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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참 예뻐요
1화
1. 달에게 부치는 노래
방과 후 해방감은 잠깐이었다. 재잘재잘 웃음꽃을 터트리며 수도권 도시의 여고 정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희주는 바짝 긴장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늘에 가득한 먹장구름 탓일까. 오늘은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찌뿌드드했다.
희주는 이어폰을 꽂고 버스에 올라탔다. 늦봄의 차창으로 갑자기 어둠이 엄습하더니 곧 빗방울이 내리쳤다. 젖어 가는 창밖의 울긋불긋한 거리를 바라보며 음악에 빠져들다 보니 집으로 향한다는 긴장감이 다스려졌다. 동생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야 했던 희주는 걸음을 서둘렀다.
희주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빙긋거리며 이어폰을 빼냈다. 그러고는 음원의 주인공인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도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어서 또 다른 감사의 대상이 떠올랐다. 안드레아스 숄을 알게 해 준 누군가의 목소리다.
그날은 방을 함께 쓰는 사촌 언니가 여행을 가서 혼자였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층층으로 쌓여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새벽녘, 창을 열고 겨울바람과 진눈깨비를 마주하던 그때 어디선가 노래가 날아들었다. 성별도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노랫소리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희주는 넋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아련하게 들려오던 두 곡의 노래는 희주의 영혼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아침까지 멜로디가 생생했다. 기억에 살아남은 가사 일부를 가지고 검색한 끝에 한 곡의 노래를 찾아냈다. White as lilies. 안드레아스 숄이 작곡해서 부른 곡이었다.
당장 음원을 구입했고, 다른 카운터 테너도 좋아하게 되었으며, 한동안 멀리했던 음악 자체를 오롯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음악은 마음을 다스려 주고 위로해 주는 든든한 친구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희주는 우산을 펴 들고 동네 치킨 가게에 들러 동생, 진우가 좋아하는 오븐치킨 한 조각을 샀다. 넉넉하게 먹이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고모부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탓인지 갈수록 용돈이 줄어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빗줄기와 불빛과 어둠이 뒤엉킨 고층 아파트는 동화 속의 성 같았다. 희주는 다시금 방긋 웃었다. 그래,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서 호강하고 있어. 애써 마음을 달래 본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술병을 앞에 둔 고모부와 고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며,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잔뜩 어지럽혀 있었다. 특히 거실 한쪽에 자리 잡은 진우의 컴퓨터 모니터가 박살 나 있었다. 진우는 집에 없었다. 희주는 고모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허겁지겁 신발을 꿰신었다.
“내버려 둬! 그놈은 고생 좀 해 봐야 철이 든다고!”
고모의 앙칼진 목청을 뒤로한 채 희주는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내달렸다.
동네 피시방에서 진우를 발견하지 못하자 왈칵 불안감이 차올랐다. 가랑비를 맞으며 동네를 헤매 보아도, 전화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집을 뛰쳐나간 적은 몇 번 있었어도 이렇듯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진우는 휴대폰도 돈도 없이 뛰쳐나갔단다.
“진우야, 흐흑.”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고 살아왔는데 거리에서 한 시간을 보내자 그만 꺼이꺼이 울음이 터졌다. 딱히 동생 때문에 터지는 눈물은 아니었다. 힘겨운 시간들을 시시각각 삭제해 주곤 했던 희망이라는 기둥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희주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나도야! 나도 힘들었어!”
비가 그치고 서늘한 밤바람이 젖은 몸으로 스미었다. 어쩌면 진우는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아파트로 향했다. 그러던 중 단지 어귀에서 누군가 팔을 낚아챘다.
“희주야.”
맞은편 집인 1305호의 선아였다. 지금은 아이 엄마지만 대학생 때부터 알아왔기에 지금도 언니라고 부르곤 했다.
“어, 선아 언니. 안녕하세요.”
그 와중에도 희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진우가 질색해하는 습관 중의 하나였다.
“진우 찾으러 다녔지?”
“혹시 진우 봤어요?”
선아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주고는 등을 토닥여 준다.
“걱정 마. 지금 우리 엄마랑 같이 있어. 진우가 네 폰 번호를 안 알려 주더라. 가자.”
단지 어귀에서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는 진우를 선아가 발견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아는 근처 커피숍으로 희주를 데려갔다.
진우는 선아의 친정 엄마인 윤 여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윤 여사는 오래전부터 대학교수인 남편과 1305호에서 살아왔다. 지금은 그 집으로 사위를 불러들여 함께 사는 중인데, 워낙에 화목한 가족이라 그런지 희주는 그 집의 현관문만 바라봐도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었다. 희주를 진우 옆으로 앉게 한 선아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된 거니.”
희주는 진우에게 꿀밤을 먹이려다가 멈칫했다. 진우가 고개를 홱 돌리며 급하게 얼굴을 감추었지만 보고 말았다. 중학생 동생의 터진 입술과 볼의 피멍까지. 누가 그랬는지 어림짐작이 되는데도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싸웠니?”
“글쎄다. 진우가 도무지 말을 안 한다.”
정작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은 묵묵부답인 채 윤 여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해자가 누군지 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희주는 굳이 윤 여사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거리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진우야…… 설마 고모부가…… 아니지?”
손찌검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훈계 차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지 지금처럼 완연한 폭력은 없었다. 그나마 진우가 함구해서 고모의 입을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진우는 멍든 볼을 손으로 가리면서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말을 좀 해. 맨날 말을 안 하니까 누나가 도울 수 없잖아.”
거듭된 채근에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하면!”
“뭐?”
“말하면 어쩔 건데!”
진우의 음울한 짜증이 가시처럼 마음을 콕콕 찔러 댔다. 참으라고,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다고 앵무새처럼 답변해 왔던 누나를 힐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주는 진우가 정말로 고모부에게 맞았다면, 이번에는 진지하게 상의할 터였다.
“속을 털어놔야 누나가 도와줄 수 있지.”
“병신.”
“이 자식이 누나한테! 근데 너 고모부한테 진짜 욕했니?”
“아니.”
“근데 고모랑은…….”
“함께 게임하는 새끼한테 욕한 건데, 고모부가 갑자기 달려와 시비 걸었다고.”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고모부가 일이 잘 안 풀려 예민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과하게 반응했으리라.
“요즘 고모부 상황도 안 좋은데 피시방 가서 하지 그랬어.”
“맨날 하는 시간에 했어. 고모부가 거실로 나온지도 몰랐어. 역시나! 너하곤 말 안 할래.”
“알았어, 알았어. 누나가 어떻게 도와줄까?”
희주는 고개를 숙여 진우와 눈을 맞추려고 했다. 한사코 시선을 피하던 진우가 비장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방…… 얻어 줘.”
“뭐?”
“따로 살고 싶어.”
“야, 오진우.”
희주는 말문이 턱 막혀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윤 여사는 시종 차분하게 진우를 지켜보고 있을 뿐 관여할 기미를 내비치진 않았다. 희주는 나름대로 설득을 시도했다.
“야, 나가면 누나랑 같이 나가야지. 때가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병신, 지는 고모 집 가정부라 이쁨 받고 잘 지내면서. 난 밥만 축내지만 누난 밥값 하니까 그냥 남아 있어도 되잖아. 지가 진짜 가정분 줄 안다니까. 남 빨래에다 청소까지 다 해 주고.”
야유하는 진우에게 희주는 발끈하지 못했다. 진우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도 진우야…….”
한 번 더 설득해 보려고 억지웃음을 짓는데 다시금 진우의 얼굴에 자리한 피멍이 보였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진우의 눈길과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렇다. 얼굴에 남은 야만적인 폭력의 증표만 생각했다. 그보다 더 큰 상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피멍이 가셔도 어린 영혼의 상처는 오래도록 남을 터였다. 진우의 눈길은 슬픔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누나에게 속내를 털어놓고도 기대감은 갖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금 윤 여사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진우를 바라보는 윤 여사의 시선은 따뜻했으며 조용한 웃음까지 보태졌다.
그날 밤, 고모와의 담판은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말대꾸 한 번 안 한 채 4년 동안 때론 식모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조카가 동생 문제로 부당함을 지적하며 단호하게 나올 때는 펄쩍 뛰었지만, 희주의 완강한 태도에 이내 잘못을 수긍하는 듯했다.
“실은 고모부 회사 부도로 아파트가 넘어갈 판이다. 해서 작은 평수 월세로 이사할 참이었어. 아무래도 같이 살긴 힘들지 않을까 싶다. 너희들한텐 당장 원룸밖에 해 줄 돈이 없어. 어차피 오래 살지 않을 거면 월세가 수월할 거야.”
부모님 두 분의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고모부 내외가 관리하던 건 희주와 진우의 학비며 생활비로 거의 소진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너희들끼리 한번 살아 봐라. 이것저것 들어가는 돈이 보통 많은 게 아냐. 그래도 너희가 어디 남이냐. 고모가 생활비야 어떡하든 다달이 보태 줄 테니 아껴서 잘 살아. 참, 희주야. 할머니한텐 우선 비밀로 해 줄래? 상황 봐서 내가 설명할 테니.”
“예, 저도 할머니한텐 당장 알리고 싶지 않아요.”
시골에서 할아버지 병수발로 발이 묶인 할머니에겐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진우 그놈, 게임에 미쳐 인성이 개판이더라. 고모부가 때린 게 잘했단 건 아냐. 근데 어른 계신 자리에서 그렇게 욕하는 건 정말 아니다. 오빠네 집에서도 진우 때문에 너까지 나한테 보냈던 거잖아. 앞으론 네가 잘 좀 가르쳐. 그리고 고모부가 재기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하지만 희주는 지금 집을 나가면 다시는 고모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만 진우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여지는 남겨 두었다.
다음 날, 희주는 선아를 만났다. 선아, 아니 윤 여사 덕분에 새로운 주거지는 의외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 * *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에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여섯 달을 보낸 뒤 부모님의 통장과 함께 남매는 고모 집으로 인계되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 된 희주는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었다. 많은 소녀들이 그러하듯 한때 예고를 진로 중 하나로 생각하고 착실히 쌓아 가던 실력은 어쩌면 어쭙잖은 기교일 뿐이었다.
부모님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과 피아노도 잃게 된 한참 뒤에야 진정으로 음표 속에 감정을 담고 싶다는 간절함이 찾아들었다. 고모는 남매의 진로를 일찌거니 취업을 염두에 두며 이끌었다. 취미로라도 치겠다며 학원을 보내 달라는 희주에게, 고모는 학업에 도움이 되는 영어 학원이라면 보내 줄 수 있지만, 같은 학원비여도 피아노는 안 된다고 했다.
희주는 어느 날, 놀이터 모래밭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놓고 손가락을 놀렸다. 그때 어떤 여대생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바로 1305호의 선아였다. 그날부터 선아에게 이끌려 멋진 방음부스와 피아노가 있는 그 집에서 몇 차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선아는 피아노를 잘 쳤으며, 지금은 독일에서 사는 큰언니가 성악가라고 했다. 방음부스는 큰언니가 집에서 음대를 다닐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희주는 진우를 챙기느라 그 집에 자주 가 보지는 못했다. 희주가 집에 없으면 진우가 자꾸 밖으로 돌아다녔던 탓이다.
윤 여사가 안내한 집은 도심 외곽에 자리한 작은 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다. 그곳은 시市에 포함되면서도 면사무소 관할의 작은 동네였고, 작은 공장과 논밭과 축사가 공존했다. 동산을 뒤로 둔 2층 벽돌집은 아담한 별장 같았다. 대문 옆으론 셔터가 내려진 납작한 차고가 붙어 있었고, 발코니는 정원과 초등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1층 현관에 이르기 직전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윤 여사는 남매를 2층으로 이끌었다.
“으슥해 보여도 초등학교가 있으니 치안은 괜찮을 거야.”
1층은 아들이 사용하는데 지금은 군대를 가서 비어 있다고 했다. 2층 내부의 주방 앞으론 작은 방과 욕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면의 슬라이딩 도어를 지나면 큰방과 발코니로 이어졌다. 발코니로 나갔더니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초등학교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희주는 날마다 싱그런 아름드리나무와 마주하며 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떴다.
“너무 멋져요.”
희주의 반응에 윤 여사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
“시골이라서 가끔 분뇨 냄새가 나긴 해도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집 안을 요모조모 살핀 뒤 희주는 진우를 바라보고 눈으로 물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윤 여사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
“네가 부탁한 대로 1년 계약서를 써 놓았다만 더 살고 싶으면 집주인하고 상의해 보도록 하렴. 어지간해선 들어줄 거야.”
“네? 아주머니가 주인 아니세요?”
“후후, 아들이 집주인이야. 난 관리인 정도?”
고운 피부와 우아한 말씨의 50대 중후반의 여자는 드물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말고 집주인이 제대하면 잘 지내 봐. 고 녀석이 나중에라도 집세 올리려 들면 나한테 꼭 알려 주고.”
아들을 언급하는 윤 여사의 밝은 표정에서 자식을 향한 애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희주나 진우를 바라보는 눈길에도 시종일관 애정이 가득했다. 희주는 문득 묻고 싶었다. 우리한테 왜 이리 잘해 주세요?
“뭐가 이상하니?”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다가 희주는 멈칫했다. 보증금도, 월세도 예상보다 많이 적었다.
“어, 저도 나름 인터넷에서 시세를 알아보았는데…… 집세가 많이 싸서요.”
1화
1. 달에게 부치는 노래
방과 후 해방감은 잠깐이었다. 재잘재잘 웃음꽃을 터트리며 수도권 도시의 여고 정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희주는 바짝 긴장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늘에 가득한 먹장구름 탓일까. 오늘은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찌뿌드드했다.
희주는 이어폰을 꽂고 버스에 올라탔다. 늦봄의 차창으로 갑자기 어둠이 엄습하더니 곧 빗방울이 내리쳤다. 젖어 가는 창밖의 울긋불긋한 거리를 바라보며 음악에 빠져들다 보니 집으로 향한다는 긴장감이 다스려졌다. 동생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야 했던 희주는 걸음을 서둘렀다.
희주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빙긋거리며 이어폰을 빼냈다. 그러고는 음원의 주인공인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도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어서 또 다른 감사의 대상이 떠올랐다. 안드레아스 숄을 알게 해 준 누군가의 목소리다.
그날은 방을 함께 쓰는 사촌 언니가 여행을 가서 혼자였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층층으로 쌓여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새벽녘, 창을 열고 겨울바람과 진눈깨비를 마주하던 그때 어디선가 노래가 날아들었다. 성별도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노랫소리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희주는 넋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아련하게 들려오던 두 곡의 노래는 희주의 영혼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아침까지 멜로디가 생생했다. 기억에 살아남은 가사 일부를 가지고 검색한 끝에 한 곡의 노래를 찾아냈다. White as lilies. 안드레아스 숄이 작곡해서 부른 곡이었다.
당장 음원을 구입했고, 다른 카운터 테너도 좋아하게 되었으며, 한동안 멀리했던 음악 자체를 오롯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음악은 마음을 다스려 주고 위로해 주는 든든한 친구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희주는 우산을 펴 들고 동네 치킨 가게에 들러 동생, 진우가 좋아하는 오븐치킨 한 조각을 샀다. 넉넉하게 먹이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고모부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탓인지 갈수록 용돈이 줄어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빗줄기와 불빛과 어둠이 뒤엉킨 고층 아파트는 동화 속의 성 같았다. 희주는 다시금 방긋 웃었다. 그래,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서 호강하고 있어. 애써 마음을 달래 본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술병을 앞에 둔 고모부와 고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며,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잔뜩 어지럽혀 있었다. 특히 거실 한쪽에 자리 잡은 진우의 컴퓨터 모니터가 박살 나 있었다. 진우는 집에 없었다. 희주는 고모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허겁지겁 신발을 꿰신었다.
“내버려 둬! 그놈은 고생 좀 해 봐야 철이 든다고!”
고모의 앙칼진 목청을 뒤로한 채 희주는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내달렸다.
동네 피시방에서 진우를 발견하지 못하자 왈칵 불안감이 차올랐다. 가랑비를 맞으며 동네를 헤매 보아도, 전화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집을 뛰쳐나간 적은 몇 번 있었어도 이렇듯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진우는 휴대폰도 돈도 없이 뛰쳐나갔단다.
“진우야, 흐흑.”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고 살아왔는데 거리에서 한 시간을 보내자 그만 꺼이꺼이 울음이 터졌다. 딱히 동생 때문에 터지는 눈물은 아니었다. 힘겨운 시간들을 시시각각 삭제해 주곤 했던 희망이라는 기둥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희주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나도야! 나도 힘들었어!”
비가 그치고 서늘한 밤바람이 젖은 몸으로 스미었다. 어쩌면 진우는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아파트로 향했다. 그러던 중 단지 어귀에서 누군가 팔을 낚아챘다.
“희주야.”
맞은편 집인 1305호의 선아였다. 지금은 아이 엄마지만 대학생 때부터 알아왔기에 지금도 언니라고 부르곤 했다.
“어, 선아 언니. 안녕하세요.”
그 와중에도 희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진우가 질색해하는 습관 중의 하나였다.
“진우 찾으러 다녔지?”
“혹시 진우 봤어요?”
선아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주고는 등을 토닥여 준다.
“걱정 마. 지금 우리 엄마랑 같이 있어. 진우가 네 폰 번호를 안 알려 주더라. 가자.”
단지 어귀에서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는 진우를 선아가 발견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아는 근처 커피숍으로 희주를 데려갔다.
진우는 선아의 친정 엄마인 윤 여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윤 여사는 오래전부터 대학교수인 남편과 1305호에서 살아왔다. 지금은 그 집으로 사위를 불러들여 함께 사는 중인데, 워낙에 화목한 가족이라 그런지 희주는 그 집의 현관문만 바라봐도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었다. 희주를 진우 옆으로 앉게 한 선아는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된 거니.”
희주는 진우에게 꿀밤을 먹이려다가 멈칫했다. 진우가 고개를 홱 돌리며 급하게 얼굴을 감추었지만 보고 말았다. 중학생 동생의 터진 입술과 볼의 피멍까지. 누가 그랬는지 어림짐작이 되는데도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싸웠니?”
“글쎄다. 진우가 도무지 말을 안 한다.”
정작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은 묵묵부답인 채 윤 여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해자가 누군지 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희주는 굳이 윤 여사를 의식하지 않은 채 거리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진우야…… 설마 고모부가…… 아니지?”
손찌검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훈계 차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지 지금처럼 완연한 폭력은 없었다. 그나마 진우가 함구해서 고모의 입을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진우는 멍든 볼을 손으로 가리면서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말을 좀 해. 맨날 말을 안 하니까 누나가 도울 수 없잖아.”
거듭된 채근에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하면!”
“뭐?”
“말하면 어쩔 건데!”
진우의 음울한 짜증이 가시처럼 마음을 콕콕 찔러 댔다. 참으라고,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다고 앵무새처럼 답변해 왔던 누나를 힐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주는 진우가 정말로 고모부에게 맞았다면, 이번에는 진지하게 상의할 터였다.
“속을 털어놔야 누나가 도와줄 수 있지.”
“병신.”
“이 자식이 누나한테! 근데 너 고모부한테 진짜 욕했니?”
“아니.”
“근데 고모랑은…….”
“함께 게임하는 새끼한테 욕한 건데, 고모부가 갑자기 달려와 시비 걸었다고.”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고모부가 일이 잘 안 풀려 예민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과하게 반응했으리라.
“요즘 고모부 상황도 안 좋은데 피시방 가서 하지 그랬어.”
“맨날 하는 시간에 했어. 고모부가 거실로 나온지도 몰랐어. 역시나! 너하곤 말 안 할래.”
“알았어, 알았어. 누나가 어떻게 도와줄까?”
희주는 고개를 숙여 진우와 눈을 맞추려고 했다. 한사코 시선을 피하던 진우가 비장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방…… 얻어 줘.”
“뭐?”
“따로 살고 싶어.”
“야, 오진우.”
희주는 말문이 턱 막혀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윤 여사는 시종 차분하게 진우를 지켜보고 있을 뿐 관여할 기미를 내비치진 않았다. 희주는 나름대로 설득을 시도했다.
“야, 나가면 누나랑 같이 나가야지. 때가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병신, 지는 고모 집 가정부라 이쁨 받고 잘 지내면서. 난 밥만 축내지만 누난 밥값 하니까 그냥 남아 있어도 되잖아. 지가 진짜 가정분 줄 안다니까. 남 빨래에다 청소까지 다 해 주고.”
야유하는 진우에게 희주는 발끈하지 못했다. 진우의 목소리는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도 진우야…….”
한 번 더 설득해 보려고 억지웃음을 짓는데 다시금 진우의 얼굴에 자리한 피멍이 보였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진우의 눈길과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렇다. 얼굴에 남은 야만적인 폭력의 증표만 생각했다. 그보다 더 큰 상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피멍이 가셔도 어린 영혼의 상처는 오래도록 남을 터였다. 진우의 눈길은 슬픔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누나에게 속내를 털어놓고도 기대감은 갖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금 윤 여사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진우를 바라보는 윤 여사의 시선은 따뜻했으며 조용한 웃음까지 보태졌다.
그날 밤, 고모와의 담판은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말대꾸 한 번 안 한 채 4년 동안 때론 식모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조카가 동생 문제로 부당함을 지적하며 단호하게 나올 때는 펄쩍 뛰었지만, 희주의 완강한 태도에 이내 잘못을 수긍하는 듯했다.
“실은 고모부 회사 부도로 아파트가 넘어갈 판이다. 해서 작은 평수 월세로 이사할 참이었어. 아무래도 같이 살긴 힘들지 않을까 싶다. 너희들한텐 당장 원룸밖에 해 줄 돈이 없어. 어차피 오래 살지 않을 거면 월세가 수월할 거야.”
부모님 두 분의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고모부 내외가 관리하던 건 희주와 진우의 학비며 생활비로 거의 소진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너희들끼리 한번 살아 봐라. 이것저것 들어가는 돈이 보통 많은 게 아냐. 그래도 너희가 어디 남이냐. 고모가 생활비야 어떡하든 다달이 보태 줄 테니 아껴서 잘 살아. 참, 희주야. 할머니한텐 우선 비밀로 해 줄래? 상황 봐서 내가 설명할 테니.”
“예, 저도 할머니한텐 당장 알리고 싶지 않아요.”
시골에서 할아버지 병수발로 발이 묶인 할머니에겐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진우 그놈, 게임에 미쳐 인성이 개판이더라. 고모부가 때린 게 잘했단 건 아냐. 근데 어른 계신 자리에서 그렇게 욕하는 건 정말 아니다. 오빠네 집에서도 진우 때문에 너까지 나한테 보냈던 거잖아. 앞으론 네가 잘 좀 가르쳐. 그리고 고모부가 재기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하지만 희주는 지금 집을 나가면 다시는 고모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만 진우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여지는 남겨 두었다.
다음 날, 희주는 선아를 만났다. 선아, 아니 윤 여사 덕분에 새로운 주거지는 의외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에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여섯 달을 보낸 뒤 부모님의 통장과 함께 남매는 고모 집으로 인계되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 된 희주는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었다. 많은 소녀들이 그러하듯 한때 예고를 진로 중 하나로 생각하고 착실히 쌓아 가던 실력은 어쩌면 어쭙잖은 기교일 뿐이었다.
부모님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과 피아노도 잃게 된 한참 뒤에야 진정으로 음표 속에 감정을 담고 싶다는 간절함이 찾아들었다. 고모는 남매의 진로를 일찌거니 취업을 염두에 두며 이끌었다. 취미로라도 치겠다며 학원을 보내 달라는 희주에게, 고모는 학업에 도움이 되는 영어 학원이라면 보내 줄 수 있지만, 같은 학원비여도 피아노는 안 된다고 했다.
희주는 어느 날, 놀이터 모래밭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놓고 손가락을 놀렸다. 그때 어떤 여대생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바로 1305호의 선아였다. 그날부터 선아에게 이끌려 멋진 방음부스와 피아노가 있는 그 집에서 몇 차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선아는 피아노를 잘 쳤으며, 지금은 독일에서 사는 큰언니가 성악가라고 했다. 방음부스는 큰언니가 집에서 음대를 다닐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희주는 진우를 챙기느라 그 집에 자주 가 보지는 못했다. 희주가 집에 없으면 진우가 자꾸 밖으로 돌아다녔던 탓이다.
윤 여사가 안내한 집은 도심 외곽에 자리한 작은 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다. 그곳은 시市에 포함되면서도 면사무소 관할의 작은 동네였고, 작은 공장과 논밭과 축사가 공존했다. 동산을 뒤로 둔 2층 벽돌집은 아담한 별장 같았다. 대문 옆으론 셔터가 내려진 납작한 차고가 붙어 있었고, 발코니는 정원과 초등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1층 현관에 이르기 직전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윤 여사는 남매를 2층으로 이끌었다.
“으슥해 보여도 초등학교가 있으니 치안은 괜찮을 거야.”
1층은 아들이 사용하는데 지금은 군대를 가서 비어 있다고 했다. 2층 내부의 주방 앞으론 작은 방과 욕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면의 슬라이딩 도어를 지나면 큰방과 발코니로 이어졌다. 발코니로 나갔더니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초등학교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희주는 날마다 싱그런 아름드리나무와 마주하며 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들떴다.
“너무 멋져요.”
희주의 반응에 윤 여사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
“시골이라서 가끔 분뇨 냄새가 나긴 해도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집 안을 요모조모 살핀 뒤 희주는 진우를 바라보고 눈으로 물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윤 여사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
“네가 부탁한 대로 1년 계약서를 써 놓았다만 더 살고 싶으면 집주인하고 상의해 보도록 하렴. 어지간해선 들어줄 거야.”
“네? 아주머니가 주인 아니세요?”
“후후, 아들이 집주인이야. 난 관리인 정도?”
고운 피부와 우아한 말씨의 50대 중후반의 여자는 드물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말고 집주인이 제대하면 잘 지내 봐. 고 녀석이 나중에라도 집세 올리려 들면 나한테 꼭 알려 주고.”
아들을 언급하는 윤 여사의 밝은 표정에서 자식을 향한 애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희주나 진우를 바라보는 눈길에도 시종일관 애정이 가득했다. 희주는 문득 묻고 싶었다. 우리한테 왜 이리 잘해 주세요?
“뭐가 이상하니?”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다가 희주는 멈칫했다. 보증금도, 월세도 예상보다 많이 적었다.
“어, 저도 나름 인터넷에서 시세를 알아보았는데…… 집세가 많이 싸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