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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반갑지 않은 남자





“저기…… 누나? 오늘 행사장 가세요?”

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승은 미용실에서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준아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늘하늘한 여신 같은 원피스. 아찔한 킬힐.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더 커 보이게 만들어 주는 아찔한 속눈썹과 그윽한 아이섀도우. 농염해 보이는 붉은 입술.

누가 봐도 지금의 준아의 차림은 시상식이나 행사장에 참여할 법한 화려한 모습이었다.

물론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에서 잘나가는 배우 채준아이기에 이런 그녀의 모습이 낯설다거나 색다르게 다가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승이 이렇게 묻는 이유가 있었다.

“그냥 감독님이랑 밥 먹는 자리예요. 누가 밥 먹는데 이러고 가요?”

오늘 그녀의 스케줄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차림이기 때문이었다.

준아의 출연이 결정되자 권 감독은 주연 배우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오늘 준아는 권 감독이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 외에 다른 스케줄은 없었다.

그저 편히 밥만 먹고 오면 될 자리건만. 아침부터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준아는 약속 시간 1시간 전인 지금, 무척이나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오늘 내 생애 최고의 행사인 거 몰라?”

그런 현승이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준아가 말했다. 누구에게는 그저 가벼운 식사 자리일지 모르겠지만, 준아에겐 그저 가벼울 수 없었다.

권 감독이 마련한 주연 배우와의 식사 자리. 그 말인즉슨 오늘의 식사 자리에 선호가 참석할 예정이란 뜻이었다.

배우가 된 후, 같은 직업을 가진 선호를 실컷 구경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를 제대로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호와 같은 작품을 한 적도 없었고, 촬영 외에 다른 행사장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선호였기에 더더욱 마주칠 일은 없었다.

팬들이야 팬미팅이니 무대인사니 이런저런 핑계로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배우인 준아가 그런 곳에 참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를 보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그를,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던 그를, 드디어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꿈처럼 다가온 기회에 그저 그런 모습으로 선호의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선느를 만나는 자리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는 꾸며 줘야지.”

준아가 배우 이선호의 열성적인 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딱 둘이었다. 동생 민아. 그리고 매니저 현승.

준아의 은밀한 취미를 우연찮게 알게 된 이후, 현승은 준아의 수월한 덕질을 위한 도우미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지금 누나 복장은…….”

“행사 갔다가 바로 왔다고 하면 되지. 현승이 너, 이따가 안 걸리게 잘해라.”

명품 브랜드 행사에 참여했다가 시간이 없어서 바로 식사 자리에 온 걸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라며 준아가 단단히 주의를 주자 현승은 한숨을 픽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럼 감독님이랑 선느랑 셋이서만 보는 건가?”

먼저 벤에 올라탄 준아가 뒤따라 운전석에 탄 현승에게 묻자, 현승은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알기론 한 분 더 오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누구?”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가 보면 알겠죠.”

매니저인 현승도 강 대표에게 들은 바가 없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준아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주인공이 선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외에 것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어떤 배우가 참여하는지는 몰랐으나, 오늘 미팅에 또 다른 참석자라면 아마 자신의 파트너 역할을 맡을 배우일 것이 분명했다.

이 바닥에 원수지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 누가 파트너 역할을 맡았던 그저 열심히 연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선느를 만나러 가 볼까?”

선호에게 잘 보이면 될 뿐이었다.

“기다려요, 선느!”

잔뜩 들뜬 목소리로 준아가 말하자, 현승은 홱 뒤로 고개를 돌리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누나. 자꾸 그렇게 ‘선느~ 선느~’ 하다가 이선호 씨 앞에서도 ‘선느’라고 부르시면 진짜 큰일 납니다.”

“걱정 마. 그렇게 바보같이 덕밍아웃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 *



은은한 조명으로 채워진 조용한 식당. 현승과 준아가 차례로 식당 안에 들어서자 직원은 준아를 알아보고 바로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식당 맨 안쪽에 위치한 방.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 앞에는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리 선느가 먼저 온 건가? 으아아! 떨려 죽을 거 같아!’

문만 열면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준아에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떨림이 일어났다.

“일행분 오셨습니다.”

문을 열기 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준아가 왔다는 것을 알린 직원은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었다.

‘진정하자, 채준아. 선느를 보기도 전에 죽을 순 없잖아.’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털어 낸 준아는 화보 촬영을 할 때나 지을 법한 미소를 지으며 앞을 응시했다.

“어어. 준아 씨 왔어요?”

준아와 먼저 눈이 마주친 사람은 권이완 감독이었다.

권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들어서는 준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준아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자 권 감독은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영광은 무슨. 준아 씨가 나랑 같이 작업해 준다니 내가 더 고맙지요.”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감독님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요.”

“그래요? 근데 이걸 어쩌나. 나 사실 거품인데. 하하하.”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인사에 분위기는 한껏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권 감독에게만 고정하고 있던 준아의 시선에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얼핏 보였다.

‘으아……. 너무 떨려서 못 보겠잖아!’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건만,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덕에 혹여나 상기된 표정이 들킬까 싶어 준아는 쉽사리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아, 인사해. 채준아 씨 알지?”

부끄러움에 먼저 인사하지 못하는 준아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권 감독이 나서서 그에게 준아를 인사시켜 주었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뭐지?’

방금 들은 그 음성은 준아가 아는 선호의 음성보다 현저히 낮고 굵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선호가 아닌 엉뚱한 남자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준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대했던 선호가 아니었던지라 실망이 서린 표정을 짓던 준아는 금세 표정을 감추고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누구지?’

얼핏 보기엔 처음 보는 얼굴인 듯싶었다. 신인 배우인가 싶어 다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는데, 권 감독이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채준아 씨야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테고.”

“네.”

남자가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자 권 감독은 준아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무술감독 반도남.”

‘……?!’

그의 이름을 들은 준아는 무엇에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준아를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고, 뒤늦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준아의 입이 저도 모르게 작게 벌어졌다.

“우리 영화 무술감독이자 준아 씨 파트너 역할로 캐스팅됐어요.”

“네에?!”

무술감독이 자신의 파트너 역할이라니……. 권 감독의 설명에 당황한 준아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렇게 좋아요? 준아 씨 리액션이 아주 좋네. 허허허.”

“아아…… 네에…….”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애써 미소를 그렸지만, 어색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 해? 둘이 인사해야지.”

남자가 먼저 인사하라며 권 감독이 도남에게 눈치를 주자, 그는 미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준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도남입니다.”



* * *



“아오! 진짜.”

준아가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서자 민아는 그런 그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선느를 영접하러 간다며 아침 일찍부터 잔뜩 들떠서 나가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는 건지.

민아는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준아 곁에 다가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몰라! 말 시키지 마!”

준아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이선호 보러 간다고 신나서 나가더니 왜 그래? 이선호 못 만났어?”

“그러니까 내 말이. 왜 선느는 못 보고 엉뚱한 놈만 만나냐고.”

“엉뚱한 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민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준아가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 반도남이라고 무…….”

“뭐? 반도남?!”

갑자기 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호에 대해선 늘 무덤덤하기만 했던 민아였으나, 도남의 이름이 등장하자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반도의 상남자랑 같이 영화를 찍다니! 대박. 언니 완전 대박!”

“뭐야, 네가 어떻게 반도남을 알아? 그리고 반도의 상남자는 또 뭐야? 반도의 싸가지면 몰라도.”

반도의 왕싸가지! 준아가 한쪽 입술을 삐죽이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민아는 모르는 소리 말라며 도남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배우라는 사람이 반도의 상남자를 몰라?”



이름 반도남.

나이 서른여섯. 키 188. BAN’S 액션스쿨의 대표.



유명한 액션신은 모두 그가 만들어 낸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무술감독.

“생긴 것도 어찌나 잘생겼는지. 배우들을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그 외모로 울끈불끈한 근육을 자랑하면서 겁나 멋있게 액션을 하는데. 어후~ 상남자도 이런 상남자가 없다니까. 그래서 팬들이 반도남을 ‘반도의 상남자’라고 부르지. 후훗.”

“무슨 무술감독이 팬도 있어?”

누워 있던 준아가 상체를 슬쩍 일으키며 묻자 민아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응. 팬카페도 있어.”

“하. 웃기고 있네.”

싸가지 주제에 팬카페라니. 준아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 조소를 흘렸다.

“뭐가 웃겨? 반도남이 얼마나 멋있는데!”

그를 무시하는 듯한 준아의 발언에 민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준아는 그런 민아에게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채민아. 설마 너…….”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맹목적인 지지와 옹호를 하는 이런 반응은…….

“그 사람 팬카페 가입했어?”

팬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늘 자신이 선호를 향해 보였던 반응이었다.

“이번에 열심회원으로 등업 했지. 후훗.”

“뭐?!”

아니나 다를까, 민아는 당당하게 그의 팬임을 밝혔다.

덕질이 유전이던가.

선호의 열렬한 팬 활동을 하던 자신을 그저 한심스럽게 여기던 민아가 유명한 연예인도 아닌 무술감독의 팬이 되었다는 말에 준아는 순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민아가 도남의 팬이 된 계기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우연히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요즘 반도남이 얼마나 핫한지 모르지? 장난 아니라니까. 내 주위에도 그 방송 보고 반도남한테 빠진 사람 되게 많아.”

무술감독이자 액션배우로 살아가는 도남과 그와 함께 생활하는 액션배우들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힘든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땀을 흘리며 액션에 대한 열정을 쏟아붓는 그의 모습에 민아는 빠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언니의 덕질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한심하다고 비웃던 자신이 덕질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토록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민아는 자신의 덕질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아마 언니도 같이 일하다 보면 이선호보다 반도남을 더 좋아하게 될걸? 그럼~ 반도의 상남잔데 입덕할 수밖에 없지. 어차피 입덕할 거 지금 할래? 내가 뜨끈뜨끈한 떡밥 나눠 줄게.”

덕밍아웃을 하더니 이젠 준아까지 도남의 팬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준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웃기고 있네. 미쳤냐? 내가 선느를 버리고 반도의 싸가지한테 입덕하게?!”

민아가 아무리 그를 반도의 상남자라고 부르며 칭송할지라도 준아에겐 그저 반도의 싸가지일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도남입니다.’

‘하! 처음은 무슨!’

난생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도남을 생각하니 예전의 일이 불쑥 떠올라 준아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바닥에 원수지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더니, 잊고 있던 원수가 있었다.

어쩌다, 또 이렇게, 그를 만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