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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난 아무한테나 이름을 말하진 않아요.”

“아무한테나라……. 그런 모습이 내 관심을 끌 거라 생각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추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자뻑 수준인 거, 맞지?

“나이는?”

그녀가 무시하든 말든 그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나이는 또 왜요?”

“나보다 어려 보여서 말을 놓으면 어떨까 싶어서.”

하, 지금도 반은 반토막 말인데 아예 막가시겠다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또 나직이 웃었다.

강한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면서 얼굴 전체가 또 다른 인상을 풍긴다.

은근히 매력적이라고 해야 하나.

지수 역시 순간이지만 저도 모르게 멍하니 응시하고 말았다. 확실히 이 남자, 여자를 홀리게 하는 뭔가가 있긴 하다.

거기다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 하고 있었다. 마치 그럴수록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이.

고단수에 자의식 강하고 그 이상으로 건방진 남자.

그래서 더 조심하면서 정신 바싹 차리고 처음 계획대로 신중히 밀고 나가야 한다.

지수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다시 한 번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다.

“피곤하군요.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가는 자체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지수는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시도는 맥없이 끝났다. 또다시 이 남자의 손에 의해.

아까는 너무 깜짝 놀라 잘 몰랐는데 이번에는 맨살에 그의 온기가 선명히 느껴졌다.

움찔, 몸이 떨리면서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거부감인지 낯선 열기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당혹감 속에 잠겼다.

지수는 화끈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상체를 틀었다.

하지만 어깨를 잡은 남자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 치우시죠?”

“싫다면?”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요? 한 번은 참았지만 계속 이렇게 치근대면…….”

“해 볼 수 있으면 어디 해봐요. 나도 당신이 어디까지 할지 아주 기대가 되거든.”

하! 무슨 이런 건방진 자식이 다 있지?

그것은 노골적인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특별히 얄미운 표정이나 거만한 말투가 그녀의 신경을 제대로 자극했다.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못 참아.

지수는 이곳에 온 이유도 망각한 채 울컥, 그대로 맞받아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헌이 그 새를 놓치지 않고 태평한 표정으로 힐끗 주변을 눈짓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그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휴게실 한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체 그녀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강재헌과 저런 실랑이를 벌이나, 꽤나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기대하는 거든지?

특별히 그녀를 향한 여자들의 눈빛은 집요하리만치 매서웠다.

지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재헌을 대할 때와 달리 절대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저들의 눈에 난 어떻게 비칠까? 어느 재벌 집의 막무가내 막내딸 정도?

만일 지금 이 순간 강재헌과 맞짱을 뜨는 여자가 변변한 배경 하나 없는 천애 고아에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늦깎이 고학생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아마 저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특권이라도 생긴 양 그녀를 한껏 비웃으며 통쾌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입가에 쓴 미소가 퍼졌다.

안다. 자신이 아직도 찌질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구보다 세상의 냉정한 이치를 일찍 터득한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든든한 보호 없이 홀로 남은 힘없는 약자에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스물일곱 해의 인생 동안 톡톡히 경험하며 살아온 그녀이니까.

어쨌든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는 편이 좋았다. 괜한 소란을 일으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선 안 된다. 행여나 누군가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온라인상에 올리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었다.

하, 정체……라니.

풋, 다시 쓴 미소가 번진다.

무슨 첩보 미스터리물도 아니고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그녀는 삼류 복수극의 여주인공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고 이미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이상 벗어날 길은 없었다.

지수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남자의 손을 가볍게 밀어 냈다.

의외로 쉽게 떨어지는 손.

그는 얄밉게 눈썹만 찡긋 올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가기는 억울해서 한마디 쏘아 주려 했을 때였다.

“지수 씨? 여기서 뭐 해요?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한참을……, 아, 부대표님?”

그녀의 영원한 우방, 민호였다. 그가 놀란 얼굴로 지수에 이어 재헌을 보았다.

“지수? 그게 당신 이름인가?”

재헌이 민호를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보낸 후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주 귀한 정보를 얻어 낸 양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또다시 뭔가가 가슴 안에서 파파박, 불꽃을 일으켰다.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힘겹게 열을 세고 있는데 민호가 그녀 대신 말을 이었다.

“혹시나 지수 씨가 무슨 실례라도 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실례는 무슨. 우린 그저 가볍게 대화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안 그래요, 지수 씨?”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눈빛이었다.

그 역시 이 상황에 그녀가 그 이상은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특별히 감정적인 행동으로 파트너인 민호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무의미한 대화였어요. 이제 그만 가요, 민호 씨.”

“아, 그럴까요? 부대표님, 그럼 전 나중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민호가 양해와 함께 막 몸을 틀려 했을 때였다.

그보다 한발 앞서 재헌이 지수의 허리를 가볍게 낚아챘다.

꺅, 하는 가는 비명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잃은 지수가 비틀거리자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옆으로 더 바싹 끌어당기는 남자다.

민호, 지수를 비롯해 은밀히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안, 민호 씨. 우린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어서. 아름다운 파트너는 잠시만 빌리는 걸로 합시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민호가 곧장 손을 뻗었지만 재헌은 이미 몸을 돌린 채 무대 쪽으로 걸음을 뗀 후였다.

너무 순식간에 태풍처럼 일어난 일이기에 반쯤 정신이 나간 건 민호뿐만이 아니었다.

지수는 어느새 재헌과 함께 무대 근처까지 와 있었다.

이를 앙다물며 그의 손을 홱 밀어 냈다. 허리에 닿았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미쳤어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날 먼저 자극한 건 그쪽 아닌가?”

“뭐라고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거든.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맙시다. 지금도 충분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상태거든. 그러니 웃어요. 그렇게 죽일 듯 노려보지 말고.”

그 말과 함께 뻔뻔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는 재헌이다.

말 그대로 스치듯 닿은 하체로 인해 몸이 절로 반응했다.

그녀는 훅, 숨을 삼키며 곧장 공간을 두었다.

“그 손 놓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자극하겠다면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 못 해요.”

무슨 일? 설마 키스라도 하시겠다고?

그녀의 불신 가득한 눈빛에 그가 정면으로 마주했다.

한껏 뜨거운 눈빛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헐, 설마!

아니, 그는 진심이었다. 이번에도 자극하면 당장 실행에 옮기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으로 어떤 파장이 일지 뻔히 알면서?

그리고 그 노골적인 암시는 그녀의 저항을 막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붉은빛의 가는 저 입술이 닿는다는 상상만으로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그녀의 속내를 그대로 읽은 것인지 재헌이 또 얄밉게 웃었다.

드르륵, 이가 저절로 갈린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를 이렇게 화나게 한 사람은 강재헌,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하필 그때 어떤 커플 두 쌍이 그녀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고 그 여파에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노련한 재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맥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여자로서 168이 결코 작은 신장이 아니건만 그와 마주하자 난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한술 더 떠 달콤한 블루스 리듬에 맞춰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시선이 꿋꿋이 정면을 향하는 동안 강인한 목과 톡 불거져 나온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 살짝 시선을 올린 것이 실수였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정교한 선의 붉은 입술이었다.

이젠 아예 숨이 꽉 막혀 온다.

방금 전의 키스 암시 때문일까?

저 입술이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던 차에 볼 주변에 닿은 상대의 가는 숨결에 지수는 화들짝 얼굴을 돌렸다.

헉,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

순식간에 퍼지는 열기에 당혹감을 느낀 것은 지수였다. 마치 좁은 우리 안에 갇힌 동물처럼 미치게 초조해지면서 무의식중에 입술을 말아 깨물기 시작했다.

“당신한테서 좋은 향이 나는군. 무슨 향수를 쓰는 거지?”

“샴푸 향이거든요!”

미칠 것 같은 상황에 저도 모르게 발끈 터져 나온 말이었다.

재헌이 얄밉게 또 쿡쿡 웃더니 살짝 몸을 떼어 그녀를 더 여유롭게 내려다본다.

“정말? 난 원래 피부 향이 이렇게 달콤한가 했지.”

하, 이 남자 정말! 고단수의 바람둥이, 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더 초조한 걸까?

이미 이 남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아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상황을 이끄는 것은 그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마주한 순간부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수는 가까스로 이 파티에 참석한 목적을 상기했다.

강재헌의 관심을 끌어 유혹하는 것.

진정해, 서지수. 그렇게 최악은 아니야. 물론 원래 계획에서 많이 틀어진 건 확실하지만 일단 그의 관심은 끌었잖아? 이렇게 단둘이 춤까지 추면서.

어떻게 보면 첫 만남의 첫 단계 치곤 꽤 성과가 컸다.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 드러내 저절로 찾아온 기회를 날려서는 안 된다.

“갑자기 조용해졌군.”

그 말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든 지수는 단번에 그의 시선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다시 숨이 탁, 막히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왜 장 사장의 말을 수락해 이런 짓을 시작했는지…….

지금은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도망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당신이 원했던 거잖아요. 더 이상 사람의 이목을 끌지 않기.”

“내가 원하는 거라…… 갑자기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궁금해지는군.”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거든요!”

“원래 그렇게 직선적인가?”

“그쪽도 만만치 않아요. 거기에 무례하기까지 하죠.”

“그거야 당신 때문이지. 난 무시당하는 것은 참지 못하거든.”

“하, 이 정도에? 세상에는 무시당해도 꾹 참고 말도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재헌의 검은 눈썹이 사선을 그렸다. 그녀가 어떤 뜻으로 말했든 의외라는 듯이.

“이 사회에 불만이 꽤나 많은 얼굴이군, 보기와 다르게.”

보기와 다르게……?

그가 덧붙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외관만을 보며 판단한 이 어리석은 남자가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몇 번인가 경험했던, 좀 가졌다 하는 자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으로 가득 차 있는지 열변이라도 토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역시나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이곳에 온 이유와 어떻게 강재헌을 유혹해야 하는지.

하지만 유연한 리듬에 맞춰 그녀를 리드하는 남자를 의식하는 동안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얇은 천 아래 스치듯 닿는 단단한 남자의 몸과 허리에 놓인 강인한 손이 전신을 거미줄처럼 칭칭 감는 것만 같았다.

지수는 생전 처음 느끼는 이 낯선 긴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폐쇄 공포증처럼 점점 숨이 막혀 왔다.

당장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를 밀어 내려는 순간, 이번에도 재헌이 더 빨랐다.

“사람들이 계속 모여드는군. 잠시 시원한 공기라도 쐴까?”

그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더니 홀에서 연결된 야외 테라스로 이끄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