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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BAN’S 액션스쿨





넓은 유리창으로 햇살이 길게 밀려드는 아침.

“헛둘, 헛둘.”

편안한 운동복 차림의 사내들이 넓은 강당 여기저기에 흩어져 각자 몸을 풀고 있는 중이다.

하나같이 얼마나 몸매가 좋은지.

“너 몸이 더 좋아졌다? 연습 안 하고 몸 만드냐?”

“아닙니다.”

불끈불끈한 팔 근육과 거북이 등껍질마냥 쩍쩍 갈라진 식스팩. 잔뜩 성난 등 근육은 기본 옵션이요.

“아니긴 뭘 아니야? 허어. 이 자식, 치골 좀 보소. 누구 보여 주려고 이딴 거 만드냐? 너 연애하냐?”

“아닙니다.”

은밀한 부위의 섹시한 근육은 취향이니.

훈훈한 몸매를 자랑하는 남자들이 북적이는 이곳은.

“자. 반 감독님 오시기 10분 전이다. 열심히들 몸 풀어라.”

“네!”

BAN’S 액션스쿨. 도남이 운영하는 체육관이다.

“선배니이이이이임~!”

모두가 스트레칭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막내 민기가 호들갑을 떨며 2층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오민기. 아침부터 웬 난리야? 넌 운동 안 하고 어디 갔다 오냐?”

방금 전 후배들의 몸매 단속을 하던 BAN’S 액션스쿨의 이인자 기혁은 손에 펼치고 있던 부채로 민기의 머리를 툭 때리며 물었다.

“대박 사건입니다!”

부채로 머리를 얻어맞을 때마다 엄살 부리기 바쁜 민기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엄살도 잊은 채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호들갑인지. 체육관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어느새 민기에게로 향했다.

“오늘 여기에 누가 오는지 아십니까?”

“오긴 누가 와?”

이인자인 자신도 모르게 대단한 인물이 올 리 없다 생각한 기혁은 그새 흥미를 잃은 얼굴을 했다.

그러자 기혁을 대신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왜? 아이돌이라도 오냐?”

“오오. 아이돌이라니!”

“우어어어어!”

저마다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 이름을 외치며 흥분하기 시작한 그들은, 민기를 보채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쭉 훑어본 민기는 조금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대답했다.

“이선호.”

“에라이!”

남탕에 또 남자라니!

고대했던 여자 아이돌의 이름이 아닌 선호의 이름이 등장하자 기대로 가득했던 얼굴은 실망으로 얼룩졌다.

한쪽 구석에서 혼자 열심히 몸을 풀고 있던 지원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지원, 넌 좋겠다? 이선호 온단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습니다. 이선호가 오건 말건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지원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하자, 기혁이 빈정대듯 말했다.

“아, 깜빡했다. 너 여자 아니었지?”

“아닌 거 아시면 앞으로 묻지 마십시오.”

선배들의 유치한 놀림을 가볍게 무시한 지원은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이어 나갔다.

이곳의 유일한 홍일점인 그녀는 이곳 식구들에겐 여자 취급을 받지 못했다.

지원은 오히려 그런 점을 편하게 여겼다. 여자라고 특별 대우받는 것 따윈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보며 기혁과 그의 일당은 자기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했다.

“쯧쯧. 저러니까 쟤가 모솔인 거야.”

“맞습니다. 어떤 놈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겠습니까?”

“아이고. 이지원이 불쌍해서 어쩌냐. 누구 봉사하는 마음으로 이지원 데려갈 놈 없냐?”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럼 쟤는 평생 모솔로 살아야겠구나. 허어어.”

그렇게 모두가 연민의 눈빛으로 지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 민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 설마 제가 이선호가 온다고 이러겠습니까?”

“그럼 또 누가 와?”

“오민기. 너 또 실망하게 만들면 죽는다.”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살려 두지 않겠다며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민기는 겁을 먹기는커녕 씨익 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이름을 말했다.

모두들 기대하십시오!

“채.”

얼마 전 드라마에서 선배님들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아 갔던 그 여인.

“준.”

우리의 영원한 긴 생머리 요정.

“아!”

바로 채준아입니다!!

“채준아? 레알? 트루?”

“대박! 진짜 대박!”

“우어어어!”

선호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와는 전혀 상반된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준아에게 푹 빠져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또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미녀 배우 준아였기에 반응은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야, 이씨. 다 비켜!”

잔뜩 흥분된 얼굴을 한 그들은 갑자기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를 미친 듯이 하기 시작했다.

“내 팔 근육 좀 일어났냐?”

“벌크업 좀 더 하셔야겠습니다.”

“젠장. 아까 열심히 해 놓을걸.”

준아를 영접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런 철없는 선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원은 또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 *



훈련 일지를 확인하던 도남은 누군가 벌컥 사무실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야! 채준아가 오면 나한테 먼저 말을 해야지!”

씩씩거리며 기혁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도남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뭐 별일이라고.”

“어쭈. 이 자식이 대표라고 다 너 혼자 알고, 혼자 다 해 먹겠다 이거지?”

“권 감독님 영화 한다고 전에 말했던 걸로 아는데.”

“……아, 그랬냐?”

그 영화가 이 영화였냐. 도남에게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어 기혁은 쩝, 입을 다물었다.

액션스쿨 대표와 이인자이기 전, 오랜 친구이자 동료이기에 두 사람의 대화에선 격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파에 털썩 앉은 기혁은 휴대폰을 거울 삼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채준아가 오면 미리 말해 주면 좋잖냐.”

“채준아가 오건 말건 너랑 뭔 상관이야. 그리고 미리 말해 주면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질 거야 많지. 머리에 왁스도 좀 바르고.”

“머리에 왁스 바른다고 호박이 수박 되냐?”

“트레이닝복도 하나 장만하고.”

“그래 봤자 트레이닝복이지.”

“운동화도 좀 깨끗한 걸로.”

“냄새나는 발이나 깨끗이 씻어라.”

“이게 진짜!”

도남이 꼬박꼬박 대꾸하자 바짝 약이 오른 기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는 그런 거 안 해도 잘생겼다고 잘난 척하는 건가. 망할 자식.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재수 없는 친구 녀석 이마에 딱밤이라도 하나 먹여 줘야겠다 싶어 도남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는데 기혁의 표정이 야릇하게 바뀌었다.

“뭐야, 너?”

도남을 찬찬히 훑어보던 기혁은 푸학, 웃음을 터트렸다.

“너 이 새끼, 특급수박 되고 싶었냐?”

“…….”

“그래 봤자 트레이닝복이라며?”

“…….”

“발은 닦았고?”

“…….”

기혁의 질문에 도남의 얼굴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채준아가 오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던 녀석이. 특별한 것 없는 훈련일 뿐이라던 녀석이.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못 보던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끼던 한정판 운동화까지 개시하셨다.

무슨 일에도 무던하기만 하더니, 결국 녀석도 남자였던가.

“반도남. 너 설마 이 기회에 채준아랑 잘해 보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하는 건 아니지?”

“미, 미쳤냐?”

“표정 보니까 했네 했어.”

“닥치고 제발 좀 꺼져.”

오랜만에 건수를 잡은 기혁은 도남의 주위를 얼쩡거리며 그를 놀려 댔고,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기혁의 소란에 도남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기다림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감독님. 저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선호와 준아였다.

“어우, 채준아 씨!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우리 반 감독이 준아 씨 온다고 머리에 왁…… 읍!”

급하게 손을 뻗어 철없는 친구 녀석의 입을 틀어막은 도남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어색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 도남의 표정에 준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달갑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건 또 뭔지.

나름 표정을 관리하던 준아의 얼굴도 떠름하게 변했다.



* * *



“자. 다들 주목.”

도남이 2층 사무실에서 내려오자 열심히 운동하던 배우들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섰다.

그들의 몸은 도남을 향해 서 있었으나, 시선은 일제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것들이…….’

후배들의 적나라한 마음 표출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게도 느껴져 도남은 속으로 한숨을 픽 내쉬었다.

액션배우의 자존심을 지키라고 그렇게 몇 번이고 강조했건만, 녀석들은 자존심을 모두 밥 말아 먹은 모양이다.

그들이 더 창피한 행동을 하기 전에 얼른 오늘 조회를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한 도남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오늘부터 3개월간 우리와 함께 연습할 분들입니다. 소개는 따로 안 해도 다들 알 테니 소개했다고 치고, 박수.”

“우어어어어어!”

도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우들은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환호했다. 물론 그 환호는.

“채준아! 채준아! 우유빛깔 채준아! 사랑해요 채준아!”

오롯이 준아에게 향한 것이었다.

선호는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에게만 쏟아 내는 환대에 준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선호는 도남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 많았던지라 배우들에게 꽤나 익숙한 얼굴이었고, 이곳의 분위기 또한 선호 역시 익숙했다.

그러기에 그들의 편파적인 환대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선호였다. 자신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 그들의 반응이 오히려 반가웠는지 선호의 얼굴엔 미소가 그려졌다.

“조용.”

카리스마 넘치는 도남의 한마디에 호들갑스러운 외침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다들 알겠지만 작품 들어가기 전까지 배우들이 우리와 함께 연습하는 것은 어디에도 발설해선 안 된다. 특히 이번은 더 각별히 주의하도록.”

“네!”

“소장만 하겠다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거나, 쓸데없는 자랑 하겠다고 SNS인가 뭔가에 올렸다가 발각되는 즉시 이곳에서 퇴출이다. 알았나?”

“…….”

준아와 함께 사진을 찍을 생각에 마음이 잔뜩 들떠 있던 배우들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실망이 가득한 기색을 내비쳤다.

“대답 안 해?”

“……네에.”

도남의 매서운 눈빛에 배우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배우들에게 주의 사항을 알리던 도남은 몸을 돌려 선호와 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항은 두 분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준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자 도남이 미간을 슬쩍 좁히며 말했다.

“사진 말입니다. 서로 피곤하지 않게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아는 방금 배우들이 지은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세 달이라는 기간 동안 선호와 액션 연습을 하기로 결정된 후, 준아의 첫째 목표는 액션 연습으로 멋짐이 폭발하는 선호의 모습을 사진으로 모두 저장하는 것이었다.

팬이라면 직찍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기본 아니던가.

마음 같아선 세상에서 제일 비싼 카메라를 구입해 그의 미세한 모공까지 다 보일 정도로 밀착하여 찍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준아는 카메라 기능이 가장 좋다는 휴대폰을 새로 장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선호의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그가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기록하여 간직하겠다며 들뜬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왔건만.

‘이런 젠장!’

처음부터 시작된 도남의 태클에 그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게 생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준아는 이내 결심했는지 눈에 생기가 반짝 돌았다.

하지 말라는 짓은 더욱 하고 싶은 법. 특히나 덕질은 하지 말라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그래. 몰래 찍으면 되지 뭐.’

도남의 매서운 태클도 준아의 불타는 덕질을 막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