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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1화
「먼 달에 계수나무 홀로 자라나, 너를 기다린다.
복숭아꽃 점점이 피어나니 이 풍경이 어떠하냐.
나무 아래 금(琴) 뜯으며 기다리고 있겠노라. ―영비 作」
0장. 또다시 그날로
행화궁(杏花宮)의 살구꽃이 질 무렵이었다. 향비의 편지를 받은 사내가 살구나무 숲 근처에 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 뒤에서 바스락거리며 잎 밟는 소리가 났다. 향비였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따라 유자 향기가 풍겼다.
“왜 불렀소.”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마는 희고 입술을 붉었으나 뺨이 움푹 패이고 눈가가 어두웠다. 병색이 완연했다. 몸도 마음도 죽어 가는 여자에게 사내는 약간의 동정심을 품었다.
“태자 전하께 부탁이 있습니다.”
“…….”
“정이를 부탁드립니다.”
“제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고.”
“……3황자께서도 아십니다. 그분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 아들이 아니라고 하나 4년 기른 아들을 버릴까.”
“글쎄요. 전하라면 어쩌시겠습니까.”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더 이상 태자가 아닌데다가 내일이면 북방으로 출전하니,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겠소.”
“전하…….”
“차라리 이름을 부르시오. 폐위된 몸이오.”
“……계, 저를 원망하시는 것 압니다.”
“향비를 왜?”
“제가 전하의 적이어서.”
“그대는 처음부터 3황자의 사람이었는걸.”
말문이 막힌 듯, 향비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들 사이로 마른 꽃잎이 떨어졌다.
“맞습니다. 제가 이 땅으로 왔을 때부터, 만신창이가 되어 행화궁에 갇혔던 적에도 전하께서는 줄곧 그러하셨지요. 아는 척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어요. 3황자의 손을 피해 전하께 달려갔을 때도요.”
“…….”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향비는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망가져 있었다. 그때 자신은 국외에 있었고, 자연히 3황자의 보호 아래 놓였다. 향비는 3황자의 사람이 되었다.
3황자와 대립하던 자신이 향비를 감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그녀가 난비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전하를 옥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습니다. 몰랐다느니 그런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제 운명이라 생각하고, 원망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향비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선다.
“제가 아닌 정이를 가엾게 여기어, 그 아이의 뒤를 봐주세요. 삼촌으로서.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겐 이제 힘이 없는데도?”
“전하의 냉혹함 뒤 너그러움을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것입니다. 이 황궁에서도 정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나를 믿나?”
“……믿을 이가 전하뿐이니까요.”
말하며 웃는다. 처연하다. 그 말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산새는 이제 털이 모두 빠져 죽어 가고 있었다.
사내는 생각했다. 마음에 둔 이 때문에 죽임당한 어미와 마음에 둔 이 하나 없이 죽어 가는 이 여자 중 누가 더 가여운지를. 그러나 어쩌랴. 세월은 화살처럼 날아갔고 그들의 찬란하던 시절은 모두 지나가 버렸는데.
향비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며 사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계, 정말로…….”
여자의 안도에 사내는, 계는 짐작했다. 다시는 향비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 달이 지나, 먼 서쪽 전장에서 계는 서간을 받는다.
향비의 부고였다. 계가 심어 놓은 이는 향비가 목을 맸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입이 쓰다. 어쩌면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건마는. 미리 말렸어야 했나. 그러나 제 자신이 향비의 무엇이기에? 서로 데면데면하던, 적도 아군도 아닌, 같은 황궁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계는 부고장을 태우고 전장에 나섰다.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말을 타고 달리던 언덕에서, 화살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느리게 화살은 가슴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말 아래로 굴렀다.
아득한 정신. 희미해진 시선. ‘정이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던 향비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해지며 계는 눈을 감았다.
숨이 두어 번 만에 끊어졌다.
1장. 산중에 불꽃이 일다
빗소리가 척박하다. 새벽부터 오던 비는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비가 드문 계절인데도.
하염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올렸다. 그 위에 나비 모양 철제 핀을 깊게 꽂아 넣었다. 앞가슴까지 올라오는 띠를 두 번 동여매고 겉저고리를 걸친 후 푸른 비단 띠를 또 한 번 둘렀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면서 바닥을 쓸었다. 하염이 끝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의자에 앉았다.
“공주님 안색이 좋지 않네요.”
얼굴에 분을 두드리던 시녀가 속삭인다. 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소매로 제 눈가를 찍어 누르며 시녀가 울먹였다.
“죄송해요. 끝까지 공주님을 뫼시면 좋았을 텐데요.”
“괜찮다. 영아가 가기로 했잖니.”
“하지만…….”
시녀를 내버려 두고 하염은 또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의 비였고 흔치 않은 날씨였다. 이런 날의 비는 천제가 내리는 것이라 아래에서도 잔치를 벌이곤 했다.
새파란 과일을 담근 술을 모두 나눠 마시고 하늘에 선물을 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노래를, 춤을 추는 이들은 춤을,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은 연주를,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그림을. 땅은 풍요롭고 하늘에는 기쁨이 가득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춤과 노래와 아름다움을 가꾸는 연나국. 때문에 전국으로 번진 전쟁에서 도태되어 버린 가엾은 모국.’
공주 하염이 머무는 하정각은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개구리가 밤새 울던 하정각 연못에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전쟁통에 삭아 버린 나무 배(나무로 만든 배)의 반은 가라앉았고 나머지 반은 못 진흙 위로 솟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비를 피해 새들이 모여들었다.
“공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바깥에서 하염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하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더욱 서글퍼진 얼굴로 문을 열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
곱게 단장한 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텅 빈 방. 습한 공기가 하염의 숨을 틀어막았다. 하염은 다시는 못 볼 풍경을 눈에 차곡차곡 담았고 스르르 눈꺼풀을 내렸다. 이젠 떠나야 했다. 숨소리가 개미 소리보다도 작게 달싹였다.
연나국의 차녀 하염은 어미인 난비를 꼭 닮은 여인이었다. 짙은 머리카락은 길고 뻣뻣하였으며 몸은 작고 호리호리했다. 유자 냄새를 풍겨서 사람들은 일찍 죽은 전비가 돌아온 것 같다 말했다. 안타깝게도 왕께서 난비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나 보다, 라고도 말했다.
하염은 일찍 시집간 장녀를 대신하여 맏이의 역할을 해야 했다. 동생들에게 여러 것을 양보하다 보니 남은 것은 왕이 붙여 준 정혼자뿐이었다. 아마 전쟁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2년 전에 이미 시집가 살았을 텐데.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정혼자는 선봉에서 죽었다. 정혼자의 나라는 금방 무너지고 다른 나라가 세워졌으며 그 나라 또한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혔다. 각 지도는 몇 번이나 수정되어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가마.”
그리고 이제는 공주 하염도 모국을 떠나야 했다. 멀리 자비국으로.
대국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는 대신, 도합 30대 마차의 공물을 분할 납부하고 공주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구두로 가계약이 성사되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왕은 제 다섯 딸 중 시집간 장녀를 제외하고, 차녀를 보내기로 했다. 물론 공주의 의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말이야 화친이지 사실상 볼모의 몸이다. 돌아올 수 있는가 하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러기 위해 공주 대접을 해 준 거겠지.’
아버지 자왕의 교지를 순순하게 받아들인 겉모습과 달리 속에서는 열이 끓었다. 평화롭던 일상을 깨부수고 왕궁으로 불러들여 수년을 공주로 살게 하더니.
“결국에는 종살이구나.”
제 안위를 도모하려는 아버지, 자왕의 강압적인 턱수염과 지긋한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하염은 결코 울거나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염을 따르던 시녀들이 동정하여 눈물을 흘려도 하염은 아니었다. 다만 조용한 눈빛으로 제 아버지가 있는 중앙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둥근 창문에는 인기척 하나 없고.
하염이 하정각의 연못에 돌을 던졌다. 하나, 둘, 셋…….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연나국의 첫 번째 공물 마차가 자비국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전국전쟁 3년. 현재 전세를 유지하고 있는 두 대국 중 하나로 가는 만큼 행렬은 화려했다.
가장 앞에 하염이 탈 마차가 섰고, 네 마리의 말 뒤로 공물 다섯 수레가 따라갔다. 주변에는 연나국 병사들이 에워쌌다.
하늘은 개어 구름 사이가 푸르렀다. 하염은 하늘에서 눈을 떼고 팔을 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자비국 태자, 얼음처럼 차갑고 강철처럼 단단하며 뱀처럼 잔혹한 자비국의 실세.’
이미 왕궁에서는 자비국의 태자나 3황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확정이 되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소국의 공주를 정비로 들이겠느냐 비꼬는 말도 있었다. 무엇이든 어차피 제 손을 떠난 일이라 하염은 한 귀로 모두 흘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에 대한 것만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자비국의 태자이자 적우영의 원수. 늙은 왕을 대신하여 자비국을 6년째 다스리는 진짜 왕. 하염이 자비국에서 상대해야 할 이였다.
제 말을 듣지 않은 신하의 팔다리를 잘라 벌레처럼 기게 만들었다고 했다. 적의 가족과 고향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공격을 했다고 했다. 적군의 오른쪽 귀 하나당 상금을 내걸었다고 했다. 항복을 요구하는 적군 중 다섯 명을 남겨 놓고 모두 죽였다고 했다. 그런 말들이 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염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그런 말이 도는 이였다.
“허나 그런 태자의 권위가 얼마나 오래가겠느냐.”
연나국을 떠나기 전, 아버지 자왕이 하염을 은밀히 불러들여 물었다.
“홀로 군수를 통제하고 있으니 짧지는 않겠지요.”
“그것도 전쟁 중의 이야기다. 제3황자가 북국 대리를 끝내고 돌아왔으니 태자도 예만큼은 못 할 게다.”
자왕이 눈동자를 굴렸다.
“잔혹한 태자의 성정이 그대로 돌아오겠지. 전쟁이 끝난 후의 적우영은 골칫덩이가 될 테고.”
“네.”
“태자가 황제가 되면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게다. 땅은 불타고 백성들은 굶주리며 조상들이 가꿔 온 서적과 음악들이 다 사라진다. 3년만으로도 이렇게 나라들이 피폐해졌는데, 더 큰 전쟁에는 어떻게 버틴단 말이냐.”
자왕의 윽박에 하염은 눈을 감았다. 새까맣게 타 버린 논밭에서 불탄 낱알을 줍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좀 더 큰 아이들은 헐렁한 군모를 쓰고 성문을 지켰다. 핏물이 흐르는 강과 무너진 옛 건물들. 여인들은 치마를 숨겼고 사내들은 머리를 숨겼다.
그 모든 것이 자비국 태자의 손 속 안에서 이루어졌다. 강력한 군부로 온 나라를 휩쓸며 제 발아래 두던 태자. 그런 이를 고작해야 소국의 공주인 하염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지.’
하염이 고개를 저었다. 태자를 이겨선 안 되었다. 애초에 하염은 이기려 가는 것이 아니었다. 볼모로서 자왕의 친서를 가져가 바치기 위해서였다. 누구인지 모를 이의 신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황궁에 영영 갇혀 외롭게 지내야 할 수도 있고, 국제 관계에 따라서는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위치에서 말이다.
“네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
“대답해라.”
“네.”
오로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내 전언을 기다렸다가,”
자왕이 하염을 보는 눈빛은 독기가 가득했다. 일그러진 눈빛에 하염은 속이 거북해졌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는 묻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단 하나도 말하지 않고서 자왕이 속삭였다.
“알겠느냐?”
“네.”
하염은 소리 내어 대답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그것이 출발 전날 처음으로 독대한 아버지의 당부였다. 정작 떠나는 날에는 나와 있지 않고서. 대신 어린 아우, 이제는 세자로 책봉된 소년이 남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쪼르르 달려왔다.
“누이! 꼭 돌아오세요.”
“전하도 훌륭한 사내가 되세요.”
세자는 울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하여 저 가고 나선 울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훗날 왕이 되어야 할 어린 아이는 눈물을 참았다. 방울진 아우의 눈동자. 오로지 이 나라에서 그것만이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1화
「먼 달에 계수나무 홀로 자라나, 너를 기다린다.
복숭아꽃 점점이 피어나니 이 풍경이 어떠하냐.
나무 아래 금(琴) 뜯으며 기다리고 있겠노라. ―영비 作」
0장. 또다시 그날로
행화궁(杏花宮)의 살구꽃이 질 무렵이었다. 향비의 편지를 받은 사내가 살구나무 숲 근처에 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 뒤에서 바스락거리며 잎 밟는 소리가 났다. 향비였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따라 유자 향기가 풍겼다.
“왜 불렀소.”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마는 희고 입술을 붉었으나 뺨이 움푹 패이고 눈가가 어두웠다. 병색이 완연했다. 몸도 마음도 죽어 가는 여자에게 사내는 약간의 동정심을 품었다.
“태자 전하께 부탁이 있습니다.”
“…….”
“정이를 부탁드립니다.”
“제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고.”
“……3황자께서도 아십니다. 그분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 아들이 아니라고 하나 4년 기른 아들을 버릴까.”
“글쎄요. 전하라면 어쩌시겠습니까.”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더 이상 태자가 아닌데다가 내일이면 북방으로 출전하니,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겠소.”
“전하…….”
“차라리 이름을 부르시오. 폐위된 몸이오.”
“……계, 저를 원망하시는 것 압니다.”
“향비를 왜?”
“제가 전하의 적이어서.”
“그대는 처음부터 3황자의 사람이었는걸.”
말문이 막힌 듯, 향비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들 사이로 마른 꽃잎이 떨어졌다.
“맞습니다. 제가 이 땅으로 왔을 때부터, 만신창이가 되어 행화궁에 갇혔던 적에도 전하께서는 줄곧 그러하셨지요. 아는 척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어요. 3황자의 손을 피해 전하께 달려갔을 때도요.”
“…….”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향비는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망가져 있었다. 그때 자신은 국외에 있었고, 자연히 3황자의 보호 아래 놓였다. 향비는 3황자의 사람이 되었다.
3황자와 대립하던 자신이 향비를 감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그녀가 난비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전하를 옥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습니다. 몰랐다느니 그런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제 운명이라 생각하고, 원망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향비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선다.
“제가 아닌 정이를 가엾게 여기어, 그 아이의 뒤를 봐주세요. 삼촌으로서.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겐 이제 힘이 없는데도?”
“전하의 냉혹함 뒤 너그러움을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것입니다. 이 황궁에서도 정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나를 믿나?”
“……믿을 이가 전하뿐이니까요.”
말하며 웃는다. 처연하다. 그 말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산새는 이제 털이 모두 빠져 죽어 가고 있었다.
사내는 생각했다. 마음에 둔 이 때문에 죽임당한 어미와 마음에 둔 이 하나 없이 죽어 가는 이 여자 중 누가 더 가여운지를. 그러나 어쩌랴. 세월은 화살처럼 날아갔고 그들의 찬란하던 시절은 모두 지나가 버렸는데.
향비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며 사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계, 정말로…….”
여자의 안도에 사내는, 계는 짐작했다. 다시는 향비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 달이 지나, 먼 서쪽 전장에서 계는 서간을 받는다.
향비의 부고였다. 계가 심어 놓은 이는 향비가 목을 맸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입이 쓰다. 어쩌면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건마는. 미리 말렸어야 했나. 그러나 제 자신이 향비의 무엇이기에? 서로 데면데면하던, 적도 아군도 아닌, 같은 황궁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계는 부고장을 태우고 전장에 나섰다.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말을 타고 달리던 언덕에서, 화살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느리게 화살은 가슴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말 아래로 굴렀다.
아득한 정신. 희미해진 시선. ‘정이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던 향비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해지며 계는 눈을 감았다.
숨이 두어 번 만에 끊어졌다.
1장. 산중에 불꽃이 일다
빗소리가 척박하다. 새벽부터 오던 비는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비가 드문 계절인데도.
하염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올렸다. 그 위에 나비 모양 철제 핀을 깊게 꽂아 넣었다. 앞가슴까지 올라오는 띠를 두 번 동여매고 겉저고리를 걸친 후 푸른 비단 띠를 또 한 번 둘렀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면서 바닥을 쓸었다. 하염이 끝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의자에 앉았다.
“공주님 안색이 좋지 않네요.”
얼굴에 분을 두드리던 시녀가 속삭인다. 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소매로 제 눈가를 찍어 누르며 시녀가 울먹였다.
“죄송해요. 끝까지 공주님을 뫼시면 좋았을 텐데요.”
“괜찮다. 영아가 가기로 했잖니.”
“하지만…….”
시녀를 내버려 두고 하염은 또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의 비였고 흔치 않은 날씨였다. 이런 날의 비는 천제가 내리는 것이라 아래에서도 잔치를 벌이곤 했다.
새파란 과일을 담근 술을 모두 나눠 마시고 하늘에 선물을 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노래를, 춤을 추는 이들은 춤을,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은 연주를,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그림을. 땅은 풍요롭고 하늘에는 기쁨이 가득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춤과 노래와 아름다움을 가꾸는 연나국. 때문에 전국으로 번진 전쟁에서 도태되어 버린 가엾은 모국.’
공주 하염이 머무는 하정각은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개구리가 밤새 울던 하정각 연못에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전쟁통에 삭아 버린 나무 배(나무로 만든 배)의 반은 가라앉았고 나머지 반은 못 진흙 위로 솟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비를 피해 새들이 모여들었다.
“공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바깥에서 하염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하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더욱 서글퍼진 얼굴로 문을 열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
곱게 단장한 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텅 빈 방. 습한 공기가 하염의 숨을 틀어막았다. 하염은 다시는 못 볼 풍경을 눈에 차곡차곡 담았고 스르르 눈꺼풀을 내렸다. 이젠 떠나야 했다. 숨소리가 개미 소리보다도 작게 달싹였다.
연나국의 차녀 하염은 어미인 난비를 꼭 닮은 여인이었다. 짙은 머리카락은 길고 뻣뻣하였으며 몸은 작고 호리호리했다. 유자 냄새를 풍겨서 사람들은 일찍 죽은 전비가 돌아온 것 같다 말했다. 안타깝게도 왕께서 난비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나 보다, 라고도 말했다.
하염은 일찍 시집간 장녀를 대신하여 맏이의 역할을 해야 했다. 동생들에게 여러 것을 양보하다 보니 남은 것은 왕이 붙여 준 정혼자뿐이었다. 아마 전쟁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2년 전에 이미 시집가 살았을 텐데.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정혼자는 선봉에서 죽었다. 정혼자의 나라는 금방 무너지고 다른 나라가 세워졌으며 그 나라 또한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혔다. 각 지도는 몇 번이나 수정되어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가마.”
그리고 이제는 공주 하염도 모국을 떠나야 했다. 멀리 자비국으로.
대국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는 대신, 도합 30대 마차의 공물을 분할 납부하고 공주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구두로 가계약이 성사되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왕은 제 다섯 딸 중 시집간 장녀를 제외하고, 차녀를 보내기로 했다. 물론 공주의 의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말이야 화친이지 사실상 볼모의 몸이다. 돌아올 수 있는가 하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러기 위해 공주 대접을 해 준 거겠지.’
아버지 자왕의 교지를 순순하게 받아들인 겉모습과 달리 속에서는 열이 끓었다. 평화롭던 일상을 깨부수고 왕궁으로 불러들여 수년을 공주로 살게 하더니.
“결국에는 종살이구나.”
제 안위를 도모하려는 아버지, 자왕의 강압적인 턱수염과 지긋한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하염은 결코 울거나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염을 따르던 시녀들이 동정하여 눈물을 흘려도 하염은 아니었다. 다만 조용한 눈빛으로 제 아버지가 있는 중앙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둥근 창문에는 인기척 하나 없고.
하염이 하정각의 연못에 돌을 던졌다. 하나, 둘, 셋…….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연나국의 첫 번째 공물 마차가 자비국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전국전쟁 3년. 현재 전세를 유지하고 있는 두 대국 중 하나로 가는 만큼 행렬은 화려했다.
가장 앞에 하염이 탈 마차가 섰고, 네 마리의 말 뒤로 공물 다섯 수레가 따라갔다. 주변에는 연나국 병사들이 에워쌌다.
하늘은 개어 구름 사이가 푸르렀다. 하염은 하늘에서 눈을 떼고 팔을 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자비국 태자, 얼음처럼 차갑고 강철처럼 단단하며 뱀처럼 잔혹한 자비국의 실세.’
이미 왕궁에서는 자비국의 태자나 3황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확정이 되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소국의 공주를 정비로 들이겠느냐 비꼬는 말도 있었다. 무엇이든 어차피 제 손을 떠난 일이라 하염은 한 귀로 모두 흘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에 대한 것만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자비국의 태자이자 적우영의 원수. 늙은 왕을 대신하여 자비국을 6년째 다스리는 진짜 왕. 하염이 자비국에서 상대해야 할 이였다.
제 말을 듣지 않은 신하의 팔다리를 잘라 벌레처럼 기게 만들었다고 했다. 적의 가족과 고향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공격을 했다고 했다. 적군의 오른쪽 귀 하나당 상금을 내걸었다고 했다. 항복을 요구하는 적군 중 다섯 명을 남겨 놓고 모두 죽였다고 했다. 그런 말들이 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염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그런 말이 도는 이였다.
“허나 그런 태자의 권위가 얼마나 오래가겠느냐.”
연나국을 떠나기 전, 아버지 자왕이 하염을 은밀히 불러들여 물었다.
“홀로 군수를 통제하고 있으니 짧지는 않겠지요.”
“그것도 전쟁 중의 이야기다. 제3황자가 북국 대리를 끝내고 돌아왔으니 태자도 예만큼은 못 할 게다.”
자왕이 눈동자를 굴렸다.
“잔혹한 태자의 성정이 그대로 돌아오겠지. 전쟁이 끝난 후의 적우영은 골칫덩이가 될 테고.”
“네.”
“태자가 황제가 되면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게다. 땅은 불타고 백성들은 굶주리며 조상들이 가꿔 온 서적과 음악들이 다 사라진다. 3년만으로도 이렇게 나라들이 피폐해졌는데, 더 큰 전쟁에는 어떻게 버틴단 말이냐.”
자왕의 윽박에 하염은 눈을 감았다. 새까맣게 타 버린 논밭에서 불탄 낱알을 줍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좀 더 큰 아이들은 헐렁한 군모를 쓰고 성문을 지켰다. 핏물이 흐르는 강과 무너진 옛 건물들. 여인들은 치마를 숨겼고 사내들은 머리를 숨겼다.
그 모든 것이 자비국 태자의 손 속 안에서 이루어졌다. 강력한 군부로 온 나라를 휩쓸며 제 발아래 두던 태자. 그런 이를 고작해야 소국의 공주인 하염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지.’
하염이 고개를 저었다. 태자를 이겨선 안 되었다. 애초에 하염은 이기려 가는 것이 아니었다. 볼모로서 자왕의 친서를 가져가 바치기 위해서였다. 누구인지 모를 이의 신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황궁에 영영 갇혀 외롭게 지내야 할 수도 있고, 국제 관계에 따라서는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위치에서 말이다.
“네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
“대답해라.”
“네.”
오로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내 전언을 기다렸다가,”
자왕이 하염을 보는 눈빛은 독기가 가득했다. 일그러진 눈빛에 하염은 속이 거북해졌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는 묻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단 하나도 말하지 않고서 자왕이 속삭였다.
“알겠느냐?”
“네.”
하염은 소리 내어 대답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그것이 출발 전날 처음으로 독대한 아버지의 당부였다. 정작 떠나는 날에는 나와 있지 않고서. 대신 어린 아우, 이제는 세자로 책봉된 소년이 남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쪼르르 달려왔다.
“누이! 꼭 돌아오세요.”
“전하도 훌륭한 사내가 되세요.”
세자는 울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하여 저 가고 나선 울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훗날 왕이 되어야 할 어린 아이는 눈물을 참았다. 방울진 아우의 눈동자. 오로지 이 나라에서 그것만이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