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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덕후의 꿈
“준아야.”
얼굴에 내려앉는 선호의 그윽한 시선에, 준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선호는 조심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불규칙하게 내뱉어지는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힐 만큼 가까워진 거리. 그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해.”
그의 고백에 준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세상의 회전축이 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저도 사랑해요.”
그의 마음에 화답하며 준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선호는 그녀의 둥근 이마에, 불그스름한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더니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더욱 뜨겁게 삼켰다.
‘으아……. 너무 달콤하잖아!’
몽롱해진 기분에 마치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아야!”
두둥실 떠올랐던 그녀의 몸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 아파!”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찧은 엉덩이를 연신 문지르던 준아는 순간 무엇에 놀랐는지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우리 선느 어디 갔지? 선느으으으!”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방금 전까지 자신과 격렬하게 키스하던 선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이런…….”
그녀의 노트북 안에.
그렇다.
선호와 나눈 이 달콤한 키스는 꿈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끌어안던 건 선호의 손길이 아니라 허리에 감긴 이불이었으며,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 건 한껏 몽롱해진 기분 탓이 아니라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던 실제 과정이었던 것이다.
“에잇. 좋다 말았네!”
기왕 꿈꾼 거 실컷 키스하다 깼으면 얼마나 좋았냐며, 입맛을 쩝 다셨다.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간 준아는 정지되어 있는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영화 속에선 아까 준아의 꿈속에서 펼쳐진 선호의 키스신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상대가 준아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아주 똑같은 장면이었다.
“아우~ 선느!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냐?”
조각 같은 외모, 따뜻한 성품, 훌륭한 연기력.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배우 이선호를 향해 팬들은 선느라고 불렀다.
준아가 그 선느에게 빠져 산 세월도 벌써 10년. 선느에게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다는 말을 몸소 증명해 보이려는 듯 준아의 덕질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노트북을 닫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으며 거실에 나오자 어스름한 기운이 그녀를 맞이했다.
“……몇 시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우. 웬일이야? 나 완전 일찍 일어났어!”
오랜만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며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있는데, 삐리릭 소리를 내며 현관문 도어록에 불이 들어왔다.
잠시 후, 헤어스타일만 다를 뿐 얼굴도 키도 몸매도 쌍둥이마냥 준아와 똑 닮은 여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민아?”
채민아. 두 살 어린 준아의 친동생이다.
“너 뭐냐?”
집에 들어선 민아를 보는 준아의 눈빛이 이내 뾰족해지는가 싶더니, 팔짱을 끼고 서서 민아에게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밤새 놀다 지금 들어오는 거야? 미쳤어?”
그렇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으면 친구네 집에서 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한심하다는 듯 준아를 바라보던 민아는 자신의 휴대폰을 불쑥 내밀어 보였다.
대체 뭘 어쩌라고 이걸 들이미는 건가 싶어서 자세히 보던 준아는 이내 민망한 듯 입을 작게 오므렸다.
현재 시간 7시 18분.
그런데 오전이 아닌…….
“잠을 얼마나 잤으면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몰라?”
오후였다.
민아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꼬라지 봐라. 잉여가 따로 없네. 언니 또 이선호 보다가 늦게 잤지?”
“어허. 누가 버릇없이 형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형부 같은 소리 하네.”
“꿈은 이루어진다! 두고 봐. 이 언니가 이선호랑 꼭 결혼한다.”
“에휴.”
더 이상 말해 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다며 민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선호랑 결혼을 하는 게 꿈이라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언니의 꿈이 참 한심스러우면서도 어쩔 땐 차라리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기까지도 했다.
덕후가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 준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현승]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누른 준아는 퉁명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 누나. 지금 빨리 회사 나오셔야겠는데요.
“뭐? 지금?”
― 대표님이 보자고 하세요.
“나 휴가인 거 몰라? 그냥 연락 안 된다고 해.”
― 저도 웬만하면 그렇게 둘러대려고 했는데요.
“근데?”
― 어쩌면 최고의 떡밥을 낚을지도 몰라요.
현승의 목소리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준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 * *
SJ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직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는데 한 여인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하얗고 조막만 한 얼굴. 윤기가 촤르르 흐르며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어깨에 툭 걸친 오버핏 코트에도 감춰지지 않는 길쭉하고 늘씬한 몸매.
여신 포스를 폴폴 풍기는 여자의 등장에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시네요.”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직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자, 모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럼 수고하세요.”
직원들에게 수고하라며 인사를 남긴 뒤 여자는 대표실로 걸음을 옮겼다.
“누나, 같이 가요.”
뒤늦게 사무실에 들어선 현승이 그녀의 뒤를 조르르 따라갔다.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의 이 여자.
“누나. 아까 로비에 걸려 있는 누나 사진 바뀐 거 보셨어요? 지난번 거보다 훨씬 크죠?”
SJ엔터테인먼트의 개국 공신이자.
“당연히 커야지. 이 회사를 누가 먹여 살리는데.”
SJ엔터테인먼트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 배우.
그녀는 바로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스스한 얼굴로 집에서 뒹굴거리며 동생 민아에게 잉여라 구박받던.
“암요! 채준아 아니면 저희는 다 굶어 죽지요.”
배우 채준아였다.
* * *
대표실로 준아와 현승이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강석진 대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빨리 데리고 왔네?”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강 대표의 말에 현승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앉아서 얘기하지.”
강 대표는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준아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이 밤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온 것을 보니, 갑자기 보자고 불러낸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다.
그의 예상대로 준아는 소파에 앉자마자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저 지금 휴가인 거 모르세요? 회사가 무너지는 일 아닌 이상 아무 연락도 하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더 일찍 연락하고 싶었는데 휴가 방해 안 하려고 일주일이나 참은 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제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며 강 대표는 변명 아닌 변명을 슬그머니 늘어놓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래도 명색이 대표님인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짜증 냈던 게 미안했는지 준아가 먼저 용건을 물었다. 그제야 얼굴에 엷은 미소를 그린 강 대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작품 들어왔…….”
“안 해요.”
“뭔지는 알고 안 한다고 그러는 건가?”
강 대표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리며 묻자 준아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드라마만 끝나면 길게 쉬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대표님도 그러라고, 귀찮게 안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고작 일주일 쉰 사람한테 또 일을 하라고요?”
데뷔 이후로 쉴 새 없이 일만 한 그녀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 대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준아를 배우로 캐스팅한 사람도, 신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연기 생활을 이끌어 간 사람도 강 대표였기에.
“한번 읽어 봐.”
강 대표는 두툼한 시나리오를 준아에게 건네주었다. 딱 6개월만 쉬게 해 달라던 준아의 부탁을 이렇게 또 어기고 말았지만, 강 대표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읽어 보면 꼭 하고 싶을 거야.”
이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품이었다.
“싫어요. 안 봐요.”
그런 강 대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아는 시나리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흐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준아와 이런 밀당을 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강 대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할 카드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이 영화 예산이 300억이야.”
일단은 규모로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로 한다. 배우라면 한 번쯤 크고 화려한 영화를 꿈꿀 테니.
“대규모 영화일수록 졸작이 많죠. 안 그래요?”
그런데 300억이건 나발이건 관심 없다며 준아는 대한민국 역대 최대 규모 영화를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준아의 신인 시절, 저예산 독립영화에 출연하자며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내뱉으면서 말이다.
준아의 대꾸에 미간을 슬쩍 좁힌 강 대표는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권이완 감독 작품이지.”
이번에 내민 카드는 준아가 가장 일해 보고 싶어 했던 권이완 감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 감독의 이름이 나오자 선글라스에 가려진 준아의 눈썹이 슬쩍 움찔했다.
강 대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곧장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너도 잘 알지? 권 감독, 아무한테나 시나리오 안 보내는 거.”
칸 영화제 2번의 수상. 국내 최고 흥행 기록 보유자. 뛰어난 연출력과 기발한 시나리오,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천재 감독.
권이완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배우들의 꿈이었고, 준아 역시 그 꿈을 가진 배우였다.
“드디어 왔다. 준아야.”
그런데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나리오가 궁금해졌는지 준아는 손에 들린 시나리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권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 그런지 역시나 치밀해.”
대규모 예산의 영화에서 쉽게 범하는 오류, 볼거리에만 신경 쓰느라 스토리가 허술한 일 따윈 없을 거라며 강 대표는 제 마음속에 있는 확신을 준아에게 심어 주었다.
<더 원>
시나리오 표지에 적힌 영화 제목을 보며 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만으로는 장르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런 그녀의 궁금증을 꿰뚫어 본 듯 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액션이다. 첩보영화지.”
“……애, 액션이요?”
액션이란 말에 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수많은 작품을 해 왔지만, 액션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대표님. 저 운동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액션은 도통 자신 없었기에 모처럼 온 기회를 그냥 날리는 건가 싶어 준아의 얼굴에 슬그머니 실망이 얼룩지려 하자 강 대표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빠르진 않아도 끈기 있게 달릴 줄은 알잖아.”
준아가 운동에 소질이 없다는 것쯤은 강 대표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던가.
발연기라며 온 국민에게 있는 욕, 없는 욕, 욕이란 욕을 다 듣고 중도하차 하는 굴욕까지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연기 연습에 매진하여 믿고 보는 채준아, ‘믿보채’가 된 그녀가 아니었던가.
비록 빠르게 달리진 못할지라도 혹독한 연습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을 거라고. 날렵하진 못해도 춤에 소질 있는 그녀이니 몸은 부드럽게 잘 쓸 거라고.
결국 액션 또한 멋지게 잘 해내고 말 거라고 강 대표는 확신했다.
“상대 배우는 정해졌어요?”
사실 상대 배우가 누구이건 상관은 없었다. 이건 그저 작품을 하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준아의 습관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강 대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 배우는 이미 정해졌지.”
“누군데요?”
어느새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준아가 건성으로 묻자, 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선호.”
“…….”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이름에 시나리오를 넘기던 준아의 손이 뚝, 멈춰 섰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준아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되물었다.
“지, 지금 누구라고 하셨어요?”
준아의 되물음에 강 대표를 대신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현승이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리며 대답해 주었다
“이선호 씨요.”
“……!”
다시 확인한 그의 이름에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권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는 꿈 같은 일만으로도 감사했건만, 진짜 감사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품은 진짜 꿈.
‘꿈은 이루어진다! 두고 봐. 이 언니가 이선호랑 꼭 결혼한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그 꿈을.
“엄마야…….”
드디어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준아야.”
얼굴에 내려앉는 선호의 그윽한 시선에, 준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선호는 조심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불규칙하게 내뱉어지는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힐 만큼 가까워진 거리. 그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해.”
그의 고백에 준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세상의 회전축이 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저도 사랑해요.”
그의 마음에 화답하며 준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선호는 그녀의 둥근 이마에, 불그스름한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더니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더욱 뜨겁게 삼켰다.
‘으아……. 너무 달콤하잖아!’
몽롱해진 기분에 마치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아야!”
두둥실 떠올랐던 그녀의 몸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 아파!”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찧은 엉덩이를 연신 문지르던 준아는 순간 무엇에 놀랐는지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우리 선느 어디 갔지? 선느으으으!”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방금 전까지 자신과 격렬하게 키스하던 선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이런…….”
그녀의 노트북 안에.
그렇다.
선호와 나눈 이 달콤한 키스는 꿈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끌어안던 건 선호의 손길이 아니라 허리에 감긴 이불이었으며,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 건 한껏 몽롱해진 기분 탓이 아니라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던 실제 과정이었던 것이다.
“에잇. 좋다 말았네!”
기왕 꿈꾼 거 실컷 키스하다 깼으면 얼마나 좋았냐며, 입맛을 쩝 다셨다.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간 준아는 정지되어 있는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영화 속에선 아까 준아의 꿈속에서 펼쳐진 선호의 키스신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상대가 준아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아주 똑같은 장면이었다.
“아우~ 선느!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냐?”
조각 같은 외모, 따뜻한 성품, 훌륭한 연기력.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배우 이선호를 향해 팬들은 선느라고 불렀다.
준아가 그 선느에게 빠져 산 세월도 벌써 10년. 선느에게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다는 말을 몸소 증명해 보이려는 듯 준아의 덕질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노트북을 닫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으며 거실에 나오자 어스름한 기운이 그녀를 맞이했다.
“……몇 시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우. 웬일이야? 나 완전 일찍 일어났어!”
오랜만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며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있는데, 삐리릭 소리를 내며 현관문 도어록에 불이 들어왔다.
잠시 후, 헤어스타일만 다를 뿐 얼굴도 키도 몸매도 쌍둥이마냥 준아와 똑 닮은 여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민아?”
채민아. 두 살 어린 준아의 친동생이다.
“너 뭐냐?”
집에 들어선 민아를 보는 준아의 눈빛이 이내 뾰족해지는가 싶더니, 팔짱을 끼고 서서 민아에게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밤새 놀다 지금 들어오는 거야? 미쳤어?”
그렇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으면 친구네 집에서 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한심하다는 듯 준아를 바라보던 민아는 자신의 휴대폰을 불쑥 내밀어 보였다.
대체 뭘 어쩌라고 이걸 들이미는 건가 싶어서 자세히 보던 준아는 이내 민망한 듯 입을 작게 오므렸다.
현재 시간 7시 18분.
그런데 오전이 아닌…….
“잠을 얼마나 잤으면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몰라?”
오후였다.
민아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꼬라지 봐라. 잉여가 따로 없네. 언니 또 이선호 보다가 늦게 잤지?”
“어허. 누가 버릇없이 형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형부 같은 소리 하네.”
“꿈은 이루어진다! 두고 봐. 이 언니가 이선호랑 꼭 결혼한다.”
“에휴.”
더 이상 말해 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다며 민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선호랑 결혼을 하는 게 꿈이라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언니의 꿈이 참 한심스러우면서도 어쩔 땐 차라리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기까지도 했다.
덕후가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 준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현승]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누른 준아는 퉁명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 누나. 지금 빨리 회사 나오셔야겠는데요.
“뭐? 지금?”
― 대표님이 보자고 하세요.
“나 휴가인 거 몰라? 그냥 연락 안 된다고 해.”
― 저도 웬만하면 그렇게 둘러대려고 했는데요.
“근데?”
― 어쩌면 최고의 떡밥을 낚을지도 몰라요.
현승의 목소리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준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 * *
SJ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직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는데 한 여인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하얗고 조막만 한 얼굴. 윤기가 촤르르 흐르며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어깨에 툭 걸친 오버핏 코트에도 감춰지지 않는 길쭉하고 늘씬한 몸매.
여신 포스를 폴폴 풍기는 여자의 등장에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시네요.”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직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자, 모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럼 수고하세요.”
직원들에게 수고하라며 인사를 남긴 뒤 여자는 대표실로 걸음을 옮겼다.
“누나, 같이 가요.”
뒤늦게 사무실에 들어선 현승이 그녀의 뒤를 조르르 따라갔다.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의 이 여자.
“누나. 아까 로비에 걸려 있는 누나 사진 바뀐 거 보셨어요? 지난번 거보다 훨씬 크죠?”
SJ엔터테인먼트의 개국 공신이자.
“당연히 커야지. 이 회사를 누가 먹여 살리는데.”
SJ엔터테인먼트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 배우.
그녀는 바로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스스한 얼굴로 집에서 뒹굴거리며 동생 민아에게 잉여라 구박받던.
“암요! 채준아 아니면 저희는 다 굶어 죽지요.”
배우 채준아였다.
* * *
대표실로 준아와 현승이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강석진 대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빨리 데리고 왔네?”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강 대표의 말에 현승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앉아서 얘기하지.”
강 대표는 선글라스를 벗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준아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이 밤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온 것을 보니, 갑자기 보자고 불러낸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다.
그의 예상대로 준아는 소파에 앉자마자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저 지금 휴가인 거 모르세요? 회사가 무너지는 일 아닌 이상 아무 연락도 하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더 일찍 연락하고 싶었는데 휴가 방해 안 하려고 일주일이나 참은 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제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며 강 대표는 변명 아닌 변명을 슬그머니 늘어놓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래도 명색이 대표님인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짜증 냈던 게 미안했는지 준아가 먼저 용건을 물었다. 그제야 얼굴에 엷은 미소를 그린 강 대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작품 들어왔…….”
“안 해요.”
“뭔지는 알고 안 한다고 그러는 건가?”
강 대표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리며 묻자 준아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드라마만 끝나면 길게 쉬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대표님도 그러라고, 귀찮게 안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고작 일주일 쉰 사람한테 또 일을 하라고요?”
데뷔 이후로 쉴 새 없이 일만 한 그녀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 대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준아를 배우로 캐스팅한 사람도, 신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연기 생활을 이끌어 간 사람도 강 대표였기에.
“한번 읽어 봐.”
강 대표는 두툼한 시나리오를 준아에게 건네주었다. 딱 6개월만 쉬게 해 달라던 준아의 부탁을 이렇게 또 어기고 말았지만, 강 대표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읽어 보면 꼭 하고 싶을 거야.”
이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품이었다.
“싫어요. 안 봐요.”
그런 강 대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아는 시나리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흐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준아와 이런 밀당을 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강 대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할 카드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이 영화 예산이 300억이야.”
일단은 규모로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로 한다. 배우라면 한 번쯤 크고 화려한 영화를 꿈꿀 테니.
“대규모 영화일수록 졸작이 많죠. 안 그래요?”
그런데 300억이건 나발이건 관심 없다며 준아는 대한민국 역대 최대 규모 영화를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준아의 신인 시절, 저예산 독립영화에 출연하자며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내뱉으면서 말이다.
준아의 대꾸에 미간을 슬쩍 좁힌 강 대표는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권이완 감독 작품이지.”
이번에 내민 카드는 준아가 가장 일해 보고 싶어 했던 권이완 감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 감독의 이름이 나오자 선글라스에 가려진 준아의 눈썹이 슬쩍 움찔했다.
강 대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곧장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너도 잘 알지? 권 감독, 아무한테나 시나리오 안 보내는 거.”
칸 영화제 2번의 수상. 국내 최고 흥행 기록 보유자. 뛰어난 연출력과 기발한 시나리오,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천재 감독.
권이완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배우들의 꿈이었고, 준아 역시 그 꿈을 가진 배우였다.
“드디어 왔다. 준아야.”
그런데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나리오가 궁금해졌는지 준아는 손에 들린 시나리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권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 그런지 역시나 치밀해.”
대규모 예산의 영화에서 쉽게 범하는 오류, 볼거리에만 신경 쓰느라 스토리가 허술한 일 따윈 없을 거라며 강 대표는 제 마음속에 있는 확신을 준아에게 심어 주었다.
<더 원>
시나리오 표지에 적힌 영화 제목을 보며 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만으로는 장르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런 그녀의 궁금증을 꿰뚫어 본 듯 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액션이다. 첩보영화지.”
“……애, 액션이요?”
액션이란 말에 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수많은 작품을 해 왔지만, 액션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대표님. 저 운동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액션은 도통 자신 없었기에 모처럼 온 기회를 그냥 날리는 건가 싶어 준아의 얼굴에 슬그머니 실망이 얼룩지려 하자 강 대표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빠르진 않아도 끈기 있게 달릴 줄은 알잖아.”
준아가 운동에 소질이 없다는 것쯤은 강 대표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던가.
발연기라며 온 국민에게 있는 욕, 없는 욕, 욕이란 욕을 다 듣고 중도하차 하는 굴욕까지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연기 연습에 매진하여 믿고 보는 채준아, ‘믿보채’가 된 그녀가 아니었던가.
비록 빠르게 달리진 못할지라도 혹독한 연습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을 거라고. 날렵하진 못해도 춤에 소질 있는 그녀이니 몸은 부드럽게 잘 쓸 거라고.
결국 액션 또한 멋지게 잘 해내고 말 거라고 강 대표는 확신했다.
“상대 배우는 정해졌어요?”
사실 상대 배우가 누구이건 상관은 없었다. 이건 그저 작품을 하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준아의 습관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강 대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 배우는 이미 정해졌지.”
“누군데요?”
어느새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준아가 건성으로 묻자, 강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선호.”
“…….”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이름에 시나리오를 넘기던 준아의 손이 뚝, 멈춰 섰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준아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되물었다.
“지, 지금 누구라고 하셨어요?”
준아의 되물음에 강 대표를 대신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현승이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리며 대답해 주었다
“이선호 씨요.”
“……!”
다시 확인한 그의 이름에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권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는 꿈 같은 일만으로도 감사했건만, 진짜 감사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품은 진짜 꿈.
‘꿈은 이루어진다! 두고 봐. 이 언니가 이선호랑 꼭 결혼한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그 꿈을.
“엄마야…….”
드디어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