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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한창 무르익은 파티.

아버지, 강서운 회장의 오랜 지인이 매년 주최하는 파티이기에 MJ 제약의 부대표로서 참석하긴 했지만 점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슬슬 따분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너무 냉소적인 건가. 아니면 나이가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이런 과시적인 대형 파티가 더욱 내키지 않는 것을 보면.

이곳에 초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그럴싸한 교양과 위선으로 치장한 사람들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가진 자에게 빌붙어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려 하는 하이에나 같은 속물들이 넘쳐나는 파티였다.

아무래도 적당한 때 빠져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막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훅, 저도 모르게 숨을 고른 재헌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이제 막 홀 안으로 들어서는 한 여자를 담고 있었다.

호기심 이상의 찌릿한 전류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처음이었다. 낯선 여자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길게 웨이브 진 와인빛의 머리칼이 후광처럼 빛나고 은빛 드레스로 감싼 굴곡진 몸매가 눈에 확 띄었다.

자동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에 귀티 나는 우아한 스타일이랄까.

도자기 장인이 곱게 빚은 것 같은 섬세한 이목구비 속에서 새끼 고양이 같은 암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구지?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바닥이 워낙 배타적이고 좁은 동네이다 보니 웬만한 집안 자제들과는 한 번쯤 얼굴을 마주쳐 눈에 익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연코 낯선 존재였다. 단 한 번이라도 봤다면 절대 쉽게 잊힐 평범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면 요즘 핫하게 떠오르는 신인 가수나 배우인가?

신인이라기에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적어도 스물넷, 다섯은 될 것 같았다.

재헌은 곧장 시선을 돌려 그녀의 동행을 살폈다.

파트너에게 가늘고 긴 샴페인 잔을 건네는 남자는 그가 아는 대경전자의 차남, 윤민호였다. 그의 기억 속에 윤민호는 재벌 3세 중 그나마 생각이 제대로 박힌 몇 안 되는 남자들 중 하나다.

이런 비중 있는 파티에 파트너로서 동행할 정도라면 둘 사이가 꽤나 친숙하다는 뜻?

그녀가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무슨 말인가 하며 화사하게 웃자 민호의 얼굴이 그대로 붉게 물들었다. 한눈에 딱 봐도 여자의 매력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애인인가?

울컥, 절로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거부감 이상의 거친 감정에 재헌은 스스로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반응을 일으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얼굴과 몸매만으로 친다면 그녀 이상으로 뛰어난 미인들이 이곳에는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 달랐다.

우선 분위기부터 다른 여자들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는 선의 몸매에 여성적인 느낌을 풍기면서도 아몬드형 눈매 속의 암갈색 눈이 도전적일 만큼 선명히 빛났다.

거기에 어딘가 당차 보이는 도도한 표정이라니…….

잠시 후 그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갔다.

그가 도도하다고 생각했던 그 표정 속에서 경직된 긴장과 불안을 읽은 탓이었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그시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그의 확신은 확고해졌다. 눈에 띄는 화려한 외관과 다르게 그녀는 마치 물에 뜬 기름처럼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아 헤매듯 홀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재헌은 절로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그녀가 어서 자신을 봐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재헌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하필 그때 리나가 그의 턱시도의 소맷단을 끌어당겼다.

자동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자 대한민국에서 요즘 꽤 잘나간다는 여배우, 채리나가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감탄할 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방금 본 그 여자의 비하면 어딘가 2프로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신 미모에 넋이라도 나갔나 보지.”

재헌의 영혼 없는 찬사에 리나가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배우에게로 쏠렸다. 그녀가 섹시하게 웃으면서 기대듯 상체를 살짝 숙이자 그의 위치에서 풍만한 가슴이 반쯤 보였다.

갑자기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이 여자의 뻔한 의도를 읽게 되자 같이 호응해 줄 마음마저 사라져 버렸다.

재헌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방금까지 머릿속을 지배했던 낯선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긴 공간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시선이 만났다.

재헌은 자동적으로 훅, 하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

몇 미터 떨어져 있어도 깜짝 놀란 새끼 고양이처럼 화들짝 커지는 눈매가 선명히 보였다.

순간 다리 안쪽으로 쏠리는 강한 기운에 절로 두 주먹을 쥐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분명히 그의 눈빛을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예의 바른 눈인사나 다정한 미소를 기대한 그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여자는 가뿐히 그를 무시해 버렸다. 마치 그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은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양. 그의 시선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울컥, 말도 안 되는 화가 치밀었다.

왜 이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녀를 돌려세우고 그 도도한 눈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충동이었지만 그것이 그 순간 그의 진심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매 순간 그 여자를 의식하며 그녀의 동작을 좇으며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그녀가 정교한 우연을 가장한 채 그의 주변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그의 시선만은 철저히 무시한 채로.

여느 여자들처럼 내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인가?

그래, 재헌은 그렇다고 확신했다.

서른세 해를 살아오면서 그가 여자에 대해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의 은밀한 몸짓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유혹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었지만 그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는 확실했다.

피식,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나름 노련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는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차라리 저럴 거면 직접 다가와 말이라도 거는 편이 낫지 않나?

한편으론 그 여자의 그런 힘겨운 노력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귀여워?

재헌은 내심 놀랐다.

지금까지 여자들의 저런 은밀한 유혹이 즐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강재헌이라는 인간 자체보다 그가 가진 부와 배경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 역시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실망해야 마땅했다. 아니, 평소처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한데 그의 육체는 그 반대로 그녀의 유혹을 기대하면서 벌써부터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한술 더 떠 민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마치 그녀와 단둘이 될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 한적한 휴게실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를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 속에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쿵! 세차게 울린 심장이 뻐근할 만큼 아프게 조여드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거울을 통해 바로 앞에서 마주한 여자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도자기 같은 피부 하며 숱 많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암갈색 동공이 정교한 선처럼 선명하게 빛나면서 시선을 빼앗는다. 무엇보다 깜짝 놀란 새끼 고양이처럼 휘둥그렇게 뜬 커다란 눈도 볼만했다.

그 이상의 충격과 경계와 긴장을 내포한 채.

그리고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는 적대감 역시 분명히 담겨 있었다.

적대감?

왜? 하는 호기심이 가장 먼저 일었다.

하지만 그가 그 호기심을 채우기도 전에 그녀가 또 그를 무시하며 시선을 외면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녀에게 무시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짜릿한 흥분이 퍼진다. 손바닥에 닿는 맨살의 아찔한 감각에 절로 숨이 차올랐다.

그녀가 흠칫. 몸을 굳히며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낯선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 아니, 평소의 그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대로 여자가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거칠게 몸을 비튼다. 매섭게 치켜뜬 고양이 같은 눈이 뜨거운 분노의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재헌은 훅, 깊은 숨을 삼켰다.

왜 그 모습이 그렇게 섹시해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 고개를 숙여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그 입술을 막고 맘껏 맛보고 싶은 충동에 두 주먹을 꼭 움켜쥐어야 했다.



* * *



맙소사, 지금 이 기분은 뭐지?

두려움? 아니면 흥분?

착각이 아니라면 재헌이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그녀의 입술이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숙여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뜨거운 눈빛.

쿵쾅쿵쾅, 지수의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단순히 그 강렬한 시선 안에 갇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입술이 바싹 말라 가는 걸까.

본능적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려 혀를 내밀자 칠흑 같은 검은 눈이 더 어둡게 물들었다.

오히려 그 강렬한 눈빛이 버거워 시선을 돌린 것은 지수였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괜찮다면 좀 비켜 주시죠?”

최대한 초연하게 말한다고 한 것이지만 가늘게 떨리는 음성은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상대는 입꼬리만 올릴 뿐 그녀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다시 초조해졌다.

그가 직접 다가왔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현실은 그 반대였다.

“날 갖고 장난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시 그의 입가에 노골적인 조롱이 번졌다. 곧이어 그녀의 몸을 천천히 훑어 내린다. 그녀를 자극하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무례한 눈빛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감히 어디서!

지수는 울컥,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방금까지의 긴장도 까맣게 잊은 채 상대 남자를 매섭게 마주 보았다. 그 정도의 냉소에 웬만한 남자라면 지레 무안해져 당장 고개를 돌려야 정상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 남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일 뿐.

오히려 더 깊은 흥미를 드러낸 채 부담스러우리만치 뚫어지게 응시하는 남자다.

“이 홀이 얼마나 클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건 왜 묻죠?”

“이 넓은 홀 안에서,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매번 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시야 속에 당신이 들어올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우연이라기엔 너무 심한 우연 아닐까요?”

지수는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최대한 노련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 남자의 눈에는 그게 다 보였나 보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그녀는 절대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알게 뭐예요? 모든 여자가 자신을 바라볼 거라고 착각하는 건 당신인데.”

그가 나직이 웃었다.

그녀의 속이 뻔히 보인다는 명백한 조소였다.

울컥 솟는 감정을 꾹 누르며 지수는 한층 차갑게 상대를 응시했다.

“설마 진심으로 당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믿는 건가요?”

“유혹? 설마 그런 겁니까?”

“정말 중증이시네. 누가 그런 말 안 하던가요?”

“아직까지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래요? 그럼 영광으로 아세요. 지금 그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까.”

그의 입에서 다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정말 웃겨서 웃는 것 같았다. 낮게 퍼지는 바리톤의 울림이 귓가를 부드럽게 감싸며 간질거렸다. 이 순간에도 흥미롭다는 듯이 물결치는 검은 눈동자가 선명히 보인다.

“본인이 꽤 재미있는 타입인 건 압니까?”

“미안하지만 난 개그우먼이 아니라서요. 이제 와 그럴 생각도 없고.”

단칼에 잘라 내는 차가운 말투에도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흥미를 드러냈다면 모를까. 예상대로 그녀의 무심한 반응이 이 남자의 관심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절대 의도적이 아닌, 그저 이 남자 앞에 서니 그렇게 되고 말았을 뿐이다.

어쩌면 무의식중의 본능이 아닐까? 이 위험한 남자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는?

“이름이 뭡니까?”

재헌이 또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