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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덕후의 최종 목표





“오? 누나.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입으셨어요?”

아이보리 컬러의 카디건과 청바지. 그리고 편안한 운동화. 수수한 차림을 하고 나온 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현승이 묻자, 준아는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대답했다.

“어제 우리 선느 기사 못 봤어?”

“무슨 기사요?”

“우리 선느가 처음으로 이상형을 고백했지 뭐야.”

“이상형이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아는 휴대폰으로 캡쳐 해 놓은 선호의 인터뷰 기사를 현승에게 보여 주었다. 준아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 선느는 막 화려하게 꾸민 여자보다 이렇게 꾸밈없이 수수한 여자가 더 좋대. 호호호.”

“아아. 네에…….”

같은 직종에 종사하면서 이런 뻔한 인터뷰 기사를 진심으로 믿는 준아의 모습이 황당해 현승은 어색하게 눈만 끔뻑였다.

“어때? 우리 선느가 나 보면 반할 것 같아? 성덕 될 수 있겠지?”

지난번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한 선호가 오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발연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의 여배우님께서는 작품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하질 않고, 어떻게 하면 선호의 마음을 빼앗을까 고민하기 바쁘다.

그런 철없는 준아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현승이 애써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누난 이미 성공한 덕후거든요?”

성공해도 너무 성공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라고 현승이 대답하자 준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아직은 하나도 성공하지 않았어.”

“아직이요? 지금보다 얼마나 더 성공하려고요?”

“선느랑 이제 겨우 얼굴 보는 건데 성공은 무슨 성공이야? 만나서 친해지고 그러다 연애도 하고 그리고 결혼도 해야 진짜 성덕이지.”

“……네에?!”

준아의 야심 찬 계획에 현승의 입이 떡 벌어졌다.

덕후의 만렙을 찍고 말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외치며 차에 올라타는 준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현승은 차 문이 닫히고 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째, 병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녀의 덕력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한 준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만 해도 녹음이 짙게 깔려 있던 공원은 여름내 받은 뜨거운 태양의 빛을 닮은 불그스름한 기운을 내기 시작하며 가을이 왔음을 알려 주었다.

“우리 선호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이 왔네.”

계절의 변화에 준아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선호였다.

물론 계절뿐만이 아니었다. 음악, 책, 영화, 음식……. 선호가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 꿰고 있었기에 준아는 무엇을 하든 늘 선호를 먼저 떠올렸고, 어느새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저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할 날을 꿈꾸며.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준아는 선호에게 어떻게 첫인사를 건네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드라마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날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늘 환대만 받는 사람이니까. 찬바람 휭휭 날리는 여자는 아마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센 척해 볼까 싶어, 준아는 그동안 쌓은 연기 내공으로 한순간에 얼굴 표정을 차갑게 바꾸고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쪽이 이선호 씨인가요? 생각보다 실물은 좀 별로네요.”

이렇게 무관심하고 쌀쌀맞게 인사를 건네면 그는 분명 이 여자는 뭔가 싶어 자신을 궁금해할 것이다.

“오호. 재밌겠는데?”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큭큭 웃어 대던 준아는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지.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쓸데없이 처음부터 마이너스로 시작할 필요는 없다며, 이런 스타일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며, 보기 1번을 머릿속에서 쓱쓱 지워 냈다.

“그럼…….”

보기 2번을 금방 생각해 낸 준아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한없이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그리며 애교가 철철 흐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니임~ 정말 뵙고 싶었어욤~ 제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무려 팬질을 10년이 넘……. 아, 이건 아니지.”

상황극이 끝나기도 전에 표정이 굳어진 준아는 또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선호에게 제 입으로 덕밍아웃을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덕밍아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그와 결혼을 하고 난 뒤였다. 그때까진 자신이 선호의 팬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이어야 했다.

“흐음. 그럼 어떻게 인사하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맘에도 없는 싫어하는 티를 내서도 안 되었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예의 바르며, 적당히 매력 있어 보여야 했다.

그런데 그 ‘적당히’가 굉장히 어려웠다.

기침과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하였거늘.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숨길 수 있단 말인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그 ‘적당히’를 연습하려는 찰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스윽 문이 열렸고…….

“준아 씨 먼저 와 있었네요?”

낯익은 목소리가.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듣고 또 들었던 그 따뜻한 목소리가 준아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꺄아! 어떡해, 어떡해!’

선호의 등장으로 인해 가슴은 심히 요동치기 시작했고, 얼굴은 술이라도 한잔 걸친 사람마냥 잔뜩 상기되었다.

‘침착하자 채준아. 침착해! 침착해!’

저도 모르게 덕심이 튀어나올까 싶어 제 마음에 다시 단단히 주의를 준 준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호에게 인사하려고 하는데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제 눈앞에 남신이 있어요!’

선호를 마주한 순간, 스스로에게 준 주의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준아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와아. 이 얼굴천재 좀 보게나. 역시 선느는 실물이 대박이구나! 우어어어어!’

고화질이니 뭐니 아무리 영상 기술이 발달했어도 화면은 그의 잘생김을 반도 담아내질 못하였음을 준아는 다시금 깨달았다.

사실 준아가 선호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0년 전에 딱 한 번, 선호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이십 대의 선호도 물론 멋있었지만, 서른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의 선호는 농염하게 익은 섹시미까지 더해져 그때보다 더욱 심각하게 멋있어져 있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하늘에서 내려온 남신인 듯. 멋있어도 너무 멋있었다.

준아가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자 멋쩍은 미소를 지은 선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준아 씨.”

“네? 아. 네, 네!!”

덕심을 숨기기는 개뿔. 그저 얼굴만 봤을 뿐인데 넋을 잃고 말았던 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끄아! 내가 선느랑 악수를 하다니이이!’

손에 맞닿은 그의 온기에 준아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진정하자 채준아. 겨우 악수 가지고 촌스럽게 이러지 말자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그저 첫걸음을 뗀 것뿐이라며,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준아는 선호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내 사랑 선느.’

“처음 뵙겠습니다. 채준아입니다.”

‘저는 미래에 당신의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우리 앞으로 뜨겁게 사랑해 보아요. 오홍홍홍!’

준아가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하자 선호도 함께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잘 부탁해요. 우리 앞으로 잘해 봐요.”

선호와 마주하는 준아의 얼굴에 핑크빛 미소가 가득 흘러넘쳤다.

“오셨어요 감독님?”

약속 장소에 권 감독이 도착하자 준아와 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 감독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호. 이거 둘이 분위기가 좋은데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한 거 같네?”

잘생기고 예쁜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아주 그림 같다며 권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도남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락을 해 왔다며 권 감독이 알려 주었다.

“허어. 주연 세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역시 남자들이 문제라며, 권 감독이 농을 던지자 지난번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선호가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도남의 불참 소식에 준아는 비어 있는 그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흐음. 반도의 싸가지가 안 오다니. 오늘 영 기분이…… 좋은 걸?! 으흐흐흐.’

도남의 불참은 준아에게는 그저 희소식일 뿐이었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같이 작품 하는 거 처음인가?”

권 감독의 질문에 준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고, 선호가 뒤이어 설명을 붙었다.

“네. 작품뿐만 아니라 얼굴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정확히 말해 처음은 아니지만 선호의 기억 속에선 처음일 테니, 준아는 굳이 그의 기억을 수정하지 않았다.

“허어. 이 좁은 바닥에서 얼굴 한 번 안 봤단 말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권 감독과 함께 부스스 웃음을 터트린 선호는 준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화면에서 봐도 예뻤지만 실제로 보니 준아 씨 정말 미인이네요. 진작 만나 볼 걸 그랬습니다.”

‘어머머! 선느가 나한테 미인이라고 한 거 맞아? 꺅!’

갑작스런 그의 칭찬에 거짓말을 못 하는 준아의 광대가 한껏 승천했다.

“미인인 준아 씨랑 함께하는 기념으로 내가 선물 하나 줄까?”

“선물이요? 갑자기 무슨…….”

선호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자, 권 감독은 깍지 낀 손등에 턱을 괴고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랭크인 전에 두 사람 친해질 기회를 줄까 해.”

“……네?”

이번에는 준아의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어머, 감독님. 이러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며, 준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권 감독을 바라보았다.

“이번 액션이 굉장히 고난이도라서 말이야. 그래서 두 사람, 반 감독 액션스쿨에서 지금부터 세 달간 훈련을 했으면 해. 어때? 괜찮아?”

권 감독의 물음에 선호는 생각이랄 것도 할 틈 없이 순응했다.

“물론입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런 선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그린 권 감독은 이번에는 준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준아 씨. 괜찮겠어요? 조금 힘들 텐데.”

액션을 많이 해 본 선호와 달리 준아가 더 힘들 것이라는 것쯤은 쉬이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껏 많은 작품을 해 왔지만 대부분의 여배우들은 힘든 촬영을 기피했다. 특히 이런 액션 장르는 더더욱 피했으며, 될 수 있는 한 대역을 쓰길 원했다.

하지만 권 감독은 배우가 직접 액션을 하기 원했다. 흉내가 아닌 진짜 연기를 원했다.

대역배우의 액션 연기를 보는 것보다 자신이 아는 그 배우가 직접 펼치는 스릴 넘치는 액션을 볼 때 관객은 더 긴장하고, 감탄하고,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준아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나 속으로 걱정을 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네! 저도 열심히 배울게요!”

그녀의 밝은 미소에 권 감독의 걱정은 싹 씻겨 내려갔다.

“허허.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준아는 진심으로 권 감독에게 감사했다. 선호와 함께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건만, 촬영 전부터 그의 얼굴을 매일 볼 기회가 주어졌다.

‘선느랑 액션 연습이라니!’

준아는 머릿속으로 그와 함께할 연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액션 연습을 하다 보면 옷차림이 가벼워질 테고, 자연스레 그의 섹시한 근육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은혜로운 선느의 모습에 준아의 얼굴엔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성수를 모아야겠군. 훗훗훗.’

그가 흘리는 땀방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녀의 마음에 굳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