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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웅장한 홀리데이 호텔의 대형 연회 룸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과 홀 중앙에 마련된 라운지에서 춤을 추는 커플들까지 한 해를 시작하는 신년 파티 분위기로 한층 고조된 상태였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 매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 자주 접하는 정부 고위층 인사에서부터 인기 영화배우, 연예인, 모델, 교수, 사업가 등 사회 각계에 걸쳐 다양했다.
지수는 투명한 샴페인 잔을 잡은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당연하지. 준비한 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얼굴 근육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녀였다.
긴 샴페인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깊게 들이켰다. 알싸한 맛이 식도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간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보니 알코올조차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민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지수의 두 눈은 줄곧 사진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 모습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찾았다!
지수는 절로 깊은 숨을 들이켰다.
마침 거의 동시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끌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젊은 여자였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붉은빛 레이스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연예계에서 꽤 알려진 스타급 여배우였다.
지수는 그 틈을 타 상대 남자를 더 은밀히 관찰했다.
사진을 통해 수없이 그려 왔던 이미지와 실제로 본 남자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었다. 하긴 사진 몇 장과 피상적인 정보만으로 강재헌의 모든 것을 보여 주긴 무리일 테니까.
어쨌든 그 많은 유명 인사 중 강재헌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MJ 제약의 부대표라는 직함과 비즈니스맨으로서의 화려한 이력만으로 충분히 이목을 끌면서도 그 사람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남성적 아우라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지금도 여자들이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낸 채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보일 정도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것은 다른 여자들과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긴장 때문이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할 뿐이다. 특별히 강재헌을 눈에 담자 그 긴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해졌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무슨 말인가 하자 아까의 그 여배우가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상체를 살짝 숙인 동작으로 인해 깊이 팬 풍만한 가슴 곡선이 반 이상 드러났다.
풋, 절로 쓴 미소가 번진다.
그 여자의 의도가 몇 미터 떨어진 지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의 몸으로 강재헌의 마음을 홀리는 것.
그 기회를 놓칠세라 여자의 가슴을 은밀히 훔쳐보는 주변 남자들과 달리, 여자의 표적이 된 재헌은 별 감흥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냉소적이면서도 시니컬한 표정이었다.
의외다. 저런 표정을 짓다니.
아니면 그 이상으로 고단수인 걸까?
어쩌면 단순한 미인계가 안 먹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직 강재헌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한 달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그러니 시작하기도 전에 겁먹고 뒷걸음쳐서는 안 되는 거다.
그래, 침착하자. 떨지 말자. 계획대로 하면 되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지수는 절로 숨을 훅 들이켰다.
돌연 재헌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찌릿, 강렬한 스파크처럼 두 사람의 눈이 허공 위에서 만났다.
방심하다 일격을 맞은 기분이 이럴까?
어찌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사로잡힌 그 강한 눈빛에 가엾은 심장이 제 기능을 못 한 채 미친 듯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그녀였다.
왜? 설마 내가 지금껏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걸까?
최대한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믿었건만…….
무심히 시선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무심코 마주친 눈빛이라기엔 부담스러울 만치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척추를 타고 가는 한기가 치달렸다.
보이지 않은 밧줄에 온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답답함이 밀려온다.
지수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생각을 해, 서지수, 제발!
간신히 숨을 들이켜며 하얗게 탈색된 머리를 움직이려 애를 썼다.
아까 그 여배우처럼 교태 어린 눈빛이나 미소는 금물이었다. 이미 강재헌이 어떤 타입인지 대충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그의 예상을 빗나가야 한다.
그래,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일수록 손쉽게 얻어지는 먹이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지수는 최대한 초연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만 그녀가 그러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외관상 그녀의 모습은 그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 무심해 보였다.
적시에 민호가 먹음직스러운 카나페 하나를 내밀었다. 살짝 입술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입 속에서 달콤한 향이 퍼진다. 자동적으로 떠오른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민호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다시 양심의 가책이 꿈틀거렸다.
아까부터 한껏 들뜬 착한 남자를 보자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호를 이용한 그녀이기에 부디 그가 그녀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긴장이 풀려 갔다.
이제 지수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재헌을 은밀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의도적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착각이 아니라면 언제부터인가 재헌 역시 그녀를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즉각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딘가 시니컬하면서도 호기심이 퍼진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긴장이 전신을 타고 거센 회오리를 일으키듯 점점 더 커져 갔다.
그 밤 내내 지수는 그 검은 눈을 똑똑히 의식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선 끝에 느껴지는 한 남자의 강렬한 눈빛에 급기야는 전세가 역전되어 오히려 그에게 감시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로써 강재헌의 관심을 끌기 위한 처음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일까?
그렇다, 라는 생각에 은근한 만족감이 들면서도 마음 깊은 곳은 그 이상으로 초조해져 갔다.
그녀는 다시 깊은 숨을 들이켰다.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이르다. 이 파티가 끝나기 전에 최소한 그와 가벼운 대화라도 나누면서 그녀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부추겨야 한다.
제 2라운드로 접어들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마침 민호가 시끄러운 소음을 피해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지수는 홀 끝으로 이동해 한적한 휴게실 입구에 세워진 대형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낯선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여자는 꾸미기 나름인 걸까?
세련된 화장 덕에 한층 커지고 깊어진 눈과 섬세한 윤곽이 더욱 또렷해졌다. 숱 많은 와인빛 머리칼은 우아하게 웨이브 져 가냘픈 맨어깨를 어루만지고, 우윳빛 고운 살결이 눈부신 은빛 드레스와 조화를 이루며 매혹적인 여성미를 한껏 드러냈다.
하루 대여비가 20만 원이나 하는 명품 드레스와 구두가 제값을 하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그나마 돈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저녁, 민호가 자신을 보았을 때의 충격과 감탄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긴 그녀의 눈에도 스스로가 이렇게 달라 보일 정도이니 지극히 소탈한 차림에 익숙한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한껏 쪼그라들었던 자존감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이젠 주변 남자들의 시선에도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민호의 파트너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그들의 세상 속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순간 막을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만일 저들이 내 실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주일에 5일을 고된 노동을 요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그나마 쉬는 주말마저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거나 짬짬이 시간을 내어 방송 대학에서 학업까지 병행하는 악바리.
그런 악착같은 지수에게 이런 화려한 파티는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과는 무관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민호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괜찮은 청년임에 분명했다.
그런 착한 남자를 이용하는 것에 다시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민호는 그녀가 오래전 시간제 근무로 일했던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매너 좋은 손님으로 기억에 남아 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면서 수줍은 고백을 했을 때 적잖이 당황한 지수였다. 스무 살의 순수했던 그때, 다른 누구보다 빨리 냉정한 현실과 마주했던 경험을 가진 지수였기에 더 이상 남녀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런 사소한 감정은 그녀의 현실 속에서 감정의 사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카페 동료를 통해 민호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되자 그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그는 카페 건너편의 대형 빌딩의 실소유자이자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벌가의 차남이었고 그녀와는 태생과 환경부터 다른 존재였다.
아주 잠깐, 그렇게 대단한 집안의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인 스타일이었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가 처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며 그의 관심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호는 그마저도 다 이해할 수 있다며 계속 구애를 이어 갔지만 지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신사답게 물러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 주었다.
그렇게 민호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 말,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 이번 계획과 관련해 장만옥 사장 내외와 두 번째 미팅을 가졌을 때 민호와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그녀와의 재회에 노골적인 기쁨을 드러냈고 그 이상으로 기뻐한 사람은 장 사장 내외였다. 이미 민호의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장 사장은 그녀가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번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일주일 전, 매년 대기업 인사나 유명인들만 참석한다는 이 호텔의 신년 파티에 MJ의 부대표, 강재헌도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는 어떻게든 민호를 꼬드겨 그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면서 그녀를 압박했다. 다행히 민호의 파트너로서 이 파티에 초대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절로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언제…….
지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였다.
어느새 강재헌이 그녀 뒤에 바싹 다가와 서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머스크 향이 주변 공기를 아련히 감싸 온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만났다.
강렬했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건만, 그 이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강한 눈빛이었다.
다시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는데도 무언의 그 검은 눈동자가 마치 말 이상의 강력한 최음제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이 순간 저 강렬한 눈빛을 피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수는 온 정신을 끌어 모아 간신히 이성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하려 시도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왜냐하면 그러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맨어깨를 가차 없이 낚아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흠칫, 몸이 떨렸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홱 틀었다. 당장 그 손 치우라는 매서운 눈빛을 던졌다.
다행히 상대가 싱긋 웃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손이 사라진 후에도 그 감촉은 그대로 남아 어깨 주변을 활활 태우는 것 같았다.
애써 당혹감을 감춘 채 지수는 몸을 돌려 정면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도전적인 암갈색 눈동자에는 대체 당신이 뭔데,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재미있습니까?”
“뭐라고요?”
“당신, 날 갖고 장난치는 게 꽤나 재미있는 것 같아서.”
웅장한 홀리데이 호텔의 대형 연회 룸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과 홀 중앙에 마련된 라운지에서 춤을 추는 커플들까지 한 해를 시작하는 신년 파티 분위기로 한층 고조된 상태였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 매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 자주 접하는 정부 고위층 인사에서부터 인기 영화배우, 연예인, 모델, 교수, 사업가 등 사회 각계에 걸쳐 다양했다.
지수는 투명한 샴페인 잔을 잡은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당연하지. 준비한 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얼굴 근육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녀였다.
긴 샴페인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깊게 들이켰다. 알싸한 맛이 식도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간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보니 알코올조차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민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지수의 두 눈은 줄곧 사진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 모습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찾았다!
지수는 절로 깊은 숨을 들이켰다.
마침 거의 동시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끌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젊은 여자였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붉은빛 레이스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연예계에서 꽤 알려진 스타급 여배우였다.
지수는 그 틈을 타 상대 남자를 더 은밀히 관찰했다.
사진을 통해 수없이 그려 왔던 이미지와 실제로 본 남자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었다. 하긴 사진 몇 장과 피상적인 정보만으로 강재헌의 모든 것을 보여 주긴 무리일 테니까.
어쨌든 그 많은 유명 인사 중 강재헌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MJ 제약의 부대표라는 직함과 비즈니스맨으로서의 화려한 이력만으로 충분히 이목을 끌면서도 그 사람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남성적 아우라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지금도 여자들이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낸 채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보일 정도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것은 다른 여자들과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긴장 때문이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할 뿐이다. 특별히 강재헌을 눈에 담자 그 긴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해졌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무슨 말인가 하자 아까의 그 여배우가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상체를 살짝 숙인 동작으로 인해 깊이 팬 풍만한 가슴 곡선이 반 이상 드러났다.
풋, 절로 쓴 미소가 번진다.
그 여자의 의도가 몇 미터 떨어진 지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의 몸으로 강재헌의 마음을 홀리는 것.
그 기회를 놓칠세라 여자의 가슴을 은밀히 훔쳐보는 주변 남자들과 달리, 여자의 표적이 된 재헌은 별 감흥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냉소적이면서도 시니컬한 표정이었다.
의외다. 저런 표정을 짓다니.
아니면 그 이상으로 고단수인 걸까?
어쩌면 단순한 미인계가 안 먹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직 강재헌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한 달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그러니 시작하기도 전에 겁먹고 뒷걸음쳐서는 안 되는 거다.
그래, 침착하자. 떨지 말자. 계획대로 하면 되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지수는 절로 숨을 훅 들이켰다.
돌연 재헌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찌릿, 강렬한 스파크처럼 두 사람의 눈이 허공 위에서 만났다.
방심하다 일격을 맞은 기분이 이럴까?
어찌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사로잡힌 그 강한 눈빛에 가엾은 심장이 제 기능을 못 한 채 미친 듯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그녀였다.
왜? 설마 내가 지금껏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걸까?
최대한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믿었건만…….
무심히 시선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무심코 마주친 눈빛이라기엔 부담스러울 만치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척추를 타고 가는 한기가 치달렸다.
보이지 않은 밧줄에 온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답답함이 밀려온다.
지수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생각을 해, 서지수, 제발!
간신히 숨을 들이켜며 하얗게 탈색된 머리를 움직이려 애를 썼다.
아까 그 여배우처럼 교태 어린 눈빛이나 미소는 금물이었다. 이미 강재헌이 어떤 타입인지 대충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그의 예상을 빗나가야 한다.
그래,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일수록 손쉽게 얻어지는 먹이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지수는 최대한 초연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만 그녀가 그러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외관상 그녀의 모습은 그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 무심해 보였다.
적시에 민호가 먹음직스러운 카나페 하나를 내밀었다. 살짝 입술을 벌려 한입 베어 물자 입 속에서 달콤한 향이 퍼진다. 자동적으로 떠오른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민호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다시 양심의 가책이 꿈틀거렸다.
아까부터 한껏 들뜬 착한 남자를 보자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호를 이용한 그녀이기에 부디 그가 그녀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긴장이 풀려 갔다.
이제 지수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재헌을 은밀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의도적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착각이 아니라면 언제부터인가 재헌 역시 그녀를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즉각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딘가 시니컬하면서도 호기심이 퍼진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긴장이 전신을 타고 거센 회오리를 일으키듯 점점 더 커져 갔다.
그 밤 내내 지수는 그 검은 눈을 똑똑히 의식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선 끝에 느껴지는 한 남자의 강렬한 눈빛에 급기야는 전세가 역전되어 오히려 그에게 감시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로써 강재헌의 관심을 끌기 위한 처음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일까?
그렇다, 라는 생각에 은근한 만족감이 들면서도 마음 깊은 곳은 그 이상으로 초조해져 갔다.
그녀는 다시 깊은 숨을 들이켰다.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이르다. 이 파티가 끝나기 전에 최소한 그와 가벼운 대화라도 나누면서 그녀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부추겨야 한다.
제 2라운드로 접어들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마침 민호가 시끄러운 소음을 피해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지수는 홀 끝으로 이동해 한적한 휴게실 입구에 세워진 대형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낯선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여자는 꾸미기 나름인 걸까?
세련된 화장 덕에 한층 커지고 깊어진 눈과 섬세한 윤곽이 더욱 또렷해졌다. 숱 많은 와인빛 머리칼은 우아하게 웨이브 져 가냘픈 맨어깨를 어루만지고, 우윳빛 고운 살결이 눈부신 은빛 드레스와 조화를 이루며 매혹적인 여성미를 한껏 드러냈다.
하루 대여비가 20만 원이나 하는 명품 드레스와 구두가 제값을 하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그나마 돈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저녁, 민호가 자신을 보았을 때의 충격과 감탄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긴 그녀의 눈에도 스스로가 이렇게 달라 보일 정도이니 지극히 소탈한 차림에 익숙한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한껏 쪼그라들었던 자존감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이젠 주변 남자들의 시선에도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민호의 파트너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그들의 세상 속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순간 막을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만일 저들이 내 실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주일에 5일을 고된 노동을 요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그나마 쉬는 주말마저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거나 짬짬이 시간을 내어 방송 대학에서 학업까지 병행하는 악바리.
그런 악착같은 지수에게 이런 화려한 파티는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과는 무관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민호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괜찮은 청년임에 분명했다.
그런 착한 남자를 이용하는 것에 다시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민호는 그녀가 오래전 시간제 근무로 일했던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매너 좋은 손님으로 기억에 남아 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면서 수줍은 고백을 했을 때 적잖이 당황한 지수였다. 스무 살의 순수했던 그때, 다른 누구보다 빨리 냉정한 현실과 마주했던 경험을 가진 지수였기에 더 이상 남녀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런 사소한 감정은 그녀의 현실 속에서 감정의 사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카페 동료를 통해 민호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되자 그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그는 카페 건너편의 대형 빌딩의 실소유자이자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벌가의 차남이었고 그녀와는 태생과 환경부터 다른 존재였다.
아주 잠깐, 그렇게 대단한 집안의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인 스타일이었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가 처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며 그의 관심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호는 그마저도 다 이해할 수 있다며 계속 구애를 이어 갔지만 지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신사답게 물러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 주었다.
그렇게 민호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 말,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 이번 계획과 관련해 장만옥 사장 내외와 두 번째 미팅을 가졌을 때 민호와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그녀와의 재회에 노골적인 기쁨을 드러냈고 그 이상으로 기뻐한 사람은 장 사장 내외였다. 이미 민호의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장 사장은 그녀가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번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일주일 전, 매년 대기업 인사나 유명인들만 참석한다는 이 호텔의 신년 파티에 MJ의 부대표, 강재헌도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는 어떻게든 민호를 꼬드겨 그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면서 그녀를 압박했다. 다행히 민호의 파트너로서 이 파티에 초대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절로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언제…….
지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였다.
어느새 강재헌이 그녀 뒤에 바싹 다가와 서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머스크 향이 주변 공기를 아련히 감싸 온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만났다.
강렬했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건만, 그 이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강한 눈빛이었다.
다시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는데도 무언의 그 검은 눈동자가 마치 말 이상의 강력한 최음제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이 순간 저 강렬한 눈빛을 피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수는 온 정신을 끌어 모아 간신히 이성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하려 시도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왜냐하면 그러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맨어깨를 가차 없이 낚아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흠칫, 몸이 떨렸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홱 틀었다. 당장 그 손 치우라는 매서운 눈빛을 던졌다.
다행히 상대가 싱긋 웃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손이 사라진 후에도 그 감촉은 그대로 남아 어깨 주변을 활활 태우는 것 같았다.
애써 당혹감을 감춘 채 지수는 몸을 돌려 정면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도전적인 암갈색 눈동자에는 대체 당신이 뭔데,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재미있습니까?”
“뭐라고요?”
“당신, 날 갖고 장난치는 게 꽤나 재미있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