 가득 차자 기분이 이상했다.
“누구세요?”
유헌이 모르는 새에 약속이 파투 나기라도 한 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여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