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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2화




자비국으로 가는 길은 멀지만 험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대국의 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떠난 지 채 3일도 지나지 않아 봉하(峰下) 다리에서 문제가 터졌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는 저(低)강이 길게 흐르고 있었다. 저강은 넓어 유속이 부드러우나 흐름이 묘하여 상류에선 배로 건너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이전 통일 시대 때 봉하 다리가 만들어졌다. 다리가 놓인 이래로 사람과 말과 수레가 죄 이곳으로 통과하니, 산적들이 빌어먹게 생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것이 벌써 수십 년 전 이야기다.

그 유서 깊고 단단했던 다리가 이제는 부서진 돌 잔해로만 남아 있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것같이 자잘하게 산산조각 난 봉하 다리 앞에서 명석 장군이 손을 들었다. 마차를 인솔하던 그의 명령에 마차가 멈추었다. 명석이 하염에게 보고하였다.

“공주님, 길을 돌아가야겠습니다.”

“봉하 다리가 있지 않나요?”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최근 이곳으로 폭격이 있던 모양입니다.”

놀란 하염이 마차에서 내려 잔해를 확인했다.

“어쩔 수 없네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봉산 남쪽으로 통하는 길을 터야겠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강을 건너나요?”

“네. 다리는 없으나 수야국 근처에서 배를 빌릴 수 있을 겁니다.”

“산은 위험하진 않을까요? 공물이 있는데.”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아니면 북쪽으로 빙 둘러 가야합니다.”

그건 너무나 먼 길이다. 하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석이 산길을 틀 선발대를 보냈고 또 두 명을 근처로 흩어 보내 흔적을 지웠다. 다른 두 명에게는 주변의 최근 정세를 알아보게 했다.

기다리는 동안 남은 이들은 간단한 식사를 했다. 하염은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명석이 힐끔거리고 있다가 발효시킨 면피 조각과 고기를 잘게 저민 죽을 조금 더 보냈다. 하염이 고개를 저었다.

“일하시는 분들이 먹어야지요. 여러분들 드세요.”

그러나 명석은 받지 않았다.

“저번 식사 때에도 거의 목만 축이셨습니다. 이 정도는 드셔야 합니다. 산중에서 혹시 모를 체력 소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제야 하염은 음식을 구겨 억지로 입 안에 집어넣었다.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할 때 즈음, 가장 먼저 주변 상황을 알아보던 이들이 돌아왔다.

“봉하 다리가 무너진 건 보름 전입니다. 게름한족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려는지 돌덩이가 날아왔다고 합니다. 돌덩이를 내던진 이들은 검은 복면을 했는데, 알려진 바 없습니다.”

“그을린 자국이 있던데.”

“날아온 돌 중 불길이 이는 것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 바위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말고도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내리꽂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하늘에선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는데요. 결국 게름한족들은 병사 삼분지 일을 잃고 돌아가고 복면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흩어졌다 합니다.”

들은 그대로 읊는 병사 앞에서 명석은 턱께를 문질렀다.

“그게 보름 전이라 하면 이미 주변에는 아무도 없겠군. 식량 얻을 곳이 없으니 게름한족도 본진으로 돌아갔을 테고, 복면인들이 걸리기는 하다만…….”

바스스 바람이 불면 길게 올라온 풀잎과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너른 평지 어디에도 누군가 숨을 만한 곳이 없다.

발아래 붕 뜬 가느다란 땅 조각. 그 위를 밟고 선 사람들과 말들과 수레. 두려움과 별개로 하늘 아래 저강, 그 위를 아치형으로 잇는 푸른 산맥 줄기는 낯선 세계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복숭아꽃이 핀 곳이 이곳인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들아.

강 따라 멀리 멀리 내 님께도 알려 다오.”



자연스레 하염의 입에서 시구가 흘러나왔다. 여행 다니는 서화가(書畵家) 자화백(自畵伯)의 노래. 하염은 그제야 그 글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염이 연나국 밖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골목이 즐비한 사가나 앞뒤로 꽉 막힌 왕궁만 오갔던지라, 때문에 먼 풍경의 아름다움이란 옛 책과 그림으로만 알고 있었다.

함께 마차에 오른 몸종 영아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차마 내려다보지 못하고 제 눈을 가렸다. 하염만이 창밖 세상 낙원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라를 떠난 덕분에 산수 구경을 하게 되다니.’

하염은 피식 웃으며 오감을 예리하게 세웠다.

풀과 축축하게 젖은 흙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 퍼드득 날아가는 각종 새들. 나뭇잎은 바스락거리고 짐승 소리는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바람 사이로 작게, 인기척도 느껴졌다.

“!”

순식간이었다.

마차가 고개를 넘어 내려갈 때였다. 무장을 한 사람들이 마차들을 에워쌌다. 아마 산속까지 흘러들어 온 도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염은 숨을 죽였다.

‘아니면…….’

명석은 라호국의 자객이 아니기를 바랐다. 자비국의 주적인 라호국과 맞서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게름한족과 맞붙었다는 복면인들 생각도 났다.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마차는 아예 멈추었다. 한마디도 오가지 않은 고요한 산중. 화살 하나가 효시처럼 애꿎은 마차 지붕에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강도처럼 “와!” 소리 지르거나 허둥거리지 않았다. 정식 병사의 모습은 아니매 병사처럼 공격에 능숙했다. 수는 열다섯 명.

명성의 단궁이 적들의 머리를 겨누면 모두 관통했다. 네 명을 죽인 후에는 도를 휘둘렀다. 다리를 베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이가 두 명,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전투는 오래지 않았고 피해도 그리 크기 않았다. 간단한 지혈과 뒤처리를 하는 동안 명석은 살아남은 두 사람을 뒤쪽으로 끌고 갔다.

“네놈들은 어디서 왔느냐!”

“저, 저흰 화전 짓던 놈들입니다.”

“맞습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그만…….”

“귀하신 분들인 줄을 모르고.”

거짓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일개 농민의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이들 결국 사실을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손가락 다섯 개를 더 잘라 낸 후에야 명석은 두 사람을 죽였다.

“공주님, 정체는 밝히지 못했습니다만,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자비국에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피 냄새가…….”

전쟁 얘기만 귀 따갑게 들었지 한 번도 그 실상을 보지 못했던 하염에게는 이 살수조차 낯설었다.

잡동사니이며 사치품, 전쟁 중에는 팔리지 않는 것들과 안전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여기저기에 바치며 이제껏 살아남은 연나국. 하염은 그런 나라의 공주였다.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가지 못해 또다시 기습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쪽에도 피해가 있었다. 병사 다섯을 잃었다. 명석은 아군의 시체를 한데 모아 이름 띠만 챙기고 출발했다.

이후로도 습격은 계속되었다. 시간을 두고 점점 많은 이들이 공격해 왔다. 죽어 가는 수가 늘어났다. 모두 다른 차림새의 다른 무리였다. 다만 덤벼드는 방식은 미묘하게 비슷했다. 단순히 물건을 원하는 강도인지 공주를 찾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잡힌 이들은 영문 모를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연나국 사절단의 정보가 온갖 곳에 새어 나간 것이 분명했다. 한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명석이 피도 채 닦아 내지 못한 채 다가왔다.

“공주님, 계속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자비국에 도착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산을 벗어나 평지로 들어서면 좀 나아질까요?”

“습격은 줄어들 것입니다.”

정말인지 하염은 되묻지 않았다.

피비린내는 점점 짙어졌다. 나중에는 하염이 있던 마차 안까지 핏물이 튀었다. 하인 한 명이 죽었고 병사들도 계속 쓰러졌다.

산꼭대기를 지났을 때 남은 병사는 고작해야 반도 되지 않았다. 하염 곁에는 아끼는 시종 영아만 꼭 붙어 있었다. 비통함을 억누르고 명석은 우선 하염에게 고개 숙였다.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만, 마차를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공물 다섯 수레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뿐 사람의 수는 절반이나 줄어, 명석의 뺨도 해쓱했다. 울타리를 벗어난 연나국의 힘이란 고작해야 이런 것이었다. 전쟁도 겪지 않고 3년 간 숨어 있던 대가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나을까요, 공주님?”

공식적 인솔자는 공주이나, 실질적으로는 명석 장군이 해 왔던 일이었다. 막상 제게 물으니 하염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산의 절반을 지났는데, 다시 돌아가야 할까.’

이곳에서는 연나국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돌아가서 병사들을 보충하여 다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염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가시지를 않았다.

“어차피 노리는 이들이라면 반대쪽으로 간들 같을 겁니다.”

“네. 그럼 처음 계획대로 가겠습니다.”

길을 서둘렀다. 서둘렀지만 한참 줄은 병사들로 행렬을 다 지키며 가는 것은 무리였다. 자연히 속도가 늦어졌다. 다행히 한동안은 조용했다.

산을 절반 정도 내려왔을 때,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명석은 숨이 턱 막혔다. 좀 더 강하게 돌아가자고 말했어야 했나 싶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이번 적은 무자비하고 난폭했다. 서슴없이 하염이 있는 마차로 칼을 들이밀었다. 물건들은 둘째치더라고 하염을 지켜야 했다. 마차를 지키던 병사들은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 한 명 한 명씩 쓰러졌다. 상대는 아직도 즐비하여 이번만큼은 명석도 까마득한 기분이 되었다. 다 잃더라도 하염 공주만은 살려야 했다.

“공주님! 아래로 돌아 내려가십시오. 민가가 보이면 숨어서 일단 옷을 갈아입으시고 어떻게든 자비국으로 가셔야 합니다. 영아, 공주님을 잘 모셔라.”

하염도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이 많은 무리가 왜 그들을 습격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지금은 일단 행동할 때였다. 만약 공물 때문이라면 제 뒤를 따라오지 않을 테고, 자신이 목적이라면 병사들이 살 테다.

명석이 제 앞의 적을 단 칼에 베어 내며 유인하는 사이, 하염과 영아는 손을 꼭 붙잡고 마차 뒤쪽으로 돌아갔다. 적 몇 명이 발견하고 쫓아오려다가 명석의 단궁에 맞아 죽었다. 두 여인이 명석이 말한 길로 내달렸다.

초연했던 풍경은 어느새 피로 물들었다. 하염의 발바닥이 고통을 호소하였으나 쉴 틈이 없었다. 마차와 거리가 멀어졌는지 챙챙 철이 부딪치는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점점 해가 기울었다. 어둠이 밀려오면 산행에 익숙지 않은 두 여자가 불리할 것이 뻔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스락 나뭇가지를 밟는 통에 놀란 영아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해가 지면서 점점 세상이 붉어졌다. 그제야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앞질렀는지 복면의 사람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은 두 여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를 든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두 여인은 움츠러들었다.

붙잡은 손으로 영아의 떨림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염은 입술을 악물고 일어섰다.

“공주님.”

영아가 속삭였으나 하염은 영아의 손을 놓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희는 누구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감히 누구의 것에 손대는지 아느냐! 이는…….”

단호한 목소리. 또한 한 나라의 공주로서, 적들 앞에서 타국의 이름으로 위협해야 하는 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은 외쳤다.

“이는 자비국의 것이다! 너희가 그대로 돌아간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감정을 숨긴 하염은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치켜뜬다. 흙먼지가 묻은 뺨이 상기되고 주먹을 꽉 쥐었으며 다리는 곧게 뻗어 나란히 섰다.

흔들림 없이 적들을 직시하는 시선에도 적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가장 앞에 있던 적 한 명이 손을 들어 두 여인을 가리켰다. 엄지와 검지를 접었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하염은 눈을 꽉 감았다. 더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모국은 어찌 되나. 자비국에서 이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인가. 아버지나 동생이 저를 기다릴까. 하등 쓸데없는 고민들이 작은 머리를 꽉 채운다.

‘어차피 날 버린 곳, 죽은 후를 뭐 하러 걱정하나…….’

칼날이 하염을 내리꽂기 직전, 여섯 명의 적들이 나동그라졌다. 그들이 놀라 뒤도는 사이에 또 다섯 명이 쓰러졌다. 남은 몇 명은 창에 몸이 꿰뚫려 쓰러졌다. 그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손톱만큼 남은 해. 작아진 빛만큼 하늘은 새빨개졌다. 그 반대편에서는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되려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