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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3화
또다시 산중턱에 해가 솟았다. 새빨간 갑주와 붉은 갈기의 말. 말 위에 올라탄 한 움큼의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어둠이 사라지고 자그마한 태양빛이 말 위에서 일렁였다. 눈이 부셔서 하염은 눈을 감았다가 아주 천천히 떴다.
낮고 서늘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었군.”
거대한 활과 벼린 무구를 등에 진 불꽃이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처리해라.”
아직은 살아 있는, 움찔거리는 적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수하 한 명이 물었다.
“한 명은 살려 둘까요?”
“필요 없다.”
“자, 잠시만요! 저희는…….”
그러나 검은 복면의 적들은 목이 베여 쓰러지고 말았다. 복면인 모두는 순식간에 쓰러졌다. 넋이 나가 있던 하염이 시체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
두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하염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놀라는 것 같기도 하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건강해 보이는군. 연나국 여인이 산 중엔 무슨 일이지?”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딱딱했다. 한순간 하염의 목구멍이 차게 얼어붙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봉하 다리가 끊겨 봉산을 넘어 하류로 가려던 차에 봉변을 당했습니다.”
“봉하 다리는 왜 건너려 했나?”
“다리 건너 갈 곳이 있었습니다. 가던 중 도적을 만나 도망하던 중이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염은 다시 인사했다.
“일행이 뒤쳐졌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염은 떨고 있는 영아를 일으켰다. 그러나 적색의 병사들은 두 여인의 앞을 둥글게 선 채 비켜서질 않았다. 병사들의 주인이 다시 말했다.
“도움을 받았으면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할 터. 네 목적을 말하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봉하 다리 건너에는 여러 나라가 있는데 어디에 목적이 있느냐.”
“생명의 은인이라 하여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를 고문하더라도?”
“……붉은 기의 주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잠깐 말 위 붉은 갑주의 사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고민을 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다.
“붉은 기의 주인을 아는가?”
“이 정세에 듣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지 못하는군.”
“네?”
하염이 되물었으나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한데 고작 들은 것뿐이라면서 어찌 그리 확신을 하나.”
“공명정대하고 올바름으로 태자께서 자비국을 이끌어 가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모를 리가 없지요.”
“혀가 천상유수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이번에는 피식 숨이 새어 나가듯이 조용한 웃음이었다. 그는 투구를 벗었다. 목 뒤로 짧게 쳐진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투구를 말 머리 옆에 매달고서 그는 말에서 내렸다.
아까처럼 쉬이 입을 열지 않고 또 지긋이 하염을 쳐다본다.
“나를 처음 보는 게 맞느냐?”
이상한 일이었다. 하염은 그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생판 처음 보는 이를 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정하지도, 친절하지도, 그리움도 없는 목소리지만 눈빛만은 하염을 계속 따라다녔다. 원하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하염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자비국 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연나국 사절의 대표, 2공주 서(糬)씨 하염(夏炎)입니다.”
“지금은 적우영 원수다.”
자비국 태자의 군영이자 태자가 직접 원수로 있는 적우영(赤羽營:태자 직속군). 가는 길은 피로 강을 만들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잔혹한 병법도 망설이지 않는 이들. 진정한 자비국의 공포라 떠들어 대던 세간의 소문을 떠올리며 하염이 살짝 무릎을 굽혔다.
타국이라 해도, 전장이라 해도 위계는 뚜렷한 법이었다. 대국의 태자 그리고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런 곳에서 원수를 뵐 줄은 몰랐습니다.”
“……나 또한 그렇다.”
말하는 목소리가 먹먹하다. 원수는 어지러운 몰골의 여인들을 보고 눈을 감았다.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는지, 습관인건지 문지르고.
아니, 하루 전부터 그랬다. 이른 새벽 장춘 어귀에 들어서 노숙하던 때. 적우영 본대 수막사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앞을 서성이던 부관 지관령이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이내 또 한 번의 깊은 날숨소리가 들려왔다. 지관령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기침하셨습니까?”
“…….”
“각하?”
지관령이 다시 물었다.
“조식(아침)도 잡수시지 않으셨는데, 뭐라도 대령할까요?”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오늘이 무슨 날이냐.”
대답 대신 물음이 던져졌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듯, 걸쇠에 긁히는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듯이 비몽사몽 들뜬 것처럼도 들렸다. 잠이 덜 깨셨나 생각하며 지관령이 대답했다.
“엊그제 춘분이 지났습니다만?”
“…….”
말이 없다. 이부자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고 숨소리도 없다. 지관령이 잠시 긴장했다. 저 천막 안에 제 주인이 맞는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지만 지관령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라호국 3부대와 한바탕하고 어제 장춘에 들어섰잖습니까.”
“…….”
“각하, 괜찮으십니까?”
“향비는?”
“향비라니요?”
“……아니다. 지금 장춘……이구나. 5년 전…….”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였다. 이상했다. 그의 상관이자 적우영의 원수(元帥:대장)는 이런 걸 묻는 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가 이토록 깊이 잠든 것도 드문 일이었다. 언제나 가장 먼저 깨서 가장 먼저 잠들곤 했다.
원수는 잠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관령이 막사 앞에서 서성거렸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원래는 더 전에 조식을 들이곤 했던 것이다.
“저……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대답은 잠시 후 막사 입구가 걷히며 들려왔다.
“채비한다.”
“네?”
걷힌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적우영 원수. 경갑옷을 다 챙겨 입지도 않고 끈을 입으로 잡아당기며 명령했다.
“지금 당장, 저강 쪽으로 이동한다.”
“저강이요? 그러면 돌아가는데요.”
“준비시켜라.”
“명 받들겠습니다!”
급한 건 다 끝났으니 쉬라 명령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지관령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두 번 묻지 않고 병사들에게 달려 나갔다.
지관령이 자리를 정리시키는 동안, 보초병이 대신 원수의 경갑옷 끈을 잡아당겨 주었다. 끈을 묶고 관을 세웠다. 손이 가슴께에 닿는 순간 그가 몸을 슬쩍 피했다.
“각하?”
“……아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가슴부터 확인했다. 화살 맞은 상처 따윈 없었다. 고통은 실제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도. 그렇다면 그간의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의 연기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5년은…….
원수는 가슴께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것이 단지 긴 꿈이든 상상이든 실제였든 그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알겠지.’
생각에 잠긴 사이 보초병이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제 막 해가 뜨는 새벽녘. 여전히 하늘은 어둑했고, 그 앞에 원수의 붉은 갑옷과 머리카락과 관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보였다.
원수가 말 위에 올라타기까지, 적우영 병사들도 어느새 짐을 꾸리고 열을 맞추어 섰다.
“출발한다!”
대답은 묵묵히. 영문을 모르는 상관의 명령에도 적우영의 눈빛은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오히려 명령을 내리는 이의 표정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확신 없는 지휘에도 원수의 목소리만은 번듯하여, 적우영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달렸다. 그리 고된 거리는 아닌지라 적우영 병사들도 말도 멀쩡했다. 다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는데, 그건 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봉산에 다다른 후에야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원수는 알아차렸다.
적우영 원수, 계(溪:시내 계)는 하염이 내려온 산길을 올려다보았다.
“자비국까지는 아직도 많은 길이 남았는데 벌써 공물과 병사를 다 잃은 건가?”
“공물과 병사는 아직 위쪽에 있습니다. 급히 몸만 피신한 터라.”
공물을 내팽개치고 홀로 몸만 보존하였으니 변명이나 다름없다. 하염의 볼이 붉어졌다. 계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곳까지 호위하지.”
제 할 말을 마치자마자 계가 말에 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화려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하염의 눈에는 선명했다. 또 하나의 해 같기도, 혹은 사내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한겨울의 동백 같기도 하다. 그 꽃잎 한 장 한 장 바람을 타고 흔들릴 때마다 피 냄새가 짙게 퍼졌다.
내달렸던 산길을 되돌아갔을 때에는 병사 세 명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적우영 병사들이 끼어들고 나서야 상황이 종결되었다. 사방이 잠잠해진 후에야 명석 장군이 공물과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내려왔다.
살아남은 이들이 도합 열두 명으로 채 한 병력이 나오질 않았다. 하염은 명석과 공물이 무사함을 확인하고서 안도했다.
명석 또한 하염이 성하게 돌아오자 안도하였다. 그는 주변에 포진한 병사들의 정체를 캐묻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서 만난 적이 없더라도 붉은 갑주는 알아볼 수 있었다.
“소군 명석. 태자 전하를…….”
“지금은 적우영 원수로 온 자리다.”
“……네. 원수 각하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나서야 그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해는 이미 졌고 몸은 만신창이다. 또 다른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부서진 마차 때문에라도 서둘러야 했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하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사이에서 명석은 잠시 망설였다.
결국 떠나기 직전에 하염 앞으로 가 머리를 숙였다.
“공주님. 후에 시신을 수습하러 와도 되겠습니까?”
자비국에 들렀다 다시 들를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염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계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모르는 이군. 궁 내 호위만 하던 이인가?”
비꼬는 말을 명석이 알아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죽은 이는 버려두면 바람이 쓸고 새가 먹어 없어질 텐데, 괜한 짓이다. 이래서야 제때 도착이나 할 수 있겠나.”
명석은 말대꾸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실상 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제껏 제 땅에서 전쟁다운 전쟁을 한 적이야 있나. 전전긍긍 적들이 피하기만을 바라면서 궁내를 지키고 기껏해야 근방의 땅에서 적들을 쫓아내는 전투가 다였던 것이다.
사정을 아는 하염이 쓰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떠난 길, 최선을 다해 가야지요.”
부서질 것처럼 여린 어깨와 달리 확실한 대답이었다. 비틀리지 않은 굳건한 눈이 계를 반듯하게 향했다.
“돌아가라. 공주는 멀쩡하게 자비국에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가 보지 않고 어찌 알겠습니까.”
“고작 3일 치의 거리에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는데도?”
“……눈속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자비국행 공물이라 하여 안전하다 생각한 제 오산입니다.”
“…….”
계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의 앞에 선 기분이었다. 철없는 소년이 대나무 칼을 들고 싸우겠다 날뛰는 꼴을 보는 기분이었다. 규방의 처녀가 전쟁의 낭만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최선이라는 것은 없네, 공주. 실패하여 연나국 왕의 친서가 도착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장군 한 명만 온다면 모를까…….”
하염은 쓴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고국에서 쫓겨나 향하는 길인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라니.
자왕은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왜 돌아왔느냐 할 것이다. 저도 가고 싶으나 갈 수가 없었다. 이제 자비국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갈 곳이 없었다.
3화
또다시 산중턱에 해가 솟았다. 새빨간 갑주와 붉은 갈기의 말. 말 위에 올라탄 한 움큼의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어둠이 사라지고 자그마한 태양빛이 말 위에서 일렁였다. 눈이 부셔서 하염은 눈을 감았다가 아주 천천히 떴다.
낮고 서늘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었군.”
거대한 활과 벼린 무구를 등에 진 불꽃이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처리해라.”
아직은 살아 있는, 움찔거리는 적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수하 한 명이 물었다.
“한 명은 살려 둘까요?”
“필요 없다.”
“자, 잠시만요! 저희는…….”
그러나 검은 복면의 적들은 목이 베여 쓰러지고 말았다. 복면인 모두는 순식간에 쓰러졌다. 넋이 나가 있던 하염이 시체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
두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하염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놀라는 것 같기도 하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건강해 보이는군. 연나국 여인이 산 중엔 무슨 일이지?”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딱딱했다. 한순간 하염의 목구멍이 차게 얼어붙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봉하 다리가 끊겨 봉산을 넘어 하류로 가려던 차에 봉변을 당했습니다.”
“봉하 다리는 왜 건너려 했나?”
“다리 건너 갈 곳이 있었습니다. 가던 중 도적을 만나 도망하던 중이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염은 다시 인사했다.
“일행이 뒤쳐졌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염은 떨고 있는 영아를 일으켰다. 그러나 적색의 병사들은 두 여인의 앞을 둥글게 선 채 비켜서질 않았다. 병사들의 주인이 다시 말했다.
“도움을 받았으면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할 터. 네 목적을 말하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봉하 다리 건너에는 여러 나라가 있는데 어디에 목적이 있느냐.”
“생명의 은인이라 하여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를 고문하더라도?”
“……붉은 기의 주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잠깐 말 위 붉은 갑주의 사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고민을 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다.
“붉은 기의 주인을 아는가?”
“이 정세에 듣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지 못하는군.”
“네?”
하염이 되물었으나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한데 고작 들은 것뿐이라면서 어찌 그리 확신을 하나.”
“공명정대하고 올바름으로 태자께서 자비국을 이끌어 가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모를 리가 없지요.”
“혀가 천상유수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이번에는 피식 숨이 새어 나가듯이 조용한 웃음이었다. 그는 투구를 벗었다. 목 뒤로 짧게 쳐진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투구를 말 머리 옆에 매달고서 그는 말에서 내렸다.
아까처럼 쉬이 입을 열지 않고 또 지긋이 하염을 쳐다본다.
“나를 처음 보는 게 맞느냐?”
이상한 일이었다. 하염은 그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생판 처음 보는 이를 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정하지도, 친절하지도, 그리움도 없는 목소리지만 눈빛만은 하염을 계속 따라다녔다. 원하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하염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자비국 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연나국 사절의 대표, 2공주 서(糬)씨 하염(夏炎)입니다.”
“지금은 적우영 원수다.”
자비국 태자의 군영이자 태자가 직접 원수로 있는 적우영(赤羽營:태자 직속군). 가는 길은 피로 강을 만들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잔혹한 병법도 망설이지 않는 이들. 진정한 자비국의 공포라 떠들어 대던 세간의 소문을 떠올리며 하염이 살짝 무릎을 굽혔다.
타국이라 해도, 전장이라 해도 위계는 뚜렷한 법이었다. 대국의 태자 그리고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런 곳에서 원수를 뵐 줄은 몰랐습니다.”
“……나 또한 그렇다.”
말하는 목소리가 먹먹하다. 원수는 어지러운 몰골의 여인들을 보고 눈을 감았다.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는지, 습관인건지 문지르고.
아니, 하루 전부터 그랬다. 이른 새벽 장춘 어귀에 들어서 노숙하던 때. 적우영 본대 수막사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앞을 서성이던 부관 지관령이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이내 또 한 번의 깊은 날숨소리가 들려왔다. 지관령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기침하셨습니까?”
“…….”
“각하?”
지관령이 다시 물었다.
“조식(아침)도 잡수시지 않으셨는데, 뭐라도 대령할까요?”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오늘이 무슨 날이냐.”
대답 대신 물음이 던져졌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듯, 걸쇠에 긁히는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듯이 비몽사몽 들뜬 것처럼도 들렸다. 잠이 덜 깨셨나 생각하며 지관령이 대답했다.
“엊그제 춘분이 지났습니다만?”
“…….”
말이 없다. 이부자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고 숨소리도 없다. 지관령이 잠시 긴장했다. 저 천막 안에 제 주인이 맞는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지만 지관령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라호국 3부대와 한바탕하고 어제 장춘에 들어섰잖습니까.”
“…….”
“각하, 괜찮으십니까?”
“향비는?”
“향비라니요?”
“……아니다. 지금 장춘……이구나. 5년 전…….”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였다. 이상했다. 그의 상관이자 적우영의 원수(元帥:대장)는 이런 걸 묻는 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가 이토록 깊이 잠든 것도 드문 일이었다. 언제나 가장 먼저 깨서 가장 먼저 잠들곤 했다.
원수는 잠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관령이 막사 앞에서 서성거렸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원래는 더 전에 조식을 들이곤 했던 것이다.
“저……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대답은 잠시 후 막사 입구가 걷히며 들려왔다.
“채비한다.”
“네?”
걷힌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적우영 원수. 경갑옷을 다 챙겨 입지도 않고 끈을 입으로 잡아당기며 명령했다.
“지금 당장, 저강 쪽으로 이동한다.”
“저강이요? 그러면 돌아가는데요.”
“준비시켜라.”
“명 받들겠습니다!”
급한 건 다 끝났으니 쉬라 명령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지관령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두 번 묻지 않고 병사들에게 달려 나갔다.
지관령이 자리를 정리시키는 동안, 보초병이 대신 원수의 경갑옷 끈을 잡아당겨 주었다. 끈을 묶고 관을 세웠다. 손이 가슴께에 닿는 순간 그가 몸을 슬쩍 피했다.
“각하?”
“……아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가슴부터 확인했다. 화살 맞은 상처 따윈 없었다. 고통은 실제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도. 그렇다면 그간의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의 연기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5년은…….
원수는 가슴께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것이 단지 긴 꿈이든 상상이든 실제였든 그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알겠지.’
생각에 잠긴 사이 보초병이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제 막 해가 뜨는 새벽녘. 여전히 하늘은 어둑했고, 그 앞에 원수의 붉은 갑옷과 머리카락과 관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보였다.
원수가 말 위에 올라타기까지, 적우영 병사들도 어느새 짐을 꾸리고 열을 맞추어 섰다.
“출발한다!”
대답은 묵묵히. 영문을 모르는 상관의 명령에도 적우영의 눈빛은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오히려 명령을 내리는 이의 표정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확신 없는 지휘에도 원수의 목소리만은 번듯하여, 적우영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달렸다. 그리 고된 거리는 아닌지라 적우영 병사들도 말도 멀쩡했다. 다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는데, 그건 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봉산에 다다른 후에야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원수는 알아차렸다.
적우영 원수, 계(溪:시내 계)는 하염이 내려온 산길을 올려다보았다.
“자비국까지는 아직도 많은 길이 남았는데 벌써 공물과 병사를 다 잃은 건가?”
“공물과 병사는 아직 위쪽에 있습니다. 급히 몸만 피신한 터라.”
공물을 내팽개치고 홀로 몸만 보존하였으니 변명이나 다름없다. 하염의 볼이 붉어졌다. 계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곳까지 호위하지.”
제 할 말을 마치자마자 계가 말에 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화려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하염의 눈에는 선명했다. 또 하나의 해 같기도, 혹은 사내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한겨울의 동백 같기도 하다. 그 꽃잎 한 장 한 장 바람을 타고 흔들릴 때마다 피 냄새가 짙게 퍼졌다.
내달렸던 산길을 되돌아갔을 때에는 병사 세 명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적우영 병사들이 끼어들고 나서야 상황이 종결되었다. 사방이 잠잠해진 후에야 명석 장군이 공물과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내려왔다.
살아남은 이들이 도합 열두 명으로 채 한 병력이 나오질 않았다. 하염은 명석과 공물이 무사함을 확인하고서 안도했다.
명석 또한 하염이 성하게 돌아오자 안도하였다. 그는 주변에 포진한 병사들의 정체를 캐묻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서 만난 적이 없더라도 붉은 갑주는 알아볼 수 있었다.
“소군 명석. 태자 전하를…….”
“지금은 적우영 원수로 온 자리다.”
“……네. 원수 각하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나서야 그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해는 이미 졌고 몸은 만신창이다. 또 다른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부서진 마차 때문에라도 서둘러야 했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하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사이에서 명석은 잠시 망설였다.
결국 떠나기 직전에 하염 앞으로 가 머리를 숙였다.
“공주님. 후에 시신을 수습하러 와도 되겠습니까?”
자비국에 들렀다 다시 들를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염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계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모르는 이군. 궁 내 호위만 하던 이인가?”
비꼬는 말을 명석이 알아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죽은 이는 버려두면 바람이 쓸고 새가 먹어 없어질 텐데, 괜한 짓이다. 이래서야 제때 도착이나 할 수 있겠나.”
명석은 말대꾸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실상 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제껏 제 땅에서 전쟁다운 전쟁을 한 적이야 있나. 전전긍긍 적들이 피하기만을 바라면서 궁내를 지키고 기껏해야 근방의 땅에서 적들을 쫓아내는 전투가 다였던 것이다.
사정을 아는 하염이 쓰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떠난 길, 최선을 다해 가야지요.”
부서질 것처럼 여린 어깨와 달리 확실한 대답이었다. 비틀리지 않은 굳건한 눈이 계를 반듯하게 향했다.
“돌아가라. 공주는 멀쩡하게 자비국에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가 보지 않고 어찌 알겠습니까.”
“고작 3일 치의 거리에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는데도?”
“……눈속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자비국행 공물이라 하여 안전하다 생각한 제 오산입니다.”
“…….”
계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의 앞에 선 기분이었다. 철없는 소년이 대나무 칼을 들고 싸우겠다 날뛰는 꼴을 보는 기분이었다. 규방의 처녀가 전쟁의 낭만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최선이라는 것은 없네, 공주. 실패하여 연나국 왕의 친서가 도착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장군 한 명만 온다면 모를까…….”
하염은 쓴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고국에서 쫓겨나 향하는 길인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라니.
자왕은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왜 돌아왔느냐 할 것이다. 저도 가고 싶으나 갈 수가 없었다. 이제 자비국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갈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