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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쉬었다 가도 늦지 않다(2)
제대로 속았다.
“아오, 여긴 술집이잖아. 이런, 미친 부장 새…….”
저녁을 먹고 반주로 술이나 한잔할 거라는 김 부장의 말과는 달리 이곳은 어여쁜 언니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술집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를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지들끼리 아가씨 불러서 처놀면 되지.”
고다는 김 부장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가씨들 사이에 고다를 앉혀 놓을 심산인가 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고다는 발길을 돌렸다. 그때 가방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하, 타이밍하고는. 어디서 감시하고 있나?”
김 부장의 전화였다.
“네, 부장님.”
― 최 대리, 어디야? 정 상무님이 아까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신데.
요란한 음악 소리와 간드러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부아가 치밀었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 그래, 그래. 빨리 오라고. 들어와서 두 번째 방이야.
벌써 술을 제법 마신 건지 김 부장은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냈다.
“부장님, 저는…….”
― 알았다니까. 우리 최 대리, 곧 최 과장 돼야지?
김 부장은 고다의 말은 채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꺼져 버린 핸드폰을 보며 고다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 김 부장 멋대로…….”
고다는 요란한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술집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발을 움직여 번쩍이는 불빛 속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큰 한숨을 몇 번 내쉰 고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래, 고과가 달려 있다. 눈 질끈 감고 술만 몇 잔 따라 주고 오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다는 부러 호기롭게 큰소리를 내 보았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고다의 기분은 오히려 가라앉기만 했다.
“힘내자. 내년에 과장 돼야지. 연봉도 올라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다는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와 문을 살짝 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러 명의 남자 종업원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이내 고다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우렁차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온 일행이 있어서. 두 번째 방이라고…….”
“이쪽입니다.”
종업원이 안내한 룸 앞에서 고다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잠깐 망설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고다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룸의 문이 열렸다. 요란한 화장을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룸에서 나왔다. 짧은 순간 문틈으로 거나하게 취한 김 부장과 정 상무가 여자들을 껴안고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고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서둘러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김 부장의 면상이라 생각하고 쾅쾅 소리가 나게 계단을 밟으며 고다는 걸어 올라갔다.
“그래, 안 해. 안 한다고.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안 한다고. 과장 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담배 냄새와 술 냄새로 찌든 술집 안의 탁한 공기와는 다르게 바깥 공기는 신선했다.
고다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한겨울의 차가움이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상쾌한 기운이 몸을 감싸자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졌다.
“하, 시원하다.”
고다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 했는지 알게 됐네. 정신이 번쩍 들었어.”
도로가까지 걸어 나온 고다는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김 부장이 쉼 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고다는 끝까지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여느 아침과는 확연히 다른 고다의 분위기에 미라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고다는 웃지도 않았고, 미라를 보며 유쾌하게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고다는 컴퓨터를 잠깐 사용하고는 책상에 손을 올린 채 꺼져 있는 모니터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최 대리, 출근했나? 최고다 대리?”
9시를 한참 넘겨 느지막하게 출근을 한 김 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고다를 찾아 소리를 질렀다.
고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부장님.”
“따라와.”
어제 정 상무와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김 부장이 숨을 쉴 때마다 고다의 코끝까지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고다는 역겨운 냄새를 간신히 참으며 조용히 김 부장의 책상 앞에 섰다.
“최 대리,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알아? 전화는 왜 안 받아? 일단 정 상무님께는 최 대리가 급한 일이 있어서 못 오는 거라고 둘러댔어. 오늘 저녁에 다시 약속 잡았으니까 정 상무님 실망하지 않도록…….”
“부장님, 제가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다가 뒷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렸다.
“최 대리, 이게 뭐야? 사직서?”
사직서라는 말에 직원들이 놀라며 고다와 김 부장을 번갈아 보았다.
“네. 사직서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어제 부장님의 룸싸롱 제안으로도 충분히 불쾌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접대 자리에 나가서 정 상무에게 술을 따르고 애교를 떨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뭐?”
“술 접대를 하지 않으면 다음 고과 기대도 말라는 부장님 말씀을 들었는데 제가 그럼 어쩌겠습니까?”
고다의 입에서 ‘접대’와 ‘룸싸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자 좋아하는 정 상무를 룸싸롱에서 만나 웃음 파는 건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줄줄이 C만 받는 고과는 더더욱 싫으니 제가 이 회사를 나갈 수밖에요.”
당황한 김 부장이 고다의 입을 말리려 했다.
“아니, 최 대리,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어수선한 분위기에 식은땀까지 흘리는 김 부장이 고다의 눈에 한심하게 보였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다.
“아니요, 저는 부장님의 뜻, 한 치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깔끔하게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정 상무님께는 웃음 팔고 술 따르면서 광고 따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접대가 무지 싫어서 최 대리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전해 주십시오.”
고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 부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미리 정리해 둔 물품 상자를 들었다.
“아, 그리고 부장님 제가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고다는 팀원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다음부터는 부하 직원이 만든 기획안 도둑질하는 거 그만두십시오. 능력이 안 되면 부하 직원을 밀어 주기라도 하셔야 존경이라도 받을 텐데 자꾸 도둑질을 하시면…….”
고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그리고 제가 부장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는 전 직원이 볼 수 있도록 사내 게시판에 올려 두었으니 부장님도 꼭 읽어 보시고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 저, 최 대리!”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는 김 부장을 향해 고다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다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자 고다의 등 뒤로 온갖 종류의 문자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이른 아침에 고다가 올린 게시글을 보고 직원들이 공유하기 시작했나 보다.
“잘했다, 최고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 고다는 입사했을 때처럼 당당하고 거침없이 회사의 문을 열고 나왔다.
“잘했어.”
제법 추워진 겨울이지만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리님! 최 대리님!”
고다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미라가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어, 미라 씨.”
고다가 숨이 차도록 뛰어오고 있는 미라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세요?”
“회사 그만둔다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봐. 날아갈 것 같다.”
밝게 웃고 있는 고다를 보며 미라는 어이가 없었다.
“대리님, 왜…….”
선망의 대기업이다. 대학 졸업자들이 1순위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하는 높은 연봉의 대기업. 미라도 1년의 인턴생활이 끝나면 간절하게 정규직으로 남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꿈의 직장을 고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 버렸다.
“그만두냐고? 좋은 직장을?”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다는 그녀의 생각을 다 읽고 있는 것처럼 웃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고다는 미라를 보며 자그마한 미소를 그렸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희망도 있고 열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주위 눈치나 보고 고과나 신경 쓰고, 윗사람의 기분이나 맞추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회사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내가 너무 우스꽝스럽잖아.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그래도 김 부장님이 이상한 일 지시하신 거면…….”
미라가 차마 묻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고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 김 부장이 나한테 술집에서 정 상무 접대 같이 하자고 했어.”
미라가 어지간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돼요.”
“그래, 부당하지. 그래서 인사팀에 성희롱으로 신고할까 하다가 그만뒀어.”
“왜 안 하셨어요? 당장 신고해서 바로잡아야죠.”
“맞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부장님께 못 하겠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부당한 일을 내 고과 성적 때문에 암묵적으로 하겠다고 동의한 거니까.”
“대리님…….”
미라는 고다의 사정을 안타까워했다.
“알아. 나 참 못났지?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여기 남아 있으면 자꾸 못난 짓을 하게 될까 봐. 잘못된 일도 못 하겠다는 소리 한마디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연민에 찬 시선에 고다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그리고 지난달 총무팀 연정 씨 얘기 들었지? 거기 이 과장한테 성희롱 당했다고 인사팀에 신고했지만 결국 그만둔 건 연정 씨였어. 감봉 3개월 처분만 받은 이 과장은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고 있잖아.”
미라도 그 사건을 알고 있다.
여직원회에서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회사에서는 쉬쉬하며 일을 빨리 무마시키기에 급급했다. 이 과장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고 연정은 같은 사무실에서 이 과장을 보기 괴롭다며 회사를 그만둬 버렸다.
“어쩌면 나, 겁이 나는 건지도 몰라. 정의롭게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어. 질게 뻔한 싸움이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잖아.”
고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서 하고 싶어. 여기서는 아니야.”
고다는 장난스럽게 미라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나 갈게. 통장에 퇴직금 들어오면 밥 한번 거하게 살 테니까 기대하고.”
미라와의 짧은 인사를 끝낸 고다가 앞으로 걸어가다 말고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에 맞닿을 만큼 높은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저 속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을 했고, 저 속에 들어가서도 숨 막히는 경쟁을 하며 살아갔다.
치열하게 살다 보니 왜 저곳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무엇을 위해 저곳에 남아 있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서서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를 끝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이곳을 그만둔 오늘을 언젠가 한 번은 후회하겠지만 이곳에 남아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매일을 후회하면서 살아야 한다.
고다의 나이 스물아홉 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결코 늦지 않은 나이.
고다는 앞을 보며 걸어갔다. 이제는 고다가 잊어버렸던 목적을 다시 찾을 것이다. 마천루처럼 뻗어 있는 건물과 멀어질수록 고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다는 시장에 있는 허름한 콩나물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허기를 자극하는 진한 육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엄마, 나 왔어.”
고다가 밝게 웃으며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엄마, 정애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무실에서 들고 온 종이상자는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출근한 거 아니었어?”
정애는 고다가 들고 온 상자를 힐끔 쳐다봤다.
“출근했다 온 거야.”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 퇴근을 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아픈 거야?”
정애는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고다에게 물었다.
“아니. 휴가야.”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아직 정애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자리를 새로 구하면 그때 솔직하게 말할 작정이었다.
“세상에, 별일이다. 네가 입사하고 휴가를 다 쓰고. 처음 아니냐? 미친년처럼 일만 하더니.”
정애를 도와 고다도 콩나물을 다듬었다.
“내가 그랬나?”
헛웃음이 나왔다. 정애의 말대로 젊음의 열정을 다 바친 회사에 지금은 한 톨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 이것아. 꽃다운 시절 다 간다고 내가 누누이 말해도 안 듣더니.”
“그러게. 진즉에 엄마 말 들을걸.”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숙이고 들어오는 고다가 정애는 도리어 이상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쉬고 싶어서. 그런데 엄마, 우리 빚 다 갚은 거 맞지?”
“젊은 게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냐? 지지난 달에 남은 빚 깡그리 청산했다고 파티까지 해 놓고선.”
“당연히 기억하지. 혹시나 해서. 내가 모르는 빚이 혹시라도 남아 있을까 봐.”
정애는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고다를 설핏 보고는 딱 잘라 말했다.
“빚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한 푼도 남아 있는 거 없으니까 너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응.”
“그냥 둬. 손에 콩나물 비린내 난다.”
정애는 고다가 콩나물을 만지지 못하도록 그릇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는 하는데, 뭘.”
“나야 원래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고. 손에서 냄새나면 좋아?”
“까짓거 씻으면 되지.”
“그럼 그러든지.”
정애는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콩나물을 다듬었다.
“엄마…….”
정애의 얼굴을 보니 고다는 괜히 울컥한다.
“왜 애틋하게 불러? 무섭다.”
“우리 엄마도 많이 늙었네 싶어서. 옛날에 참 고왔는데.”
“소싯적에 안 고운 여자도 있나? 시장통에서 국밥 파는 여편네 몰골이 다 똑같지 뭐.”
예전의 정애는 예뻤다. 어린 고다를 옆에 앉히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곤 했었다. 어릴 적 고다는 엄마를 보면서 천사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옛날에는 말도 고왔는데. 친구들이 엄마 보면 우아하다고 난리였었는데.”
정애가 콩나물을 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옆에서 29년을 보면서 함께 살아온 딸이다. 숨소리만 들어도 고다의 어디가 달라졌는지 고다의 기분이 어떤지 정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 왜 이러냐? 뭐 잘못 처먹고 왔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고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어유, 욕 좀. 엄마가 자꾸 그런 말 쓰니까 내가 배우잖아.”
“놀고 있네. 지랄이 풍년이다, 이년아.”
“엄마!”
과거의 향수에 젖어 애잔했던 고다는 정애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가 협조를 안 하니 내가 분위기를 잡을 수가 없어. 뭐, 청순, 아련, 청초, 이런 거랑 내 이미지가 점점 멀어지잖아.”
고다가 입을 샐쭉거렸다.
“놀고 자빠졌네. 할 일 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퍼 자. 피곤하다고 골골대지 말고.”
“내가 언제 골골거렸다고.”
정애는 고다의 손에 있던 콩나물을 모두 뺏어 버렸다.
“그만두고 집에 가서 쉬기나 해. 휴가라며.”
“알았어.”
정애가 험한 말을 내뱉고는 있지만 저를 안쓰럽게 여기는 걸 고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이니까.
“엄마, 나 내일 아버지 보러 갈 거야. 요즘 바빠서 통 못 갔어.”
“그래라. 네 아빠 좋아하시겠네. 너라면 죽고 못 사는 양반이니. 그동안 엄청 보고 싶었을 거야.”
“응.”
고다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쉬는 김에 우수 갈아입을 옷도 갖다 줘. 다 큰 아들 얼굴 보기가 힘드니. 자식 둘이라고 있는 것들이 죄다 바쁘다고 난리들이야, 원. 세상 일을 지들이 다 하나.”
“요즘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바쁘지.”
“그러게. 뭔 놈의 세상이 다들 바쁘기만 해. 나중에는 바빠서 숨 쉴 짬도 없을지 몰라.”
“엄마도, 참. 나 간다.”
고다가 콩나물 다듬던 손을 휴지로 대충 닦고 한쪽에 두었던 상자를 들고 일어섰다.
“어차피 회사 나왔으면 푹 쉬어.”
정애가 고다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응?”
“지금까지 고생만 진탕 했는데 쉬라고. 늦잠도 자고. 10년 동안 애 많이 썼으니 너 그래도 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마음 편하게 놀아.”
말하지도 않았는데 정애는 고다가 회사를 그만둔 걸 그새 눈치챘나 보다.
“빚도 정리됐고, 우수도 벌고. 우리 생활비는 국밥 팔아서도 충분하니까 너는 그만 발발거리라고.”
“응. 나 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쉬라는 정애의 말이 고다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엄마라는 존재는 역시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갈게.”
“집에 가면 청소 좀 하고 쉬든지.”
“알았어.”
“세탁기에 빨래 있을 거야. 햇빛 날 때 널고.”
“응.”
“이왕 하는 김에 화장실 청소도 해. 그리고 베란다 청소도 한 지 제법 되는데. 냉장고 정리도…….”
“엄마! 쉬라며!”
한껏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몽글몽글 솟아나던 고다가 정애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맘 편히 쉬라는 정애의 처음 말과는 달리 고다가 집에 가서 할 일이 자꾸만 늘어났다.
정애는 큭큭 웃는 소리를 냈다.
“엄마가 심했니? 그래도 몸이 바빠야 딴생각도 안 드는 거야. 죽을상 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 봤자 좋을 거 없다. 일은 천천히 찾으면 되고.”
“네, 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합지요.”
고다는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래, 진짜 쉬어야지. 우리 딸, 너무 힘들었어.”
고다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며 정애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딸이 엄청 고생했다고. 내 말 들려? 이제 그만 힘들게 해라, 이 웬수야. 아빠면 고다 잘 살게 도와줘야지.”
정애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물방울이 눈꺼풀에 살짝 맺혔지만 정애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다시 콩나물을 다듬었다. 우울한 감상에 빠져 있기보다는 오늘 장사 준비가 정애에게는 더 급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고다는 쉬지 않고 정애가 시킨 일을 모조리 끝내 버렸다. 몇 시간이 걸려 일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집안일을 정신없이 다 해치우고 나자 온몸이 쑤셔 왔다.
“죽을 거 같아.”
청소를 하다 보니 옷장 위까지 모두 닦았고, 빨래를 개켜 넣다 보니 서랍장 정리까지 끝내 버렸다. 구석구석 묵은 때를 깔끔하게 닦아 내고 반짝거리는 집 안을 보자 기분도 말끔해졌다.
“그래도 흐뭇하다. 집도 깨끗해지고, 몸 움직이는 동안 잡념도 안 들고. 엄마 말이 맞네.”
고다는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들었다.
“콩쥐가 일을 다 했으니 슬슬 잔칫집에나 가 볼까?”
고다가 연희와 하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녀 삼총사, 오늘 모일까?]
[나 촬영 중. 8시 전에 끝남.]
[나도 오늘 괜찮아. 어디서 볼까?]
[신사동. 8시.]
“아, 간만에 애들도 보고. 회사 그만둘 만하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한 고다는 침대에서 하품을 하며 뒹굴었다.
“졸리다.”
고다는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첫날치고는 꽤 그럴싸한 하루였다.
“뭐? 회사를 때려치워?”
하나가 소주를 마시려다 말고 들었던 잔을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들은 말이 맞는 거야, 연희야? 얘가, 얘가 정신이 나갔나.”
하나의 통통 튀는 목소리에 술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른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 셋이 앉아 있는 것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데 하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남자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큰 눈과 높은 콧대에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하나는 연기자이다. 비록 친구1, 직장 동료2 같은 단역 배우로 전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멋진 배우가 되어 대한민국 국민배우 강태하와 함께 진한 격정 멜로를 연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하나는 가지고 있다.
“하나야, 목소리 조금 낮춰. 사람들이 쳐다봐. 너는 연예인인 얘가 조심성도 없이.”
하나를 말리고 있는 연희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청순한 분위기 그대로 성격도 온화하고 다정하여 대학 병원에서 얼짱 간호사로 유명했다.
밝고 씩씩한 고다와 정의롭고 다혈질인 하나와는 성격상 전혀 닮지 않은 연희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고다, 하나, 연희 세 사람은 고등학교 때부터 죽고 못 사는 삼총사로 지내 왔다.
“지랄하네. 연예인은 무슨,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나저나 연희, 너는 고다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실로? 진정으로? 그 좋은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는데? 연봉 얼마짜리라고 했었지? 사천? 그 많은 돈을 포기하고 회사를 그만뒀다는데?”
흥분한 하나와는 달리 연희는 차분했다.
“고다가 뭔가 계획이 있는 거겠지. 절대 경솔하게 행동할 애가 아니잖아.”
연희의 말에 하나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몸을 바짝 고다에게로 붙였다.
“그래, 좋아. 이유나 들어 보자. 이해 못 할 이유라면 어머니 대신에 내가 흠씬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해 주겠어. 멋진 광고쟁이가 되겠다더니 왜 그만둔 거야?”
고다가 쓰디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만둔 거야.”
“뭔 소리래?”
“멋진 광고쟁이가 되고 싶은데 바보 같은 광고쟁이가 되고 있어서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온 거지. 나의 쌈박한 광고를 위해서.”
고다의 속 편한 모습에 하나는 어이가 없었다.
“웃기고 있네. 네가 고생을 안 해 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지.”
하나가 소주 한 잔을 그대로 쭈욱 마셨다.
“캬아. 소주 맛 한번 내 인생처럼 쓰네.”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 하나가 고다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네 꿈이 아무리 크고 원대하면 뭐 하냐? 기회가 없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꿈을 펼칠 마당이 없는데 무슨…….”
하나는 연거푸 소주를 비웠다.
아무래도 어제 영화 오디션 결과가 별로인 모양이다. 이번에는 제법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라고 좋아했었는데 햇병아리 연기자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다 네가 정말 원하는 광고를 만들고 싶어도 더럽고 치사하지만 잘나가는 광고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고.”
“알아.”
“알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응.”
한 손으로 소주잔을 들고 홀짝이는 고다를 물끄러미 보더니 하나가 평소와 다르게 진중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대로 속았다.
“아오, 여긴 술집이잖아. 이런, 미친 부장 새…….”
저녁을 먹고 반주로 술이나 한잔할 거라는 김 부장의 말과는 달리 이곳은 어여쁜 언니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술집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를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지들끼리 아가씨 불러서 처놀면 되지.”
고다는 김 부장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가씨들 사이에 고다를 앉혀 놓을 심산인가 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고다는 발길을 돌렸다. 그때 가방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하, 타이밍하고는. 어디서 감시하고 있나?”
김 부장의 전화였다.
“네, 부장님.”
― 최 대리, 어디야? 정 상무님이 아까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신데.
요란한 음악 소리와 간드러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부아가 치밀었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 그래, 그래. 빨리 오라고. 들어와서 두 번째 방이야.
벌써 술을 제법 마신 건지 김 부장은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냈다.
“부장님, 저는…….”
― 알았다니까. 우리 최 대리, 곧 최 과장 돼야지?
김 부장은 고다의 말은 채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꺼져 버린 핸드폰을 보며 고다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 김 부장 멋대로…….”
고다는 요란한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술집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발을 움직여 번쩍이는 불빛 속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큰 한숨을 몇 번 내쉰 고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래, 고과가 달려 있다. 눈 질끈 감고 술만 몇 잔 따라 주고 오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다는 부러 호기롭게 큰소리를 내 보았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고다의 기분은 오히려 가라앉기만 했다.
“힘내자. 내년에 과장 돼야지. 연봉도 올라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다는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와 문을 살짝 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러 명의 남자 종업원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이내 고다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우렁차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온 일행이 있어서. 두 번째 방이라고…….”
“이쪽입니다.”
종업원이 안내한 룸 앞에서 고다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잠깐 망설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고다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룸의 문이 열렸다. 요란한 화장을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룸에서 나왔다. 짧은 순간 문틈으로 거나하게 취한 김 부장과 정 상무가 여자들을 껴안고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고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서둘러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김 부장의 면상이라 생각하고 쾅쾅 소리가 나게 계단을 밟으며 고다는 걸어 올라갔다.
“그래, 안 해. 안 한다고.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안 한다고. 과장 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담배 냄새와 술 냄새로 찌든 술집 안의 탁한 공기와는 다르게 바깥 공기는 신선했다.
고다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한겨울의 차가움이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상쾌한 기운이 몸을 감싸자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졌다.
“하, 시원하다.”
고다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 했는지 알게 됐네. 정신이 번쩍 들었어.”
도로가까지 걸어 나온 고다는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김 부장이 쉼 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고다는 끝까지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여느 아침과는 확연히 다른 고다의 분위기에 미라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고다는 웃지도 않았고, 미라를 보며 유쾌하게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고다는 컴퓨터를 잠깐 사용하고는 책상에 손을 올린 채 꺼져 있는 모니터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최 대리, 출근했나? 최고다 대리?”
9시를 한참 넘겨 느지막하게 출근을 한 김 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고다를 찾아 소리를 질렀다.
고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부장님.”
“따라와.”
어제 정 상무와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김 부장이 숨을 쉴 때마다 고다의 코끝까지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고다는 역겨운 냄새를 간신히 참으며 조용히 김 부장의 책상 앞에 섰다.
“최 대리,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알아? 전화는 왜 안 받아? 일단 정 상무님께는 최 대리가 급한 일이 있어서 못 오는 거라고 둘러댔어. 오늘 저녁에 다시 약속 잡았으니까 정 상무님 실망하지 않도록…….”
“부장님, 제가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다가 뒷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렸다.
“최 대리, 이게 뭐야? 사직서?”
사직서라는 말에 직원들이 놀라며 고다와 김 부장을 번갈아 보았다.
“네. 사직서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어제 부장님의 룸싸롱 제안으로도 충분히 불쾌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접대 자리에 나가서 정 상무에게 술을 따르고 애교를 떨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뭐?”
“술 접대를 하지 않으면 다음 고과 기대도 말라는 부장님 말씀을 들었는데 제가 그럼 어쩌겠습니까?”
고다의 입에서 ‘접대’와 ‘룸싸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자 좋아하는 정 상무를 룸싸롱에서 만나 웃음 파는 건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줄줄이 C만 받는 고과는 더더욱 싫으니 제가 이 회사를 나갈 수밖에요.”
당황한 김 부장이 고다의 입을 말리려 했다.
“아니, 최 대리,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어수선한 분위기에 식은땀까지 흘리는 김 부장이 고다의 눈에 한심하게 보였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다.
“아니요, 저는 부장님의 뜻, 한 치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깔끔하게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정 상무님께는 웃음 팔고 술 따르면서 광고 따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접대가 무지 싫어서 최 대리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전해 주십시오.”
고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 부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미리 정리해 둔 물품 상자를 들었다.
“아, 그리고 부장님 제가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고다는 팀원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다음부터는 부하 직원이 만든 기획안 도둑질하는 거 그만두십시오. 능력이 안 되면 부하 직원을 밀어 주기라도 하셔야 존경이라도 받을 텐데 자꾸 도둑질을 하시면…….”
고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그리고 제가 부장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는 전 직원이 볼 수 있도록 사내 게시판에 올려 두었으니 부장님도 꼭 읽어 보시고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 저, 최 대리!”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는 김 부장을 향해 고다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다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자 고다의 등 뒤로 온갖 종류의 문자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이른 아침에 고다가 올린 게시글을 보고 직원들이 공유하기 시작했나 보다.
“잘했다, 최고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 고다는 입사했을 때처럼 당당하고 거침없이 회사의 문을 열고 나왔다.
“잘했어.”
제법 추워진 겨울이지만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리님! 최 대리님!”
고다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미라가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어, 미라 씨.”
고다가 숨이 차도록 뛰어오고 있는 미라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세요?”
“회사 그만둔다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봐. 날아갈 것 같다.”
밝게 웃고 있는 고다를 보며 미라는 어이가 없었다.
“대리님, 왜…….”
선망의 대기업이다. 대학 졸업자들이 1순위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하는 높은 연봉의 대기업. 미라도 1년의 인턴생활이 끝나면 간절하게 정규직으로 남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꿈의 직장을 고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 버렸다.
“그만두냐고? 좋은 직장을?”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다는 그녀의 생각을 다 읽고 있는 것처럼 웃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고다는 미라를 보며 자그마한 미소를 그렸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희망도 있고 열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주위 눈치나 보고 고과나 신경 쓰고, 윗사람의 기분이나 맞추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회사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내가 너무 우스꽝스럽잖아.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그래도 김 부장님이 이상한 일 지시하신 거면…….”
미라가 차마 묻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고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 김 부장이 나한테 술집에서 정 상무 접대 같이 하자고 했어.”
미라가 어지간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돼요.”
“그래, 부당하지. 그래서 인사팀에 성희롱으로 신고할까 하다가 그만뒀어.”
“왜 안 하셨어요? 당장 신고해서 바로잡아야죠.”
“맞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부장님께 못 하겠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부당한 일을 내 고과 성적 때문에 암묵적으로 하겠다고 동의한 거니까.”
“대리님…….”
미라는 고다의 사정을 안타까워했다.
“알아. 나 참 못났지?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여기 남아 있으면 자꾸 못난 짓을 하게 될까 봐. 잘못된 일도 못 하겠다는 소리 한마디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워서.”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연민에 찬 시선에 고다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그리고 지난달 총무팀 연정 씨 얘기 들었지? 거기 이 과장한테 성희롱 당했다고 인사팀에 신고했지만 결국 그만둔 건 연정 씨였어. 감봉 3개월 처분만 받은 이 과장은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고 있잖아.”
미라도 그 사건을 알고 있다.
여직원회에서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회사에서는 쉬쉬하며 일을 빨리 무마시키기에 급급했다. 이 과장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고 연정은 같은 사무실에서 이 과장을 보기 괴롭다며 회사를 그만둬 버렸다.
“어쩌면 나, 겁이 나는 건지도 몰라. 정의롭게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어. 질게 뻔한 싸움이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잖아.”
고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서 하고 싶어. 여기서는 아니야.”
고다는 장난스럽게 미라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나 갈게. 통장에 퇴직금 들어오면 밥 한번 거하게 살 테니까 기대하고.”
미라와의 짧은 인사를 끝낸 고다가 앞으로 걸어가다 말고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에 맞닿을 만큼 높은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저 속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을 했고, 저 속에 들어가서도 숨 막히는 경쟁을 하며 살아갔다.
치열하게 살다 보니 왜 저곳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무엇을 위해 저곳에 남아 있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서서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를 끝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이곳을 그만둔 오늘을 언젠가 한 번은 후회하겠지만 이곳에 남아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매일을 후회하면서 살아야 한다.
고다의 나이 스물아홉 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결코 늦지 않은 나이.
고다는 앞을 보며 걸어갔다. 이제는 고다가 잊어버렸던 목적을 다시 찾을 것이다. 마천루처럼 뻗어 있는 건물과 멀어질수록 고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다는 시장에 있는 허름한 콩나물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허기를 자극하는 진한 육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엄마, 나 왔어.”
고다가 밝게 웃으며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엄마, 정애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무실에서 들고 온 종이상자는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출근한 거 아니었어?”
정애는 고다가 들고 온 상자를 힐끔 쳐다봤다.
“출근했다 온 거야.”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 퇴근을 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아픈 거야?”
정애는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고다에게 물었다.
“아니. 휴가야.”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아직 정애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자리를 새로 구하면 그때 솔직하게 말할 작정이었다.
“세상에, 별일이다. 네가 입사하고 휴가를 다 쓰고. 처음 아니냐? 미친년처럼 일만 하더니.”
정애를 도와 고다도 콩나물을 다듬었다.
“내가 그랬나?”
헛웃음이 나왔다. 정애의 말대로 젊음의 열정을 다 바친 회사에 지금은 한 톨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 이것아. 꽃다운 시절 다 간다고 내가 누누이 말해도 안 듣더니.”
“그러게. 진즉에 엄마 말 들을걸.”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숙이고 들어오는 고다가 정애는 도리어 이상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쉬고 싶어서. 그런데 엄마, 우리 빚 다 갚은 거 맞지?”
“젊은 게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냐? 지지난 달에 남은 빚 깡그리 청산했다고 파티까지 해 놓고선.”
“당연히 기억하지. 혹시나 해서. 내가 모르는 빚이 혹시라도 남아 있을까 봐.”
정애는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고다를 설핏 보고는 딱 잘라 말했다.
“빚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한 푼도 남아 있는 거 없으니까 너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응.”
“그냥 둬. 손에 콩나물 비린내 난다.”
정애는 고다가 콩나물을 만지지 못하도록 그릇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는 하는데, 뭘.”
“나야 원래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고. 손에서 냄새나면 좋아?”
“까짓거 씻으면 되지.”
“그럼 그러든지.”
정애는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콩나물을 다듬었다.
“엄마…….”
정애의 얼굴을 보니 고다는 괜히 울컥한다.
“왜 애틋하게 불러? 무섭다.”
“우리 엄마도 많이 늙었네 싶어서. 옛날에 참 고왔는데.”
“소싯적에 안 고운 여자도 있나? 시장통에서 국밥 파는 여편네 몰골이 다 똑같지 뭐.”
예전의 정애는 예뻤다. 어린 고다를 옆에 앉히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곤 했었다. 어릴 적 고다는 엄마를 보면서 천사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옛날에는 말도 고왔는데. 친구들이 엄마 보면 우아하다고 난리였었는데.”
정애가 콩나물을 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옆에서 29년을 보면서 함께 살아온 딸이다. 숨소리만 들어도 고다의 어디가 달라졌는지 고다의 기분이 어떤지 정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 왜 이러냐? 뭐 잘못 처먹고 왔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고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어유, 욕 좀. 엄마가 자꾸 그런 말 쓰니까 내가 배우잖아.”
“놀고 있네. 지랄이 풍년이다, 이년아.”
“엄마!”
과거의 향수에 젖어 애잔했던 고다는 정애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가 협조를 안 하니 내가 분위기를 잡을 수가 없어. 뭐, 청순, 아련, 청초, 이런 거랑 내 이미지가 점점 멀어지잖아.”
고다가 입을 샐쭉거렸다.
“놀고 자빠졌네. 할 일 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퍼 자. 피곤하다고 골골대지 말고.”
“내가 언제 골골거렸다고.”
정애는 고다의 손에 있던 콩나물을 모두 뺏어 버렸다.
“그만두고 집에 가서 쉬기나 해. 휴가라며.”
“알았어.”
정애가 험한 말을 내뱉고는 있지만 저를 안쓰럽게 여기는 걸 고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이니까.
“엄마, 나 내일 아버지 보러 갈 거야. 요즘 바빠서 통 못 갔어.”
“그래라. 네 아빠 좋아하시겠네. 너라면 죽고 못 사는 양반이니. 그동안 엄청 보고 싶었을 거야.”
“응.”
고다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쉬는 김에 우수 갈아입을 옷도 갖다 줘. 다 큰 아들 얼굴 보기가 힘드니. 자식 둘이라고 있는 것들이 죄다 바쁘다고 난리들이야, 원. 세상 일을 지들이 다 하나.”
“요즘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바쁘지.”
“그러게. 뭔 놈의 세상이 다들 바쁘기만 해. 나중에는 바빠서 숨 쉴 짬도 없을지 몰라.”
“엄마도, 참. 나 간다.”
고다가 콩나물 다듬던 손을 휴지로 대충 닦고 한쪽에 두었던 상자를 들고 일어섰다.
“어차피 회사 나왔으면 푹 쉬어.”
정애가 고다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응?”
“지금까지 고생만 진탕 했는데 쉬라고. 늦잠도 자고. 10년 동안 애 많이 썼으니 너 그래도 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마음 편하게 놀아.”
말하지도 않았는데 정애는 고다가 회사를 그만둔 걸 그새 눈치챘나 보다.
“빚도 정리됐고, 우수도 벌고. 우리 생활비는 국밥 팔아서도 충분하니까 너는 그만 발발거리라고.”
“응. 나 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쉬라는 정애의 말이 고다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엄마라는 존재는 역시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갈게.”
“집에 가면 청소 좀 하고 쉬든지.”
“알았어.”
“세탁기에 빨래 있을 거야. 햇빛 날 때 널고.”
“응.”
“이왕 하는 김에 화장실 청소도 해. 그리고 베란다 청소도 한 지 제법 되는데. 냉장고 정리도…….”
“엄마! 쉬라며!”
한껏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몽글몽글 솟아나던 고다가 정애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맘 편히 쉬라는 정애의 처음 말과는 달리 고다가 집에 가서 할 일이 자꾸만 늘어났다.
정애는 큭큭 웃는 소리를 냈다.
“엄마가 심했니? 그래도 몸이 바빠야 딴생각도 안 드는 거야. 죽을상 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 봤자 좋을 거 없다. 일은 천천히 찾으면 되고.”
“네, 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합지요.”
고다는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래, 진짜 쉬어야지. 우리 딸, 너무 힘들었어.”
고다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며 정애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딸이 엄청 고생했다고. 내 말 들려? 이제 그만 힘들게 해라, 이 웬수야. 아빠면 고다 잘 살게 도와줘야지.”
정애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물방울이 눈꺼풀에 살짝 맺혔지만 정애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다시 콩나물을 다듬었다. 우울한 감상에 빠져 있기보다는 오늘 장사 준비가 정애에게는 더 급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고다는 쉬지 않고 정애가 시킨 일을 모조리 끝내 버렸다. 몇 시간이 걸려 일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집안일을 정신없이 다 해치우고 나자 온몸이 쑤셔 왔다.
“죽을 거 같아.”
청소를 하다 보니 옷장 위까지 모두 닦았고, 빨래를 개켜 넣다 보니 서랍장 정리까지 끝내 버렸다. 구석구석 묵은 때를 깔끔하게 닦아 내고 반짝거리는 집 안을 보자 기분도 말끔해졌다.
“그래도 흐뭇하다. 집도 깨끗해지고, 몸 움직이는 동안 잡념도 안 들고. 엄마 말이 맞네.”
고다는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들었다.
“콩쥐가 일을 다 했으니 슬슬 잔칫집에나 가 볼까?”
고다가 연희와 하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녀 삼총사, 오늘 모일까?]
[나 촬영 중. 8시 전에 끝남.]
[나도 오늘 괜찮아. 어디서 볼까?]
[신사동. 8시.]
“아, 간만에 애들도 보고. 회사 그만둘 만하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한 고다는 침대에서 하품을 하며 뒹굴었다.
“졸리다.”
고다는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첫날치고는 꽤 그럴싸한 하루였다.
“뭐? 회사를 때려치워?”
하나가 소주를 마시려다 말고 들었던 잔을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들은 말이 맞는 거야, 연희야? 얘가, 얘가 정신이 나갔나.”
하나의 통통 튀는 목소리에 술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다른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 셋이 앉아 있는 것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데 하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남자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큰 눈과 높은 콧대에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하나는 연기자이다. 비록 친구1, 직장 동료2 같은 단역 배우로 전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멋진 배우가 되어 대한민국 국민배우 강태하와 함께 진한 격정 멜로를 연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하나는 가지고 있다.
“하나야, 목소리 조금 낮춰. 사람들이 쳐다봐. 너는 연예인인 얘가 조심성도 없이.”
하나를 말리고 있는 연희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청순한 분위기 그대로 성격도 온화하고 다정하여 대학 병원에서 얼짱 간호사로 유명했다.
밝고 씩씩한 고다와 정의롭고 다혈질인 하나와는 성격상 전혀 닮지 않은 연희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고다, 하나, 연희 세 사람은 고등학교 때부터 죽고 못 사는 삼총사로 지내 왔다.
“지랄하네. 연예인은 무슨,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나저나 연희, 너는 고다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실로? 진정으로? 그 좋은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는데? 연봉 얼마짜리라고 했었지? 사천? 그 많은 돈을 포기하고 회사를 그만뒀다는데?”
흥분한 하나와는 달리 연희는 차분했다.
“고다가 뭔가 계획이 있는 거겠지. 절대 경솔하게 행동할 애가 아니잖아.”
연희의 말에 하나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몸을 바짝 고다에게로 붙였다.
“그래, 좋아. 이유나 들어 보자. 이해 못 할 이유라면 어머니 대신에 내가 흠씬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해 주겠어. 멋진 광고쟁이가 되겠다더니 왜 그만둔 거야?”
고다가 쓰디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만둔 거야.”
“뭔 소리래?”
“멋진 광고쟁이가 되고 싶은데 바보 같은 광고쟁이가 되고 있어서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온 거지. 나의 쌈박한 광고를 위해서.”
고다의 속 편한 모습에 하나는 어이가 없었다.
“웃기고 있네. 네가 고생을 안 해 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지.”
하나가 소주 한 잔을 그대로 쭈욱 마셨다.
“캬아. 소주 맛 한번 내 인생처럼 쓰네.”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 하나가 고다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네 꿈이 아무리 크고 원대하면 뭐 하냐? 기회가 없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꿈을 펼칠 마당이 없는데 무슨…….”
하나는 연거푸 소주를 비웠다.
아무래도 어제 영화 오디션 결과가 별로인 모양이다. 이번에는 제법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라고 좋아했었는데 햇병아리 연기자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다 네가 정말 원하는 광고를 만들고 싶어도 더럽고 치사하지만 잘나가는 광고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고.”
“알아.”
“알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응.”
한 손으로 소주잔을 들고 홀짝이는 고다를 물끄러미 보더니 하나가 평소와 다르게 진중하게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