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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사고로 이영과 헤어지고, 몇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그리워만 하고 있을 때도, 유헌은 이영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보고 싶었다. 그가 기억하는 이영의 마지막은 스물셋이었으니, 그 이후의 이영은 어찌 되었을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웃고 있을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도 이영에 대한 그리움만은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하루도 그녀를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같이 곱씹었고, 매일같이 상상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대상을 이렇게 만나게 되자, 유헌은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이영은 오랫동안 그려 왔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간이 만들어 준 분위기가 더해진 이영은 눈물이 고이도록 아름다웠다.
“이유헌 씨?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지금 안색이 너무…….”
유헌이 바짝 언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이영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내쉬는 숨조차 가둬 버린 채 다가오는 이영을 바라봤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 볼을 그러쥘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부드러운 얼굴을 감싸고 한참이나 어루만지고 싶었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유헌은 그와 이영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괜찮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줄 알고 걱정했어요. 아프신 거면 말씀해 주세요.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유헌 씨를 왜 찾았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을까요?”
이영이 유헌에게 자리를 권했다. 유헌은 뭔가에 홀린 듯이 이영을 바라보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녀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다.
“혹시 저를 예전에 보신 적 있나요?”
조심스럽게 던져진 질문은 그대로 유헌의 가슴에 꽂혀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이영이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영의 머릿속에 유헌과의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아는지조차 남아 있지 않아 저렇게나 떨리는 목소리로, 저렇게나 떨리는 눈으로 물어 올 정도였다.
“……네. 있습니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유헌이 답했다. 단순히 본 적만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절절하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애달아 했고,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었다.
“그러면…… 제가 기억을 아예 잃어버린 것도 아시나요?”
당장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서 유헌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그대로 뛰쳐나가 병원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생생했다.
“네. 알아요.”
목소리가 잘게 떨려 왔다. 티 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썼건만, 오랜만에 만난 연인 앞에서는 수많은 각오도 무용지물이 됐다.
“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 중인데, 제가 열여덟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어요.”
“일기장이요?”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없어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조금이나마 흔적을 찾았거든요.”
유헌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자 이영은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근데 있는 거라고는 일기장 하나라서……. 여기에 이유헌 씨 이름이 많이 나와서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해 봤다가 유헌 씨가 제 아버지랑 같이 사진을 찍은 걸 보고 연락드렸어요.”
처음 유헌을 만났다던 날 이후로 그의 이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에 등장했다. 이영의 일기장이 아니라 유헌의 일기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에 대한 얘기들로 가득했다.
오래도록 좋아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친한 친구였을까. 혼자 고민하던 이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인터넷에 검색했고, 사진 속에 있는 남자의 정보가 곧장 쏟아졌다. ‘전 사격 국가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올림픽에서 딴 메달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격 메달리스트와의 접점이 있기는 힘드니 동명이인이 아닐까 했던 의심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인겸의 후원 증서를 받은 사진이 오래된 뉴스 자료로 남아 있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유헌을 아는 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이영에게는 정보를 살 수 있는 돈과 인맥이 있었다.
유헌의 근황을 알아낸 뒤에는 곧장 그를 만나기 위한 명분을 만들었다. 사격 선수들이 경호 업무로 빠지는 건 일반적인 수순이었으니, 경호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흘리며 유헌을 콕 집어 요구했다.
“제가 잃어버린 기억을 다 알고 계시는 분 같아서 유헌 씨를 어떻게든 만나 뵙고 싶었어요.”
이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유헌은 이영이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기억했다. 잊을까 두려워 매일같이 곱씹었으니.
“저한테…… 제 기억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질문 앞에서 유헌이 굳어 갔다. 모두 쏟아 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열일곱의 그날부터 처음으로 나눴던 키스, 처음으로 나눴던 밤, 서로에게 붙어 속삭이던 밀어, 전부 나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말하면 이영은 다시 또 유헌에게 묶여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 품에 가두고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격리시키고 싶지만, 이영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잠룡이라 불리던 거물급 국회의원은 이제 대선 후보가 되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었다. 이영은 그런 이의 딸이었고, 결혼마저도 하나의 사업이 되는 세상 속에 살았다.
총을 잡다 손을 잃은 천애고아와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였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유헌은 다시 또 도망쳤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이 다시 그를 찾았음에도, 그토록 애달아 하던 사랑과 드디어 마주했음에도, 그는 다시 등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건 사실이에요. 이영 씨 아버지께 후원받아서 운동했었거든요. 그렇지만 이후에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유헌은 표정을 지워 내고 거짓말을 했다. 이영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그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또다시 가슴이 저릿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차라리 유헌 혼자 아픈 편이 나았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면 이영 역시 힘들어질 터였다. 원하지 않는 전개였다.
“별다른 도움이 못 될 거예요. 이영 씨에 대해서는 서인겸 의원님 때문에 굵직한 소식을 들었던 게 전부입니다. 부탁하신 일은 제가 맡을 게 못 되네요.”
유헌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영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유헌 씨!”
잡아채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헌은 도망치듯 작업실에서 뛰쳐나왔다.
‘지금이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의원님.’
‘지금이 마지막이야.’
5년 전, 끔찍하던 마지막의 기억이 유헌을 덮쳤다. 이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그를 밀어내던 인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유난히도 느린 엘리베이터가 속을 태웠지만, 유헌은 이영에게 붙잡히지 않고 건물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을 저녁의 쌀쌀함이 몸을 시리게 했지만, 애달픔에 얼어붙은 마음 탓인지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발을 재촉했다. 좁은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이영의 얼굴이 맺혔지만, 잊어야 할 모습이었다. 5년간 어떻게든 버텼으니 오늘의 기억으로 더 오랜 세월을 버티면 되리라고, 유헌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떻게 됐냐.]
[잘했어?]
삐걱대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나니 민재로부터 문자가 왔다. 답장할 여력이 없어 핸드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도 아른거리는 이영의 상(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좀 나을까 싶어 식탁 위의 약상자를 들췄다. 손목이 총을 거부하고, 이영과 헤어지게 된 이후로부터 지독한 불면과 싸워 왔다. 약이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턱턱 막혀 오는 숨이 시야를 까맣게 가려 갈 쯤,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민재와 고아원 식구들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사는 유헌이었다. 찾아올 이가 없었다.
“누구세요?”
깨질 듯 아파 오는 머리 때문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갔다.
“……서이영입니다.”
유헌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어 인터폰을 다시 확인하니 분명 이영이었다. 걱정과 불안함이 가득 서린 얼굴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곧장 문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는 물음은 끝맺지 못했다. 이영이 울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울면서 온 건지 눈은 이미 새빨개져 있고, 유헌과 마주친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렇게 무턱대고 집 알아내서 찾아오는 거 실례라는 거 아는데, 제가……. 제가 너무…….”
잔뜩 잠긴 목소리는 연신 눈물만 훔쳐 낼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일기장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어요.”
유헌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는 동안, 이영은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유헌과 이영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코와 볼에 생크림을 묻힌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이영이 유헌에게 몸을 바짝 기댄 채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고, 유헌 역시 이영을 감싼 모습이었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는 사진에는 바랜 잉크로 ‘2012. 03. 22.’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날은 유헌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다.
‘제대로 찍히는 건 맞아?’
‘맞다니까!’
‘어디 봐야 돼? 여기?’
‘음……. 아마 맞을걸?’
‘뭐야, 서이영. 아무것도 모르고 사 온 거야?’
‘아, 어떻게든 찍히겠지! 얼른 봐! 얼른! 나 찍는다?’
어디를 보고 찍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면서 무작정 안겨 오는 이영이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셔터를 누르든 말든 그저 이마에 입을 맞추기 바빴다.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릿해질 정도로 행복하고, 그리운 기억이었다.
“이 사진을 보면 사귀던 사이인 게 분명한데……. 제가 기억을 하나도 못 하니까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사고로 이영과 헤어지고, 몇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그리워만 하고 있을 때도, 유헌은 이영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보고 싶었다. 그가 기억하는 이영의 마지막은 스물셋이었으니, 그 이후의 이영은 어찌 되었을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웃고 있을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도 이영에 대한 그리움만은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하루도 그녀를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같이 곱씹었고, 매일같이 상상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대상을 이렇게 만나게 되자, 유헌은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이영은 오랫동안 그려 왔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간이 만들어 준 분위기가 더해진 이영은 눈물이 고이도록 아름다웠다.
“이유헌 씨?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지금 안색이 너무…….”
유헌이 바짝 언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이영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내쉬는 숨조차 가둬 버린 채 다가오는 이영을 바라봤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 볼을 그러쥘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부드러운 얼굴을 감싸고 한참이나 어루만지고 싶었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유헌은 그와 이영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괜찮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줄 알고 걱정했어요. 아프신 거면 말씀해 주세요.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유헌 씨를 왜 찾았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을까요?”
이영이 유헌에게 자리를 권했다. 유헌은 뭔가에 홀린 듯이 이영을 바라보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녀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다.
“혹시 저를 예전에 보신 적 있나요?”
조심스럽게 던져진 질문은 그대로 유헌의 가슴에 꽂혀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이영이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영의 머릿속에 유헌과의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아는지조차 남아 있지 않아 저렇게나 떨리는 목소리로, 저렇게나 떨리는 눈으로 물어 올 정도였다.
“……네. 있습니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유헌이 답했다. 단순히 본 적만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절절하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애달아 했고,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었다.
“그러면…… 제가 기억을 아예 잃어버린 것도 아시나요?”
당장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서 유헌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그대로 뛰쳐나가 병원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생생했다.
“네. 알아요.”
목소리가 잘게 떨려 왔다. 티 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썼건만, 오랜만에 만난 연인 앞에서는 수많은 각오도 무용지물이 됐다.
“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 중인데, 제가 열여덟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어요.”
“일기장이요?”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없어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조금이나마 흔적을 찾았거든요.”
유헌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자 이영은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근데 있는 거라고는 일기장 하나라서……. 여기에 이유헌 씨 이름이 많이 나와서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해 봤다가 유헌 씨가 제 아버지랑 같이 사진을 찍은 걸 보고 연락드렸어요.”
처음 유헌을 만났다던 날 이후로 그의 이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에 등장했다. 이영의 일기장이 아니라 유헌의 일기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에 대한 얘기들로 가득했다.
오래도록 좋아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친한 친구였을까. 혼자 고민하던 이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인터넷에 검색했고, 사진 속에 있는 남자의 정보가 곧장 쏟아졌다. ‘전 사격 국가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올림픽에서 딴 메달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격 메달리스트와의 접점이 있기는 힘드니 동명이인이 아닐까 했던 의심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인겸의 후원 증서를 받은 사진이 오래된 뉴스 자료로 남아 있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유헌을 아는 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이영에게는 정보를 살 수 있는 돈과 인맥이 있었다.
유헌의 근황을 알아낸 뒤에는 곧장 그를 만나기 위한 명분을 만들었다. 사격 선수들이 경호 업무로 빠지는 건 일반적인 수순이었으니, 경호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흘리며 유헌을 콕 집어 요구했다.
“제가 잃어버린 기억을 다 알고 계시는 분 같아서 유헌 씨를 어떻게든 만나 뵙고 싶었어요.”
이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유헌은 이영이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기억했다. 잊을까 두려워 매일같이 곱씹었으니.
“저한테…… 제 기억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질문 앞에서 유헌이 굳어 갔다. 모두 쏟아 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열일곱의 그날부터 처음으로 나눴던 키스, 처음으로 나눴던 밤, 서로에게 붙어 속삭이던 밀어, 전부 나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말하면 이영은 다시 또 유헌에게 묶여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 품에 가두고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격리시키고 싶지만, 이영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잠룡이라 불리던 거물급 국회의원은 이제 대선 후보가 되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었다. 이영은 그런 이의 딸이었고, 결혼마저도 하나의 사업이 되는 세상 속에 살았다.
총을 잡다 손을 잃은 천애고아와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였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유헌은 다시 또 도망쳤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이 다시 그를 찾았음에도, 그토록 애달아 하던 사랑과 드디어 마주했음에도, 그는 다시 등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건 사실이에요. 이영 씨 아버지께 후원받아서 운동했었거든요. 그렇지만 이후에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유헌은 표정을 지워 내고 거짓말을 했다. 이영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그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또다시 가슴이 저릿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차라리 유헌 혼자 아픈 편이 나았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면 이영 역시 힘들어질 터였다. 원하지 않는 전개였다.
“별다른 도움이 못 될 거예요. 이영 씨에 대해서는 서인겸 의원님 때문에 굵직한 소식을 들었던 게 전부입니다. 부탁하신 일은 제가 맡을 게 못 되네요.”
유헌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영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유헌 씨!”
잡아채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헌은 도망치듯 작업실에서 뛰쳐나왔다.
‘지금이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의원님.’
‘지금이 마지막이야.’
5년 전, 끔찍하던 마지막의 기억이 유헌을 덮쳤다. 이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그를 밀어내던 인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유난히도 느린 엘리베이터가 속을 태웠지만, 유헌은 이영에게 붙잡히지 않고 건물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을 저녁의 쌀쌀함이 몸을 시리게 했지만, 애달픔에 얼어붙은 마음 탓인지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발을 재촉했다. 좁은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이영의 얼굴이 맺혔지만, 잊어야 할 모습이었다. 5년간 어떻게든 버텼으니 오늘의 기억으로 더 오랜 세월을 버티면 되리라고, 유헌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떻게 됐냐.]
[잘했어?]
삐걱대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나니 민재로부터 문자가 왔다. 답장할 여력이 없어 핸드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도 아른거리는 이영의 상(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좀 나을까 싶어 식탁 위의 약상자를 들췄다. 손목이 총을 거부하고, 이영과 헤어지게 된 이후로부터 지독한 불면과 싸워 왔다. 약이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턱턱 막혀 오는 숨이 시야를 까맣게 가려 갈 쯤,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민재와 고아원 식구들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사는 유헌이었다. 찾아올 이가 없었다.
“누구세요?”
깨질 듯 아파 오는 머리 때문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갔다.
“……서이영입니다.”
유헌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어 인터폰을 다시 확인하니 분명 이영이었다. 걱정과 불안함이 가득 서린 얼굴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곧장 문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는 물음은 끝맺지 못했다. 이영이 울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울면서 온 건지 눈은 이미 새빨개져 있고, 유헌과 마주친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렇게 무턱대고 집 알아내서 찾아오는 거 실례라는 거 아는데, 제가……. 제가 너무…….”
잔뜩 잠긴 목소리는 연신 눈물만 훔쳐 낼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일기장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어요.”
유헌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는 동안, 이영은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유헌과 이영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코와 볼에 생크림을 묻힌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이영이 유헌에게 몸을 바짝 기댄 채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고, 유헌 역시 이영을 감싼 모습이었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는 사진에는 바랜 잉크로 ‘2012. 03. 22.’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날은 유헌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다.
‘제대로 찍히는 건 맞아?’
‘맞다니까!’
‘어디 봐야 돼? 여기?’
‘음……. 아마 맞을걸?’
‘뭐야, 서이영. 아무것도 모르고 사 온 거야?’
‘아, 어떻게든 찍히겠지! 얼른 봐! 얼른! 나 찍는다?’
어디를 보고 찍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면서 무작정 안겨 오는 이영이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셔터를 누르든 말든 그저 이마에 입을 맞추기 바빴다.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릿해질 정도로 행복하고, 그리운 기억이었다.
“이 사진을 보면 사귀던 사이인 게 분명한데……. 제가 기억을 하나도 못 하니까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