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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린다는 건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더구나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일은 옅은 짜증마저 동반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피로가 축적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쥐고 있던 종이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기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손짓으로 머리를 거칠게 긁어 올리던 진우는 여린 신음을 흘렸다. 뭉친 어깨 근육이 시큰거리며 통증을 호소해 왔다.

먹통인 액정을 한 번 쳐다본 진우가 전화를 끊은 뒤 다시금 통화를 시도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깨를 주무르는 그의 손등을 뒤에서 누군가 톡톡 건드려 왔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경쾌한 손길에 무심히 뒤를 돌아보던 그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어렸다.

깨끗한 흰자위 때문에 유독 맑아 보이는 눈동자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은 조금 전 의자에 앉아 있던 그 여행객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젤리크예요.”

“네?”

“나, 안젤리크라고요.”

“…….”

진우는 미소를 머금은 여자를 마주한 채 말을 잃었다. ‘안젤리크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인’이라는 작은아버지의 설명에 당연히 외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교포가 아니라. 사진 같은 거 확인할 필요 없다고 하던 작은아버지의 짓궂은 목소리가 새삼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이 재미나는지 여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손을 들어 진우의 눈앞에서 작게 흔들었다.

「꾸꾸(Coucou, 여기요).」

장난스러운 그녀의 행동이 어쩐지 멋쩍어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진우가 살짝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

그의 얼굴이 가까워 오자 안젤리크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서로의 볼에 볼을 맞대는 프랑스식 인사법인 비즈를 하려고.

보드라운 볼이 와 닿자 당황한 그가 휙 고개를 드는 바람에 덩달아 움찔한 그녀의 입술이 그의 볼을 문지르듯 스쳤다.

굳어 버린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얼른 사과를 했다.

“어…… 미안해요.”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려던 그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따뜻한 손이 그의 볼을 만져 왔다. 정확하게는 손가락이 볼을 문질렀다. 조금 전 그녀의 입술이 스쳤던 곳이었다.

“이거 조금 묻었어요. 이제 깨끗해요.”

이거, 라며 그녀는 립스틱이 칠해진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를 숙여서 인사한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그쪽 얼굴이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잠깐 혼란했어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그가 잠깐의 침묵 후 캐리어를 가리켰다.

“내가, 끌까요?”

“괜찮아요. 안 무거워요. 그런데 나 모바일폰 렌트해야 돼요.”

진우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향했다.

“한국에서 하는 전화 받을 때 쓰려고요.”

진우는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휴대폰을 렌트하는 곳부터 찾았다.

국내 통화만 할 거라는 설명에 통신사 직원은 스마트폰에 비해 훨씬 저렴한 2G폰을 권유했다. 그녀가 렌트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진우는 작은아버지에게 그녀와 만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안젤리크는 서류를 작성하는 틈틈이 비를 감상했다. 인천에서는 흰 구름이 떠 있었는데 부산의 구름은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스콜을 연상케 할 만큼 멋들어진 폭우였다.

“가죠.”

안젤리크는 넓은 보폭으로 공항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와 속도를 맞추며 힐끗 그를 곁눈질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처음 인사를 나눈 한국인인 데다 여행 기간 동안 같은 집에 머물 사이였다.

그런데 그의 작은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그다지 사교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친해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를 잠시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공항 주차장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차창을 뚫을 것처럼 퍼붓던 빗줄기가 톡톡거리는 빗방울로 바뀌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그쳤다. 예측 불가능한 소나기다웠다.

안정감 있게 운전하는 그의 옆에 앉아 그녀는 비가 갠 풍경을 감상했다. 비가 씻어 준 덕분인지, 워낙에 그런 건지 부산의 공기는 맑아 보였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아직 없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초록의 산들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던 설명이 실감 났다.

“여기 강 이름이 뭐더라?”

혼잣말을 하며 가이드북을 꺼내 뒤적이는데 옆에서 대답이 나왔다.

“낙동강.”

“아, 낙동강.”

가이드북에서 눈을 떼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차가 출발한 뒤로 마치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운전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는 흘러가는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에 오기 전 미술관 관장님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된 그의 작은아버지는 그가 나무를 닮은, 가장 아끼는 조카 녀석이라며 부산에 있는 동안 잘 챙겨 줄 거라고 말했었다. 나무 같은 사람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나무처럼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나무처럼 한결같은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없는 만큼 말수도 없다는 건 알겠다. 작은아버지와는 외모만큼이나 성격 역시 닮은 점이 없다는 것도.

안젤리크는 또다시 침묵을 지키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창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신호를 받아 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 진우는 스마트폰으로 창밖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는 침묵을 불편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 마주침이 다소 우스꽝스러웠던 탓인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한국은 첫 방문인 데다 예외적으로 작은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라 더욱.

“정식으로 다시 인사할까요? 아까는 좀 당황했었던 터라.”

창문에서 시선을 뗀 그녀의 눈동자에 얼핏 장난기가 스치고 지났다.

“그랬어요? 표정이 없어서 하나도 몰랐어요. 얼마만큼 당황했어요?”

“…….”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말을 잃은 그를 그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딱딱한 말투가 아니더라도 그는 좀 쌀쌀맞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상과는 달리 별것 아닌 말에 난처해하는 모습이 은근 귀엽게 느껴졌다. 볼에 입술이랑 손 좀 닿았다고 눈이 커다래졌을 때처럼.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한층 깊어지자 그녀는 풋 웃어 버렸다. 어쩌면 첫 느낌과는 다르게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아요. 인사해요, 진짜로. 나는 에코 안젤리크예요. 반가워요.”

진우의 눈앞에 조그마한 손이 내밀어졌다. 얼른 잡으라는 듯 팔랑거리던 손가락이 진우의 손에 감싸였다.

“이진우입니다.”

“어?”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못 들은 걸까. 별로 어렵거나 헷갈릴 만한 이름이 아닌데. 다시 한번 ‘이진우’를 발음하려던 진우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악수를 하느라 맞잡은 그의 손을 뒤집더니 눈앞에 바짝 끌어당기고는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손금이라도 읽는 것처럼.

시선으로 그의 손바닥을 쓰다듬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담은 채였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잡힌 손을 빼내 다시 운전대를 잡은 진우가 신호를 받아 출발하며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손바닥 여기저기가 아주 딱딱하잖아요. 손가락 살도.”

콘트라베이스나 피아노를 만지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끄럽게 잘생긴 손인데 손바닥은 마치 운동선수나 육체노동에 익숙한 사람처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지누의 직업은 뭐예요?”

마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기초 교본에 쓰여 있을 법한 표현에 진우의 입술에 엷은 웃음이 어렸다. 그녀는 꽤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가 하면 또 지금처럼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어색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묘한 억양과 말투만으로도 그녀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작은아버지한테서 못 들었습니까?”

“음, 필요한 거 있으면 조카한테 얘기하라고 해서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나무 같은 녀석이라고만 했어요. 나무랑 닮았다고. 그런데 그거 좋다는 거예요, 나쁘다는 거예요?”

진우는 장난을 걸듯 물어 오는 그녀에게 글쎄요, 라고 중얼거리고서 표지판에 집중했다. 아마도 막힐 확률이 크겠지만 그래도 부산에 처음 온 그녀를 위해서 광안대교 정경을 볼 수 있는 길로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차선을 바꿨다.

“나무 다룹니다. 가구 디자인도 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그리고 후배와 함께 공방도 운영하고요.”

“공방?”

“아틀리에.”

“오―”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그녀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그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한편으론 조금 놀랍기도 했다.

아까 공항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그에게선 조용한 실험실에서 혼자만의 연구에 빠져 있는 과학자 이미지가 느껴졌었다. 흰 가운이 어울리는 단정하고 깔끔한, 그리고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 그래서 손에 굳은살이 박이게 만드는 이과 쪽 직업은 뭘까 궁금했었는데, 가구 디자이너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멋지네요.”

교수이자 서양화가인 그의 작은아버지가 조카들 가운데 가장 마음이 가는 녀석이라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게 아닐까 짐작됐다.

그녀의 솔직한 감탄이 멋쩍어 슬쩍 눈매를 모으던 진우는 뒤이어 갑자기 터져 나온 탄성에 고개를 돌렸다. 탄성의 주인공은 눈앞의 광경에 홀린 듯 차창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바다 위를 이렇게 길게 지나는 다리는 처음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예쁜 블루도 처음 봐요.”

한차례 쏟아진 소낙비로 인해 하늘도 바다도 쨍한 파란색이었다. 포토샵이라도 한 것처럼 불순물 하나 없는 색감이었다.

“창문 조금 내릴게요.”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창문을 내리고 깊이 숨을 들이켜다 갑자기 얼른 올려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진우의 눈꼬리가 접혔다. 동그래진 눈을 한 그녀가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엄청 더워. 숨이 막혀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기대했는데 얼굴을 덮은 건 비릿하고 끈적한 열풍이었다. 숨 쉴 구멍 하나 없는 마스크 시트가 얼굴에 철썩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기내에서 내렸을 때 훈기를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바로 김해공항으로 향하는 연결편으로 갈아타야 했기에 공항에 머문 시간은 잠깐이었다. 조금 전 김해공항에서 나왔을 때에는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린 덕분에, 그리고 차 안에는 내내 에어컨이 켜져 있어 바깥의 공기가 어떤지 미처 알지 못했다.

문득 견디기 어려운 열기와 습도 때문에 한국 여행을 하기 가장 힘든 달로 7, 8월을 꼽던 가이드북 내용이 떠올랐다.

“어…… 비가 와서 더 끈덕끈덕하는 거죠? 설마 언제나 이런 건 아니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눈빛으로 물어 오는 그녀로 인해 진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안젤리크는 제스처와 함께 표정도 풍부한 사람이라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일은 36도까지 올라간다던데. 지금보다 습도도 더 높고.”

“습도?”

“공기가 수증기, 그러니까 물을 머금은 정도. 오늘보다 더 축축하고 끈적끈적할 거라는 말입니다.”

“아…….”

진우는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가이드북에 눈길을 주었다.

“가이드북에 날씨에 대해 나와 있을 텐데요?”

“얼마나 더운지 쓰여 있기는 하지만 아시아는 처음이라서 얼마만큼인지는 느낌이 전혀 안 왔어요.”

이렇게나 더운 날이 머무는 내내 지속될 거라는 그의 설명에 안젤리크는 순간 아찔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날씨쯤은 참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멋졌다. 바다를 마주한 도시는 날씨가 어떻든 바다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는 부산의 정경은 사진이나 동영상보다 훨씬 더 모던하고 활기차 보였다. 어지럽도록 높이 솟은 초고층 아파트들은 파리의 라 데팡스 신도시 지구를 연상케 했다. 마천루 같은 눈앞의 아파트들에 비교하면 파리의 신도시는 아담한 규모지만.

하얀 요트들이 정박한 곳을 돌아 호텔이 줄지어 보이는 도로를 지나자 달맞이 언덕이 나왔다. 경사진 길을 오른 진우가 언덕 끝에 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