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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다(외전증보판)
1. 쉬었다 가도 늦지 않다(1)
쾅.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재석의 인상이 영 심상찮았다. 재석은 사뭇 화난 얼굴로 진욱의 책상 앞에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사장님.”
“왜, 한 실장님.”
진욱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재석을 올려다봤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가 목소리를 아래로 깔고 저를 사장님이라 부를 때면 좋은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아는 진욱이었다.
“나, 살려 줘.”
“응. 살아.”
“이 자식이!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농담이 아니면 뭔데? 다짜고짜 살려 달라니.”
장난스러운 진욱의 반응에도 재석은 여전히 심각했다.
“호준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단다.”
재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일이 하기 싫대?”
“일이 왜 하기 싫어. 광고라면 끔뻑 죽는 애가.”
“그럼 시답잖은 소리 말고 계속 열심히 일하라고 해. 바쁜데 시간 뺏지 말고.”
제 할 말을 다한 진욱은 두툼한 서류를 넘겨 봤다.
“하아, 어쩌다 내가 이런 놈이랑 엮여서.”
책상에 시선을 두고 있는 진욱을 보니 재석은 기가 막혔다.
“뭐? 본론을 말해.”
서류 검토할 게 많아 숨 쉴 틈도 없는데 오늘따라 재석이 자꾸만 딴죽을 걸었다.
“강 대리 없으면 우리는 죽음이야. 셋이서 어떻게 일을 해? 그러니까 호준이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지.”
“강 대리, 어디 가? 왜 셋이 일해?”
“허허. 이 어이없는 놈. 이런 게 사장이라고.”
“응?”
진욱은 재석의 허탈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진심으로 몰라서 그런 해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야?”
“강 대리 무슨 일 있어? 심각한 일이야?”
“이 녀석, 어휴.”
재석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장아, 강 대리 곧 출산 휴가 들어가잖아. 배가 남산만 한데. 잊어버렸던 거야?”
“아, 맞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임신했다는 말 들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맞다? 아이고, 이런 걸 사장이라고. 세계 광고제에서 수두룩하게 상을 받으면 뭐 하냐고. 아무리 감동적인 광고를 만들면 뭐 하냐고.”
재석은 진열장에 늘어선 상패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현실 세계에서는 일 빼고 모든 것에 무심함의 절정인데.”
재석은 진욱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걸 꾹 참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책임지고 사람 구하겠다고 말해 놓고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강 대리 산휴 가고 나면 나랑 호준이밖에 없다고. 그러니 호준이가 미치려고 하지.”
“미안, 미안. 내가 요새 너무 정신이 없었다.”
진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골머리를 썩고 있던 에너지 절약 공익 광고 때문에 직원 채용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내가 또 깜빡하면 안 되니까 말 나온 김에 당장 네가 알아봐.”
“정말이지?”
재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강 대리 몸 무거워서 내일이라도 쉬고 싶을 텐데. 출산하면 육아 휴직도 낼 거고. 당연히 충원해야지. 일 똘똘하게 할 사람으로 네가 잘 뽑아 봐.”
진욱은 머리를 의자 헤드에 기대고는 웃으며 말했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서론이 너무 길다 싶었더니 결국에는 직원 한 명 더 뽑자는 말이었다.
“오케이.”
진욱의 승낙이 떨어지자 재석은 신이 나서 사장실을 나섰다.
“호준아, 사장님이 직원 채용 공고 내란다.”
재석의 말을 듣자마자 호준은 좋아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그럼. 알아서 하라니까 우리가 잘 뽑아 보자. 리크루트에 전화해서 광고 분야 경력자들 이력서 받아 둔 거 있는지 알아봐.”
“넵.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앗싸, 내 밑으로 한 명 생긴다.”
호준이는 일사천리로 전화를 걸어 경력자를 파악했다.
“실장님, 다행이에요. 저 없으면 호준 씨랑 실장님, 두 분이서 힘들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다희는 볼록하게 솟아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강 대리는 아무 걱정 말고 순산이나 하고 와. 책상 안 빼고 기다릴 테니 몸조리 잘하고. 육아 휴직도 쓰고.”
“네, 감사합니다.”
어느새 리크루트 경력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끝낸 호준이 재석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청명했던 가을의 하늘과는 다르게 겨울의 하늘은 더욱 파래서 오히려 시리게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성큼 발을 들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알록달록하던 나뭇잎은 제법 차갑게 느껴지는 새벽 공기 때문인지 하룻밤 사이에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을 휘감는 매서운 바람은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미게 했다. 바람이 부는 걸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서늘한 아침이었다.
“젠장…….”
둔탁하게 창을 두드리는 겨울바람은 숨소리만 가득한 사무실 분위기를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회사 하반기 인사고과가 발표되는 날. 모두들 관심 없는 척, 태연한 척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조심스럽게 고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어 했고, 어떤 이는 내일 회사를 나와야 하는 건지 이제는 정말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품 안에 숨겨 둔 고민을 꺼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으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치열한 경쟁의 공간.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득한 전쟁터. 그 속에서 고다는 패자였다.
“휴우…….”
작게 내뱉은 고다의 탄식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인턴 미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대리님, 별로예요?”
미라의 물음에 고다는 애써 덤덤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고다의 입가에는 경련이 생길 듯했다. 속마음을 감추고 싶었지만 도무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다의 어색한 표정으로 대충 눈치를 챈 미라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정말 이번에도 고과 안 좋은 거예요?”
대답 대신 고다는 그저 싱긋 웃어 줄 뿐이었다.
“부장님 너무하시네.”
누가 들을까 미라는 좀 전보다 한층 낮게 소곤거렸다.
“상반기 히트 친 광고 기획도 솔직히 대리님이 다 하신 거잖아요. 대리님 이름은 쏙 빼고 부장님이 하신 것처럼 발표해서 생색내고. 새로 오신 상무님한테는 부장님만 눈도장 확실하게 찍히고. 그래 놓고는 아이디어 낸 대리님은 찬밥 취급이라니.”
“그럴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고다는 고과 확인 사이트 창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작성 중인 기획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오늘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속상해 한다고 누가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니까. 회사라는 곳은 어차피 그런 곳이었다.
“포기해야지, 뭐.”
고다의 고과는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C. 연속으로 C를 받았으니 내년 연봉은 줄어들 것이고, 다음 고과부터 연달아 A를 받지 않는 이상 제때에 과장 진급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 적당히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아는 고다지만 그래도 속이 상한 건 사실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본 적도 없는 C였다. 성적표에는 오로지 A만 있어야 한다며 악바리로 살았던 고다다.
“휴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명문대에 입학한 뒤 대한민국에서 인정해 주는 대기업 광고기획사에 최고의 성적으로 입사했다.
회사에 첫 출근 하던 날, 고다는 찬란한 꿈에 부풀었다. 능력만 있다면 최연소 임원쯤은 문제없을 거라는 오만함을 어깨에 매달고 거만한 걸음으로 위풍당당하게 1층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었다.
입사 1년 동안은 고다의 생각대로 정신없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기획안을 작성하면 어김없이 부장은 고다의 기획안을 채택해 주었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2년 차에 초고속으로 대리 특진을 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름처럼 최고를 좇아 쉬지 않았던 고다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선임부장이 임원으로 승진 발령이 나고 김 부장이 광고 3팀에 배속되면서 고다의 입지는 180도 달라졌다. 김 부장의 부하 직원이 된 그녀는 그저 그런 수많은 직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꽉 막힌 상사. 실없이 던지는 농담이 사실은 여자의 수치심을 자극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상사.
그런 최악의 상사 밑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그녀는 입사 4년 차, 대리 최고다. 승진을 위해 고과에 잔뜩 신경 써야 하는 서글픈 인생이었다.
“대리님, 이번엔 넘어가지 마세요. 부장님께 따지셔야 해요. 저기 보세요.”
미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김 부장 옆에 오 과장이 오늘도 찰싹 붙어 있었다.
“학교 후배라고 부장님은 오 과장님만 감싸 돌고. 오 과장님은 보나마나 고과 잘 받으셨을 거예요.”
“할 수 없지. 오 과장님은 곧 차장 진급도 하셔야 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착잡했다. 오 과장이 딱히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잘하는 것이 없는 게 문제였다.
김 부장은 오 과장이 내년 진급을 해야 하니 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며 대놓고 오 과장을 챙겼다. 오 과장이 진급을 해야 다음에는 고다를 챙겨 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떠벌렸기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오 과장이 진급을 한다고 해도 김 부장이 고다를 챙겨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고다는 김 부장의 수족이 되어 비위를 맞춰 가며 김 부장과 짝짜꿍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대리님. 억울하잖아요.”
그래, 억울했다. 누구보다도 고다는 억울했다. 하지만 투정을 부려 봐야 들어줄 김 부장이 아니었다.
고다의 상황을 위로라도 하고 싶은 건지 미라는 자꾸만 말을 걸었다.
미라의 착한 의도는 충분히 알지만 이미 일어난 결과를 곱씹고 되새겨 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엎어진 판은 뒤집을 수 없으니까.
“미라 씨, 우리 잠깐 나가자. 내가 커피 쏠게.”
쓰디쓴 커피라도 마셔야 고다의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고다도 알고 있다. 고과라는 것이 팀원 전체가 모두 좋게 받을 수는 없다는 걸. 누군가가 A를 받으면 누군가는 C를 받아야만 한다. 누군가가 특진을 하면 누군가는 좌천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매번 내가 그 특진자가 되거나 A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것이 조직생활이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고다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항상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직장 생활 4년 차인 고다도 진정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마음 한쪽 구석에 겨울바람이 부는 양 허한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입사할 때의 반짝이던 꿈이 점점 빛을 잃어 가며 회사의 볼품없는 부속품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나 하나 빠져도 이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공허함. 나를 대신할 사람들은 이 회사에 넘쳐나고 있다는 불안함.
단지 C라는 알파벳 한 글자 때문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대리님, 저는 달달한 거 먹을래요. 카라멜마끼아또.”
“나도 달달한 거나 먹을까?”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휴게실을 향하는 고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기만 했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걸까?’
아직 달콤한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인지 입 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어두웠던 회의실의 불이 켜졌다.
“이상으로 로즈 골드라인 광고 시안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마친 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김 부장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김 부장은 고다의 기획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손으로 대충대충 뒤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건성으로 광고 시안을 읽고 있던 김 부장이 고개를 들어 고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최 대리, 모델은 누구를 쓸 계획인가? 화려하지도 않고 임팩트도 없는 이 밋밋한 화장품 광고에 어떤 스타를 쓸 생각이지?”
김 부장의 말투가 무슨 의미인지 고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광고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놓고 표를 냈다.
“저는 일반인으로 광고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반인? 업계 1위 화장품을 광고하면서 일반인?”
김 부장의 주름진 이마가 티 나게 구겨졌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적용하고 있는 스타 마케팅은 인지도가 낮은 상품 광고에는 적합합니다. 하지만 로즈 골드라인은 네임 밸류가 있는 기존 제품의 시리즈이므로 인지도를 높일 필요성이 없습니다. 또한 테스트 결과 이번 제품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탁월합니다. 괜히 스타에 상품이 갇히지 않도록 일반인을 내세우면서 기능성을 강조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답답하구만. 답답해.”
김 부장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고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 잘랐다.
“최 대리, 자네는 여기가 학교인 줄 아나? 어디서 되지도 않는 마케팅 이론을 떠벌리는 거야? 제품 기능 강조 좋지. 하지만 어느 광고주가 A급 스타를 쓰지 않는 광고를 좋아하겠냐고? ‘이채리가 쓰는 화장품이다’, ‘송혜민이 바른 립스틱이다’, 이렇게 광고를 때려야 소비자에게 먹히는 걸 모르나?”
김 부장의 퉁명스런 타박에도 고다는 굴하지 않았다.
“부장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연예인 모델의 단점도 분명 있습니다. 한 연예인이 여러 광고를 찍는 것이 현 광고 시장의 문제입니다. 소비자들은 광고 노출이 많은 연예인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 연예인은 기억하지만 그 연예인이 광고하는 제품은 금세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광고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김 부장은 말대답을 하는 고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럼 광고주는? 최 대리가 진정한 광고 어쩌고저쩌고하는 동안 우리에게 돈을 주는 광고주님은 스타 마케팅 광고 시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혹할 텐데 그건 어쩔 건데? 우리 회사가 광고 못 따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그건 충분히 참신한 광고로 클라이언트를…….”
고다는 마지막까지 김 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광고를 찍고 싶었다. 그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나와서 ‘나 예뻐요’ 하는 웃음이나 파는 천편일률적인 것 말고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는 그런 근사한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
“아, 됐어. 일단 컨셉부터 눈이 팍 꽂히게 꾸미고 모델은 제일 잘나가는 연예인으로 바꿔서 기획안 다시 제출해. 몸매 잘 빠진 여자가 나와서 윙크라도 날려 줘야 여자들은 나도 저렇게 예뻐지겠지 하는 망상에 화장품을 살 거고, 남자들은 눈요기하려고 모델 얼굴을 쳐다보겠지. 다들 윈윈인데 스타 마케팅이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오늘도 여자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김 부장의 발언이 이어지자 고다가 발끈했다.
“그래도 이번 광고만큼은 제 의견대로…….”
하지만 고다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김 부장이 아니었다.
“내 말 듣기가 정 싫으면 할 수 없지. 이번 건은 이 대리한테 넘기고 최 대리는 빠져.”
김 부장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섰다.
“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 달 꼬박 준비한 광고 시안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기를 따르지 않을 거면 그만두라니. 고다는 김 부장의 지시를 수용할 수 없었다.
“싫으면 고분고분 말을 듣든가.”
“하지만 부장님…….”
“회의는 이걸로 끝.”
고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결국 고다의 의견은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것 봐, 최 대리. 요즘 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여자 나이 최고 비쌀 때가 스물다섯이라는데, 절정 지난 지 오래되어서 그런 건가? 영 시원찮아. 쯧.”
김 부장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고다를 힐끗 노려보며 인상을 쓰더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최 대리, 고생했는데 기운 내.”
“애쓰셨어요.”
모두들 고다에게 한마디씩 건네고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고다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누구 하나 김 부장의 뜻을 거스르며 고다의 편을 들어 줄 수 없었다.
“최 대리 시안 독특했는데 아쉽다.”
이 대리가 고다를 위로했지만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 힘들면 부장님 말씀대로 나한테 넘겨. 내가 하면 최 대리처럼 멋있는 광고는 아니라도 클라이언트 기분은 맞춰 줄 수 있을 테니까.”
이 대리는 고다와 입사 동기이다.
하지만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던 끈끈한 동기애는 고다의 특진이 발표되는 날 승진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기의 성공이 나의 좌절이 되고 동기의 위기가 나의 기회가 되어 버리는 냉혹한 현실.
입술 한쪽 끝만 살짝 웃으며 말하는 이 대리는 윗사람에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자일 뿐 진정한 동료라 느끼기에는 이미 많은 벽이 생겨 버렸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비정한 경쟁 앞에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생겨 버린 벽. 그 벽에 고다는 오늘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가로막혀 버렸다.
“젠장.”
김 부장은 테이블 위에 기획안을 그대로 두고 갔다. 화가 난 고다는 쓰레기처럼 남아 있는 광고안을 있는 힘껏 바닥에 집어 던졌다.
땅바닥에 엉망으로 뒹굴고 있는 종이 쪼가리들이 자신의 신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들 나가고 텅 빈 회의실에 고다 혼자 남았다.
“오늘 저녁에요?”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진 고다의 격앙된 목소리에 다들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쉬. 최 대리,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고다를 호출한 김 부장은 책상 앞에 고다를 세워 둔 채 잔뜩 주위를 경계하며 말을 이어 갔었다. 그런데 고다가 큰 소리를 내니 행여 누군가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할까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니, 부장님. 왜 제가 그런 자리에 가야 하는지……. 굳이 접대를 하지 않아도 프레젠테이션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기획안 내용만 좋으면…….”
“쯧쯧쯧. 뭘 이렇게 몰라서야, 원. 이러니 여자들이랑 일하기 힘들다는 거야.”
김 부장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일이라는 게 빡빡한 업무로만 되는 게 아니야. 정이 중요하지. 서로 친분도 쌓고 추억도 쌓고. 그러다 보면 비슷한 수준의 기획안이 나왔을 때 친한 쪽 손을 슬쩍 들어 주게 되어 있는 거라고. 이번 광고 최종 결정자가 정 상무라는 건 최 대리도 잘 알고 있지?”
“네.”
김 부장이 기분 나쁘게 실실거렸다.
“최 대리를 좋게 본 건지. 아무튼 정 상무가 이번에는 최 대리도 꼭 같이 오라고 나한테 특별히 말했거든.”
“하지만 팀원 중 저만 간다는 게…….”
고다는 접대 자리가 영 탐탁지 않았다.
“접대라고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가볍게 저녁만 먹는 거야. 회식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묻는 거 사근사근하게 대답해 주고 살살 웃으며 술 한 잔 따라 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 힘든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가겠다는 확답은 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는 고다를 향해 김 부장이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최 대리, 다음 고과는 잘 받아야 하지 않겠어? 누락 없이 제대로 과장 달려면 다음 분기부터는 인사고과도 신경 써야지. 1, 2년 진급 누락되면 그대로 아웃될 수도 있다고.”
김 부장이 고다의 약점을 대놓고 건드렸다.
“한국전자 광고만 우리가 따내면 최 대리 다음 고과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질게. 최 대리도 과장 달아야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 고과도 절대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고다는 을이다. 갑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을이다.
“……네.”
“좋았어. 장소는 내가 문자로 보내 줄게.”
김 부장은 고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쳤다.
‘대리 최고다’라고 적힌 자리에 돌아와 앉은 고다의 입에서 대상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섞여 나왔다.
“젠장.”
누구를 향한 짜증일까? 계약을 빌미로 접대를 바라는 속물근성의 정 상무에게 향하는 짜증일까? 고과권자의 권력을 쥐고 부하 직원을 접대에 강제로 데리고 가려는 직장 상사인 김 부장에게 향하는 짜증일까?
“나, 이것밖에 안 되나.”
아니다. 사실은 부당한 요구를 당당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에게 향하는 짜증이었다.
“점점 바보가 되고 있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이 초라하기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최고다? 패기 넘치던 너는 어디로 가 버린 거야?”
고다는 볼품없어 보이는 얼굴을 비치는 거울을 서랍 깊숙이 집어넣어 버렸다.
1. 쉬었다 가도 늦지 않다(1)
쾅.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재석의 인상이 영 심상찮았다. 재석은 사뭇 화난 얼굴로 진욱의 책상 앞에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사장님.”
“왜, 한 실장님.”
진욱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재석을 올려다봤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가 목소리를 아래로 깔고 저를 사장님이라 부를 때면 좋은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아는 진욱이었다.
“나, 살려 줘.”
“응. 살아.”
“이 자식이!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농담이 아니면 뭔데? 다짜고짜 살려 달라니.”
장난스러운 진욱의 반응에도 재석은 여전히 심각했다.
“호준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단다.”
재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일이 하기 싫대?”
“일이 왜 하기 싫어. 광고라면 끔뻑 죽는 애가.”
“그럼 시답잖은 소리 말고 계속 열심히 일하라고 해. 바쁜데 시간 뺏지 말고.”
제 할 말을 다한 진욱은 두툼한 서류를 넘겨 봤다.
“하아, 어쩌다 내가 이런 놈이랑 엮여서.”
책상에 시선을 두고 있는 진욱을 보니 재석은 기가 막혔다.
“뭐? 본론을 말해.”
서류 검토할 게 많아 숨 쉴 틈도 없는데 오늘따라 재석이 자꾸만 딴죽을 걸었다.
“강 대리 없으면 우리는 죽음이야. 셋이서 어떻게 일을 해? 그러니까 호준이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지.”
“강 대리, 어디 가? 왜 셋이 일해?”
“허허. 이 어이없는 놈. 이런 게 사장이라고.”
“응?”
진욱은 재석의 허탈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진심으로 몰라서 그런 해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야?”
“강 대리 무슨 일 있어? 심각한 일이야?”
“이 녀석, 어휴.”
재석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장아, 강 대리 곧 출산 휴가 들어가잖아. 배가 남산만 한데. 잊어버렸던 거야?”
“아, 맞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임신했다는 말 들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맞다? 아이고, 이런 걸 사장이라고. 세계 광고제에서 수두룩하게 상을 받으면 뭐 하냐고. 아무리 감동적인 광고를 만들면 뭐 하냐고.”
재석은 진열장에 늘어선 상패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현실 세계에서는 일 빼고 모든 것에 무심함의 절정인데.”
재석은 진욱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걸 꾹 참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책임지고 사람 구하겠다고 말해 놓고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강 대리 산휴 가고 나면 나랑 호준이밖에 없다고. 그러니 호준이가 미치려고 하지.”
“미안, 미안. 내가 요새 너무 정신이 없었다.”
진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골머리를 썩고 있던 에너지 절약 공익 광고 때문에 직원 채용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내가 또 깜빡하면 안 되니까 말 나온 김에 당장 네가 알아봐.”
“정말이지?”
재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강 대리 몸 무거워서 내일이라도 쉬고 싶을 텐데. 출산하면 육아 휴직도 낼 거고. 당연히 충원해야지. 일 똘똘하게 할 사람으로 네가 잘 뽑아 봐.”
진욱은 머리를 의자 헤드에 기대고는 웃으며 말했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서론이 너무 길다 싶었더니 결국에는 직원 한 명 더 뽑자는 말이었다.
“오케이.”
진욱의 승낙이 떨어지자 재석은 신이 나서 사장실을 나섰다.
“호준아, 사장님이 직원 채용 공고 내란다.”
재석의 말을 듣자마자 호준은 좋아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그럼. 알아서 하라니까 우리가 잘 뽑아 보자. 리크루트에 전화해서 광고 분야 경력자들 이력서 받아 둔 거 있는지 알아봐.”
“넵.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앗싸, 내 밑으로 한 명 생긴다.”
호준이는 일사천리로 전화를 걸어 경력자를 파악했다.
“실장님, 다행이에요. 저 없으면 호준 씨랑 실장님, 두 분이서 힘들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다희는 볼록하게 솟아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강 대리는 아무 걱정 말고 순산이나 하고 와. 책상 안 빼고 기다릴 테니 몸조리 잘하고. 육아 휴직도 쓰고.”
“네, 감사합니다.”
어느새 리크루트 경력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끝낸 호준이 재석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청명했던 가을의 하늘과는 다르게 겨울의 하늘은 더욱 파래서 오히려 시리게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성큼 발을 들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알록달록하던 나뭇잎은 제법 차갑게 느껴지는 새벽 공기 때문인지 하룻밤 사이에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을 휘감는 매서운 바람은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미게 했다. 바람이 부는 걸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서늘한 아침이었다.
“젠장…….”
둔탁하게 창을 두드리는 겨울바람은 숨소리만 가득한 사무실 분위기를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회사 하반기 인사고과가 발표되는 날. 모두들 관심 없는 척, 태연한 척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조심스럽게 고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어 했고, 어떤 이는 내일 회사를 나와야 하는 건지 이제는 정말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품 안에 숨겨 둔 고민을 꺼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으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치열한 경쟁의 공간.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득한 전쟁터. 그 속에서 고다는 패자였다.
“휴우…….”
작게 내뱉은 고다의 탄식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인턴 미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대리님, 별로예요?”
미라의 물음에 고다는 애써 덤덤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고다의 입가에는 경련이 생길 듯했다. 속마음을 감추고 싶었지만 도무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다의 어색한 표정으로 대충 눈치를 챈 미라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정말 이번에도 고과 안 좋은 거예요?”
대답 대신 고다는 그저 싱긋 웃어 줄 뿐이었다.
“부장님 너무하시네.”
누가 들을까 미라는 좀 전보다 한층 낮게 소곤거렸다.
“상반기 히트 친 광고 기획도 솔직히 대리님이 다 하신 거잖아요. 대리님 이름은 쏙 빼고 부장님이 하신 것처럼 발표해서 생색내고. 새로 오신 상무님한테는 부장님만 눈도장 확실하게 찍히고. 그래 놓고는 아이디어 낸 대리님은 찬밥 취급이라니.”
“그럴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고다는 고과 확인 사이트 창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작성 중인 기획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오늘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속상해 한다고 누가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도 아니니까. 회사라는 곳은 어차피 그런 곳이었다.
“포기해야지, 뭐.”
고다의 고과는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C. 연속으로 C를 받았으니 내년 연봉은 줄어들 것이고, 다음 고과부터 연달아 A를 받지 않는 이상 제때에 과장 진급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 적당히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아는 고다지만 그래도 속이 상한 건 사실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본 적도 없는 C였다. 성적표에는 오로지 A만 있어야 한다며 악바리로 살았던 고다다.
“휴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명문대에 입학한 뒤 대한민국에서 인정해 주는 대기업 광고기획사에 최고의 성적으로 입사했다.
회사에 첫 출근 하던 날, 고다는 찬란한 꿈에 부풀었다. 능력만 있다면 최연소 임원쯤은 문제없을 거라는 오만함을 어깨에 매달고 거만한 걸음으로 위풍당당하게 1층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었다.
입사 1년 동안은 고다의 생각대로 정신없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기획안을 작성하면 어김없이 부장은 고다의 기획안을 채택해 주었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2년 차에 초고속으로 대리 특진을 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름처럼 최고를 좇아 쉬지 않았던 고다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선임부장이 임원으로 승진 발령이 나고 김 부장이 광고 3팀에 배속되면서 고다의 입지는 180도 달라졌다. 김 부장의 부하 직원이 된 그녀는 그저 그런 수많은 직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꽉 막힌 상사. 실없이 던지는 농담이 사실은 여자의 수치심을 자극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상사.
그런 최악의 상사 밑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그녀는 입사 4년 차, 대리 최고다. 승진을 위해 고과에 잔뜩 신경 써야 하는 서글픈 인생이었다.
“대리님, 이번엔 넘어가지 마세요. 부장님께 따지셔야 해요. 저기 보세요.”
미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김 부장 옆에 오 과장이 오늘도 찰싹 붙어 있었다.
“학교 후배라고 부장님은 오 과장님만 감싸 돌고. 오 과장님은 보나마나 고과 잘 받으셨을 거예요.”
“할 수 없지. 오 과장님은 곧 차장 진급도 하셔야 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착잡했다. 오 과장이 딱히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잘하는 것이 없는 게 문제였다.
김 부장은 오 과장이 내년 진급을 해야 하니 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며 대놓고 오 과장을 챙겼다. 오 과장이 진급을 해야 다음에는 고다를 챙겨 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떠벌렸기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오 과장이 진급을 한다고 해도 김 부장이 고다를 챙겨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고다는 김 부장의 수족이 되어 비위를 맞춰 가며 김 부장과 짝짜꿍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대리님. 억울하잖아요.”
그래, 억울했다. 누구보다도 고다는 억울했다. 하지만 투정을 부려 봐야 들어줄 김 부장이 아니었다.
고다의 상황을 위로라도 하고 싶은 건지 미라는 자꾸만 말을 걸었다.
미라의 착한 의도는 충분히 알지만 이미 일어난 결과를 곱씹고 되새겨 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엎어진 판은 뒤집을 수 없으니까.
“미라 씨, 우리 잠깐 나가자. 내가 커피 쏠게.”
쓰디쓴 커피라도 마셔야 고다의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고다도 알고 있다. 고과라는 것이 팀원 전체가 모두 좋게 받을 수는 없다는 걸. 누군가가 A를 받으면 누군가는 C를 받아야만 한다. 누군가가 특진을 하면 누군가는 좌천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매번 내가 그 특진자가 되거나 A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것이 조직생활이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고다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항상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직장 생활 4년 차인 고다도 진정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마음 한쪽 구석에 겨울바람이 부는 양 허한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입사할 때의 반짝이던 꿈이 점점 빛을 잃어 가며 회사의 볼품없는 부속품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나 하나 빠져도 이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공허함. 나를 대신할 사람들은 이 회사에 넘쳐나고 있다는 불안함.
단지 C라는 알파벳 한 글자 때문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대리님, 저는 달달한 거 먹을래요. 카라멜마끼아또.”
“나도 달달한 거나 먹을까?”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휴게실을 향하는 고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기만 했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걸까?’
아직 달콤한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인지 입 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어두웠던 회의실의 불이 켜졌다.
“이상으로 로즈 골드라인 광고 시안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완벽하게 마친 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김 부장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김 부장은 고다의 기획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손으로 대충대충 뒤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건성으로 광고 시안을 읽고 있던 김 부장이 고개를 들어 고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최 대리, 모델은 누구를 쓸 계획인가? 화려하지도 않고 임팩트도 없는 이 밋밋한 화장품 광고에 어떤 스타를 쓸 생각이지?”
김 부장의 말투가 무슨 의미인지 고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광고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놓고 표를 냈다.
“저는 일반인으로 광고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반인? 업계 1위 화장품을 광고하면서 일반인?”
김 부장의 주름진 이마가 티 나게 구겨졌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적용하고 있는 스타 마케팅은 인지도가 낮은 상품 광고에는 적합합니다. 하지만 로즈 골드라인은 네임 밸류가 있는 기존 제품의 시리즈이므로 인지도를 높일 필요성이 없습니다. 또한 테스트 결과 이번 제품은 기능적인 면에서도 탁월합니다. 괜히 스타에 상품이 갇히지 않도록 일반인을 내세우면서 기능성을 강조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답답하구만. 답답해.”
김 부장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고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 잘랐다.
“최 대리, 자네는 여기가 학교인 줄 아나? 어디서 되지도 않는 마케팅 이론을 떠벌리는 거야? 제품 기능 강조 좋지. 하지만 어느 광고주가 A급 스타를 쓰지 않는 광고를 좋아하겠냐고? ‘이채리가 쓰는 화장품이다’, ‘송혜민이 바른 립스틱이다’, 이렇게 광고를 때려야 소비자에게 먹히는 걸 모르나?”
김 부장의 퉁명스런 타박에도 고다는 굴하지 않았다.
“부장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연예인 모델의 단점도 분명 있습니다. 한 연예인이 여러 광고를 찍는 것이 현 광고 시장의 문제입니다. 소비자들은 광고 노출이 많은 연예인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 연예인은 기억하지만 그 연예인이 광고하는 제품은 금세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광고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김 부장은 말대답을 하는 고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럼 광고주는? 최 대리가 진정한 광고 어쩌고저쩌고하는 동안 우리에게 돈을 주는 광고주님은 스타 마케팅 광고 시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혹할 텐데 그건 어쩔 건데? 우리 회사가 광고 못 따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그건 충분히 참신한 광고로 클라이언트를…….”
고다는 마지막까지 김 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광고를 찍고 싶었다. 그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나와서 ‘나 예뻐요’ 하는 웃음이나 파는 천편일률적인 것 말고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는 그런 근사한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
“아, 됐어. 일단 컨셉부터 눈이 팍 꽂히게 꾸미고 모델은 제일 잘나가는 연예인으로 바꿔서 기획안 다시 제출해. 몸매 잘 빠진 여자가 나와서 윙크라도 날려 줘야 여자들은 나도 저렇게 예뻐지겠지 하는 망상에 화장품을 살 거고, 남자들은 눈요기하려고 모델 얼굴을 쳐다보겠지. 다들 윈윈인데 스타 마케팅이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오늘도 여자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김 부장의 발언이 이어지자 고다가 발끈했다.
“그래도 이번 광고만큼은 제 의견대로…….”
하지만 고다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김 부장이 아니었다.
“내 말 듣기가 정 싫으면 할 수 없지. 이번 건은 이 대리한테 넘기고 최 대리는 빠져.”
김 부장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섰다.
“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 달 꼬박 준비한 광고 시안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기를 따르지 않을 거면 그만두라니. 고다는 김 부장의 지시를 수용할 수 없었다.
“싫으면 고분고분 말을 듣든가.”
“하지만 부장님…….”
“회의는 이걸로 끝.”
고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결국 고다의 의견은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것 봐, 최 대리. 요즘 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여자 나이 최고 비쌀 때가 스물다섯이라는데, 절정 지난 지 오래되어서 그런 건가? 영 시원찮아. 쯧.”
김 부장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고다를 힐끗 노려보며 인상을 쓰더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최 대리, 고생했는데 기운 내.”
“애쓰셨어요.”
모두들 고다에게 한마디씩 건네고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고다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누구 하나 김 부장의 뜻을 거스르며 고다의 편을 들어 줄 수 없었다.
“최 대리 시안 독특했는데 아쉽다.”
이 대리가 고다를 위로했지만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 힘들면 부장님 말씀대로 나한테 넘겨. 내가 하면 최 대리처럼 멋있는 광고는 아니라도 클라이언트 기분은 맞춰 줄 수 있을 테니까.”
이 대리는 고다와 입사 동기이다.
하지만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던 끈끈한 동기애는 고다의 특진이 발표되는 날 승진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기의 성공이 나의 좌절이 되고 동기의 위기가 나의 기회가 되어 버리는 냉혹한 현실.
입술 한쪽 끝만 살짝 웃으며 말하는 이 대리는 윗사람에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자일 뿐 진정한 동료라 느끼기에는 이미 많은 벽이 생겨 버렸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비정한 경쟁 앞에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생겨 버린 벽. 그 벽에 고다는 오늘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가로막혀 버렸다.
“젠장.”
김 부장은 테이블 위에 기획안을 그대로 두고 갔다. 화가 난 고다는 쓰레기처럼 남아 있는 광고안을 있는 힘껏 바닥에 집어 던졌다.
땅바닥에 엉망으로 뒹굴고 있는 종이 쪼가리들이 자신의 신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들 나가고 텅 빈 회의실에 고다 혼자 남았다.
“오늘 저녁에요?”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진 고다의 격앙된 목소리에 다들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쉬. 최 대리,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고다를 호출한 김 부장은 책상 앞에 고다를 세워 둔 채 잔뜩 주위를 경계하며 말을 이어 갔었다. 그런데 고다가 큰 소리를 내니 행여 누군가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할까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니, 부장님. 왜 제가 그런 자리에 가야 하는지……. 굳이 접대를 하지 않아도 프레젠테이션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기획안 내용만 좋으면…….”
“쯧쯧쯧. 뭘 이렇게 몰라서야, 원. 이러니 여자들이랑 일하기 힘들다는 거야.”
김 부장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일이라는 게 빡빡한 업무로만 되는 게 아니야. 정이 중요하지. 서로 친분도 쌓고 추억도 쌓고. 그러다 보면 비슷한 수준의 기획안이 나왔을 때 친한 쪽 손을 슬쩍 들어 주게 되어 있는 거라고. 이번 광고 최종 결정자가 정 상무라는 건 최 대리도 잘 알고 있지?”
“네.”
김 부장이 기분 나쁘게 실실거렸다.
“최 대리를 좋게 본 건지. 아무튼 정 상무가 이번에는 최 대리도 꼭 같이 오라고 나한테 특별히 말했거든.”
“하지만 팀원 중 저만 간다는 게…….”
고다는 접대 자리가 영 탐탁지 않았다.
“접대라고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가볍게 저녁만 먹는 거야. 회식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묻는 거 사근사근하게 대답해 주고 살살 웃으며 술 한 잔 따라 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 힘든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가겠다는 확답은 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는 고다를 향해 김 부장이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최 대리, 다음 고과는 잘 받아야 하지 않겠어? 누락 없이 제대로 과장 달려면 다음 분기부터는 인사고과도 신경 써야지. 1, 2년 진급 누락되면 그대로 아웃될 수도 있다고.”
김 부장이 고다의 약점을 대놓고 건드렸다.
“한국전자 광고만 우리가 따내면 최 대리 다음 고과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질게. 최 대리도 과장 달아야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 고과도 절대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고다는 을이다. 갑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을이다.
“……네.”
“좋았어. 장소는 내가 문자로 보내 줄게.”
김 부장은 고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쳤다.
‘대리 최고다’라고 적힌 자리에 돌아와 앉은 고다의 입에서 대상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섞여 나왔다.
“젠장.”
누구를 향한 짜증일까? 계약을 빌미로 접대를 바라는 속물근성의 정 상무에게 향하는 짜증일까? 고과권자의 권력을 쥐고 부하 직원을 접대에 강제로 데리고 가려는 직장 상사인 김 부장에게 향하는 짜증일까?
“나, 이것밖에 안 되나.”
아니다. 사실은 부당한 요구를 당당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에게 향하는 짜증이었다.
“점점 바보가 되고 있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이 초라하기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최고다? 패기 넘치던 너는 어디로 가 버린 거야?”
고다는 볼품없어 보이는 얼굴을 비치는 거울을 서랍 깊숙이 집어넣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