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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갑자기 막연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물론 이 집에서 살고 싶었다. 버스 배차 시간만 잘 맞추면 통학 거리도 꽤 괜찮았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윤 여사가 이토록 저희를 배려해 주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아들이 좀 특별한 탓에 아무나 세를 들일 수 없어서 계속 2층을 비워 두었다는 말도 뒤늦게 불안감을 보탰다. 희주의 속내를 읽은 양 윤 여사가 희주의 손을 그러쥐었다.

“희주야, 살다 보면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유달리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 법이란다. 내가 너희들 지켜본 세월이 4년이야. 내가 지금은 너희를 돕는 것 같지만, 어쩌면 내가 도움을 받는 걸 수도 있어.”

갸웃하는 희주의 볼을 윤 여사가 살짝 건드렸다.

“너흰 참 예쁘게 자랐더라. 희주는 키도 크고 예쁘고, 진우는 속이 깊고.”

“예? 진우 요게 속이 깊다고요?”

난데없는 칭찬에 희주는 의아한 듯 물었다. 한 발짝 떨어져 묵묵히 서 있던 진우는 머쓱한 듯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남매간에는 매력이 잘 안 보여서 모른단다. 환경만 받쳐 주면 진우는 멋진 남자로 클 거야. 그보다 우리 아들이 여기서 혼자 외롭게 살잖니? 내가 믿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어. 그런 거 있잖니. 그냥 근처에 향기 좋은 사람이 있다는 위안 같은 거…….”

쓸쓸하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희주야, 이젠 네가 가장이야.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돈이 필요할 때가 생기는 법이란다. 남는 보증금은 일단 통장에 넣어 둬. 그리고 나도 외손주 봐주느라 자주 오지는 못할 테니 너희가 주인이라 여기고 편히 살아라.”

그렇게 남매는 2층집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새벽녘 희주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목소리는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2년 전 힘겨운 겨울에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아침에 일어나 오래도록 생각을 이어 간 끝에 꿈이 아닌 현실에서 들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웃집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1층의 주인이 돌아온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희주는 들려오던 그 곡을 생생하게 기억하였기에 꿈이 아니라고 믿었다. 헨델의 ‘라르고’로 알려진 ‘그리운 나무그늘’의 가사를 검색해 본 희주는 신이 저희 남매를 응원하기 위해 노래하는 천사를 보내 줬다고 생각하며 눈앞의 플라타너스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해 운명은 반짝인다

……



* * *




독립을 한 뒤 처음 한 달은 느긋했다. 고모에게 보증금의 반만 쓰고도 좋은 집을 얻었다고 말한 게 실수였을까. 고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윤 여사의 배려를 밝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달째부터 부모님의 보험금으로부터 나오는 생활비를 보내오지 않았다.

사실 통장의 잔액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줄어들기만 하는 잔액이 은근한 초조함을 안겨 주더니 나중에는 생존의 공포로까지 발전해 갔다. 아끼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한참 예민할 나이인 진우가 기가 죽지 않도록 옷이며 신발에 가끔은 큰돈을 쓰기도 했다.

결국 희주는 여름방학이 되자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지금 사는 동네에선 여고 2년생이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이기도 한 시 중심가를 무작정 헤매이며 여기저기를 두드려 보았다. 이틀째 되는 날에는 힘들다는 식당이나 고깃집도 찾아갔다. 그중에서 관심을 보여 준 갈빗집에서 면접을 보고 나오다가 선아와 마주쳤다.

“고등학생이 무슨 아르바이트야?”

“어, 쪼들린 건 절대 아니고요, 방학 때 사회 경험도 할 겸 잠깐 해 보려고요.”

그래야 고3 때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허술한 변명도 덧붙였다.

“이십 일 정도의 아르바이트라……. 고딩이 잠깐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자리는 쉽지 않을 텐데. 식당도 술을 파는 데는 안 되고, 보호자나 후견인 동의서도 있어야 될 거고. 그렇다고 아무 광고나 보고 이상한 데 찾아다니면 절대 안 되고.”

선아는 희주가 미안할 정도로 함께 고민해 주고는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는 다음 날 전화를 걸어 왔다.

“식당 설거지도 괜찮다면 하루만 해 볼래?”



선아가 소개한 식당은 도로변의 주차장을 제외하곤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여름에 큼직한 개수대의 뜨거운 물과 세척기 앞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시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탓에 눈으론 짠물이 들어오고 몸은 이내 쉰내가 배었다. 희주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시급을 속속 계산해 나갔다. 덕분에 머릿속까지 들끓는 더위 속의 노동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부산한 점심에 이어 저녁 설거지까지 끝낸 희주는 상쾌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금 사는 집처럼 싱그런 풀 냄새가 나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마음을 짓누르던 공포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촉촉한 숲의 향기를 누렸다.

“희주야, 뭐 하니?”

신 사장의 목소리에 희주는 머쓱해하며 돌아섰다. 식당의 주인이면서 공동 주방장인 그녀에게 무조건 점수를 따야 하는데도 멍하니 일손을 놓고 있었다.

“죄송해요. 다음엔 어떤 일 할까요?”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희주가 주눅 들어 하자 그 모습이 마뜩잖은 듯 신 사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죄송은 무슨. 어서 저녁 먹자.”

“밥은 집에 가서…….”

“어서! 후딱 먹어 치우고 정리하자.”

먼저 주방을 나서는 신 사장에게 한 번 더 사양하려고 했는데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12시 직전에 출근했다 점심부터 먹고 시작하라는 말에 얼결에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던 일은 멍청했다. 신 사장과 비슷한 50대 중반의 주방장인 안 여사가 꼬르륵, 소리를 들었는지 짓궂게 웃고는 희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참 먹을 때잖아. 어서 나오거라.”

결국 홀의 배식대로 다가갔다. 가정식의 저렴한 뷔페식당인 이곳은 인근의 공장 직원들이 주로 이용했다. 식판에 반찬을 담으려던 희주는 머뭇거렸다. 넉넉히 남아 있는 뼈다귀김치찜은 진우가 특히 좋아했던 것이다. 키에 민감해 있는 녀석은 요즘 들어 검은콩도 곧잘 먹었다. 마른 새우를 곁들인 애호박볶음도 동생이 즐기는 몇 안 되는 반찬 중 하나였다. 희주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먼저 식탁에 앉은 신 사장과 눈을 맞췄다.

“죄송하지만…… 좀 늦게 먹고 싶은데요. 반찬을 가지고 가서 집에서 먹어도…….”

당돌한 행동이었을까. 깐깐한 교장 선생님 같은 외모의 신 사장이 딱딱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눈길을 던졌다. 희주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다.

“집에 가서 또 먹더라도 밥은 다 같이 먹자.”

묵직한 권위가 담긴 신 사장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밥은 더없이 맛있었다. 굶은 탓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리도 반찬을 맛있게 할까? 음식을 오물거리며 저도 모르게 신 사장에게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더니 신 사장이 갸웃했다.

“왜?”

희주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다가 엉뚱하다면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어, 예뻐서요. 마, 맛이.”

안 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맛이 이쁘다고? 사장이 이쁜 게 아니고?”

북한에서 살았던 안 여사는 사장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님’ 자를 붙이지 않았다.

“어, 그게 아니라 다들 예쁘세요. 근데 맛이 정말 예뻐요. 아름다운 음악처럼.”

“아이구, 이쁜 학생이 말도 참 예쁘게도 하지.”

안 여사는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었고, 신 사장은 엷은 웃음을 흘렸다.

예쁜 음식이 담긴 식판을 깨끗이 비우고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뒤 조용히 기다렸다. 과연 일당을 주려는지 신 사장이 손짓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녀는 돈 봉투가 아닌 한약방 가방을 건네주었다.

“자취한다고 해서 반찬 좀 쌌다.”

가방은 꽤 묵직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얼굴이 빨개지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신 사장이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학생치곤 손이 빠르더라. 이십 일 정돈 할 수 있다고 했지?”

“아, 네. 그보다 며칠 더 할 수도 있어요. 방학 끝날 때까지…….”

“삼 주 동안 하면 되겠다. 그때까지 사람 비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방학 동안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억센 아주머니들도 힘겨워하는 일을 여고생이 어떻게 견디겠냐며 신 사장은 일단 하루만 해 보라고 했다. 근무 시간은 12부터 저녁 7시까지였다. 신 사장이 깊은 눈길을 보냈다.

“점심도 여기 와서 먹어라. 밥은 식구가 다 같이 먹어야지, 원.”

불퉁거리는 신 사장의 모양새가 싫지 않았다.

잠시 후 버스에 올라타 반찬 가방을 끌어안고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한여름에 장화와 고무장갑을 낀 덕에 손발도 따가웠다. 하지만 무난히 일을 치렀다는 뿌듯함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일하는 도중 안 여사를 통해 오늘 못 나온 아르바이트생이 계속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최대한 손을 빨리 했다. 고모 집에서 틈틈이 설거지며 집안일을 도왔던 일이 도움이 되었다.

오늘 제 손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과 내일도 일할 곳이 있다는 사실에 흥이 났다. 희주는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며 차창의 시원한 살바람을 음미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진우가 어깨를 머쓱해하며 다가왔다.

“너 어디 아프니?”

“왜?”

“네가 마중을 다 나오고.”

“지나가다 누날 본 거야. 이리 줘.”

진우가 반찬 가방을 들었다. 통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모 집을 나온 뒤로 녀석이 누나를 배려하는 모습을 간간이 내비쳤다.

2층 벽돌집에 이르자, 희주는 습관적으로 1층을 살폈다. 어두운 집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기척이 없었다. 셔터가 내려진 차고 역시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이 없었다.

“배고프지?”

“뭐 그냥.”

2층으로 들어서자마자 희주는 씻는 것도 잊은 채 부랴부랴 식탁 위로 찬을 꺼냈다. 뭐가 이리 많지? 갸웃하며 하나씩 내용물을 확인했다. 저녁에 먹었던 찬뿐 아니라 오징어채무침과 멸치볶음 같은 반찬도 넉넉히 담겨 있었다. 진우가 좋아하는 뼈다귀김치찜을 얼른 데워 상을 차렸다.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뭐야?”

꽤 배가 고팠었는지 진우는 단번에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누나…… 혹시 고모 집 갔다 온 거야?”

“거길 내가 왜 가니. 알바하는 식당에서 싸 온 거야.”

“식당?”

“오늘 식당 알바 간다 했잖아.”

“난 빵집이나 패스트푸드점인 줄 알았지.”

“야, 일단 먹어 봐.”

과연 진우는 몇 술 떠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냉장고를 열어 아침에 먹다 남긴 김치찌개를 버렸다. 그러고는 빈 통에 반찬을 옮겨 담았다. 가게에서 먹었던 찬도, 새로운 찬도 더없이 훌륭한 맛이었다. 어쩜 이리도 음식을 잘하실까.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나한테 이리도 잘해 주실까. 신 사장을 떠올리자니 고마움과 함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래도 윤 여사나 선아를 통해 뭔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들은 듯싶었다.

그런 건 싫은데.

밤이 깊어지자 희주는 식탁에서 보던 책을 접고 큰방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작은방을 사용하는 진우가 문을 열어 둔 채 누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난 다시 고모 집에 돌아가도 되잖아? 거기가 학교 다니기도 더 편하고.”

“거길 왜 가니.”

“그래도 누난…….”

“그만! 누나도 고모 집 불편했어.”

“…….”

“괜찮은 척한 거야.”

진우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선풍기를 들고 나와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큰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제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야, 큰방은 시원해서 괜찮아.”

“내 방이 더 시원해.”

그날 밤 희주는 자다가 발이 간지러워 깨어났다. 식당의 안 여사는 땀 때문에 발이 가려우면 장화 속과 살갗에 식초를 뿌린다고 했다 다음에는 한번 저도 식초를 뿌려 볼까 했다. 밤에는 시원해서 켜지도 않았던 선풍기가 눈에 들어오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희주는 발코니의 밤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엄마, 아빠. 우리 진우가 철이 들었어요. 누나를 배려할 줄도 알아요. 공부를 안 해서 탈이지 좋은 어른으로 잘 클 것 같아요. 참, 이젠 싸움도 안 하는 것 같고 진로 문제도 제법 고민하더라고요. 그러니 우리 걱정 말고 편히 쉬세요. 정말 우린 괜찮거든요.



하루 수백 명이 다녀가는 식당인지라 어쩌면 네 명뿐인 주방 인력은 터무니없이 적은지도 모른다. 다음 날에야 알았다. 새벽에 출근해 점심을 치르고 퇴근하는 직원과 주방 바깥의 창고에서 야채 등을 손질하는 젊은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밀차라고도 불리는 납작한 식자재 카트를 밀고 창고 문을 연 희주는 신음을 삼켰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두운 창고에서 두 눈동자와 식칼이 번뜩였던 것이다. 양파, 양배추 등이 잔뜩 쌓인 안쪽에서 칼로 무를 손질하던 남자가 동작을 멈추었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카트를 힐끗 보고서야 눈빛이 무뎌졌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키가 무척 컸다.

그는 국거리용으로 다듬은 무가 담긴 식자재 박스를 카트로 올렸다. 온통 근육질의 탄탄한 팔이 묵직한 박스를 솜처럼 가볍게 옮기는 것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박스를 다 옮긴 그는 손을 털고 돌아섰다. 이제 카트를 끌고 창고를 나가면 될 터였다. 희주는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낮은 조도에 적응되었기에 모자 아래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맑으면서도 타는 듯한 눈동자와 거뭇거뭇 거칠게 돋아난 수염, 그리고 찡그린 표정은 희주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런데도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