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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유헌이라고 하는데요. 경호 관련한 일로 약속이 돼 있습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벌써 5시구나. 몰랐네.”
여자는 쾌활했다. 뿜어내는 분위기도 밝았다. 그러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 하나는 비상했던 유헌이었다. 사람 얼굴 외우는 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여자는 그의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민재의 말대로 정말 광팬이기라도 했던 걸까. 실없다는 생각도 잠시,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났다.
“저를 엄청 찾으셨다고…….”
“아, 네. 근데 그분은 제가 아니라 저희 아가씨예요.”
“아가씨요?”
“네. 지금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가셨는데, 금방 오실 거예요. 차 한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아가씨’라는 단어에 단숨에 정리됐다. 본능적으로 한 여인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쌓여 있는 기억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유헌이 차를 거절하자 여자는 작업실 안쪽에 있는 소파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복도 비스무리하게 생긴 통로를 지나자 커다란 창이 보였다. 거의 벽 전체를 덮고 있었다.
커다란 창 앞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창을 마주 보고 있는 책상에는 온갖 종이 더미와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하얀 소파가 있고, 소파 왼쪽 벽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힌 붙박이 책장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푸른 바다가 그려진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그림이 담고 있는 바다의 푸름은 자연스레 큰 창이 품고 있는 하늘의 푸름과 이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무서울 정도로 익숙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자부할 수 있던 시절, 그의 눈에 들어차던 분위기와 색감이었다. 하늘과 바다라면 사족을 못 썼던 사람, 그래서 하늘과 바다를 닮은 색을 보면 언제나 웃었던 사람.
유헌이 감히 그의 세상이었노라 자부하는 사람이 만들어 내던 공간과 너무도 똑같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유헌 씨 맞으신가요?”
참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닿아 오자 유헌의 몸이 빳빳해졌다. 그에게 문을 열어 줬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헌은 딱딱하게 굳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몸을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데, 목소리의 주인을 눈으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듣지 못했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목소리였다. 눈을 떠도, 감아도 아른거려서 수도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목소리기도 했다.
“이유헌 씨?”
결국 유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쥔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이유헌 씨 맞으신 거죠?”
뒤로 돌아 마주한 광경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공간이 멈춘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유헌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귓가에 울렸던 목소리가 잘게 쪼개져 계속해서 맴돌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고, 잔뜩 긴장했던 손은 힘이 풀려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아니신가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아니라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저는 서이영이라고 합니다. 이유헌 씨 뵙고 싶어서 지인분께 부탁한 사람이요.”
꿈이 아니라면,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멀어진 옛 연인이 그의 눈앞에 있을 리 없었다.
▲▽▲
유헌이 이영을 처음 만난 건 열일곱이었다. 성당 소속의 고아원에서 후원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유헌은 그곳에 살고 있는 고아였고, 이영은 후원회장인 국회의원 서인겸의 딸이었다.
‘저기, 혹시 여기 바오로관이 어딘지 아세요?’
‘네?’
‘바오로관에 가야 하는데 어딘지를 몰라서요.’
‘아……. 저쪽으로 쭉 가서 커다란 나무 뒤쪽으로 꺾어지면 나와요.’
첫 대화는 웃음이 날 정도로 별게 없었다. 아버지의 자선 활동에 동원된 부잣집 아가씨는 길을 몰라 헤매는 중이었고, 세상이 무료한 소년은 평소처럼 성당 주위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린 유헌의 눈에 이영은 천사 같았다. 보자마자 ‘예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호르몬이 폭발하는 나이에도 이성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유헌이건만, 이영을 본 순간에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한 이영이 멀어질 때까지, 유헌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도, 커다란 눈망울도, 새빨갛던 입술도,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난생처음 느낀 감각이었다.
‘이유헌!’
‘신부님?’
‘야, 인마. 내가 너 찾다가 마른다, 말라. 빨리 안 올래?’
이영에게 홀려 멍해져 있을 때, 잔뜩 애탄 표정의 요셉 신부가 유헌을 질질 끌고 갔다.
‘오늘 후원의 밤이라 증서 받고 사진 찍어야 된다고 내가 몇 번 말했냐. 응?’
‘아……. 그거 오늘이에요?’
‘오늘이에요? 그래 오늘이다, 인마! 빨리 와!’
귀 한쪽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방향이 익숙했다. 유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요셉 신부에게 물었다.
‘요셉 신부님, 행사 바오로관에서 해요?’
‘한 일주일은 설명하지 않았니?’
이름 모를 예쁜 여자애가 묻던 곳과 같은 곳에 간다니. 유헌은 곧장 신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지만, 유헌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제 발로 앞장서 나갔다.
‘신부님! 늦어요! 얼른 가야죠!’
‘어쭈?’
바오로관 안으로 들어가니 유헌을 기다리고 있던 수녀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가 대충 매무새를 다듬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말끔해졌다.
‘유헌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동 잘해야 돼. 너한테 둘도 없는 기회야.’
유독 유헌을 아끼던 글라라 수녀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거물 정치인이 꽤 큰돈을 들여 투자하는 자선사업이었다. 스포츠 인재 육성을 위한 노력이라며 선수층이 얇은 분야에 소외 계층 아이들을 끌어들였다.
공문이 내려오자 고아원의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유헌을 찾았다. 당장 내년이면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없는 아이인지라 걱정이 쏟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운동신경이 워낙 좋았다.
여러모로 조건이 들어맞으니 후원자 쪽에서도 빠르게 승낙했다. 정작 유헌 본인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딱히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는지라 몰랐지만, 글라라 수녀의 말대로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일단 후원하겠다고 이름을 밝힌 국회의원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서인겸’이었고, 유헌이 몸 담그게 되는 분야도 ‘사격’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경기도 아니고, 한국 선수가 좋은 성적을 냈던 종목이었다.
그러니 유헌이 잘만 해서 태극 마크라도 달게 된다면, 너무 이른 나이부터 드리워져 있는 인생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물러가게 하리라고 믿었다. 유헌 말고, 유헌을 둘러싼 이들이 그렇게 믿었다.
‘아니, 국가대표 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뭐 어떻게 될 줄 알고 기회래요.’
‘열심히 하면 되지!’
퉁퉁거림에 따끔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글라라 수녀의 한마디에 다른 수녀들의 거드는 말이 더해졌다.
유헌은 그 어린 나이에도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다. 노력이면 다 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오로지 노력대로 세상이 굴러가면 유헌에게도 멀쩡한 부모가 있었을 테니.
‘이쪽입니다, 의원님.’
열심히 해도 소용없는 게 있다며 툭 한마디 던지려는 순간, 원장 신부가 처음 보는 얼굴과 함께 나타났다.
‘유헌아, 인사드리렴. 오늘부터 너를 후원해 주실 서인겸 의원님이시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수녀들이 뒤로 자리를 비키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익숙하게 악수를 청했다.
‘네가 유헌이니? 훤칠하게 잘생겼네.’
얼떨결에 내민 손을 마주 잡으니 인겸의 얼굴이 더 환하게 변했다. 누가 봐도 인자한 미소였지만, 유헌은 어쩐지 그가 떨떠름했다. 쏟아지는 원장 신부의 눈빛 때문에 그런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어?’
인겸에게 머물렀던 시선은 그의 뒤에 선 여자아이에게로 옮겨졌다. 내내 아른거린 얼굴이었다. 이영 역시 유헌을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져 있었다.
‘아는 사이니?’
‘아까 제가 여기로 오는 길 물어봐서 그때 봤어요.’
이영은 차분하게 대답했고, 잠시 굳어졌던 인겸의 얼굴은 금세 풀어져 다시 활짝 웃는 낯을 유지했다.
‘둘이 미리 만났다니 신기하구나. 이 아이는 내 딸이다. 서이영이야. 유헌이 너랑 나이가 같단다.’
유헌은 이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마주하니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얼굴에도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괜한 부끄러움에 눈을 피하고 싶은데, 동시에 계속해서 얼굴을 보고 싶어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그럼 행사 시작하러 가 볼까요?’
‘예, 의원님. 유헌아, 너도 얼른 오거라.’
두 아이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인겸은 서둘러 유헌과 이영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 이후에 이뤄진 행사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유헌과 인겸이 장학 증서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고, 원장 신부를 껴서 셋이 사진을 한 번 더 찍고, 기자들과 몇 가지 인터뷰를 하고 끝이 났다.
흥미로운 점이라고는 이영과 유헌이 끊임없이 서로를 훔쳐봤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유헌은 한참이 지나도록 이영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했다. 이 순간이 유헌의 세상이 온통 이영으로 바뀐 순간이었으니까.
“이유헌이라고 하는데요. 경호 관련한 일로 약속이 돼 있습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벌써 5시구나. 몰랐네.”
여자는 쾌활했다. 뿜어내는 분위기도 밝았다. 그러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 하나는 비상했던 유헌이었다. 사람 얼굴 외우는 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여자는 그의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민재의 말대로 정말 광팬이기라도 했던 걸까. 실없다는 생각도 잠시,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났다.
“저를 엄청 찾으셨다고…….”
“아, 네. 근데 그분은 제가 아니라 저희 아가씨예요.”
“아가씨요?”
“네. 지금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가셨는데, 금방 오실 거예요. 차 한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아가씨’라는 단어에 단숨에 정리됐다. 본능적으로 한 여인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쌓여 있는 기억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유헌이 차를 거절하자 여자는 작업실 안쪽에 있는 소파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복도 비스무리하게 생긴 통로를 지나자 커다란 창이 보였다. 거의 벽 전체를 덮고 있었다.
커다란 창 앞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창을 마주 보고 있는 책상에는 온갖 종이 더미와 컴퓨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하얀 소파가 있고, 소파 왼쪽 벽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힌 붙박이 책장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푸른 바다가 그려진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그림이 담고 있는 바다의 푸름은 자연스레 큰 창이 품고 있는 하늘의 푸름과 이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무서울 정도로 익숙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자부할 수 있던 시절, 그의 눈에 들어차던 분위기와 색감이었다. 하늘과 바다라면 사족을 못 썼던 사람, 그래서 하늘과 바다를 닮은 색을 보면 언제나 웃었던 사람.
유헌이 감히 그의 세상이었노라 자부하는 사람이 만들어 내던 공간과 너무도 똑같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유헌 씨 맞으신가요?”
참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닿아 오자 유헌의 몸이 빳빳해졌다. 그에게 문을 열어 줬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헌은 딱딱하게 굳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몸을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데, 목소리의 주인을 눈으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듣지 못했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목소리였다. 눈을 떠도, 감아도 아른거려서 수도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목소리기도 했다.
“이유헌 씨?”
결국 유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쥔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이유헌 씨 맞으신 거죠?”
뒤로 돌아 마주한 광경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공간이 멈춘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유헌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귓가에 울렸던 목소리가 잘게 쪼개져 계속해서 맴돌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고, 잔뜩 긴장했던 손은 힘이 풀려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아니신가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아니라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저는 서이영이라고 합니다. 이유헌 씨 뵙고 싶어서 지인분께 부탁한 사람이요.”
꿈이 아니라면,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멀어진 옛 연인이 그의 눈앞에 있을 리 없었다.
▲▽▲
유헌이 이영을 처음 만난 건 열일곱이었다. 성당 소속의 고아원에서 후원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유헌은 그곳에 살고 있는 고아였고, 이영은 후원회장인 국회의원 서인겸의 딸이었다.
‘저기, 혹시 여기 바오로관이 어딘지 아세요?’
‘네?’
‘바오로관에 가야 하는데 어딘지를 몰라서요.’
‘아……. 저쪽으로 쭉 가서 커다란 나무 뒤쪽으로 꺾어지면 나와요.’
첫 대화는 웃음이 날 정도로 별게 없었다. 아버지의 자선 활동에 동원된 부잣집 아가씨는 길을 몰라 헤매는 중이었고, 세상이 무료한 소년은 평소처럼 성당 주위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린 유헌의 눈에 이영은 천사 같았다. 보자마자 ‘예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호르몬이 폭발하는 나이에도 이성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유헌이건만, 이영을 본 순간에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한 이영이 멀어질 때까지, 유헌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도, 커다란 눈망울도, 새빨갛던 입술도,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난생처음 느낀 감각이었다.
‘이유헌!’
‘신부님?’
‘야, 인마. 내가 너 찾다가 마른다, 말라. 빨리 안 올래?’
이영에게 홀려 멍해져 있을 때, 잔뜩 애탄 표정의 요셉 신부가 유헌을 질질 끌고 갔다.
‘오늘 후원의 밤이라 증서 받고 사진 찍어야 된다고 내가 몇 번 말했냐. 응?’
‘아……. 그거 오늘이에요?’
‘오늘이에요? 그래 오늘이다, 인마! 빨리 와!’
귀 한쪽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방향이 익숙했다. 유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요셉 신부에게 물었다.
‘요셉 신부님, 행사 바오로관에서 해요?’
‘한 일주일은 설명하지 않았니?’
이름 모를 예쁜 여자애가 묻던 곳과 같은 곳에 간다니. 유헌은 곧장 신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지만, 유헌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제 발로 앞장서 나갔다.
‘신부님! 늦어요! 얼른 가야죠!’
‘어쭈?’
바오로관 안으로 들어가니 유헌을 기다리고 있던 수녀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가 대충 매무새를 다듬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말끔해졌다.
‘유헌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동 잘해야 돼. 너한테 둘도 없는 기회야.’
유독 유헌을 아끼던 글라라 수녀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거물 정치인이 꽤 큰돈을 들여 투자하는 자선사업이었다. 스포츠 인재 육성을 위한 노력이라며 선수층이 얇은 분야에 소외 계층 아이들을 끌어들였다.
공문이 내려오자 고아원의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유헌을 찾았다. 당장 내년이면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없는 아이인지라 걱정이 쏟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운동신경이 워낙 좋았다.
여러모로 조건이 들어맞으니 후원자 쪽에서도 빠르게 승낙했다. 정작 유헌 본인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딱히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는지라 몰랐지만, 글라라 수녀의 말대로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일단 후원하겠다고 이름을 밝힌 국회의원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서인겸’이었고, 유헌이 몸 담그게 되는 분야도 ‘사격’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경기도 아니고, 한국 선수가 좋은 성적을 냈던 종목이었다.
그러니 유헌이 잘만 해서 태극 마크라도 달게 된다면, 너무 이른 나이부터 드리워져 있는 인생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물러가게 하리라고 믿었다. 유헌 말고, 유헌을 둘러싼 이들이 그렇게 믿었다.
‘아니, 국가대표 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뭐 어떻게 될 줄 알고 기회래요.’
‘열심히 하면 되지!’
퉁퉁거림에 따끔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글라라 수녀의 한마디에 다른 수녀들의 거드는 말이 더해졌다.
유헌은 그 어린 나이에도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다. 노력이면 다 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오로지 노력대로 세상이 굴러가면 유헌에게도 멀쩡한 부모가 있었을 테니.
‘이쪽입니다, 의원님.’
열심히 해도 소용없는 게 있다며 툭 한마디 던지려는 순간, 원장 신부가 처음 보는 얼굴과 함께 나타났다.
‘유헌아, 인사드리렴. 오늘부터 너를 후원해 주실 서인겸 의원님이시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수녀들이 뒤로 자리를 비키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익숙하게 악수를 청했다.
‘네가 유헌이니? 훤칠하게 잘생겼네.’
얼떨결에 내민 손을 마주 잡으니 인겸의 얼굴이 더 환하게 변했다. 누가 봐도 인자한 미소였지만, 유헌은 어쩐지 그가 떨떠름했다. 쏟아지는 원장 신부의 눈빛 때문에 그런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어?’
인겸에게 머물렀던 시선은 그의 뒤에 선 여자아이에게로 옮겨졌다. 내내 아른거린 얼굴이었다. 이영 역시 유헌을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져 있었다.
‘아는 사이니?’
‘아까 제가 여기로 오는 길 물어봐서 그때 봤어요.’
이영은 차분하게 대답했고, 잠시 굳어졌던 인겸의 얼굴은 금세 풀어져 다시 활짝 웃는 낯을 유지했다.
‘둘이 미리 만났다니 신기하구나. 이 아이는 내 딸이다. 서이영이야. 유헌이 너랑 나이가 같단다.’
유헌은 이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마주하니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얼굴에도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괜한 부끄러움에 눈을 피하고 싶은데, 동시에 계속해서 얼굴을 보고 싶어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그럼 행사 시작하러 가 볼까요?’
‘예, 의원님. 유헌아, 너도 얼른 오거라.’
두 아이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인겸은 서둘러 유헌과 이영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 이후에 이뤄진 행사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유헌과 인겸이 장학 증서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고, 원장 신부를 껴서 셋이 사진을 한 번 더 찍고, 기자들과 몇 가지 인터뷰를 하고 끝이 났다.
흥미로운 점이라고는 이영과 유헌이 끊임없이 서로를 훔쳐봤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유헌은 한참이 지나도록 이영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했다. 이 순간이 유헌의 세상이 온통 이영으로 바뀐 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