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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4화
“친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비국 황좌 앞에 가지고 가겠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곧게 등을 폈다. 어깨는 작지만 늠름하였고 허리까지 출렁이는 머리카락은 새까만 눈과 함께 빛이 났다. 강한 의지에 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겠지. 공주는 반드시 그럴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순간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다시 냉랭해졌다.
“알고 있나.”
곧은 하염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긴다.
“‘무슨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여인에게는 더구나.”
끓는 속을 참으며 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키가 세 뼘이나 큰지라 위압감에 하염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에도 지지는 않겠다는 듯 똑바로 바라보기에, 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모르네. 하기야. 화단의 목단은 일찍 죽는다고들 하던데.”
하염이 파르르 미소를 지었다.
“3년이나 전장에 있으셨던 각하의 고충은 저로서는 알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희 왕께서 믿고 맡겨 주신 일이니 따라야지요.”
하염의 미소에 내포된 것은 충절이 아니라 포기였다. 계는 또한 제 속의 무엇이 답답한지 손을 내려놓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아웅다웅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울먹이는 마부, 피칠갑에 벌써 지친 나약한 병사들, 마음 여린 장군은 벌써부터 얼굴 가득 근심이 가득했다.
시골 문파의 강호 초행길과 다를 바가 없다. 오지랖 넓은 이들이라면 따라다니며 걱정할 몰골이었다. 게다가 산처럼 쌓인 공물은 또 어쩐단 말인가.
계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의 시선이 다시 하염의 다소곳한 옆모습으로 돌아와, 의연한 그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소리쳤다.
“들어라! 공물에 적우영 기를 달아라. 호위 스무 명을 추려 동행한다.”
정렬로 기다리던 적우영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턱수염이 가득한 남자가 달려 나와 계 앞에 꼿꼿이 섰다.
“부관 지관령. 명 이행합니다. 스무 명은 임의로 선발하였습니다.”
그 뒤로 스무 명의 병사들이 2열로 섰다. 계는 그들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관령 그대는 멀리 갈 것 없이 한발 늦게 따라 오도록. 나는 이들과 함께 가겠다.”
“예, 각하! 지금 바로 명 이행합니다.”
돌아서는 지관령의 얼굴에는 자못 미소가 퍼졌다. 반대로 선발된 스무 명은 원수와의 동행에 아차 싶어 하며, 난감함을 숨겼다.
어쨌든 적우영 원수의 결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계는 하염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정을 했다. 거기에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하염이,
“적우영이 호위해 주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저희와 함께 가면 걸음이 느려질 텐데 괜찮습니까?”
하고 물어본 게 다였다.
“어차피 자비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공물을 잃어버리면 우리도 좋을 건 없지.”
계는 불같은 모습과 달리 차갑고 냉랭하다. 하염이 고개를 숙여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그사이 준비가 끝나 출발을 고했다. 소란했던 산중은 이제 적막하여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적우영의 기는 과연 대단하였다. 그토록 공격하던 이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마차는 안전하게 산을 내려왔다.
밤이 되어, 무리가 머물게 된 민가 주변에도 적우영 병사들이 진을 쳤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횃불 아래 검붉게 펄럭이는 기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염은 영아와 한 방에 들어갔다. 영아가 잠자리를 보았고 씻을 물을 떠 왔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평소와 전혀 다른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하염은 도통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져 갔다.
눈을 감으면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눈꺼풀 위에 내려쬐었다. 말 위에서 빛나던 불꽃이 생각났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위압,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빛. 기묘한 공존이었다. 뜨겁다고 하기엔 너무나 차갑고 또…….
하염은 몇 가지 수식어를 더 떠올리다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산을 돌아 저강 하류로 내려 온 뒤에도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봉하 다리만 한 곳이 없으니 수야국 경계까지 가서 배를 타야 했다.
“다행히 수야국은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안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수야국의 두 왕자가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건 채 얼마 전의 일이다.
줄어든 병사들 때문에 하염은 마차를 버리고 말에 올랐다. 활을 어깨에 메고 머리카락을 묶었음에도 여전히 여린 모습이었다.
가장 앞쪽으로 계와 하염이 나란히 갔고 그 뒤로는 공물 마차와 병사들이 뒤섞여 따라갔다. 인원수에 비해 조용한 행렬이었다. 가끔 말이 푸드득거리는 소리, 연나국 병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떼 지어 나는 철새의 울음소리가 났다. 연나국 사람들은 갑자기 동행하게 된 자비국 병사들을 경계하는 한편 안도했다.
공물 위에 꽂힌 붉은 기가 고고하게 흔들렸다. 그 도적들이 누구인가 하염은 생각해 봤지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명석과 얘기해 보아도 말이 엇갈렸다. 둘은 일단 그 문제를 덮어 두기로 했다.
한편 수야국 강변의 너른 들판이 나왔다. 하염이 부러운 눈길로 강변을 훑었다.
“이런 땅이 연나국에도 있었더라면.”
은세공과 가락이 훌륭한 연나국에는 풍족한 땅이 부족했다. 곡식을 들여와 먹어야만 했기에 금이 되는 장물에 더욱 공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굶는 이 없이 백성들이 살쪘을 텐데.”
바로 옆에서 소리를 듣고 계가 웃었다.
“연나국에 있었더라면 이미 뺏기고도 남았겠지.”
“그럴까요.”
“가끔은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 살아남곤 하니까.”
계의 말에는 독이 서려 있다. 하염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짐작했다. 계의 속에 품은 어둡고 깊은 무엇인가가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하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 가지 않아 반대쪽에서 사람 무리가 다가왔다. 짐을 이고 진 그들은 열심히 강둑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하염 일행을 보고는 지레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도망 전에 계의 명령이 더 빨랐다.
“붙잡아라!”
사람들이 붙잡혀 그들 앞으로 끌려왔다. 반백 노인들과 남녀 젊은이 3명, 어린 아이 4명이다.
“감히 앞길을 막다니. 불경죄로 다스려라.”
계의 목소리는 엄하기보단 무심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듯이.
당연하지 않나. 불경죄의 벌은 죽음뿐이고, 이들은 정체 모를 이들이었다. 질겁한 연나국 병사와 달리 적우영 병사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힘없는 이들이 바로 붙잡혀 고꾸라졌다.
“그만두세요!”
하염의 외침에 명석이 칼날을 뽑아 들었다. 노인의 목을 베려던 적우영 병사의 칼날을 막아 냈다. 챙 하고 맑은 소리가 고요 속에 퍼지자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계가 하염을 돌아본다.
“무슨 짓이지?”
“피난민입니다. 죽여서는 안 돼요.”
“피난민임을 확신할 수 있나?”
“그야 보면…….”
“보는 걸로 어찌 알지?”
그제야 살아남은 이들이 고두하고 울먹였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살려고 도망친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발, 저희 어머님을…….”
“공자님, 공녀님. 부디 살려 주십시오!”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계는 무뚝뚝해진 얼굴을 돌렸다. 적우영 병사들이 붙잡은 이들의 몸을 수색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칼도 수상한 무엇도 나온 것이 없었다. 그제야 계는 칼을 치우라 명령했다.
하염이 손을 뻗어 계의 손 위에 얹었다.
“고맙습니다, 원수.”
고개 숙인 피난민들이 고하기를, 전날 밤에 수야국에서 라호국 칠기대(漆騎隊:라호국 기마부대)와 전투가 벌어지면서 수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였다.
“적들이 오면 이 들판도 다 불태울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희는 계속 도망갈 수밖에요.”
“라호국 칠기대가 수야국에? 확실한가?”
하염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저, 저희야 윗분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요. 여하튼 말들이 다 거대해서 사람들도 다 밟아 죽이더이다.”
라호국 기마병인 칠기대의 명성은 유명했다. 적우영의 맞수이기도 했다. 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뒤돌아 병사 한 명에게 은밀하게 지시하는 사이, 하염은 품에서 은자 몇 푼과 제 인장을 찍은 종이를 영아에게 건네주었다. 영아가 그것들을 피난민들에게 주었다.
“그걸 들고 북쪽으로 쭉 올라 봉산을 지나면 연나국이 나옵니다. 한동안은 전쟁에 안전할 테니 그곳에 정착하세요. 문지기에게 이걸 보여 주면 통과시켜 줄 겁니다.”
“아이고! 공녀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비국의 적인 라호국. 그러나 하염의 모친 난비는 라호국 사람이고, 첫째 자매는 라호국 공자에게 시집을 갔다. 연나국이 전쟁에 끼어들게 된 이유도 처음에는 라호국와 자비국의 전쟁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국에는 자비국과 손을 잡게 되었지만, 모친이 안 계신 지금에야 그 무슨 상관이랴.
하염은 그저 전쟁에 휘둘린 사람들, 저를 포함한 피난민과 피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가여울 뿐이었다.
행렬은 다시 출발했다. 걸음은 한껏 느려졌다. 새로 길을 짜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호국이 끼어들었다면 붉은 기를 보는 순간 싸움이 벌어질 위험이 컸다.
고민을 하던 하염에게 계가 앞뒤 자르고 물었다.
“어째서인가?”
“네?”
“왜 그들을 그리 보살피나.”
나아가려는 말고삐를 쥐고 하염을 빤히 보고 있었다. 곧게 뻗는 눈빛이었다.
“난리에 고향도 재산도 잃고 헤매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전란의 피해자일진데 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니 다행이 아닙니까.”
“매사 그러는가?”
“네?”
“여기저기에 손을 뻗는가 하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비꼬는 말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물음에 하염도 성심껏 대답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이들을 돕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제 손이 닿는 이들이라면요.”
“부모의 원수라도?”
“그건…….”
“아니면 그대를 희롱한 이라도?”
말이 막혔다.
“……잘 모르겠습니다.”
확답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강한 원한이라는 것을 하염은 가져 본 적이 없다. 왕궁 밖 사가에 있을 때에도, 왕궁에 들어가 다른 형제들에게 괄시받을 때에도. 그것은 하염이 참고 넘길 일이었지 원한을 가질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제 모친 난비의 죽음에도 원한은 없었다.
계가 쓰게 웃었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 참 무미건조하고도 부러운 삶이로다.”
혼잣말로 하고 가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하염의 가슴 속에 쿡 박혀 왔다. 앞서가는 계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은 손으로 가슴팍의 노리개를 움켜쥐었다.
4화
“친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비국 황좌 앞에 가지고 가겠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곧게 등을 폈다. 어깨는 작지만 늠름하였고 허리까지 출렁이는 머리카락은 새까만 눈과 함께 빛이 났다. 강한 의지에 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겠지. 공주는 반드시 그럴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순간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다시 냉랭해졌다.
“알고 있나.”
곧은 하염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긴다.
“‘무슨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여인에게는 더구나.”
끓는 속을 참으며 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키가 세 뼘이나 큰지라 위압감에 하염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에도 지지는 않겠다는 듯 똑바로 바라보기에, 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모르네. 하기야. 화단의 목단은 일찍 죽는다고들 하던데.”
하염이 파르르 미소를 지었다.
“3년이나 전장에 있으셨던 각하의 고충은 저로서는 알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희 왕께서 믿고 맡겨 주신 일이니 따라야지요.”
하염의 미소에 내포된 것은 충절이 아니라 포기였다. 계는 또한 제 속의 무엇이 답답한지 손을 내려놓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아웅다웅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울먹이는 마부, 피칠갑에 벌써 지친 나약한 병사들, 마음 여린 장군은 벌써부터 얼굴 가득 근심이 가득했다.
시골 문파의 강호 초행길과 다를 바가 없다. 오지랖 넓은 이들이라면 따라다니며 걱정할 몰골이었다. 게다가 산처럼 쌓인 공물은 또 어쩐단 말인가.
계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의 시선이 다시 하염의 다소곳한 옆모습으로 돌아와, 의연한 그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소리쳤다.
“들어라! 공물에 적우영 기를 달아라. 호위 스무 명을 추려 동행한다.”
정렬로 기다리던 적우영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 사이에서 턱수염이 가득한 남자가 달려 나와 계 앞에 꼿꼿이 섰다.
“부관 지관령. 명 이행합니다. 스무 명은 임의로 선발하였습니다.”
그 뒤로 스무 명의 병사들이 2열로 섰다. 계는 그들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관령 그대는 멀리 갈 것 없이 한발 늦게 따라 오도록. 나는 이들과 함께 가겠다.”
“예, 각하! 지금 바로 명 이행합니다.”
돌아서는 지관령의 얼굴에는 자못 미소가 퍼졌다. 반대로 선발된 스무 명은 원수와의 동행에 아차 싶어 하며, 난감함을 숨겼다.
어쨌든 적우영 원수의 결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계는 하염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정을 했다. 거기에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하염이,
“적우영이 호위해 주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저희와 함께 가면 걸음이 느려질 텐데 괜찮습니까?”
하고 물어본 게 다였다.
“어차피 자비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공물을 잃어버리면 우리도 좋을 건 없지.”
계는 불같은 모습과 달리 차갑고 냉랭하다. 하염이 고개를 숙여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그사이 준비가 끝나 출발을 고했다. 소란했던 산중은 이제 적막하여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적우영의 기는 과연 대단하였다. 그토록 공격하던 이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마차는 안전하게 산을 내려왔다.
밤이 되어, 무리가 머물게 된 민가 주변에도 적우영 병사들이 진을 쳤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횃불 아래 검붉게 펄럭이는 기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염은 영아와 한 방에 들어갔다. 영아가 잠자리를 보았고 씻을 물을 떠 왔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평소와 전혀 다른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하염은 도통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져 갔다.
눈을 감으면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눈꺼풀 위에 내려쬐었다. 말 위에서 빛나던 불꽃이 생각났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위압,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빛. 기묘한 공존이었다. 뜨겁다고 하기엔 너무나 차갑고 또…….
하염은 몇 가지 수식어를 더 떠올리다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산을 돌아 저강 하류로 내려 온 뒤에도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봉하 다리만 한 곳이 없으니 수야국 경계까지 가서 배를 타야 했다.
“다행히 수야국은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안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수야국의 두 왕자가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건 채 얼마 전의 일이다.
줄어든 병사들 때문에 하염은 마차를 버리고 말에 올랐다. 활을 어깨에 메고 머리카락을 묶었음에도 여전히 여린 모습이었다.
가장 앞쪽으로 계와 하염이 나란히 갔고 그 뒤로는 공물 마차와 병사들이 뒤섞여 따라갔다. 인원수에 비해 조용한 행렬이었다. 가끔 말이 푸드득거리는 소리, 연나국 병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떼 지어 나는 철새의 울음소리가 났다. 연나국 사람들은 갑자기 동행하게 된 자비국 병사들을 경계하는 한편 안도했다.
공물 위에 꽂힌 붉은 기가 고고하게 흔들렸다. 그 도적들이 누구인가 하염은 생각해 봤지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명석과 얘기해 보아도 말이 엇갈렸다. 둘은 일단 그 문제를 덮어 두기로 했다.
한편 수야국 강변의 너른 들판이 나왔다. 하염이 부러운 눈길로 강변을 훑었다.
“이런 땅이 연나국에도 있었더라면.”
은세공과 가락이 훌륭한 연나국에는 풍족한 땅이 부족했다. 곡식을 들여와 먹어야만 했기에 금이 되는 장물에 더욱 공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굶는 이 없이 백성들이 살쪘을 텐데.”
바로 옆에서 소리를 듣고 계가 웃었다.
“연나국에 있었더라면 이미 뺏기고도 남았겠지.”
“그럴까요.”
“가끔은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 살아남곤 하니까.”
계의 말에는 독이 서려 있다. 하염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짐작했다. 계의 속에 품은 어둡고 깊은 무엇인가가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하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 가지 않아 반대쪽에서 사람 무리가 다가왔다. 짐을 이고 진 그들은 열심히 강둑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하염 일행을 보고는 지레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도망 전에 계의 명령이 더 빨랐다.
“붙잡아라!”
사람들이 붙잡혀 그들 앞으로 끌려왔다. 반백 노인들과 남녀 젊은이 3명, 어린 아이 4명이다.
“감히 앞길을 막다니. 불경죄로 다스려라.”
계의 목소리는 엄하기보단 무심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듯이.
당연하지 않나. 불경죄의 벌은 죽음뿐이고, 이들은 정체 모를 이들이었다. 질겁한 연나국 병사와 달리 적우영 병사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힘없는 이들이 바로 붙잡혀 고꾸라졌다.
“그만두세요!”
하염의 외침에 명석이 칼날을 뽑아 들었다. 노인의 목을 베려던 적우영 병사의 칼날을 막아 냈다. 챙 하고 맑은 소리가 고요 속에 퍼지자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계가 하염을 돌아본다.
“무슨 짓이지?”
“피난민입니다. 죽여서는 안 돼요.”
“피난민임을 확신할 수 있나?”
“그야 보면…….”
“보는 걸로 어찌 알지?”
그제야 살아남은 이들이 고두하고 울먹였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살려고 도망친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발, 저희 어머님을…….”
“공자님, 공녀님. 부디 살려 주십시오!”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계는 무뚝뚝해진 얼굴을 돌렸다. 적우영 병사들이 붙잡은 이들의 몸을 수색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칼도 수상한 무엇도 나온 것이 없었다. 그제야 계는 칼을 치우라 명령했다.
하염이 손을 뻗어 계의 손 위에 얹었다.
“고맙습니다, 원수.”
고개 숙인 피난민들이 고하기를, 전날 밤에 수야국에서 라호국 칠기대(漆騎隊:라호국 기마부대)와 전투가 벌어지면서 수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였다.
“적들이 오면 이 들판도 다 불태울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희는 계속 도망갈 수밖에요.”
“라호국 칠기대가 수야국에? 확실한가?”
하염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저, 저희야 윗분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요. 여하튼 말들이 다 거대해서 사람들도 다 밟아 죽이더이다.”
라호국 기마병인 칠기대의 명성은 유명했다. 적우영의 맞수이기도 했다. 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뒤돌아 병사 한 명에게 은밀하게 지시하는 사이, 하염은 품에서 은자 몇 푼과 제 인장을 찍은 종이를 영아에게 건네주었다. 영아가 그것들을 피난민들에게 주었다.
“그걸 들고 북쪽으로 쭉 올라 봉산을 지나면 연나국이 나옵니다. 한동안은 전쟁에 안전할 테니 그곳에 정착하세요. 문지기에게 이걸 보여 주면 통과시켜 줄 겁니다.”
“아이고! 공녀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비국의 적인 라호국. 그러나 하염의 모친 난비는 라호국 사람이고, 첫째 자매는 라호국 공자에게 시집을 갔다. 연나국이 전쟁에 끼어들게 된 이유도 처음에는 라호국와 자비국의 전쟁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국에는 자비국과 손을 잡게 되었지만, 모친이 안 계신 지금에야 그 무슨 상관이랴.
하염은 그저 전쟁에 휘둘린 사람들, 저를 포함한 피난민과 피를 뒤집어쓴 병사들이 가여울 뿐이었다.
행렬은 다시 출발했다. 걸음은 한껏 느려졌다. 새로 길을 짜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호국이 끼어들었다면 붉은 기를 보는 순간 싸움이 벌어질 위험이 컸다.
고민을 하던 하염에게 계가 앞뒤 자르고 물었다.
“어째서인가?”
“네?”
“왜 그들을 그리 보살피나.”
나아가려는 말고삐를 쥐고 하염을 빤히 보고 있었다. 곧게 뻗는 눈빛이었다.
“난리에 고향도 재산도 잃고 헤매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전란의 피해자일진데 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니 다행이 아닙니까.”
“매사 그러는가?”
“네?”
“여기저기에 손을 뻗는가 하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비꼬는 말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물음에 하염도 성심껏 대답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이들을 돕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제 손이 닿는 이들이라면요.”
“부모의 원수라도?”
“그건…….”
“아니면 그대를 희롱한 이라도?”
말이 막혔다.
“……잘 모르겠습니다.”
확답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강한 원한이라는 것을 하염은 가져 본 적이 없다. 왕궁 밖 사가에 있을 때에도, 왕궁에 들어가 다른 형제들에게 괄시받을 때에도. 그것은 하염이 참고 넘길 일이었지 원한을 가질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제 모친 난비의 죽음에도 원한은 없었다.
계가 쓰게 웃었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 참 무미건조하고도 부러운 삶이로다.”
혼잣말로 하고 가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하염의 가슴 속에 쿡 박혀 왔다. 앞서가는 계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은 손으로 가슴팍의 노리개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