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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누각(空中樓閣) 4화
사람들은 능운소를 집요하게 훑으며 저마다 생각에 빠졌다. 보통 남사룡이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에서 뽑힌다면 북사룡은 그 외 중소 문파나 낭인들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내심 남사룡의 실력을 우위로 두던 이들은 범상치 않은 능운소의 기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자. 호기심은 잠시 묻어 두고. 좋은 날이니 모두 축하 인사부터 합시다.”
단천악이 술잔을 높이 들자 다른 이들도 잔을 들었다.
“무이문의 부활을 위하여!”
술을 비운 단천악이 팔을 크게 휘둘러 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뒤이어 술을 비운 이들도 분분히 잔을 깨뜨렸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탁자 위로 온갖 산해진미가 놓였다. 연회장의 중앙에선 인근에서 유명한 기생들이 춤으로 흥을 돋우며 시를 노래했다.
“불쾌한 시선이 많을 것이다. 무시하거라.”
단천악의 속삭임에 능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예상한 바였다. 무이문의 참변과 별개로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이 달가울 리 없었다. 특히 무이문의 영역이었던 곳을 차지한 문파는 더욱 껄끄러울 터였다.
굳이 능운소가 나서지 않더라도 연회는 무르익어 갔다. 간혹 그에게 접근하는 인사들이 있었으나 중간에 단천악이 차단하거나 능운소 본인이 병을 핑계로 긴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단천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오늘 연회는 여기까지 하겠소. 내일은 친선 비무가 있을 예정이니 푹 쉬고 다시 오시오.”
“오오! 멸염창의 실력도 볼 수 있소? 그렇다면 기꺼이 다시 오겠소.”
누군가의 외침에 옳소! 보고 싶소! 하고 여러 사람이 장단을 맞췄다. 능운소가 미미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선보일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옳거니! 사내라면 그래야지!”
“내일 꼭 와야겠구먼!”
시원한 대답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삼삼오오 일어난 이들이 비틀거리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숙부님. 편히 쉬십시오.”
“운소야.”
“예.”
“진정 괜찮겠느냐? 굳이 내키지 않으면 불참해도 된다.”
“괜찮습니다.”
능운소는 짧게 답한 후 먼저 몸을 돌렸다. 맞지 않은 자리를 지켰더니 무척 피로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단천악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습니까?”
그때, 당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장년인 하나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민머리에 체구가 단천악과 맞먹는 사내였다.
“능운소인 것은 맞으나 기억 소실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매림당주.”
“예. 방주.”
단천악이 씩 웃으며 매림당주의 어깨를 꽉 잡았다.
“기껏해야 후기지수 중 하나일 뿐이야. 설령 다른 의도가 있다 해도 뭘 어쩌겠나. 자네들과 내가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을 테지.”
“그렇긴 하지만…….”
“방주님 말이 맞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형님.”
뒤늦게 다가온 난림당주가 입술을 비죽였다. 청수한 인상의 그는 백우선(白羽扇)을 팔락이며 매림당주의 우려를 비웃었다.
“그, 그래도 감시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에 비하면 보통 체구에 평범한 얼굴인 국림당주가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 보았다. 허리춤을 휘감은 연검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뱀처럼 구불거렸다.
“섣부르게 건들면 형님 먼저 뒈질 거요. 내일 놈이 본 실력을 보일 테니 그때 보고 결정합시다.”
마지막으로 말을 꺼낸 이는 오 척(150센티미터) 단구에 눈이 죽 찢어진 사내였다. 죽림당주의 말에 단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눈이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숨죽이고 있어야지.”
그의 눈이 어두운 기색으로 번들거렸다. 오래전 신의(信義)를 저버린 뱀의 눈이었다.
***
비무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아침부터 청림방 연무장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곳은 이미 전날의 연회장 장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무림인의 대련에 걸맞은 장소로 변해 있었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가장 상석은 단천악이, 한 단 밑으론 청림방의 장로와 당주가, 널찍이 떨어진 양옆은 초대받은 인근 문파인들로 채워졌다.
단천악이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그를 반겼다.
“멸염창도 왔나?”
“어떻게 생겼다 했지?”
“글쎄?”
“저 사람 아냐?”
누군가가 단천악의 뒤를 손가락질했다. 그를 따라 사람들이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노립을 깊게 눌러쓴 의문의 사내가 있었다. 새까만 무복 차림에 등에 장창을 찬 무인이었다.
“허. 맞구만.”
“얼굴이 안 보여.”
“대련하면 볼 수 있겠지.”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북사룡 수좌인 멸염창의 참여였다. 무림팔룡에서 가장 강한 이로 화산파의 옥안미룡이 꼽힌다면, 가장 신비로운 이로는 멸염창을 꼽았다. 그 모습을 본 자가 적음에도 후기지수의 수좌를 다투는 명성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멸염창을 만나고 살아남은 이가 드문 데다 잊을 만하면 그가 행한 협행이 호담자의 입을 통해 무림 전역에 퍼진 덕도 있었다.
국경 인근 마을을 습격하던 마적 떼 몰살, 실력이 높아 쉬이 잡지 못했던 연쇄 살인마 참살, 불의한 일을 보면 절대 지나치지 않는 것 등. 손속에 잔인한 면은 있으나 명백히 정도를 걷는 그의 행보를 사람들은 칭송하며 북사룡의 으뜸이라 칭했다.
그런 멸염창이 오늘 모습을 드러낸다 했다. 최고의 화제니만큼 단 한 번만 비무에 참여함에도 온갖 무림인이 청림방으로 모여들었다.
“옥안미룡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지! 남북이룡이 만나지 못해서 너무 아쉽구만.”
“화산파에 있다지 않은가. 무림인이라도 섬서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족히 달포(약 한 달)는 걸리니 어쩔 수 없는 게지.”
“이제 시작한다!”
연무장 중앙으로 양손에 청색과 홍색 깃발을 든 심판이 등장했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 바로 시작을 알렸다.
친선 비무는 복건성 내 각 문파의 어린 제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동통한 팔다리를 휘두르며 투덕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사방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소년, 청년, 장년인까지 점차 고수들이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캉……!
세찬 검풍에 상대의 도가 맥없이 튕겨 나갔다. 채 도를 잡기도 전에 목덜미에 검이 겨눠졌다.
“소생의 패배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항복했다. 심판이 붉은 깃발을 올렸다.
“승자는 보타문의 백화검(白華劍) 이매봉!”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이매봉이 먼저 포권하자 상대도 마지못해 답했다. 여인이라 얕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줄 몰랐다. 그는 콧김을 뿜으며 연무장을 내려갔다.
“역시 백화검이구만.”
“속가로 두기엔 아까운 실력이야.”
“어쩔 수 없지. 중이 되면 평생 혼인도 못 하고 살지 않은가.”
“허긴.”
사람들의 숙덕거림이 들릴 텐데도 이매봉의 얼굴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어서 내려가라는 심판의 눈짓을 무시하곤 단천악을 향해 포권했다.
“친선 비무에 멸염창 무명 소협이 참여한다 들었습니다. 부디 제게 비무의 기회를 주십시오.”
당돌한 발언에 단천악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최대한 강한 이를 능운소와 붙여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본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따로 준비하기까지 했는데 새파란 애송이가 방해한 격이었다.
“그건…….”
“좋습니다.”
얌전히 자리를 지키던 능운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에 이매봉이 움찔했다. 능운소가 고개를 들자 사방에서 헛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무심코 입을 연 사람이 합 다물었다. 놀란 건 이매봉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신색을 되찾았다. 무인에게 중요한 건 겉가죽이 아니었다.
“과한 부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명 소협.”
“이젠 무명이 아니라 능운소입니다. 이 소저.”
“아…….”
그제야 상대의 진정한 신분을 떠올린 이매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훌쩍 몸을 날려 연무장 끝에 섰다. 천천히 연무장으로 내려간 능운소가 그와 반대쪽으로 향했다. 중앙에 선 심판이 두 개의 깃발을 올렸다.
“홍기! 보타문의 백화검 이매봉!”
이매봉이 발검해 정면으로 검을 겨눴다. 서릿발 같은 기세에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청기! 무이문의 멸염창 능운소!”
등에서 뽑은 창이 촤라라라락! 회전하며 능운소의 손에서 노닐었다. 그 또한 이매봉을 향해 창끝을 겨눴다.
“시작!”
양 깃발이 내려가자 이매봉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대를 가늠하는 행동에 능운소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기의 그물이 알알이 얽히며 퍼지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기세의 이매봉과 달리 별호에 맞지 않게 멸염창의 기세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것이 폭풍 전의 고요와 같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타앗! 항마연퇴(降魔連退)!”
이매봉이 먼저 무공명을 외치며 공격했다. 친선 비무다 보니 생사 결전을 피하기 위해선 서로 무공 이름을 외치는 게 규칙이었다. 검이 곡선으로 휘며 능운소의 아문혈(瘂門穴)을 찔렀다. 창신을 들어 가뿐히 막은 능운소가 허리를 숙이고 몸을 휘돌렸다. 치고 들어오는 이매봉의 등을 밟고 창을 내리꽂았다.
“탄화(炭火)!”
정수리가 섬뜩했다. 이매봉은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를 붙이고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이 천 개의 환영으로 나타나 사방을 점했다.
“대비천수영(大悲千手影)!”
보타문의 대표적인 무공 중 하나였다. 손날에 튕겨 나간 창이 다시 능운소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크게 진각을 밟았다. 연무장이 쩍 갈라지며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타타탓, 뒤로 물러난 이매봉이 훌쩍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 틈을 노려 능운소가 창신을 놓았다.
“헉!”
낙하하던 창이 우뚝 멈추더니 스스로 회전했다. 일그러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차와도 같은 모습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척화(斥火)!”
창이 뻗을 때마다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마치 화탄을 터뜨리는 듯한 모양새에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들이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났다. 극양의 무공에 피부가 화끈거렸다.
힘겹게 공격을 쳐 내던 이매봉이 검날에 내공을 실었다. 검심이 파르르 떨며 청색 기를 머금었다. 검기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첨이 촘촘히 뻗어 나갔다.
두 사람의 공수가 씨줄 날줄처럼 얽혔다. 능운소의 창이 포탄처럼 강맹하다면 이매봉의 검은 화살처럼 매끄럽고 암기처럼 고요했다. 둘의 비무는 마치 불과 물의 싸움 같았다. 예상보다 선전하는 이매봉의 기세에 단천악이 눈을 빛냈다.
그러나 비무의 승세는 점차 능운소에게 기울었다. 경험에서 많은 차이가 나다 보니 이매봉은 변칙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검첨(劍尖)을 밟고 움직임을 봉한 능운소가 가녀린 허리를 가차 없이 후려 찼다. 악! 소리 내며 튕겨 나간 이매봉이 이를 악물고 제비 돌기로 연무장 끝에서 간신히 신형을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을 힐끗 내려다보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
심판이 청기를 올렸다.
“승자는 멸염창 능운소!”
사람들은 능운소를 집요하게 훑으며 저마다 생각에 빠졌다. 보통 남사룡이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에서 뽑힌다면 북사룡은 그 외 중소 문파나 낭인들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내심 남사룡의 실력을 우위로 두던 이들은 범상치 않은 능운소의 기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자. 호기심은 잠시 묻어 두고. 좋은 날이니 모두 축하 인사부터 합시다.”
단천악이 술잔을 높이 들자 다른 이들도 잔을 들었다.
“무이문의 부활을 위하여!”
술을 비운 단천악이 팔을 크게 휘둘러 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뒤이어 술을 비운 이들도 분분히 잔을 깨뜨렸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탁자 위로 온갖 산해진미가 놓였다. 연회장의 중앙에선 인근에서 유명한 기생들이 춤으로 흥을 돋우며 시를 노래했다.
“불쾌한 시선이 많을 것이다. 무시하거라.”
단천악의 속삭임에 능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예상한 바였다. 무이문의 참변과 별개로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이 달가울 리 없었다. 특히 무이문의 영역이었던 곳을 차지한 문파는 더욱 껄끄러울 터였다.
굳이 능운소가 나서지 않더라도 연회는 무르익어 갔다. 간혹 그에게 접근하는 인사들이 있었으나 중간에 단천악이 차단하거나 능운소 본인이 병을 핑계로 긴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단천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오늘 연회는 여기까지 하겠소. 내일은 친선 비무가 있을 예정이니 푹 쉬고 다시 오시오.”
“오오! 멸염창의 실력도 볼 수 있소? 그렇다면 기꺼이 다시 오겠소.”
누군가의 외침에 옳소! 보고 싶소! 하고 여러 사람이 장단을 맞췄다. 능운소가 미미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선보일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옳거니! 사내라면 그래야지!”
“내일 꼭 와야겠구먼!”
시원한 대답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삼삼오오 일어난 이들이 비틀거리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숙부님. 편히 쉬십시오.”
“운소야.”
“예.”
“진정 괜찮겠느냐? 굳이 내키지 않으면 불참해도 된다.”
“괜찮습니다.”
능운소는 짧게 답한 후 먼저 몸을 돌렸다. 맞지 않은 자리를 지켰더니 무척 피로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단천악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습니까?”
그때, 당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장년인 하나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민머리에 체구가 단천악과 맞먹는 사내였다.
“능운소인 것은 맞으나 기억 소실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매림당주.”
“예. 방주.”
단천악이 씩 웃으며 매림당주의 어깨를 꽉 잡았다.
“기껏해야 후기지수 중 하나일 뿐이야. 설령 다른 의도가 있다 해도 뭘 어쩌겠나. 자네들과 내가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을 테지.”
“그렇긴 하지만…….”
“방주님 말이 맞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형님.”
뒤늦게 다가온 난림당주가 입술을 비죽였다. 청수한 인상의 그는 백우선(白羽扇)을 팔락이며 매림당주의 우려를 비웃었다.
“그, 그래도 감시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에 비하면 보통 체구에 평범한 얼굴인 국림당주가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 보았다. 허리춤을 휘감은 연검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뱀처럼 구불거렸다.
“섣부르게 건들면 형님 먼저 뒈질 거요. 내일 놈이 본 실력을 보일 테니 그때 보고 결정합시다.”
마지막으로 말을 꺼낸 이는 오 척(150센티미터) 단구에 눈이 죽 찢어진 사내였다. 죽림당주의 말에 단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눈이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숨죽이고 있어야지.”
그의 눈이 어두운 기색으로 번들거렸다. 오래전 신의(信義)를 저버린 뱀의 눈이었다.
***
비무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아침부터 청림방 연무장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곳은 이미 전날의 연회장 장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무림인의 대련에 걸맞은 장소로 변해 있었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가장 상석은 단천악이, 한 단 밑으론 청림방의 장로와 당주가, 널찍이 떨어진 양옆은 초대받은 인근 문파인들로 채워졌다.
단천악이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그를 반겼다.
“멸염창도 왔나?”
“어떻게 생겼다 했지?”
“글쎄?”
“저 사람 아냐?”
누군가가 단천악의 뒤를 손가락질했다. 그를 따라 사람들이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노립을 깊게 눌러쓴 의문의 사내가 있었다. 새까만 무복 차림에 등에 장창을 찬 무인이었다.
“허. 맞구만.”
“얼굴이 안 보여.”
“대련하면 볼 수 있겠지.”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북사룡 수좌인 멸염창의 참여였다. 무림팔룡에서 가장 강한 이로 화산파의 옥안미룡이 꼽힌다면, 가장 신비로운 이로는 멸염창을 꼽았다. 그 모습을 본 자가 적음에도 후기지수의 수좌를 다투는 명성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멸염창을 만나고 살아남은 이가 드문 데다 잊을 만하면 그가 행한 협행이 호담자의 입을 통해 무림 전역에 퍼진 덕도 있었다.
국경 인근 마을을 습격하던 마적 떼 몰살, 실력이 높아 쉬이 잡지 못했던 연쇄 살인마 참살, 불의한 일을 보면 절대 지나치지 않는 것 등. 손속에 잔인한 면은 있으나 명백히 정도를 걷는 그의 행보를 사람들은 칭송하며 북사룡의 으뜸이라 칭했다.
그런 멸염창이 오늘 모습을 드러낸다 했다. 최고의 화제니만큼 단 한 번만 비무에 참여함에도 온갖 무림인이 청림방으로 모여들었다.
“옥안미룡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지! 남북이룡이 만나지 못해서 너무 아쉽구만.”
“화산파에 있다지 않은가. 무림인이라도 섬서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족히 달포(약 한 달)는 걸리니 어쩔 수 없는 게지.”
“이제 시작한다!”
연무장 중앙으로 양손에 청색과 홍색 깃발을 든 심판이 등장했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 바로 시작을 알렸다.
친선 비무는 복건성 내 각 문파의 어린 제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동통한 팔다리를 휘두르며 투덕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사방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소년, 청년, 장년인까지 점차 고수들이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캉……!
세찬 검풍에 상대의 도가 맥없이 튕겨 나갔다. 채 도를 잡기도 전에 목덜미에 검이 겨눠졌다.
“소생의 패배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항복했다. 심판이 붉은 깃발을 올렸다.
“승자는 보타문의 백화검(白華劍) 이매봉!”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이매봉이 먼저 포권하자 상대도 마지못해 답했다. 여인이라 얕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줄 몰랐다. 그는 콧김을 뿜으며 연무장을 내려갔다.
“역시 백화검이구만.”
“속가로 두기엔 아까운 실력이야.”
“어쩔 수 없지. 중이 되면 평생 혼인도 못 하고 살지 않은가.”
“허긴.”
사람들의 숙덕거림이 들릴 텐데도 이매봉의 얼굴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어서 내려가라는 심판의 눈짓을 무시하곤 단천악을 향해 포권했다.
“친선 비무에 멸염창 무명 소협이 참여한다 들었습니다. 부디 제게 비무의 기회를 주십시오.”
당돌한 발언에 단천악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최대한 강한 이를 능운소와 붙여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본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따로 준비하기까지 했는데 새파란 애송이가 방해한 격이었다.
“그건…….”
“좋습니다.”
얌전히 자리를 지키던 능운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에 이매봉이 움찔했다. 능운소가 고개를 들자 사방에서 헛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무심코 입을 연 사람이 합 다물었다. 놀란 건 이매봉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신색을 되찾았다. 무인에게 중요한 건 겉가죽이 아니었다.
“과한 부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명 소협.”
“이젠 무명이 아니라 능운소입니다. 이 소저.”
“아…….”
그제야 상대의 진정한 신분을 떠올린 이매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훌쩍 몸을 날려 연무장 끝에 섰다. 천천히 연무장으로 내려간 능운소가 그와 반대쪽으로 향했다. 중앙에 선 심판이 두 개의 깃발을 올렸다.
“홍기! 보타문의 백화검 이매봉!”
이매봉이 발검해 정면으로 검을 겨눴다. 서릿발 같은 기세에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청기! 무이문의 멸염창 능운소!”
등에서 뽑은 창이 촤라라라락! 회전하며 능운소의 손에서 노닐었다. 그 또한 이매봉을 향해 창끝을 겨눴다.
“시작!”
양 깃발이 내려가자 이매봉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대를 가늠하는 행동에 능운소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기의 그물이 알알이 얽히며 퍼지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기세의 이매봉과 달리 별호에 맞지 않게 멸염창의 기세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것이 폭풍 전의 고요와 같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타앗! 항마연퇴(降魔連退)!”
이매봉이 먼저 무공명을 외치며 공격했다. 친선 비무다 보니 생사 결전을 피하기 위해선 서로 무공 이름을 외치는 게 규칙이었다. 검이 곡선으로 휘며 능운소의 아문혈(瘂門穴)을 찔렀다. 창신을 들어 가뿐히 막은 능운소가 허리를 숙이고 몸을 휘돌렸다. 치고 들어오는 이매봉의 등을 밟고 창을 내리꽂았다.
“탄화(炭火)!”
정수리가 섬뜩했다. 이매봉은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를 붙이고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이 천 개의 환영으로 나타나 사방을 점했다.
“대비천수영(大悲千手影)!”
보타문의 대표적인 무공 중 하나였다. 손날에 튕겨 나간 창이 다시 능운소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크게 진각을 밟았다. 연무장이 쩍 갈라지며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타타탓, 뒤로 물러난 이매봉이 훌쩍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 틈을 노려 능운소가 창신을 놓았다.
“헉!”
낙하하던 창이 우뚝 멈추더니 스스로 회전했다. 일그러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차와도 같은 모습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척화(斥火)!”
창이 뻗을 때마다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마치 화탄을 터뜨리는 듯한 모양새에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들이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났다. 극양의 무공에 피부가 화끈거렸다.
힘겹게 공격을 쳐 내던 이매봉이 검날에 내공을 실었다. 검심이 파르르 떨며 청색 기를 머금었다. 검기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첨이 촘촘히 뻗어 나갔다.
두 사람의 공수가 씨줄 날줄처럼 얽혔다. 능운소의 창이 포탄처럼 강맹하다면 이매봉의 검은 화살처럼 매끄럽고 암기처럼 고요했다. 둘의 비무는 마치 불과 물의 싸움 같았다. 예상보다 선전하는 이매봉의 기세에 단천악이 눈을 빛냈다.
그러나 비무의 승세는 점차 능운소에게 기울었다. 경험에서 많은 차이가 나다 보니 이매봉은 변칙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검첨(劍尖)을 밟고 움직임을 봉한 능운소가 가녀린 허리를 가차 없이 후려 찼다. 악! 소리 내며 튕겨 나간 이매봉이 이를 악물고 제비 돌기로 연무장 끝에서 간신히 신형을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을 힐끗 내려다보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
심판이 청기를 올렸다.
“승자는 멸염창 능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