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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 쪽팔려. 미친 거야, 그래, 미친 거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키스할 거라고 착각하질 않나, 한술 더 떠 따귀까지 때릴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심하다 허점을 찔린 기분. 아니, 유혹하려다 오히려 유혹을 당한 낭패스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아찔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할 뻔했는지, 미친 듯 흥분한 나머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회를 내동댕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다 차려 놓은 밥상을 걷어찰 뻔한 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나만의 잘못일까?
당연하지. 그럼 누구를 탓하겠어?
뜻밖의 변수, 그가 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래, 그 말도 꼭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말과 눈빛만으로 그녀를 이렇게 자극하는 남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서로의 마찰 속에 거친 불꽃을 일으키는 메탈처럼 그녀는 매순간 그의 존재에 발끈해 버렸다.
무엇보다 평소 차가운 표정 한 번이면 깔끔히 해결되었던 남녀 관계가 유독 재헌에게만은 통하지 않기에 더 속이 바싹 타들어 간 것이 사실이었다.
그 말은 연애에 관한 한 그가 그만큼 고수라는 뜻이었다.
바싹 다가왔던 붉은 입술이 떠오르자 다시 목 끝이 따끔거리며 손바닥이 젖어든다.
그가 정말 키스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지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뜨거운 볼을 감싸 쥔 채 깊은 숨을 들이켰다.
쓸데없는 생각은 밀어내고 어떻게든 현실을 직시하려고 애를 썼다.
괜찮아. 그렇게 최악은 아니야. 어쨌든 그는 여전히 내게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까. 그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내 유혹을 받아들이겠다고. 자신은 한번 결정하면 절대 굽히지 않는 타입이라고. 그 말이 진심이라면…….
물론 진심일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도전장을 던진 셈이었다.
그녀의 날 선 반응이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기쁨보다는 이렇게 초조해지는 거지?
마치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작정하고 다가온다면 과연 자신에게 막을 힘이 있기나 할지 두려워서?
또 시작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쫄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이미 각오한 일이잖아. 그가 어떻게 나오든 계획대로 하면 되는 거야. 이미 대가를 받았고 더 이상 도망칠 길은 없어. 그래,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것만 생각해야 해.
우선은 그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면서.
그가 기대 이상으로 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심리와 상황을 파악해 그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 한다. 그를 확실히 유혹하기로 작정한 이상 키스 시도 한 번에 그렇게 당황한 채 수줍은 십 대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숱하게 해 온 것처럼 강재헌이라는 남자를 은밀하게 유혹해야 한다, 기필코!
* * *
활기찬 홀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가 다가왔다.
잠시 두 사람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굳이 말은 안 했지만 민호는 막강한 강재헌의 돌발 행동과 지수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다시 양심의 가책이 꿈틀거린다. 결국 그녀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 그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미안함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더욱 다정한 행동으로 그의 상처 난 자존심을 달래 주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민호는 곧 재헌의 존재를 잊었고 지수는 그 밤 내내 그의 옆에서 완벽한 파트너 역할을 완수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는 재헌의 강렬한 시선을 온몸으로 의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
* * *
연회 룸 안으로 돌아와 재헌은 가장 먼저 지수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았다.
예상대로 민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금세 짜증이 밀려왔다. 거기에 재헌의 심장까지 건드리는 달콤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울컥 화가 치민다. 자신과 함께한 내내 미소는커녕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던 여자였다.
지수가 민호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향해 환한 미소로 물들 때마다 속이 답답해지면서 누군가 자신의 것을 건드린 것같이 거슬리는 기분이 든다. 제가 점점 유치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착하게 굴어야 하지만 두 사람을 당장 떼어 놓고 싶은 충동은 그 이상으로 강했다.
대체 저 여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녀가 뭐라고, 생판 처음 보는 여자에게 느끼는 이 소유욕은 또 어떻고? 뻔히 파트너까지 있는 여자를.
정신이 나간 것이다. 싫을 티를 팍팍 내는 여자에게 억지로 자신을 들이대는 강재헌이라니…….
거기에 한 술 더 떠 무리한 도박까지 하고 만 그였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그녀의 지나친 거부감에 대한 반동인가?
물론 첫눈에 그녀에게 끌린 것은 재헌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뒤로 그를 향해 유혹하듯 은근히 다가온 것이 그녀라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 뚝 떼며 앙증맞은 표정을 짓는 여자다.
그래, 뭔가 있다.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그녀에게는 비밀스런 뭔가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지만 도전적인 암갈색 눈동자에서 본 그 빛은 분명 적대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수라는 여자를 알고 싶은 호기심은 더 강해졌다.
그는 즉각 홀 한편에 대기 중인 윤 비서를 불렀다. 윤민호의 파트너인 지수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하자 그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스친다. 하긴 매사 냉정한 상사로 통하는 그가 이런 사적인 조사를 시킨 것이 처음이니 그의 반응을 뭐라 할 수 없었다.
반 시간 정도 지났을까, 윤 비서가 관련 내용을 알아왔다.
예상대로 밤 10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서지수, 27세, 고아, 미혼, 옥수동 전철역 근처 R 빌라, ○○인쇄소 근무.
고아에 ○○인쇄소 근무?
재헌의 매끈한 미간이 좁혀졌다.
명문가 외동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귀티가 잘잘 흐르는 세련된 외관과 그가 손에 넣은 정보는 어딘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명품 드레스가 가짜가 아니라면 말이다.
뭐지? 결국 예쁜 얼굴과 잘빠진 몸매 하나만 믿고 돈 많은 남자를 노리는 꽃뱀인 건가?
절대!
그는 곧장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의 눈, 영민한 자아로 반짝이는 암갈색 눈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 눈은 결코 가진 자에게 구걸하는 나약한 속물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당당히 맞서는 당찬 눈빛이라면 모를까.
이제 그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억누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정이 되기 전, 재헌은 리나와 함께 먼저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니, 이 밤이 가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지수가 어떤 여자인지, 더 늦기 전에 그 실체를 두 눈으로 꼭 확인해야 했다.
* * *
재헌이 떠났다. 그것도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 잘난 여배우와 함께.
그 밤 내내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던 주제에 결국 그것이 그가 말한 관심의 전부였던 것이다.
실망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휘저었다.
이제 저 두 사람은 곧장 호텔로 향할 테지?
그녀에게 보여 줬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잠자리에서도 꽤나 마초적일 것 같았다.
마……초적?
하, 또 엉뚱한 상상을 하는 자신이다.
대체 그가 딴 여자랑 사라졌다고 왜 실망을 하는 건데? 강재헌이 어떤 남자인지 벌써 잊었어? 그에게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장서영에게 어떤 짓을 하고 떠났는지 잊었냐고. 그는 여자를 헌 신 바꾸듯 미련 없이 갈아 치우는 최악의 바람둥이야!
그런 남자에게 대체 뭘 기대한 것인지, 몇 시간 동안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탓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재헌이 사라지자 지수가 그곳에 더 머물 이유도 없어졌다.
한순간에 풀려 버린 긴장에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민호도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고맙게도 그만 집에 가겠냐고 물었고 두 사람은 한껏 고조된 파티 분위기를 뒤로한 채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나섰다.
* * *
윤기 흐르는 검은 세단이 허름한 건물 한편에 멈춰 섰다.
재헌의 전담 운전기사, 김 대리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이곳이 정말 맞느냐고 물었다.
재헌 역시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눈에 딱 봐도 오래된 빌라 건물들이 밀집된 그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파티에서 보여 주었던 그녀의 세련된 모습과는 확실히 언밸런스했다.
재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후 다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윤 비서를 통해 지수와 민호가 호텔을 나와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는 혼자 내기를 했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일까? 오늘 밤 함께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낼까?
아니, 그녀는 혼자 내릴 것이다. 물론 민호가 애인일 리 없다.
만일 애인이었다면 이곳으로 오는 대신 호텔이나 민호의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왜 그런 확신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확신은 더 굳어졌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코발트색 고급 스포츠카가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짜릿한 흥분과 함께 전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재헌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은 아직도 차 안에 있는 상태였다. 어둠에 잠긴 거리 한편에서 가로등 불빛에 비추인 민호와 지수의 실루엣이 보였다.
왜 당장 내리지 않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 건가?
갑자기 초조해졌다.
울컥 치미는 짜증과 이유 없는 갈증에 재헌은 곧장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지수 씨, 집에 도착했어요.”
고요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지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나 봐요.”
“그러게 많이 피곤했나 봐요.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고.”
지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민호가 괜한 말을 꺼낼까 싶어 일부러 잠든 척하다 진짜 잠이 든 그녀였다.
“요즘 계속 무리를 했거든요.”
차창 너머의 눈에 익은 거리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한결 안정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난 좋았어요. 덕분에 잠자는 미녀를 실컷 볼 수 있어서.”
헐, 웬 닭살, 하며 고개를 든 것과 동시에 은근한 기대가 담긴 민호의 표정을 읽어 버린 지수였다.
아, 쪽팔려. 미친 거야, 그래, 미친 거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키스할 거라고 착각하질 않나, 한술 더 떠 따귀까지 때릴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심하다 허점을 찔린 기분. 아니, 유혹하려다 오히려 유혹을 당한 낭패스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아찔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할 뻔했는지, 미친 듯 흥분한 나머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회를 내동댕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다 차려 놓은 밥상을 걷어찰 뻔한 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나만의 잘못일까?
당연하지. 그럼 누구를 탓하겠어?
뜻밖의 변수, 그가 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래, 그 말도 꼭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말과 눈빛만으로 그녀를 이렇게 자극하는 남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서로의 마찰 속에 거친 불꽃을 일으키는 메탈처럼 그녀는 매순간 그의 존재에 발끈해 버렸다.
무엇보다 평소 차가운 표정 한 번이면 깔끔히 해결되었던 남녀 관계가 유독 재헌에게만은 통하지 않기에 더 속이 바싹 타들어 간 것이 사실이었다.
그 말은 연애에 관한 한 그가 그만큼 고수라는 뜻이었다.
바싹 다가왔던 붉은 입술이 떠오르자 다시 목 끝이 따끔거리며 손바닥이 젖어든다.
그가 정말 키스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지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뜨거운 볼을 감싸 쥔 채 깊은 숨을 들이켰다.
쓸데없는 생각은 밀어내고 어떻게든 현실을 직시하려고 애를 썼다.
괜찮아. 그렇게 최악은 아니야. 어쨌든 그는 여전히 내게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까. 그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내 유혹을 받아들이겠다고. 자신은 한번 결정하면 절대 굽히지 않는 타입이라고. 그 말이 진심이라면…….
물론 진심일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도전장을 던진 셈이었다.
그녀의 날 선 반응이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기쁨보다는 이렇게 초조해지는 거지?
마치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작정하고 다가온다면 과연 자신에게 막을 힘이 있기나 할지 두려워서?
또 시작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쫄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이미 각오한 일이잖아. 그가 어떻게 나오든 계획대로 하면 되는 거야. 이미 대가를 받았고 더 이상 도망칠 길은 없어. 그래,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것만 생각해야 해.
우선은 그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면서.
그가 기대 이상으로 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심리와 상황을 파악해 그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 한다. 그를 확실히 유혹하기로 작정한 이상 키스 시도 한 번에 그렇게 당황한 채 수줍은 십 대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숱하게 해 온 것처럼 강재헌이라는 남자를 은밀하게 유혹해야 한다, 기필코!
* * *
활기찬 홀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가 다가왔다.
잠시 두 사람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굳이 말은 안 했지만 민호는 막강한 강재헌의 돌발 행동과 지수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다시 양심의 가책이 꿈틀거린다. 결국 그녀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 그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미안함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더욱 다정한 행동으로 그의 상처 난 자존심을 달래 주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민호는 곧 재헌의 존재를 잊었고 지수는 그 밤 내내 그의 옆에서 완벽한 파트너 역할을 완수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는 재헌의 강렬한 시선을 온몸으로 의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
* * *
연회 룸 안으로 돌아와 재헌은 가장 먼저 지수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았다.
예상대로 민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금세 짜증이 밀려왔다. 거기에 재헌의 심장까지 건드리는 달콤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울컥 화가 치민다. 자신과 함께한 내내 미소는커녕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던 여자였다.
지수가 민호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향해 환한 미소로 물들 때마다 속이 답답해지면서 누군가 자신의 것을 건드린 것같이 거슬리는 기분이 든다. 제가 점점 유치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착하게 굴어야 하지만 두 사람을 당장 떼어 놓고 싶은 충동은 그 이상으로 강했다.
대체 저 여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녀가 뭐라고, 생판 처음 보는 여자에게 느끼는 이 소유욕은 또 어떻고? 뻔히 파트너까지 있는 여자를.
정신이 나간 것이다. 싫을 티를 팍팍 내는 여자에게 억지로 자신을 들이대는 강재헌이라니…….
거기에 한 술 더 떠 무리한 도박까지 하고 만 그였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그녀의 지나친 거부감에 대한 반동인가?
물론 첫눈에 그녀에게 끌린 것은 재헌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뒤로 그를 향해 유혹하듯 은근히 다가온 것이 그녀라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 뚝 떼며 앙증맞은 표정을 짓는 여자다.
그래, 뭔가 있다.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그녀에게는 비밀스런 뭔가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지만 도전적인 암갈색 눈동자에서 본 그 빛은 분명 적대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수라는 여자를 알고 싶은 호기심은 더 강해졌다.
그는 즉각 홀 한편에 대기 중인 윤 비서를 불렀다. 윤민호의 파트너인 지수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하자 그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스친다. 하긴 매사 냉정한 상사로 통하는 그가 이런 사적인 조사를 시킨 것이 처음이니 그의 반응을 뭐라 할 수 없었다.
반 시간 정도 지났을까, 윤 비서가 관련 내용을 알아왔다.
예상대로 밤 10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서지수, 27세, 고아, 미혼, 옥수동 전철역 근처 R 빌라, ○○인쇄소 근무.
고아에 ○○인쇄소 근무?
재헌의 매끈한 미간이 좁혀졌다.
명문가 외동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귀티가 잘잘 흐르는 세련된 외관과 그가 손에 넣은 정보는 어딘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명품 드레스가 가짜가 아니라면 말이다.
뭐지? 결국 예쁜 얼굴과 잘빠진 몸매 하나만 믿고 돈 많은 남자를 노리는 꽃뱀인 건가?
절대!
그는 곧장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의 눈, 영민한 자아로 반짝이는 암갈색 눈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 눈은 결코 가진 자에게 구걸하는 나약한 속물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당당히 맞서는 당찬 눈빛이라면 모를까.
이제 그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억누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정이 되기 전, 재헌은 리나와 함께 먼저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니, 이 밤이 가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지수가 어떤 여자인지, 더 늦기 전에 그 실체를 두 눈으로 꼭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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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헌이 떠났다. 그것도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 잘난 여배우와 함께.
그 밤 내내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던 주제에 결국 그것이 그가 말한 관심의 전부였던 것이다.
실망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휘저었다.
이제 저 두 사람은 곧장 호텔로 향할 테지?
그녀에게 보여 줬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잠자리에서도 꽤나 마초적일 것 같았다.
마……초적?
하, 또 엉뚱한 상상을 하는 자신이다.
대체 그가 딴 여자랑 사라졌다고 왜 실망을 하는 건데? 강재헌이 어떤 남자인지 벌써 잊었어? 그에게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장서영에게 어떤 짓을 하고 떠났는지 잊었냐고. 그는 여자를 헌 신 바꾸듯 미련 없이 갈아 치우는 최악의 바람둥이야!
그런 남자에게 대체 뭘 기대한 것인지, 몇 시간 동안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탓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재헌이 사라지자 지수가 그곳에 더 머물 이유도 없어졌다.
한순간에 풀려 버린 긴장에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민호도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고맙게도 그만 집에 가겠냐고 물었고 두 사람은 한껏 고조된 파티 분위기를 뒤로한 채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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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흐르는 검은 세단이 허름한 건물 한편에 멈춰 섰다.
재헌의 전담 운전기사, 김 대리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이곳이 정말 맞느냐고 물었다.
재헌 역시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눈에 딱 봐도 오래된 빌라 건물들이 밀집된 그곳은 여자 혼자 살기에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파티에서 보여 주었던 그녀의 세련된 모습과는 확실히 언밸런스했다.
재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인 후 다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윤 비서를 통해 지수와 민호가 호텔을 나와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는 혼자 내기를 했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일까? 오늘 밤 함께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낼까?
아니, 그녀는 혼자 내릴 것이다. 물론 민호가 애인일 리 없다.
만일 애인이었다면 이곳으로 오는 대신 호텔이나 민호의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왜 그런 확신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확신은 더 굳어졌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코발트색 고급 스포츠카가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짜릿한 흥분과 함께 전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재헌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은 아직도 차 안에 있는 상태였다. 어둠에 잠긴 거리 한편에서 가로등 불빛에 비추인 민호와 지수의 실루엣이 보였다.
왜 당장 내리지 않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 건가?
갑자기 초조해졌다.
울컥 치미는 짜증과 이유 없는 갈증에 재헌은 곧장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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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씨, 집에 도착했어요.”
고요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지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나 봐요.”
“그러게 많이 피곤했나 봐요.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고.”
지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민호가 괜한 말을 꺼낼까 싶어 일부러 잠든 척하다 진짜 잠이 든 그녀였다.
“요즘 계속 무리를 했거든요.”
차창 너머의 눈에 익은 거리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한결 안정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난 좋았어요. 덕분에 잠자는 미녀를 실컷 볼 수 있어서.”
헐, 웬 닭살, 하며 고개를 든 것과 동시에 은근한 기대가 담긴 민호의 표정을 읽어 버린 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