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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진우를 따라 대문으로 들어선 안젤리크가 입을 벌렸다. 소나무와 과실수가 심긴 정원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거칠게 밀려와 바위와 부딪치는 하얀 포말, 바람이 만들어 내는 높고 낮은 파도들, 그리고 하늘과 또렷하게 경계를 나눈 수평선을 보며 한순간 말을 잃었다.
“뷰가 이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에요! 진짜 근사해. 이런 곳에서 살면 매일매일 바캉스 온 기분이지 않아요?”

워낙에 성격이 그런 건가, 아니면 여행을 온 흥분 때문인가. 감정을 일일이 표현하는 그녀를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원래 성격이 밝아요?”

“밝아?”

“잘 웃고 느끼는 대로 잘 표현하고.”

“그런 편이에요.”

대답 뒤에는 짓궂은 질문이 뒤따랐다.

“원래 잘 안 웃고 표현도 잘 안 해요?”

예상치 못한 반격에 조금 커진 눈을 하던 그가 인정했다.

“……그런 편이죠.”

잘 웃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입꼬리를 슬쩍 올린 그가 매일이 바캉스 같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뒤늦게 해 왔다.

“매일 보면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지만 매일 봐도 싫증 나지는 않죠.”

“싫증? 싫어한다고요?”

“그런 뜻도 있지만, 지금은 질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쓴 겁니다.”

“질리지 않는다?”

질리지 않는다, 물리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풀어서 설명해 줘도 이해하지 못하다 영어로 말해 주자 그제야 ‘아하’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본 진우는 1층 현관문을 열고 캐리어를 들여놓았다. 그녀가 사용할 침실을 보여 준 후 대문과 1층 현관문 터치 패드의 번호를 알려 주고는 2층을 가리켰다.

“알고 있겠지만, 난 위에 삽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요.”

“우리 이제 이웃사촌이네요. 다투지 말고 잘 지내요.”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아는구나, 라고 생각하다 다투지 말자는 표현에 진우의 눈동자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애들도 아닌데.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물었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음, 가이드북에 여러 레스토랑이 나오기는 했는데, 가이드북보다는 지누가 말해 주는 걸 먹어 보고 싶어요.”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아주 매운 거와 뜨거운 건 빼고요.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먹어 볼 용기가 안 나요.”

“그럼 초밥 어때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며 진우가 ‘스시’라고 덧붙였다.

“나 그거 좋아해요.”

그녀는 가이드북을 펼쳐 표시해 놓았던 초밥 식당을 찾아 보여 주며 물었다.

“해운대라고 했는데 여기서 멀어요?”

가까이 다가서서 가이드북 속 주소를 확인한 진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멀지는 않지만 좁은 골목길에 위치해 있어 설명하기도 혼자서 찾아가기도 애매한 곳이었다. 그는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뒤 제안을 하나 했다.

“테이크아웃해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생각지 못한 배려에 조금 놀라던 그녀가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이곳의 모든 곳이 다 초행길인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 3, 40분 정도 걸릴 거라는 말을 남기고 대문을 나서는 그를 지켜보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캐리어에서 짐을 꺼낸 그녀는 우선 샤워부터 했다. 미지근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한참 서 있었더니 긴 여정과 시차로 인한 피로가 물과 함께 흘러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로 갈아입은 뒤 정원으로 나와 청량한 솔향기를 흠뻑 들이켜다가 그만 웃어 버렸다. 바다에서 불어온 후덥지근한 바람이 방금 샤워를 하고 뽀송해진 피부를 금세 끈적하게 만들어 놓았다.

「상상을 초월하네.」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휴대폰을 들어 ‘엄마’를 터치했다. 휴대폰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열어 둔 채 정원 담벼락에 기대 바다를 구경하던 안젤리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안녕하세요, 마담 에코, 따님입니다.」

― 어머나, 나한테 딸이 있었나요?

안젤리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인천공항에서 아빠한테만 전화했다고 삐졌구나? 엄마 진료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랬지.」

― 통화는 몰라도 메시지 보낸다고 진료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텐데?

「대신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엄마한테 먼저 전하잖아.」

― 부산이야?

「응, 좀 전에 무슈 이 댁에 도착했어. 샤워하고, 짐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까 엄마 점심시간이라 전화한 거야. 점심 먹었어요?」

― 방금. 거기는 저녁 먹을 시간이겠다.

「그래서 지누가, 무슈 이 조카 이름이 지누야. 지누가 나가서 먹기에는 나 피곤할 거라고 스시 사러 갔어요.」

― 세심하네. 마중도 나와 주고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줘서 고맙다. 다정한 사람인가 보다.

잠깐 생각하던 그녀가 그의 첫인상을 전해 주었다.

「음, 다정하기보다는 예의 바른 사람 같아.」

― 그렇구나. 그런데 부산의 느낌은 어때?

「아직은 바다가 멋지다는 거랑 날씨 말고는 잘 모르겠어.」

― 날씨는 어떤데? 생각하던 것만큼 덥고 습하니?

안젤리크는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훨씬, 아주 후덥지근해. 습도가 엄청나. 조금 과장하자면 사우나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 왜 가능하면 한여름은 피해서 여행하는 게 좋다고 하는지 알겠어. 엄마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야.」

― 그 정도야?

「그 정도야. 그렇지만.」

그녀는 담벼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정원의 잔디를 밟으며 눈앞의 전경을 전해 주었다.

「바다가 바로 앞에 있고, 뒤로는 낮은 산들이 배경처럼 쭉 이어져 있어서 날씨쯤은 참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매력 있어. 특히나 이 집은 뷰가 엄청 근사해. 정원이 꽤 넓어서 소나무랑 석류 같은 과실수들이 심겨 있어. 꽃도 있고. 대도시에 이런 분위기를 가진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할 만큼 여기만 뚝 떼어 놓은 느낌이야.」

과실수를 훑고 간 그녀의 시선이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한창 지어지고 있는 세쌍둥이 같은 건물에 머물렀다.

「이 집이랑 눈앞의 뷰만 보면 한적한 바닷가 휴양지 같은 분위기거든? 그런데 고개만 조금 돌리면 초고층 빌딩 세 개가 거의 동시에 올라가는 모습이 보여. 참 신기하지? 어떻게 이런 곳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야.」

안젤리크는 스피커폰의 볼륨을 최대치로 키우고 팔을 담장 너머로 쭉 뻗어 가능한 한 파도 소리를 담으려 애썼다.

「엄마, 파도 소리 들려? 파도가 바로 발밑에서 부서지고 있어.」

― 들리는 것도 같고 그냥 바람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멋진 곳에서 머물게 되어 다행이다. 마음껏 누려. 그리고 안젤. 엄마가 한 말 기억하지?

혹시라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로 인해 너무 아파하지는 말 것. 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할 것. 무조건 엄마한테 전화할 것.

떠나오기 전 엄마가 손을 잡고서 그녀의 눈을 보며 했던 말이었다.

「응, 기억해. 그리고 엄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럴 만큼의 감정이…….」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돌자 진우가 꽤 큼직해 보이는 종이 백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웃어 보인 안젤리크는 궁금하니까 페이스북에도 사진을 올리라는 엄마의 요구에 알겠다고 답했다.

진우는 야외 테이블 위에 종이봉투를 올려놓으며 안젤리크에게 눈길을 주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녀 역시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의 모습이 조금 달랐다. 말의 속도가 빠른 건 물론 목소리의 톤도 다르게 들렸다.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할 만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둔 진우는 봉투에서 음식들을 하나둘 꺼냈다.

― 저녁 맛있게 먹고 푹 쉬어.

「응. 엄마도 오후 시간 잘 보내. 또 전화할게. 사랑해.」

쥬뗌므. 낯설지 않은 단어에 진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방금 들은 달콤한 사랑 고백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눈웃음이 아직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휴대폰을 테이블 귀퉁이에 내려놓은 안젤리크가 해초샐러드와 새우튀김을 발견하고서 신난 표정을 지었다.

“오― 맛있겠다. 어? 그런데 왜 젓가락이 하나만 있어요? 같이 안 먹어요?”

“나는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점심도 늦게 먹었고.”

진우가 내놓는 대답은 두 번 권하기 망설여질 만큼 무뚝뚝한 뉘앙스였다.

맛있게 먹으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붙잡을 새도 없이 대문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안젤리크가 서둘러 말했다.

“오늘 모두 다 고마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문을 빠져나가는 그를 지켜보다 그녀는 한쪽 볼에 바람을 넣었다.

「바쁜 사람한테 마중 나오라고 하고, 저녁 심부름까지 부탁한 것 같아서 미안해지잖아.」

이왕이면 함께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배려심은 있는데 사교성은 없나 보다.

아무래도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와 친해지기는 어려울 듯했다.

「아쉽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봉투 속의 내용물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한국에서의 첫 식사를 홀로 하게 된 점은 여전히 아쉬웠으나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경은 그 아쉬움을 금세 잊게 만들 만큼 근사하고 로맨틱했다.





2장. 착각



그냥 눈이 떠졌다. 이중창이라 방음이 잘되는지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커튼을 뚫고 햇살이 비쳐 오는 것도 아닌데 잠이 깨 버렸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날아오는 동안 잠을 자려고 노력한 덕분인지 조금 몽롱하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피곤하지는 않았다.

안젤리크는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10분 전이었다.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편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에 닿는 방바닥의 시원한 감촉을 음미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몸에 밴 습관대로 몇 가지 동작을 하고 나자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커튼을 걷어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가 부산이란 말이지.」

어쩐지 어제보다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샤워를 한 후 부엌으로 가 커피를 찾았다. 냉장고에서도 싱크대 선반에서도 원두커피를 찾을 수가 없었다. 2층에 올라가서 물어볼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시 망설이던 안젤리크는 외출 준비를 하고서 집을 나왔다. 대문 근처에서 올려다본 2층은 커튼이 열려 있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집 주변을 구경하며 언덕길을 내려가다 커피 향이 유독 고소하게 번져 나오는 곳으로 골라 들어갔다. 골목 모퉁이의 작은 카페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며 커피를 마시다가 크로스 백에서 가이드북을 꺼내 오늘 일정을 체크했다. 자갈치시장과 그 맞은편에 있다는 국제시장, BIFF 광장을 구경한 뒤 점심은 먹자골목에서 거리 음식들을 먹어 보기. 오후에는 해운대에 가서 바다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 잠시 쉬다가 달이 뜨면 문탠 로드를 거닐기.

가이드북을 참고해서 일정을 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정대로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바다를 좋아해서 어쩌면 해운대 바닷가에서 일몰을 즐기며 저녁때까지 머무를지도 몰랐다.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보고 가고 싶지만 관광지 순례보다는 즐기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안젤리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해운대 산책과 문탠 로드 사이에 ‘Resto avec Jinou?(지누와 저녁?)’이라고 적어 넣었다.

언제나처럼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챙겨 먹은 안젤리크는 카페에서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길을 내려갔다. 여행 온 사람 특유의 느긋한 걸음으로.

내일은 더 더울 거라던 진우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이른 아침의 햇볕은 고흐의 태양보다 강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차도와 접해 있는 긴 언덕길의 끝에서 택시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안젤리크는 하품을 했다.

「이제 겨우 8시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너무하잖아.」

한국의 여름은 온도보다 습도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들다더니 살갗에 달라붙는 끈끈한 습기로 인해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하품도 자꾸만 나왔다.

뙤약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 거리는 벌써부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8월에도 30도를 웃도는 날이 많지 않은 데다, 바람이 건조해 한낮에도 그늘에 있으면 견딜 만한 파리의 여름에 익숙한 그녀에게는 쉽게 적응하기 힘든 날씨였다.

집으로 되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그녀는 다시 한번 택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인도에 서서 넓은 차도를 주시하는 그녀의 시야에 달맞이 언덕을 빠져나오는 택시가 보였다.

택시를 세우려다 뒷좌석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게 보여 손을 내리던 그녀의 눈이 반가움으로 커졌다. 그녀가 알아본 순간 눈이 마주친 진우가 기사에게 택시를 세우게 했다. 택시가 끼익 타이어 소리를 내며 급작스레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