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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지옥 훈련의 시작
‘어후……. 근육 쪼개지는 것 좀 봐! 저 사이에 파묻혀 살고 싶다 정말.’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스트레칭 좀 하라고 했더니, 준아는 몸 스트레칭이 아닌 동공 스트레칭을 하기에 바빴다. 그녀의 시선은 조금 떨어져 앉은 선호에게 향해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를 쭉쭉 늘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아한 발레리노 같기도 했고, 절도 있는 무예가 같기도 했다.
한마디로, 죽였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의 몸을 힐끔힐끔 몰래 훔쳐보던 준아는 어느새 정신 줄을 놓아 버렸고, 이제는 아예 선호를 향해 몸을 틀어 앉아 대놓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이어 가던 선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준아를 바라보았다.
‘엄마야!’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준아는 급히 시선을 돌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운동이라곤 숨쉬기운동과 위운동과 장운동밖에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 준아가 귀엽다는 듯 싱긋 웃은 선호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준아 씨는 액션 많이 해 봤어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요? 긴장되겠다.”
“네. 안 그래도 어제 한숨도 못 잤지 뭐예요.”
“저런. 그 정도로 걱정했어요?”
‘어쩜, 우리 선느는 이리 다정하기까지 할까.’
진심 어린 눈빛으로 제 걱정을 해 주는 선호의 모습에 준아의 마음이 살살 녹기 시작했다.
어제 한숨도 못 잔건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달랐다. 액션이 걱정되어서 못 잔 게 아니라, 선호를 볼 생각에 하도 설레서 잠을 설친 것이었다.
이런 준아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선호는 후배의 첫 액션 도전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꽤나 몸치였는데, 반 감독님한테 액션 배우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됐거든요.”
“흉내는요 무슨! 선배님 액션이 얼마나 멋진데요!”
자신을 낮춰도 너무 낮추는 그의 겸손함에 준아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와이어면 와이어, 자동차면 자동차. 특히 <비열한 도시>에서 단검 하나로 나쁜 놈들 다 때려잡는 그 액션을 보고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데요! 어후. 그 장면은 보고 또 봐도 정말 멋있어서 나노 단위로 캡쳐를 해 가지고 그…….”
쉴 새 없이 선호의 칭찬을 늘어놓던 준아는 순간 놀라 입술을 멈추었다. 나노 단위로 캡쳐를 해서 보다니…….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덕후의 습성이 아니던가.
‘으아아…….’
대충 아는 척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아는 척을 하고 말았다.
슬쩍 선호의 눈치를 살피니 그도 조금은, 아니. 무척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두 배는 더 커져 있었다.
“아……. 그, 그러니까, 제가…….”
연습 첫날부터 덕밍아웃을 하게 될 위기에 처한 준아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액션이 처음이라 액션으로 유명한 작품들은 모조리 다 찾아봤거든요. 그중에 선배님의 액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라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죠. 하하. 아하하하.”
준아의 연기가 통했는지 그제야 의아한 눈을 푼 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그렸다.
“준아 씨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 고맙네요. 그나저나 대단해요.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연기 공부를 하고. 저도 분발해야겠네요.”
준아가 출연 결정을 지은 지 불과 1주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선호는 그녀의 연기 열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가 덕질을 인생 낭비라 하였는가.
덕질이 이리도 이로울 때도 있다.
첫날부터 분위기가 이렇게나 좋은 걸 보니, 덕후의 만렙을 찍겠다는 제 결심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만 같아 기분 좋은 미소가 준아의 얼굴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다.
“스트레칭 다 하셨습니까?”
한참 핑크빛 기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때, 퉁명스런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훈련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두 분과 함께 훈련할 파트너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준아와 선호 앞에 무심한 얼굴을 하고 선 도남은 곁에 선 두 사람을 눈으로 흘낏 가리키며 차례로 한 사람씩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정찬해. 이선호 씨와 함께할 파트너입니다.”
도남의 소개에 찬해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선호에게 인사했고, 선호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오오……. 좀 생겼는데? 정찬해? 그 얼굴 아~주 칭찬해!’
그의 훌륭한 외모에 준아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이 친구 잘생겼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선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준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준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동의하자, 선호는 도남이 말하지 않은 소소한 정보를 준아에게 알려 주었다.
“BAN’S 액션스쿨의 비주얼 계보를 잇는 2대 킹카죠.”
곧은 얼굴선과 깊이 있는 눈빛, 월등한 신체 조건. 찬해의 외모는 연예기획사에서 여러 번 캐스팅 제안을 받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액션배우의 길을 걷고 싶다며 BAN’S 액션스쿨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끔, 아니 종종 조폭으로 오해받는 조금은 험악하게 생긴 액션스쿨 배우들 사이에 그가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액션배우도 이렇게 잘난 사람이 있다며 저들의 자긍심을 높여 주기도 했다.
찬해는 훌륭한 신체 조건 덕에 도남의 자리를 물려받아 주로 남자 주인공의 대역을 맡고 있었고, 선호와도 이미 여러 번 작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1대 킹카는 누구예요?”
준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속삭이듯 묻자, 선호는 살짝 턱으로 앞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반도남 감독님.”
“하! 킹카가 다 얼어 죽었네.”
낮게 꿍얼거리는 준아의 혼잣말에 선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부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예쁜 줄만 알았더니 은근 당차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후배님이었다.
“왜요? 반 감독님 잘생겼잖아요?”
“잘생기기는요. 선배님이 오조 오억 배 더 잘생기셨거든요?”
“……네?”
“……아.”
무심코 튀어나온 준아의 진심에 선호와 준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퉁명스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분, 귓속말로 떠들지 말고 집중하십시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준아와 선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남은 뒤이어 한 사람을 준아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이지원. 채준아 씨와 함께할 파트너입니다.”
준아의 파트너는 다름 아닌 BAN’S 액션스쿨의 홍일점 지원이었다.
지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준아가 생긋 웃어 보이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럼 파트너 소개도 마쳤으니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도남의 말이 끝나자 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찬해는 선호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선호가 찬해를 따라 자리를 옮기자, 준아도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드디어 선느랑 연습이구나!’
연습을 하다 꽃피울 그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는데, 그때 뒤에서 도남이 그녀를 불렀다.
“채준아 씨. 어디 가십니까?”
“……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준아가 고개를 돌리자, 도남이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던 찬해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선호는 준아에게 힘내라며 싱긋 웃어 주고는 찬해를 따라갔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춰 선 준아는 멀어져 가는 선호와 제게 손짓하는 도남을 번갈아 보며 방황했다.
‘뭐야? 선느는 저기 가는데 나는 왜?’
준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가는 게 빠르겠다고 여겼는지, 도남은 휘휘 흔들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그녀 곁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채준아 씨는 여기서 저랑 함께 따로 연습합니다.”
“네?! 같이 하는 거 아니었어요?”
선호와 따로 연습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준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한가득 밀려왔다.
선느랑 함께하고 싶다고, 선느와 같이 연습할 거라고, 선느를 곁에서 보아야 한다고. 그 애절한 마음을 눈빛에 실어 도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남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아까보다 더 냉랭한 눈빛으로 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액션 초짜가 어딜 같이 합니까?”
‘초, 초짜?’
“이선호 씨가 태권도 검은 띠를 맨 고3이라면, 채준아 씨는 도복도 안 입은 이제 갓 입학한 코흘리개 초딩입니다.”
‘뭐라고? 초딩?’
“그러니 분수에 맞게 기본부터 합니다. 알았습니까?”
‘……부, 부우운수?!’
도남의 연이은 팩트 폭력에 준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반도의 싸가지에게 매너나 다정다감 그딴 걸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매정함은 여전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BAN’S 액션스쿨에 들어온 이상 도남의 말이 곧 법이었고, 배우는 입장인 준아가 그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 이유는 없었다.
결국 준아는 선호와의 달콤한 연습이 아닌 도남과의 끔찍한 지옥 훈련을 하게 되었다.
* * *
‘으히이잉…… 선느으으…….’
선호와 생이별을 하게 된 준아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연습 중인 선호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보십니까? 집중 안 합니까?”
귀를 찌르는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준아는 선호를 향한 시선을 억지로 거두어 앞에 선 도남을 바라보았다.
말이 바라보는 것이지, 반은 흘겨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준아 씨는 액션이 처음인 만큼 제가 집중지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 말든가.’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전 여배우라고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와 액션을 배우는 사람은 그저 다 똑같은 훈련생일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니 마음대로 하시지요.’
알겠다며 준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남은 그런 준아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무 싫은 티를 냈나……. 준아는 급히 표정 관리에 나섰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쨌든 도남의 말대로 이곳은 BAN’S 액션스쿨이었고, 자신은 그에게 액션을 배우러 온 것이기에 그의 말을 잘 듣고 하루라도 빨리 액션 동작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이 프로의 자세였다. 그리고 빨리 배워야 하루빨리 선호와 함께 연습할 수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의 이유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이끌었고, 이내 준아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으로 도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도남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이 싸가지는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태클을 걸 기세네.’
대체 뭐가 문젠가 싶어서 그녀 역시 도남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도남은 지원을 불러 옆에 세웠다.
“잘 보십시오. 뭐 느끼시는 거 없습니까?”
“네? 뭘?”
“이 친구 보니 채준아 씨가 지금 뭘 고쳐야 할지 모르시겠습니까?”
갑자기 또 뭘 고치라는 건지. 삐딱한 마음 자세는 고쳤고,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어 준아는 지원과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맨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화장기가 없는, 그야말로 민낯의 진수였다.
‘설마 지금, 화장했다고 뭐라고 그러는 거야? 하. 참나.’
학생주임 선생마냥 단속에 나서는 도남이 못마땅해, 준아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비랑 틴트는 화장도 아닌데요?”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준아는 그다음 옷차림을 살폈다.
편안한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나름 옷은 잘 갖춰 입고 왔기에 옷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다시 지원을 바라보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날씬하기만 한 비실비실한 몸매가 아닌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군살 없는 환상적인 몸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참 멋있고 아름다웠다.
“……근육을 키워야 할까요?”
액션을 하려면 근육운동을 하라는 건가 싶어 조심히 대답을 내놓았더니.
“그것도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남은 땡, 을 외쳤다.
“대체 뭘 고치라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듯 준아가 대놓고 물어보자, 도남은 지원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지원의 헤어스타일은 도남보다 아주 조금 긴, 숏커트 헤어였다. 도남은 준아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 와이어에 꼬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
반짝 윤기를 내는 준아의 고운 머리카락은 그녀의 등을 반 이상 덮을 정도로 길었다. 뒤늦게 문제점을 깨달은 준아는 제 손목에 걸려 있는 고무줄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렸다.
그런데 준아를 바라보는 도남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함이 그득했다.
“말꼬랑지. 그것도 안 됩니다. 상대방 얼굴에 채찍질할 일 있습니까?”
‘아후.’
미간을 슬쩍 찌푸린 준아는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이제 됐냐고 눈빛으로 묻자 도남은 스읍 입술을 일자로 다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똥머리. 그것도 안 됩니다. 그것도 훈련하다 보면 풀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묶었던 머리가 스르륵 풀려 버리고 말았다.
‘아놔, 진짜!’
짜증이 밀려와 어금니를 꽉 깨문 준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거리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준아가 시선을 올려 도남을 바라보자, 그는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자르시죠.”
“……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준아가 동그란 눈으로 묻는데, 그는 두 손가락으로 가위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싹둑 자릅시다.”
‘……싸, 싹둑?!’
당황스러움에 잠시 굳었던 준아는 이내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긴 생머리는 준아의 상징과도 같았다.
긴 생머리 하면 채준아. 채준아 하면 긴 생머리. 이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공식이었다.
게다가 긴 생머리 덕분에 지금까지 수년간 샴푸 모델을 해 온 준아였다.
“죄송하지만 안 돼요.”
준아의 대답을 들은 도남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왜 안 됩니까?”
도남의 태클에 준아는 기가 막힌 듯 또다시 헛웃음을 내뱉었다.
배우로 살아가면 좋은 점도 있지만, 그보다 불편한 점이 많았다. 누구나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당연한 그 일을 제 맘대로 못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가장 불편했다.
준아에게 긴 생머리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제 마음대로 자르고 기르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는 별 의미 없는 머리카락일지 모르나, 준아는 달랐다.
머리카락은 이미지였고, 캐릭터였으며, 돈이었다.
게다가 샴푸 모델을 하는 동안 결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는 조항에 사인을 한 이상, 이 머리카락은 제 몸에 붙어 있어도 제 것이 아닌 참 아이러니한 처지였다.
연예계와 나름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도남이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무턱대고 자르라 마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도리어 더 당황스러웠으나, 준아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자르는 게 아니고 못 자르는 거죠.”
“그 머리카락 채준아 씨 머리카락 아닙니까?”
“제 거지만 맘대로 자르는 순간 감당해야 할 손해가 어마어마하거든요.”
이 머리카락은 당신이 만만히 볼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할 일 없이 기르는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머리카락엔 수많은 돈이 걸려 있다고.
“그렇게 자르라고 하신다고 맘대로 자를 수 있…….”
그렇게 차분히 도남에게 설명을 이어 가던 준아의 입이 순간 멈칫하더니, 무엇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하니 입술이 벌어졌다.
절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을 줄 알았더니…….
……자를 수 있었다.
샴푸 광고 계약 연장을 안 했다.
‘어후……. 근육 쪼개지는 것 좀 봐! 저 사이에 파묻혀 살고 싶다 정말.’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스트레칭 좀 하라고 했더니, 준아는 몸 스트레칭이 아닌 동공 스트레칭을 하기에 바빴다. 그녀의 시선은 조금 떨어져 앉은 선호에게 향해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를 쭉쭉 늘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아한 발레리노 같기도 했고, 절도 있는 무예가 같기도 했다.
한마디로, 죽였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의 몸을 힐끔힐끔 몰래 훔쳐보던 준아는 어느새 정신 줄을 놓아 버렸고, 이제는 아예 선호를 향해 몸을 틀어 앉아 대놓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이어 가던 선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준아를 바라보았다.
‘엄마야!’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준아는 급히 시선을 돌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운동이라곤 숨쉬기운동과 위운동과 장운동밖에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 준아가 귀엽다는 듯 싱긋 웃은 선호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준아 씨는 액션 많이 해 봤어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요? 긴장되겠다.”
“네. 안 그래도 어제 한숨도 못 잤지 뭐예요.”
“저런. 그 정도로 걱정했어요?”
‘어쩜, 우리 선느는 이리 다정하기까지 할까.’
진심 어린 눈빛으로 제 걱정을 해 주는 선호의 모습에 준아의 마음이 살살 녹기 시작했다.
어제 한숨도 못 잔건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달랐다. 액션이 걱정되어서 못 잔 게 아니라, 선호를 볼 생각에 하도 설레서 잠을 설친 것이었다.
이런 준아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선호는 후배의 첫 액션 도전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꽤나 몸치였는데, 반 감독님한테 액션 배우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됐거든요.”
“흉내는요 무슨! 선배님 액션이 얼마나 멋진데요!”
자신을 낮춰도 너무 낮추는 그의 겸손함에 준아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와이어면 와이어, 자동차면 자동차. 특히 <비열한 도시>에서 단검 하나로 나쁜 놈들 다 때려잡는 그 액션을 보고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데요! 어후. 그 장면은 보고 또 봐도 정말 멋있어서 나노 단위로 캡쳐를 해 가지고 그…….”
쉴 새 없이 선호의 칭찬을 늘어놓던 준아는 순간 놀라 입술을 멈추었다. 나노 단위로 캡쳐를 해서 보다니…….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덕후의 습성이 아니던가.
‘으아아…….’
대충 아는 척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아는 척을 하고 말았다.
슬쩍 선호의 눈치를 살피니 그도 조금은, 아니. 무척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두 배는 더 커져 있었다.
“아……. 그, 그러니까, 제가…….”
연습 첫날부터 덕밍아웃을 하게 될 위기에 처한 준아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액션이 처음이라 액션으로 유명한 작품들은 모조리 다 찾아봤거든요. 그중에 선배님의 액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라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죠. 하하. 아하하하.”
준아의 연기가 통했는지 그제야 의아한 눈을 푼 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그렸다.
“준아 씨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 고맙네요. 그나저나 대단해요.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연기 공부를 하고. 저도 분발해야겠네요.”
준아가 출연 결정을 지은 지 불과 1주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선호는 그녀의 연기 열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가 덕질을 인생 낭비라 하였는가.
덕질이 이리도 이로울 때도 있다.
첫날부터 분위기가 이렇게나 좋은 걸 보니, 덕후의 만렙을 찍겠다는 제 결심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만 같아 기분 좋은 미소가 준아의 얼굴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다.
“스트레칭 다 하셨습니까?”
한참 핑크빛 기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때, 퉁명스런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훈련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두 분과 함께 훈련할 파트너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준아와 선호 앞에 무심한 얼굴을 하고 선 도남은 곁에 선 두 사람을 눈으로 흘낏 가리키며 차례로 한 사람씩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정찬해. 이선호 씨와 함께할 파트너입니다.”
도남의 소개에 찬해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선호에게 인사했고, 선호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오오……. 좀 생겼는데? 정찬해? 그 얼굴 아~주 칭찬해!’
그의 훌륭한 외모에 준아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이 친구 잘생겼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선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준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준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동의하자, 선호는 도남이 말하지 않은 소소한 정보를 준아에게 알려 주었다.
“BAN’S 액션스쿨의 비주얼 계보를 잇는 2대 킹카죠.”
곧은 얼굴선과 깊이 있는 눈빛, 월등한 신체 조건. 찬해의 외모는 연예기획사에서 여러 번 캐스팅 제안을 받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액션배우의 길을 걷고 싶다며 BAN’S 액션스쿨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끔, 아니 종종 조폭으로 오해받는 조금은 험악하게 생긴 액션스쿨 배우들 사이에 그가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액션배우도 이렇게 잘난 사람이 있다며 저들의 자긍심을 높여 주기도 했다.
찬해는 훌륭한 신체 조건 덕에 도남의 자리를 물려받아 주로 남자 주인공의 대역을 맡고 있었고, 선호와도 이미 여러 번 작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1대 킹카는 누구예요?”
준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속삭이듯 묻자, 선호는 살짝 턱으로 앞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반도남 감독님.”
“하! 킹카가 다 얼어 죽었네.”
낮게 꿍얼거리는 준아의 혼잣말에 선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부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예쁜 줄만 알았더니 은근 당차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후배님이었다.
“왜요? 반 감독님 잘생겼잖아요?”
“잘생기기는요. 선배님이 오조 오억 배 더 잘생기셨거든요?”
“……네?”
“……아.”
무심코 튀어나온 준아의 진심에 선호와 준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퉁명스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분, 귓속말로 떠들지 말고 집중하십시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준아와 선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남은 뒤이어 한 사람을 준아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이지원. 채준아 씨와 함께할 파트너입니다.”
준아의 파트너는 다름 아닌 BAN’S 액션스쿨의 홍일점 지원이었다.
지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준아가 생긋 웃어 보이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럼 파트너 소개도 마쳤으니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도남의 말이 끝나자 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찬해는 선호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선호가 찬해를 따라 자리를 옮기자, 준아도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드디어 선느랑 연습이구나!’
연습을 하다 꽃피울 그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는데, 그때 뒤에서 도남이 그녀를 불렀다.
“채준아 씨. 어디 가십니까?”
“……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준아가 고개를 돌리자, 도남이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던 찬해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선호는 준아에게 힘내라며 싱긋 웃어 주고는 찬해를 따라갔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춰 선 준아는 멀어져 가는 선호와 제게 손짓하는 도남을 번갈아 보며 방황했다.
‘뭐야? 선느는 저기 가는데 나는 왜?’
준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가는 게 빠르겠다고 여겼는지, 도남은 휘휘 흔들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그녀 곁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채준아 씨는 여기서 저랑 함께 따로 연습합니다.”
“네?! 같이 하는 거 아니었어요?”
선호와 따로 연습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준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한가득 밀려왔다.
선느랑 함께하고 싶다고, 선느와 같이 연습할 거라고, 선느를 곁에서 보아야 한다고. 그 애절한 마음을 눈빛에 실어 도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남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아까보다 더 냉랭한 눈빛으로 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액션 초짜가 어딜 같이 합니까?”
‘초, 초짜?’
“이선호 씨가 태권도 검은 띠를 맨 고3이라면, 채준아 씨는 도복도 안 입은 이제 갓 입학한 코흘리개 초딩입니다.”
‘뭐라고? 초딩?’
“그러니 분수에 맞게 기본부터 합니다. 알았습니까?”
‘……부, 부우운수?!’
도남의 연이은 팩트 폭력에 준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반도의 싸가지에게 매너나 다정다감 그딴 걸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매정함은 여전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BAN’S 액션스쿨에 들어온 이상 도남의 말이 곧 법이었고, 배우는 입장인 준아가 그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 이유는 없었다.
결국 준아는 선호와의 달콤한 연습이 아닌 도남과의 끔찍한 지옥 훈련을 하게 되었다.
* * *
‘으히이잉…… 선느으으…….’
선호와 생이별을 하게 된 준아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연습 중인 선호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보십니까? 집중 안 합니까?”
귀를 찌르는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준아는 선호를 향한 시선을 억지로 거두어 앞에 선 도남을 바라보았다.
말이 바라보는 것이지, 반은 흘겨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준아 씨는 액션이 처음인 만큼 제가 집중지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 말든가.’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전 여배우라고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와 액션을 배우는 사람은 그저 다 똑같은 훈련생일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니 마음대로 하시지요.’
알겠다며 준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남은 그런 준아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무 싫은 티를 냈나……. 준아는 급히 표정 관리에 나섰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쨌든 도남의 말대로 이곳은 BAN’S 액션스쿨이었고, 자신은 그에게 액션을 배우러 온 것이기에 그의 말을 잘 듣고 하루라도 빨리 액션 동작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이 프로의 자세였다. 그리고 빨리 배워야 하루빨리 선호와 함께 연습할 수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의 이유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이끌었고, 이내 준아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으로 도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도남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이 싸가지는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태클을 걸 기세네.’
대체 뭐가 문젠가 싶어서 그녀 역시 도남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도남은 지원을 불러 옆에 세웠다.
“잘 보십시오. 뭐 느끼시는 거 없습니까?”
“네? 뭘?”
“이 친구 보니 채준아 씨가 지금 뭘 고쳐야 할지 모르시겠습니까?”
갑자기 또 뭘 고치라는 건지. 삐딱한 마음 자세는 고쳤고,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어 준아는 지원과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맨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화장기가 없는, 그야말로 민낯의 진수였다.
‘설마 지금, 화장했다고 뭐라고 그러는 거야? 하. 참나.’
학생주임 선생마냥 단속에 나서는 도남이 못마땅해, 준아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비랑 틴트는 화장도 아닌데요?”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준아는 그다음 옷차림을 살폈다.
편안한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나름 옷은 잘 갖춰 입고 왔기에 옷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다시 지원을 바라보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날씬하기만 한 비실비실한 몸매가 아닌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군살 없는 환상적인 몸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참 멋있고 아름다웠다.
“……근육을 키워야 할까요?”
액션을 하려면 근육운동을 하라는 건가 싶어 조심히 대답을 내놓았더니.
“그것도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남은 땡, 을 외쳤다.
“대체 뭘 고치라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듯 준아가 대놓고 물어보자, 도남은 지원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지원의 헤어스타일은 도남보다 아주 조금 긴, 숏커트 헤어였다. 도남은 준아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 와이어에 꼬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
반짝 윤기를 내는 준아의 고운 머리카락은 그녀의 등을 반 이상 덮을 정도로 길었다. 뒤늦게 문제점을 깨달은 준아는 제 손목에 걸려 있는 고무줄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렸다.
그런데 준아를 바라보는 도남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함이 그득했다.
“말꼬랑지. 그것도 안 됩니다. 상대방 얼굴에 채찍질할 일 있습니까?”
‘아후.’
미간을 슬쩍 찌푸린 준아는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이제 됐냐고 눈빛으로 묻자 도남은 스읍 입술을 일자로 다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똥머리. 그것도 안 됩니다. 그것도 훈련하다 보면 풀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묶었던 머리가 스르륵 풀려 버리고 말았다.
‘아놔, 진짜!’
짜증이 밀려와 어금니를 꽉 깨문 준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거리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준아가 시선을 올려 도남을 바라보자, 그는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자르시죠.”
“……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준아가 동그란 눈으로 묻는데, 그는 두 손가락으로 가위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싹둑 자릅시다.”
‘……싸, 싹둑?!’
당황스러움에 잠시 굳었던 준아는 이내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긴 생머리는 준아의 상징과도 같았다.
긴 생머리 하면 채준아. 채준아 하면 긴 생머리. 이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공식이었다.
게다가 긴 생머리 덕분에 지금까지 수년간 샴푸 모델을 해 온 준아였다.
“죄송하지만 안 돼요.”
준아의 대답을 들은 도남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왜 안 됩니까?”
도남의 태클에 준아는 기가 막힌 듯 또다시 헛웃음을 내뱉었다.
배우로 살아가면 좋은 점도 있지만, 그보다 불편한 점이 많았다. 누구나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당연한 그 일을 제 맘대로 못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가장 불편했다.
준아에게 긴 생머리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제 마음대로 자르고 기르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는 별 의미 없는 머리카락일지 모르나, 준아는 달랐다.
머리카락은 이미지였고, 캐릭터였으며, 돈이었다.
게다가 샴푸 모델을 하는 동안 결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는 조항에 사인을 한 이상, 이 머리카락은 제 몸에 붙어 있어도 제 것이 아닌 참 아이러니한 처지였다.
연예계와 나름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도남이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무턱대고 자르라 마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도리어 더 당황스러웠으나, 준아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자르는 게 아니고 못 자르는 거죠.”
“그 머리카락 채준아 씨 머리카락 아닙니까?”
“제 거지만 맘대로 자르는 순간 감당해야 할 손해가 어마어마하거든요.”
이 머리카락은 당신이 만만히 볼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할 일 없이 기르는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머리카락엔 수많은 돈이 걸려 있다고.
“그렇게 자르라고 하신다고 맘대로 자를 수 있…….”
그렇게 차분히 도남에게 설명을 이어 가던 준아의 입이 순간 멈칫하더니, 무엇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하니 입술이 벌어졌다.
절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을 줄 알았더니…….
……자를 수 있었다.
샴푸 광고 계약 연장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