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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5화




나루터가 있는 곳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밥 짓는 연기는 아니었다. 검고 뭉그러진 구름 모양이라, 전쟁이 끝난 후의 것이었다.

행렬은 잠시 멈추었다. 명석은 병사 셋을 보내 누가 승리하였는지 알아보라 했다. 이제는 엄연히 수야국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수야국이 승리했다면 허락을 구하면 될 일이다만, 라호국이 이겼을 때에는 전투도 불사해야 했다.

선두로 보낸 병사들은 금방 돌아왔다. 약속대로 푸른 두건을 흔드는 것을 보자 일행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호국의 칠기대가 무너지고 수야국의 푸른 어(魚)자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하였다.

“라호국 칠기대라 하면 육전(陸戰:육지 전투)에는 적우영 버금가는 이들인데, 노 젓는 수야국 어군(漁軍:수군)이 이겼단 말인가?”

명석의 의문은 타당했다. 수야국의 어군이 유명하긴 해도 육지에서 칠기대를 맞설 만큼은 아닌 것이다. 계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고 하염은 거들었다.

“어군이 방비를 단단히 하였나 보군요.”

“그래 봤자 물고기나 잡던 이들이지.”

계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자신감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가 이끄는 적우영의 유일한 맞상대는 아직까지도 칠기대뿐인 것이다.

하염은 오래전에 왕궁에서 들었던 소식을 떠올렸다. “적우영과 칠기대가 사흘 밤낮동안 구야산에서 전투를 치렀대요.”라고 떠들던 말들. 연나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적우영의 진면목이 처음으로 드러났던 전투. 험준하기로 유명한 구야산에서의 치열한 공방은 결국 적우영의 승리로 끝났다. 그곳에서 라호국의 왕자와 다섯 장군의 수급을 벤 적우영 원수는 고작 스무 살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자비국 사람들은 적우영과 젊은 태자를 칭송하였다. 타국은 붉은 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대단한 승리라고 모두가 칭송했지만 사실은 적우영 또한 수많은 피해를 보았다.

피로 뒤덮인 산은 마치 가을빛처럼 온통 붉었었다. 계가 이를 악물고 키웠던 적우영 병사들은 피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는 텅 빈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들과 서서 적의 시체와 뒤섞인 아군의 시체에 불을 붙였다. 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매캐한 냄새가 온 하늘을 뒤덮었고 구야산은 검게 벌거벗게 되었다.

‘적우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그 직후였다. 적의 피로 물든 꿩 깃. 다만 그것이 어찌 적의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일단 출발하지.”

그 태자가 말을 몰았다. 어쨌든 그들은 저강을 건너는 일이 더욱 급하였다. 뒤를 이어 하염과 수레도 움직였다.

느린 마차 걸음으로 일각 정도를 가니 수야국의 불탄 성곽이 보였다. 성곽 앞에는 지방관과 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염이 대표로 앞서 나갔다. 명석이 호위차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계도 그 점에는 동의했다. 아무리 원한이 없다 하더라도 적우영의 잔혹함이 전국에 알려진 바, 수야국에서 적우영의 방문을 반길 리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라호국과의 전투를 마친 뒤니 자비국의 이름은 최대한 뒤로 빼는 것이 좋았다.

하염은 살랑살랑 웃는 얼굴로 노쇠한 지방관을 대했다. 말을 타고 움직였다 하나 하염의 나긋나긋한 비단옷 차림은 전쟁터에서는 충분이 돋보였다.

분위기는 좋았다. 지방관은 공물과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힐끔 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계의 코앞까지 와서 경례를 표했다.

“적우영 원수 각하를 이렇게 뵙는군요. 소신 ‘수야국’ 난주(州) 주사입니다.”

“얘기를 들었겠지?”

“예. 공주님께서 나루와 배를 빌리신다고…….”

주사가 말을 끄는 것이 심상치 않다. 계가 다시 물었다.

“문제가 있나?”

난주 주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실은 전쟁 통에 나루와 배가 불타 새로 건조 중입니다.”

“얼마나 걸리지?”

“연나국 공주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만이면 모를까 저 짐들을 옮길 배를 만들려면 족히 이레(7일)는 더 걸립니다.”

“…….”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사이에 하염이 다가왔다. 난주에서 머물며 기다리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난주 주사가 싱글벙글하며 말을 덧붙였다.

“마침 세자 저하께서 난주에 계십니다. 라호국 칠기대를 친히 무찌르셨지요. 태자 전하와 공주님이 오신다면 기꺼이 대접할 것입니다. 부디 쉬시다 가시지요.”

계는 영 껄끄러운 표정이었으나 별도리가 없다. 또 다른 길을 찾아갈 바에는 이레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 하구로 내려가면 완전 수야국의 안방이니 더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지친 몸을 끌고 난주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적우영 마지막 병사가 성문을 지났을 때, 멀리 북쪽 숲 쪽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다리 끝에는 붉은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수야국의 세자 하(河)씨 ‘재진(材榗)’은 수야국 사람치고는 호탕한 성격이었다. 재진은 제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더욱 컸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로부터 수야국은 풍족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장사를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수야국 사람이란 장삿속 밝고 돈에 사족을 못 하는 부류로 칭해지곤 했다. 의리나 도보다는 황금과 돈을 탐하는 속물이라 은근히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물론 수야국 사람들은 그런 것을 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잔머리와 꾀야말로 전국전쟁에서 한 몸 온전히 건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둘째가 먼저 라호국을 끌어들여 수호 조약을 어겼으니 나도 지킬 이유가 없지.”

세자 재진의 말에 관리가 손을 비벼 댔다.

“그렇고 말고요, 저하. 독에는 독으로, 바깥의 적은 바깥의 적으로 잡는 법이지요.”

기분 좋아진 재진이 크게 웃었다.

“적우영을 끌어들이라는 건가? 하하, 칼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리 병법을 잘 아나.”

“그야 전하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일단 태자를 만나 보고 결정할 일이야. 적우영을 들였지만 놈들 명성이 대단하니 어군에 긴장을 늦추지 말라 해라.”

“예, 저하.”

“뭐. 명성이야 언제든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그렇습니다. 적우영과 맞섰다는 라호국의 칠기대를 저하께서 무찌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아주 형편없었어.”

“그들이 형편없는 게 아니라 저하께서 대단하신 겁니다.”

“하여간 자네는 못 하는 말이 없군, 그래. 이름과 직책이 뭐라 했지?”

“난주 소주사 지룬입니다.”

“주사는 지루한 말만 늘어놓던데. 자네가 왜 소주사인지 모르겠군.”

“하하, 좋게 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는 무렵, 주사가 손님들을 모시고 난주성에 들어섰다는 전갈이 왔다. 재진은 흐뭇한 얼굴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에는 미리 말해 둔 대로 각종 음식들이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구수한 머리고기 냄새와 생선 냄새, 그리고 각종 이파리와 향신료 향기가 섞여 진동하였다. 이미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의 말로만 듣던 붉은 머리에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 그리고 흰 목덜미와 흰 이마, 섬세한 자수가 놓인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재준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오자 여인이 먼저 일어섰다.

“수야국 세자 되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연나국 공주 서씨 하염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힐끗 하염을 본 후 재진의 시선이 계에게로 향했다. 계는 찻잔만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부는 곳이라 차 맛이 좋지 않군.”

계에게서는 냉소적인 혼잣말만 나올 뿐이었으나 재진은 먼저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비국 태자 전하께선 꼭 여인처럼 차만 드시는군요.”

재진의 눈이 반짝거렸다. 소갈머리 없는 모습에 계가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는 게 꼭 라호국 놈들 같은데. 예의도 없고.”

“귀한 손님들을 만났더니 기분이 좋아 그렇습니다.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하씨 재진. 재진이라 부르시죠.”

“얼굴을 보았으니 내정된 방으로 갈까 하는데.”

딱 잘라 말하는 투가 냉랭하여 하염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재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레나 있어야 하는데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식사는 하셔야지요.”

넉살 좋은 대답과 과장된 웃음이었다. 계는 그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로 저런 이들은 진짜 속을 숨겨 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재진 덕분에 식사 자리는 떠들썩했다. 연신 재미없는 농담을 지껄이는데, 하염을 무시하고 계에게만 말을 걸었다. 아마 그 자리에 명석이 있었다면 제 공주가 괄시받음에 울컥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하염에게 그의 무관심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음식이 문제였다.

사가에서 자란 터라 음식 가리는 일 없는 하염이지만 낯선 수야국의 음식은 비린내가 심하여 잘 먹지를 못했다. 계는 떠들어 대는 재진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고 말이다.

덕분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하염과 계는 지쳐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계와 합류한 뒤 쉴 새 없는 강행군에 하염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반면 계는 새벽까지 동태를 살피다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타지를 떠도는 생활에 그는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잠자리가 예민한 탓에 쉬이 눈을 붙이지 못했다. 특히 이런 화려한 방에서는.

똑똑똑. 환영 속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도 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달이 높이 떠오를 때까지도 이어졌고 환상처럼 아득하게 사라져 갔다. 그제야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시체처럼 앉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잠이 들었다.

소리도 없이, 달이 기우는 때까지, 적막함 속에서. 계의 밤은 길지 않았다.



2장. 금(琴)과 적(赤)


다음 날, 하염은 난주 거리로 나왔다. 전쟁으로 여기저기 불타고 무너졌지만 거리 자체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 목재를 옮기고 벽을 쌓으며 재축하고 있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굴러다니는 화살촉과 칼날을 주워 모았다. 또 어떤 아이들은 무너진 집에서 음식들을 몰래 주어 달아났다.

그런 모습만으로도 하염의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전쟁이라고는 서책과 통문으로만 들어본 것이 다였기 때문이었다.

계의 말대로 하염은 정원의 목단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규중 여인들의 ‘걱정’과 서책의 고귀한 ‘충절’ 말고는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공녀님. 먹을 것 좀 주세요.”

아이 한 명이 발치에 매달렸다. 호위로 데려온 병사 두 명이 막아서려고 했으나 하염이 손을 저었다.

“먹을 것은 줄 게 없는데.”

“그럼 제발 아무거나 주세요, 공녀님.”

하염이 매달리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놀란다.

“여자아이구나!”

노리개 하나를 아이의 손에 건네었다.

“먹을 것이 아니라 미안하구나. 여자아이니 예쁜 것을 주마. 돈이 급할 때 장사꾼에게 팔면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다.”

아이는 노리개를 이로 한 번 물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총총걸음으로 가 버렸다. 매달릴 때와 달리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병사는 불만 어린 얼굴이 되었다.

“거지에게 뭘 그런 것까지 주십니까.”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냐.”

거리 한복판에서 그런 모습이 주목받지 않을 리가 없다. 각자 제 할 일을 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한 명 두 명 다가오기 시작했다.

“공녀님은 누구십니까.”

“수야국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귀하신 공녀님, 저 아이는 소매치기를 일삼는 못돼 먹은 아이입니다. 차라리 저희를 가엾이 여겨 주십시오.”

불 탄 거리에 나타난 귀한 여인. 아이에게 선뜻 비싼 노리개를 선물하는 여인을 향해 난주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다. 거지도 아니매 전쟁으로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손익을 계산하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공으로 돈이 생기는 일에 마다할 이들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난주 사람들은 거지 행세를 하며 여인에게 매달렸다.

여인, 하염은 처음에는 주머니를 털어 한 푼 한 푼 나누어 주었으나 이내 돈이 떨어지고 말았다. 진짜로 돈을 주니 더욱 탐내며 모여들었던 것이다. 고작 두 명뿐인 병사들도 사람들을 막아서기가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