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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일러두기
1. 외국 인명, 지명, 작품명 및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기와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2.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 ”로 불어 대화는 「 」로 영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3.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Départ, 출발
안젤리크는과 , 두 권의 가이드북을 들고서 캐리어 앞에 앉았다. 이미 신칸센 기차표와 숙소를 예약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서울과 경주, 그리고 부산이라는 여행 루트만 짜 놓은 상태였다.
부산에서의 상황에 따라 서울과 경주의 여행 일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그녀에게 무슈 이Lee는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교통편과 숙소 이용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이 된다는 그녀에게 그는 한국은 외국인이 여행하기에 편리하고 안전한 나라라는 말을 덧붙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여행하기 편리하고 안전하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공통점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일본에 비해 영어 안내판이 잘 구비되어 있는 데다 영어가 유창한 젊은 층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두 나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갈 때에는 신을 벗기 때문에 신고 벗기 편한 신발 챙기기.
한국과 일본 가이드북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팁Tip이었다.
「남의 집에 갈 일이 있을까?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좋을 텐데.」
팁과 에티켓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며 안젤리크가 중얼거렸다.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한국과 일본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이번 여름휴가를 여행 일정에 모두 쏟아 넣었다. 한국과 일본의 현지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경험이겠지만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체류 기간 동안 전통 료칸과 호텔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일본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교토에서는 다다미와 미닫이문이 예쁜 료칸을, 오사카와 도쿄에서는 관광지에서 가까운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그리고 한국의 서울과 경주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호텔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다만, 부산에서는 직장 상사인 미술관 관장님의 소개로 알게 된 무슈 이의 집에서 지낼 예정이었고.
가이드북에 적힌 대로 끈이 없어 신고 벗기 편한 단화 한 켤레를 더 챙기는 것으로 짐 꾸리기를 마친 안젤리크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 피곤해.」
3주에 가까운 여름 바캉스를 준비한다고 요 며칠 빡빡한 일정을 보낸 탓에 수면 부족이었다. 이제는 떠날 일만 남았다 싶어 한동안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다 가이드북을 다시 집었다. 피곤하다는 말과는 달리 파우더핑크색 벚꽃이 활짝 핀 가이드북을 펼쳐 드는 표정이 들떠 있었다.
포스트잇 플래그가 잔뜩 붙어 있는 가이드북을 한동안 뒤적이다 내려놓고는 또 다른 가이드북을 집었다.
‘꼬레(Corée, 한국).’
한국의 전통 의상인 연두색 윗도리와 주황색 치마를 차려입은 여자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론리플래닛 개정판은 ‘한국’이라는 타이틀로 남한과 북한을 통합해 소개하고 있었다. 채 50페이지를 넘지 않는 북한에 관한 설명은 그다지 흥미를 주지 않아 휘리릭 빠르게 넘기고 표시해 놓은 페이지들 중 한 곳을 들췄다.
Busan. 한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방문할 도시였다.
「Youtube에서 본 거랑은 많이 다르네. 언제 적 사진을 쓴 거지?」
대부분의 가이드북이 그러하듯, 사진 속 부산은 마치 10년 전쯤의 풍경을 찍은 건가 싶게 낡고 특색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떨지 더 궁금했다.
그녀는 페이지를 넘겨 여행하는 동안 방문할 또 다른 도시인 서울과 경주를 훑어보다 가이드북을 덮었다.
꼬헤 뒤 쉬드(Corée du Sud, 사우스 코리아).
한국은 막연히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곳이었다. 부산.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는 도시. 바다를 마주한 항구 도시. 그리고 그녀의 생모가 살고 있는 곳. 부모님이 들려준 얘기로는 안젤리크 그녀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살았다고 했다. 물론 어릴 때라 기억에는 없었다.
그녀는 내일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으로 간다.
「만나 주려나?」
입양 당시의 서류를 모두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덕분에 친부모를 찾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서류에 적혀 있는 곳과 동일한 주소지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입양을 추진했던 부산의 아동 복지관에 생모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기관을 통하는 것이 생모에게 부담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조금 실망은 했지만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상처를 받을 만큼의 관계도 아니었고, 상처가 될 정도로 마음에 원망이나 미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만나 주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생각이 바뀌려나. 내심 그걸 기대하고 여행 일정을 정한 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도 싫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하품을 쏟아 냈다. 몸이 나른한데 머릿속은 선명했다.
목적지에 상관없이 여행 전날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들뜨곤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의 출발을 앞둔 지금 기분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아시아는 처음이었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 이렇게 긴 여행을 떠나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거기다 평소 호기심과 궁금증을 품게 하던 일본.
그중 가장 남다른 기분이 들게 하는 건 언젠가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던 한국. 그리고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생물학적 엄마.
안젤리크는 가슴에 가이드북을 올려놓고서 눈을 감았다. 어쩐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1장. 김해공항, 진우를 만나다
― 6시에 김해공항 도착 예정이라는데.
작은아버지의 대답에 진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출발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며칠이나 머무는데요?”
― 파리에는 8월 25일에 돌아온다니까, 여행 기간이 총 3주 정도 되는 거지. 교토랑 도쿄를 8일 넘게 여행할 계획이고, 한국에서도 서울이랑 경주가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그랬으니까, 그럼 부산에서 지내는 기간은 한 일주일쯤 될 거야. 길어도 열흘 정도? 그러니 있는 동안에 네가 잘 좀 돌봐 줘.
“방금 전에는 마중만 나가 달라고 하셨잖아요?”
― 먼 거리도 아닌데 겨우 픽업 좀 하는 걸 가지고 생색낼 거냐? 그리고 한집에서 머물게 된 사람 좀 돌봐 주라는데 정색이나 하고, 너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진 거야?
“툭하면 잔정 없는 녀석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은 작은아버지이신 것 같은데요.”
― 그러니 있는 정 없는 정 다 끌어모아서 신경 좀 쓰라는 말이다. 안젤리크는 마중 나올 필요 없다면서 사양하는데, 그래도 잘 아는 사람 소개로 알게 된 데다가 내가 여러모로 마음이 쓰여서 그래. 부탁한다.
장난스러운 협박이나 강요가 일상인 작은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낯선 단어에 진우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엇갈리지 않게 사진 한 장 보내 주세요.”
― 그냥 종이에 이름이나 적어 가면 되지. 사진은 번거롭게 뭐 하러. 같은 비행기 타고 오는 여행객 중에 안젤리크라는 이름 가진 프랑스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안젤리크한테도 그렇게 전해 놨으니까 잘 보이도록 큼지막하니 써서 가.
얼핏 작은아버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깐 의아한 눈빛을 하던 진우가 작업대로 걸어가 A4용지 한 장을 꺼낸 뒤 ‘Angelique’라고 적었다.
“다음에는 시간 촉박하지 않게 미리 연락 주세요.”
― 다음에 또 부탁해도 되나 보다?
작은아버지의 놀림에 피식 입바람을 흘린 진우는 짧은 안부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 개인 작업실에서 나무 표면을 고르는 샌딩 작업 중이었던 진우는 에어브러시로 청바지와 신발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턴 뒤 집으로 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차 키를 챙겼다. 서두른 덕분에 작업실에서 나온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출발할 수 있었다.
차를 몰고 나서자마자 바다를 쓸고 온 축축하고 비릿한 바람이 방금 씻고 나온 살갗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건조하던 피부가 한순간에 끈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달맞이 언덕에서 김해공항까지는 꽤 복잡할 터였다. 바다와 길게 맞닿은 매력적인 도시지만 한번 막히면 길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교통 사정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휴가철이라 김해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평소보다 한층 소란스러웠다. 이용객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인 데다 예고 없이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가 도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상대방을 기다리게 만들 뻔했다.
겨우 제시간에 맞춰 주차를 한 진우는 전광판을 훑었다. 인천발 김해행 비행기가 지금 막 착륙했다는 안내가 떴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말아 쥐고서 열린 유리문을 빠져나오는 관광객들을 살피던 진우가 피곤한 표정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가구 회사에 보낼 디자인을 마무리하느라 요 며칠 무리를 한 탓인지 목 뒤부터 견갑골까지 뻐근했다.
얼마쯤 기다려야 하려나. 국내선이니 짐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진우는 어깨를 맞댄 채 빡빡하게 몰려 있는 환영객들에게서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섰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콧잔등에 주근깨가 잔뜩 뿌려진 파란 눈의 여자가 카트를 밀고 나오자 진우는 한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얇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Angelique
간결하게 적힌 이름에 여자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쳤다. 진우는 종이를 말아 쥔 채 팔짱을 끼고 다시금 입국장을 주시했다. 20대처럼 보이는 외국인이 보일 때마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펼쳐 들었지만, 자신이 안젤리크라며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바리케이드처럼 쳐 놓은 철제물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진우는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국인이었다. 진우의 시선이 무심하니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더 빠져나오고 마지막으로 단체 관광을 온 듯한 일본인들이 우르르 쏟아지더니 한동안 입국장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진우는 조금 전 들여다봤던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지금쯤이면 세관을 통과하고도 남을 텐데. 문제가 생겼나.
폈다 접었다를 반복한 종이는 이제 주름이 잔뜩 접혀 있었다. 진우는 휴대폰을 꺼내 작은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성마른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진우의 시선이 그에게서 네 걸음쯤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가닿았다. 분명 아까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것을 봤는데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마중 나온 사람과 길이 엇갈린 걸까. 여자는 누군가를 찾듯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사람들을 둘러보다 틈틈이 전광판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듯했다.
긴 신호음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자 진우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일곱 시간의 시차를 가진 나라에서 날아오는 목소리는 한 호흡의 공백을 두고 있었다.
― 어디냐?
뻔히 알면서도 물어 오는 작은아버지의 능청스러움에 진우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공항이요.”
― 안젤리크와는 잘 만났어?
“못 만났습니다.”
― 아니,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이번 편을 놓친 것 같기도 하고. 안젤리크라는 사람 휴대폰 번호 좀 알려 주세요.”
작은아버지에게서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낸 뒤 전화를 끊은 진우는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001 33 7 ** ** ** **. 국내 번호가 아니라서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런 것치고도 휴대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일러두기
1. 외국 인명, 지명, 작품명 및 독음은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되 관용적인 표기와 동떨어진 경우 절충하여 실용적 표기에 따랐습니다.
2.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 ”로 불어 대화는 「 」로 영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3.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지명, 장소, 인물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Départ, 출발
안젤리크는
부산에서의 상황에 따라 서울과 경주의 여행 일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그녀에게 무슈 이Lee는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교통편과 숙소 이용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이 된다는 그녀에게 그는 한국은 외국인이 여행하기에 편리하고 안전한 나라라는 말을 덧붙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여행하기 편리하고 안전하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공통점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일본에 비해 영어 안내판이 잘 구비되어 있는 데다 영어가 유창한 젊은 층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두 나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갈 때에는 신을 벗기 때문에 신고 벗기 편한 신발 챙기기.
한국과 일본 가이드북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팁Tip이었다.
「남의 집에 갈 일이 있을까?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좋을 텐데.」
팁과 에티켓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며 안젤리크가 중얼거렸다.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한국과 일본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이번 여름휴가를 여행 일정에 모두 쏟아 넣었다. 한국과 일본의 현지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경험이겠지만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체류 기간 동안 전통 료칸과 호텔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일본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교토에서는 다다미와 미닫이문이 예쁜 료칸을, 오사카와 도쿄에서는 관광지에서 가까운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그리고 한국의 서울과 경주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호텔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다만, 부산에서는 직장 상사인 미술관 관장님의 소개로 알게 된 무슈 이의 집에서 지낼 예정이었고.
가이드북에 적힌 대로 끈이 없어 신고 벗기 편한 단화 한 켤레를 더 챙기는 것으로 짐 꾸리기를 마친 안젤리크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 피곤해.」
3주에 가까운 여름 바캉스를 준비한다고 요 며칠 빡빡한 일정을 보낸 탓에 수면 부족이었다. 이제는 떠날 일만 남았다 싶어 한동안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다 가이드북을 다시 집었다. 피곤하다는 말과는 달리 파우더핑크색 벚꽃이 활짝 핀 가이드북을 펼쳐 드는 표정이 들떠 있었다.
포스트잇 플래그가 잔뜩 붙어 있는 가이드북을 한동안 뒤적이다 내려놓고는 또 다른 가이드북을 집었다.
‘꼬레(Corée, 한국).’
한국의 전통 의상인 연두색 윗도리와 주황색 치마를 차려입은 여자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론리플래닛 개정판은 ‘한국’이라는 타이틀로 남한과 북한을 통합해 소개하고 있었다. 채 50페이지를 넘지 않는 북한에 관한 설명은 그다지 흥미를 주지 않아 휘리릭 빠르게 넘기고 표시해 놓은 페이지들 중 한 곳을 들췄다.
Busan. 한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방문할 도시였다.
「Youtube에서 본 거랑은 많이 다르네. 언제 적 사진을 쓴 거지?」
대부분의 가이드북이 그러하듯, 사진 속 부산은 마치 10년 전쯤의 풍경을 찍은 건가 싶게 낡고 특색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떨지 더 궁금했다.
그녀는 페이지를 넘겨 여행하는 동안 방문할 또 다른 도시인 서울과 경주를 훑어보다 가이드북을 덮었다.
꼬헤 뒤 쉬드(Corée du Sud, 사우스 코리아).
한국은 막연히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곳이었다. 부산.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는 도시. 바다를 마주한 항구 도시. 그리고 그녀의 생모가 살고 있는 곳. 부모님이 들려준 얘기로는 안젤리크 그녀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살았다고 했다. 물론 어릴 때라 기억에는 없었다.
그녀는 내일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으로 간다.
「만나 주려나?」
입양 당시의 서류를 모두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덕분에 친부모를 찾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서류에 적혀 있는 곳과 동일한 주소지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입양을 추진했던 부산의 아동 복지관에 생모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기관을 통하는 것이 생모에게 부담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조금 실망은 했지만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상처를 받을 만큼의 관계도 아니었고, 상처가 될 정도로 마음에 원망이나 미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만나 주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생각이 바뀌려나. 내심 그걸 기대하고 여행 일정을 정한 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도 싫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하품을 쏟아 냈다. 몸이 나른한데 머릿속은 선명했다.
목적지에 상관없이 여행 전날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들뜨곤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의 출발을 앞둔 지금 기분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아시아는 처음이었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 이렇게 긴 여행을 떠나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거기다 평소 호기심과 궁금증을 품게 하던 일본.
그중 가장 남다른 기분이 들게 하는 건 언젠가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던 한국. 그리고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생물학적 엄마.
안젤리크는 가슴에 가이드북을 올려놓고서 눈을 감았다. 어쩐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1장. 김해공항, 진우를 만나다
― 6시에 김해공항 도착 예정이라는데.
작은아버지의 대답에 진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출발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며칠이나 머무는데요?”
― 파리에는 8월 25일에 돌아온다니까, 여행 기간이 총 3주 정도 되는 거지. 교토랑 도쿄를 8일 넘게 여행할 계획이고, 한국에서도 서울이랑 경주가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 그랬으니까, 그럼 부산에서 지내는 기간은 한 일주일쯤 될 거야. 길어도 열흘 정도? 그러니 있는 동안에 네가 잘 좀 돌봐 줘.
“방금 전에는 마중만 나가 달라고 하셨잖아요?”
― 먼 거리도 아닌데 겨우 픽업 좀 하는 걸 가지고 생색낼 거냐? 그리고 한집에서 머물게 된 사람 좀 돌봐 주라는데 정색이나 하고, 너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진 거야?
“툭하면 잔정 없는 녀석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은 작은아버지이신 것 같은데요.”
― 그러니 있는 정 없는 정 다 끌어모아서 신경 좀 쓰라는 말이다. 안젤리크는 마중 나올 필요 없다면서 사양하는데, 그래도 잘 아는 사람 소개로 알게 된 데다가 내가 여러모로 마음이 쓰여서 그래. 부탁한다.
장난스러운 협박이나 강요가 일상인 작은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낯선 단어에 진우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엇갈리지 않게 사진 한 장 보내 주세요.”
― 그냥 종이에 이름이나 적어 가면 되지. 사진은 번거롭게 뭐 하러. 같은 비행기 타고 오는 여행객 중에 안젤리크라는 이름 가진 프랑스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안젤리크한테도 그렇게 전해 놨으니까 잘 보이도록 큼지막하니 써서 가.
얼핏 작은아버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깐 의아한 눈빛을 하던 진우가 작업대로 걸어가 A4용지 한 장을 꺼낸 뒤 ‘Angelique’라고 적었다.
“다음에는 시간 촉박하지 않게 미리 연락 주세요.”
― 다음에 또 부탁해도 되나 보다?
작은아버지의 놀림에 피식 입바람을 흘린 진우는 짧은 안부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 개인 작업실에서 나무 표면을 고르는 샌딩 작업 중이었던 진우는 에어브러시로 청바지와 신발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턴 뒤 집으로 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차 키를 챙겼다. 서두른 덕분에 작업실에서 나온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출발할 수 있었다.
차를 몰고 나서자마자 바다를 쓸고 온 축축하고 비릿한 바람이 방금 씻고 나온 살갗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건조하던 피부가 한순간에 끈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달맞이 언덕에서 김해공항까지는 꽤 복잡할 터였다. 바다와 길게 맞닿은 매력적인 도시지만 한번 막히면 길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교통 사정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휴가철이라 김해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평소보다 한층 소란스러웠다. 이용객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인 데다 예고 없이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가 도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상대방을 기다리게 만들 뻔했다.
겨우 제시간에 맞춰 주차를 한 진우는 전광판을 훑었다. 인천발 김해행 비행기가 지금 막 착륙했다는 안내가 떴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말아 쥐고서 열린 유리문을 빠져나오는 관광객들을 살피던 진우가 피곤한 표정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가구 회사에 보낼 디자인을 마무리하느라 요 며칠 무리를 한 탓인지 목 뒤부터 견갑골까지 뻐근했다.
얼마쯤 기다려야 하려나. 국내선이니 짐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진우는 어깨를 맞댄 채 빡빡하게 몰려 있는 환영객들에게서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섰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콧잔등에 주근깨가 잔뜩 뿌려진 파란 눈의 여자가 카트를 밀고 나오자 진우는 한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얇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Angelique
간결하게 적힌 이름에 여자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쳤다. 진우는 종이를 말아 쥔 채 팔짱을 끼고 다시금 입국장을 주시했다. 20대처럼 보이는 외국인이 보일 때마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펼쳐 들었지만, 자신이 안젤리크라며 말을 건네 오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바리케이드처럼 쳐 놓은 철제물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진우는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국인이었다. 진우의 시선이 무심하니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더 빠져나오고 마지막으로 단체 관광을 온 듯한 일본인들이 우르르 쏟아지더니 한동안 입국장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진우는 조금 전 들여다봤던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지금쯤이면 세관을 통과하고도 남을 텐데. 문제가 생겼나.
폈다 접었다를 반복한 종이는 이제 주름이 잔뜩 접혀 있었다. 진우는 휴대폰을 꺼내 작은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성마른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진우의 시선이 그에게서 네 걸음쯤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가닿았다. 분명 아까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것을 봤는데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마중 나온 사람과 길이 엇갈린 걸까. 여자는 누군가를 찾듯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사람들을 둘러보다 틈틈이 전광판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듯했다.
긴 신호음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자 진우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일곱 시간의 시차를 가진 나라에서 날아오는 목소리는 한 호흡의 공백을 두고 있었다.
― 어디냐?
뻔히 알면서도 물어 오는 작은아버지의 능청스러움에 진우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공항이요.”
― 안젤리크와는 잘 만났어?
“못 만났습니다.”
― 아니,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이번 편을 놓친 것 같기도 하고. 안젤리크라는 사람 휴대폰 번호 좀 알려 주세요.”
작은아버지에게서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낸 뒤 전화를 끊은 진우는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001 33 7 ** ** ** **. 국내 번호가 아니라서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런 것치고도 휴대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