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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두 사람이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지수는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끌리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커다란 손안에 꽉 잠겨 있는 자신의 작은 손을 미치게 의식하면서.
철컥, 홀 안의 소음을 차단하는 방음 유리문이 닫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대로 온몸을 휘감았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은은한 불빛이 비추는 테라스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다행이 그녀를 잡았던 손도 순순히 떨어졌다. 절로 안도감이 밀려온다.
답답했던 몸과 마음이 강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절로 부르르 떨려 왔다. 자동적으로 두 손을 엇갈려 상체를 감싸려는데 뜻밖에 따뜻한 온기가 어깨를 덮었다.
지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어깨를 덮은 상의에 이어 바로 옆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추워 보이기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파드닥, 또다시 뭔가가 가슴 안에서 요동쳤다.
이런 뜻밖의 친절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이 남자에게서.
옷깃에서 전해지는 이 남자만의 은은한 머스크 향을 감지하자 더 당황스러웠다.
지수가 곧장 벗으려 하자 그가 여지없이 손을 밀어 내며 더 단단히 여며 주었다.
“호의를 모른 척 받아들이는 것도 숙녀의 예의야.”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는 표정이 엄격하기까지 하다.
숙녀?
책에서만 들었던 그 단어를 현실에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이 남자, 자신을 신사라고 자부하는 건 아니겠지?
“날 여기로 데리고 나온 의도가 뭐죠?”
“의도라니,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처음부터 내 의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건 그쪽이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건 무리죠.”
“물론 내가 좀 지나쳤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당신도 한몫하지 않았나? 만일 당신이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내 행동도 많이 달라졌을 거야.”
“만일? 이미 다 해 놓고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죠?”
그가 또 나직이 웃었다.
“그렇기도 하군. 이미 다 해 놓은 마당에.”
“게다가 은근슬쩍 말까지 놓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이제부터 자주 볼 사이인데 괜한 격식은 더 웃기지 않겠어?”
“하, 누구 맘대로…….”
발끈,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재헌이 경고하는 눈빛을 던졌다.
“방금 말했을 텐데, 계속 그렇게 나올수록 내 안의 투지만 자극할 뿐이라고. 나도 이제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어.”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괜히 건드리고 후회하지 말라는.
울컥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가 또 나직이 웃었다.
저렇게 사람 속을 뒤집으면서 나한텐 가만히 참으라고? 나쁜 자식!
“좋아요, 내가 참죠. 천성이 원래 그런 남자한테 일일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천성?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뜨끔,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지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알아야 하나요?”
“나야 모르지. 당신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아니면 정말 뭔가 알고 싶은가?”
“관심 없어요.”
“마음에 들어.”
“뭐라고요?”
“당신. 마음에 든다고.”
지수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장 사장을 통해 전해 들었던 대로 천성이 바람둥이라는 것은 그의 말투와 표정, 행동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만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된 상태에서 저런 노골적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정말 무례한 사람이군요. 난 함께 온 파트너가 있어요. 당신도 잘 아는 윤민호 씨! 최소한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켜 줘야 하지 않나요?”
그녀의 음성은 뜨거운 물이라도 얼릴 수 있을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한쪽 눈썹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애인인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죠.”
“미안해서 어쩌지? 이 시간부로는 상관할 일이 될 것 같거든. 특별히 남의 애인을 빼앗는 파렴치한은 되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다시 묻지. 윤민호가 애인?”
“그렇다면 신사답게 물러나겠어요?”
“그렇다면 신사답게 결투를 청해야겠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 지수였다.
이 남자와 말씨름해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
한데 말이 없다. 벌써 열 마디라도 날아왔어야 정상인데 갑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의아해서 무심코 시선을 든 지수는 저도 모르게 훅,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한 남자의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입술이었다.
다시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긴장의 기류가 다시 온몸을 타고 발끝까지 흐른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 제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더니 가는 목을 감쌌다.
헉,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냉기로 차갑게 식은 볼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마치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 대체 무슨……?
그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눈으로 보면서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을 듯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수는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절로 침을 꿀꺽 삼키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가온 것은 키스가 아닌,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나만큼이나 키스를 원하는 표정이군.”
화끈,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 자동적으로 남자의 뺨을 올려붙였다.
찰싹!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고요한 테라스에 날 선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누구보다 폭력을 혐오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두려움. 다른 사람도 아닌 강재헌의 뺨을 때리다니……, 차마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말 도통 거침이 없군.”
분노가 깔린 나직한 어조에 지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굳은 얼굴과 왼뺨에 선명히 드러난 자국이 보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 다시 할 말을 잃게 된다.
당장 유혹해도 모자랄 판에 아예 그녀의 손으로 일을 망치고 있다니.
발 근처에 턱시도 상의가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수는 떨리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며 남자의 강렬한 눈빛을 외면했다.
“당신이 시작한 일이니 난 사과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수습하기도 힘들어 그냥 뻔뻔스럽게 나가기로 한 그녀였다.
“그럼 처음부터 그런 눈빛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런 눈빛?”
“의도적으로 날 자극하는 눈빛.”
그의 뜬금없는 주장이 어이가 없었지만 재헌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부인할 생각 말아요. 난 그렇게 무디지 않거든. 그동안 그런 식의 여자들 유혹은 숱하게 봐 와서 말이야.”
“아하!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리죠. 당신의 그 잘난 통찰력을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난 한 번도 당신을 유혹하려 한 적 없어요!”
최소한 아직까지는.
키스를 시도할 만큼 그런 대범한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재헌의 시선이 더 강하게 옭아매었고 그녀는 간신히 버텨 냈다.
“왜 그렇게 공격적이지?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그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단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절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럼 뭐지? 나의 무엇이 당신을 거슬리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정말 몰라서 물어요?”
검은 눈동자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서늘한 눈은 어서 대답을 하라고 다그치듯 매섭게 빛났다.
“당신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 거만한 태도부터 무례한 행동까지.”
“…….”
“자, 이제 답이 되었다면 난 그만 내 파트너에게로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몸을 홱 돌려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명령이 담긴 나직한 어조였다.
그녀는 억지로 걸음을 멈춘 채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또 뭐죠?”
“당신 말이야. 이상하게 내 호기심을 자극해. 그래서 말인데…… 한번 해 보기로 했어.”
“해 보다니 뭘요?”
“당신이 던진 유혹. 한번 받아들여 볼까…… 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난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굽히지 않는 타입이라서.”
“내가 말했던가요? 난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 타입이죠.”
“그래? 그럼 더 흥미로워지겠는데. 어디 누가 이기는지 말이야.”
그의 조롱 섞인 농담에 그녀가 자동적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중에 지고 나서 괜히 자존심 상한다고 치졸한 모습이나 보이지 마시죠.”
지수는 매서운 표정으로 일침을 쏜 후 곧장 유리문을 열었다.
홀 안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귓가를 맴도는 재헌의 나직한 웃음소리였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지수는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끌리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커다란 손안에 꽉 잠겨 있는 자신의 작은 손을 미치게 의식하면서.
철컥, 홀 안의 소음을 차단하는 방음 유리문이 닫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대로 온몸을 휘감았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은은한 불빛이 비추는 테라스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다행이 그녀를 잡았던 손도 순순히 떨어졌다. 절로 안도감이 밀려온다.
답답했던 몸과 마음이 강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절로 부르르 떨려 왔다. 자동적으로 두 손을 엇갈려 상체를 감싸려는데 뜻밖에 따뜻한 온기가 어깨를 덮었다.
지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어깨를 덮은 상의에 이어 바로 옆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추워 보이기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파드닥, 또다시 뭔가가 가슴 안에서 요동쳤다.
이런 뜻밖의 친절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이 남자에게서.
옷깃에서 전해지는 이 남자만의 은은한 머스크 향을 감지하자 더 당황스러웠다.
지수가 곧장 벗으려 하자 그가 여지없이 손을 밀어 내며 더 단단히 여며 주었다.
“호의를 모른 척 받아들이는 것도 숙녀의 예의야.”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는 표정이 엄격하기까지 하다.
숙녀?
책에서만 들었던 그 단어를 현실에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이 남자, 자신을 신사라고 자부하는 건 아니겠지?
“날 여기로 데리고 나온 의도가 뭐죠?”
“의도라니,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처음부터 내 의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건 그쪽이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건 무리죠.”
“물론 내가 좀 지나쳤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당신도 한몫하지 않았나? 만일 당신이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내 행동도 많이 달라졌을 거야.”
“만일? 이미 다 해 놓고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죠?”
그가 또 나직이 웃었다.
“그렇기도 하군. 이미 다 해 놓은 마당에.”
“게다가 은근슬쩍 말까지 놓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이제부터 자주 볼 사이인데 괜한 격식은 더 웃기지 않겠어?”
“하, 누구 맘대로…….”
발끈,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재헌이 경고하는 눈빛을 던졌다.
“방금 말했을 텐데, 계속 그렇게 나올수록 내 안의 투지만 자극할 뿐이라고. 나도 이제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어.”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괜히 건드리고 후회하지 말라는.
울컥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가 또 나직이 웃었다.
저렇게 사람 속을 뒤집으면서 나한텐 가만히 참으라고? 나쁜 자식!
“좋아요, 내가 참죠. 천성이 원래 그런 남자한테 일일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천성?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뜨끔,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지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알아야 하나요?”
“나야 모르지. 당신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아니면 정말 뭔가 알고 싶은가?”
“관심 없어요.”
“마음에 들어.”
“뭐라고요?”
“당신. 마음에 든다고.”
지수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장 사장을 통해 전해 들었던 대로 천성이 바람둥이라는 것은 그의 말투와 표정, 행동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만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된 상태에서 저런 노골적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정말 무례한 사람이군요. 난 함께 온 파트너가 있어요. 당신도 잘 아는 윤민호 씨! 최소한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켜 줘야 하지 않나요?”
그녀의 음성은 뜨거운 물이라도 얼릴 수 있을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한쪽 눈썹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애인인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죠.”
“미안해서 어쩌지? 이 시간부로는 상관할 일이 될 것 같거든. 특별히 남의 애인을 빼앗는 파렴치한은 되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다시 묻지. 윤민호가 애인?”
“그렇다면 신사답게 물러나겠어요?”
“그렇다면 신사답게 결투를 청해야겠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 지수였다.
이 남자와 말씨름해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
한데 말이 없다. 벌써 열 마디라도 날아왔어야 정상인데 갑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의아해서 무심코 시선을 든 지수는 저도 모르게 훅,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한 남자의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입술이었다.
다시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긴장의 기류가 다시 온몸을 타고 발끝까지 흐른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 제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더니 가는 목을 감쌌다.
헉,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냉기로 차갑게 식은 볼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마치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 대체 무슨……?
그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눈으로 보면서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을 듯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수는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절로 침을 꿀꺽 삼키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가온 것은 키스가 아닌,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나만큼이나 키스를 원하는 표정이군.”
화끈,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 자동적으로 남자의 뺨을 올려붙였다.
찰싹!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고요한 테라스에 날 선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누구보다 폭력을 혐오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두려움. 다른 사람도 아닌 강재헌의 뺨을 때리다니……, 차마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말 도통 거침이 없군.”
분노가 깔린 나직한 어조에 지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굳은 얼굴과 왼뺨에 선명히 드러난 자국이 보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 다시 할 말을 잃게 된다.
당장 유혹해도 모자랄 판에 아예 그녀의 손으로 일을 망치고 있다니.
발 근처에 턱시도 상의가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수는 떨리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며 남자의 강렬한 눈빛을 외면했다.
“당신이 시작한 일이니 난 사과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수습하기도 힘들어 그냥 뻔뻔스럽게 나가기로 한 그녀였다.
“그럼 처음부터 그런 눈빛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런 눈빛?”
“의도적으로 날 자극하는 눈빛.”
그의 뜬금없는 주장이 어이가 없었지만 재헌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부인할 생각 말아요. 난 그렇게 무디지 않거든. 그동안 그런 식의 여자들 유혹은 숱하게 봐 와서 말이야.”
“아하!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리죠. 당신의 그 잘난 통찰력을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난 한 번도 당신을 유혹하려 한 적 없어요!”
최소한 아직까지는.
키스를 시도할 만큼 그런 대범한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재헌의 시선이 더 강하게 옭아매었고 그녀는 간신히 버텨 냈다.
“왜 그렇게 공격적이지?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그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단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절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럼 뭐지? 나의 무엇이 당신을 거슬리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정말 몰라서 물어요?”
검은 눈동자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서늘한 눈은 어서 대답을 하라고 다그치듯 매섭게 빛났다.
“당신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 거만한 태도부터 무례한 행동까지.”
“…….”
“자, 이제 답이 되었다면 난 그만 내 파트너에게로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몸을 홱 돌려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명령이 담긴 나직한 어조였다.
그녀는 억지로 걸음을 멈춘 채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또 뭐죠?”
“당신 말이야. 이상하게 내 호기심을 자극해. 그래서 말인데…… 한번 해 보기로 했어.”
“해 보다니 뭘요?”
“당신이 던진 유혹. 한번 받아들여 볼까…… 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난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굽히지 않는 타입이라서.”
“내가 말했던가요? 난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 타입이죠.”
“그래? 그럼 더 흥미로워지겠는데. 어디 누가 이기는지 말이야.”
그의 조롱 섞인 농담에 그녀가 자동적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중에 지고 나서 괜히 자존심 상한다고 치졸한 모습이나 보이지 마시죠.”
지수는 매서운 표정으로 일침을 쏜 후 곧장 유리문을 열었다.
홀 안으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귓가를 맴도는 재헌의 나직한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