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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도록 노력하면 될까?(1)
“나 어제 오디션 봤어. 처음으로 이름 있는 배역이었지. 친구1이 아니라 ‘이미소’라는 배역. 그래서 캐스팅되려고 나 열심히 노력했다.”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려는 하나를 연희가 말렸다. 그리고 대신 소주병을 들어 술잔에 따라 주었다.
“그 캐릭터에 맞는 옷부터 말투, 동작, 시선 처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서 오디션 봤어. 오디션 끝내고 감독님이 흡족하다고. 다음 주에 보자고 약속도 했어. 그래서 무조건 된다고 생각했지.”
하나는 소주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너 틀림없이 잘했을 거야. 그런데 뭐가 잘못됐어?”
하나가 연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잘못됐지. 우리 순진한 연희는 절대 모를 비열한 어둠의 음모가 있었지.”
“음모라니?”
연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빈 소주잔에 소주를 또 채워 주었다.
“그게 말이야, 이쪽 세상에도 수저가 있더라고.”
하나는 소주를 조금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 프로였는데 오늘 일이 틀어졌어. 다른 사람으로 정해졌다고,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 받았거든.”
“뭐?”
“어떻게 그래?”
놀란 고다와 연희가 하나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젠장.”
하나가 술잔을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소주잔이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게, 영화 투자자 사돈의 조카가 연기자 해 보는 게 꿈이래.”
“설마?”
“그래, 그 설마가 현실이 됐다. 투자자 사돈의 조카를 내 배역에 꽂은 거야.”
“세상에.”
“감독도 어쩔 수 없었겠지. 영화가 투자를 못 받으면 제작 자체가 힘드니까. 비중 크지 않은 조연 배우 하나 넣어 주고 맘 편하게 투자받는 게 훨씬 이득이겠지. 덕분에 나는 미끄러졌고.”
고다와 연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기를 하는 나에게도, 원하는 광고를 찍고 싶은 너에게도 금수저가 필요한 세상이야. 그러니 열정만으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고.”
참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다. 나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 뒤를 받쳐 주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시대이다.
“하나야…….”
연희의 애달픈 부름에 하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연희, 너 그렇게 나 부르지 마. 닭살 돋아.”
“그래도…….”
연희의 안타까운 눈빛에 하나는 그녀의 눈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스탑, 거기까지. 나 송하나야. 그까짓 일로 기 죽지 않아. 또 기회를 기다려 봐야지. 오늘 기분이 개 같은 거지, 세상 무너진 건 아니니까.”
“그래, 너 송하나야.”
씩씩한 하나의 말에 연희가 생긋 웃어 보였다.
“고다, 너도 쉽지는 않을 거다. 일이 안 풀려도 회사 그만둔 거 후회하지 않겠어?”
하나의 물음에 고다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만졌다.
“응. 후회 안 해. 내가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숨 쉬고 살고 싶어서였으니까.”
“뭔 소리래?”
“회사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말고 그저 시키는 것만 하라고 강요하는데,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어. 그렇게 살다가 내가 원하는 광고는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더 이상 필요 없는 부품이라고 폐기 처분 될까 봐.”
고다가 앞에 놓인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가 들으면 복에 겨웠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못 견디게 힘들었어.”
“고다야…….”
연희가 이번에는 고다가 걱정스러운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연희의 손을 고다가 힘주어 다시 잡고는 씨익 웃으며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인디언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죽은 말을 타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당장 내려라’. 나는 더 늦기 전에 당장 내렸을 뿐이야.”
“알았다, 기지배야. 자기 일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나도 내 코가 석 자야. 이 판국에 남의 일 걱정하게 생겼어? 자, 술이나 마셔.”
하나가 고다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뭔지 모르지만 네가 결정했다면 그게 맞는 거야. 우리 건배하자, 고다의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연희가 잔을 들었다.
“그래, 그래. 부디 우리 고다가 직장을 다시 가지기를.”
하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다의 몸을 슬쩍 밀었다.
“오냐, 부디 내가 직장 생활을 다시 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나의 멋진 배우 생활을 위해서. 제발 조연 좀 해 봐라. 내가 주인공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래, 나도 제발이다. 하나님, 친구2 말고 이름으로 불리는 배역으로 부탁합니다!”
소주가 담긴 술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와 세 여자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한 술집에 울렸다.
오늘 회사를 그만둔 고다는 손에 쥐고 있던 겉으로는 화려하고 커다란 선물 상자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부럽기만 한 선물 상자를.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선물 상자를 손에 넣었다. 어떤 선물이 들어 있을까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이다.
비록 새로운 선물 상자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녀는 예전 선물 상자에는 절대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다.
늦은 아침, 고다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속 쓰려.”
정애는 벌써 가게에 나갔는지 집 안은 조용했다.
고다가 주방으로 나가 보니 식탁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고다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정애의 메모를 읽었다.
<회사 때려치운 게 무슨 자랑이냐? 대충 해라. 늙은 어미가 해장국까지 끓여야겠어?>
정애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잘해 주면서 툴툴거리기는. 귀엽게.”
고다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풀리는 콩나물북엇국이었다.
“맛있겠다.”
고다는 국을 데우기 위해 가스 불을 켠 뒤 핸드폰을 들어 정애에게 전화했다.
“엄마, 고마워.”
― 이년아, 이게 마지막이야. 작작 마셔.
“네, 어제가 마지막이에요.”
― 오늘은 뭐 할 거야?
“슬슬 다른 회사 알아봐야지. 계속 놀 수는 없잖아.”
― 빨리 먹으면 체한다. 고작 하루 쉬어 놓고는 뭐가 또 바쁘다고.
정애가 툭툭 던지는 말속에 고다에 대한 걱정이 녹아 있었다.
“네. 오후에는 아빠한테도 가 보려고.”
― 그래, 잘 보고 와. 우수한테도 갈 거지?
“응. 집에를 안 들어오니 나라도 가서 얼굴 봐야지.”
― 그럼, 갈아입을 속옷이랑 옷, 우수 방에 챙겨 뒀으니까 갖다 줘.
“그럴게.”
어느새 북엇국이 팔팔 끓었다.
“국 끓네. 해장국, 고맙습니다.”
― 밥 먹어. 전화 끊는다.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고 엄마의 해장국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백수 첫날이었다. 또한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간만의 여유로운 아침이기도 했다.
저 멀리 우수가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고다가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어이, 최우수!”
훤칠한 키에 하얀 가운마저도 멋스럽게 보이는 잘생긴 의사 선생님은 한 살 어린 남동생 최우수였다.
하지만 우수는 고다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다.
“어, 그냥 가네? 야, 최우수! 최우수야!”
고다가 손나팔까지 만들어 큰 소리로 부르자 우수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좀…….”
고다가 방긋 웃으며 우수의 앞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왜, 최우수?”
“내가 병원에서는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면 최 선생으로 부르든지. 환자들도 듣는데.”
우수의 말대로 ‘최우수’라는 이름이 우스운지 근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우수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고다는 그저 재미있을 뿐이었다.
“좋잖아, 최우수. ‘최고다’보다는 덜 튀는데. 아빠는 이왕 이름을 지을 거면 나를 최우수로 해 주지. 최고다는 너무하셨어.”
“아, 제발!”
학교 다닐 때부터 이름 때문에 어지간히 놀림을 받던 최고다, 최우수 남매였다.
“알았어요, 최 선생님. 그만할게. 자, 잘생긴 내 동생 얼굴이나 제대로 보자.”
고다가 우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오랜만에 우리 동생 얼굴 보네.”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 차가 된 우수는 일이 바빠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누나도 참.”
우수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간만에 보는 고다가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수야, 나 회사 때려치웠다.”
“정말?”
“응.”
갑작스러운 고다의 고해성사에 놀라는 것도 잠시, 우수는 고다의 어깨를 힘주어 토닥였다.
“잘했어. 누나 그동안 너무 힘들었잖아. 매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이제는 나도 버니까 쉬면서 누나 하고 싶은 거 해.”
동생이라 항상 어리게만 봤는데 어느새 우수는 고다 앞에 듬직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고맙다.”
고다는 집에서 들고 나온 가방을 우수에게 건넸다.
“갈아입을 옷이야. 집에는 못 와도 엄마한테 전화는 자주 해라. 엄마가 말은 안 해도 너 궁금해 하셔.”
“그럴게. 차라도 마시면 좋은데 나는 수술 바로 들어가야 해서.”
“바쁜데 얼른 가. 연희는?”
“연희는 나이트 근무라 병원에 없는데.”
고다가 우수의 등짝을 퍽 소리가 나게 세게 때렸다.
“아야. 왜?”
“또, 또. 이 녀석이 누나 친구 이름 막 부를래? 연희가 네 친구야? 내 친구지.”
“으, 아파. 연희는 재수해서 나랑 같은 학번이잖아. 연희도 별말 안 하는데 누나는 왜 그래?”
우수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우수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인 연희를 자꾸 반말에 이름까지 부르는 건 불편했다.
“야야, 족보가 꼬이잖아. 나는 연희랑 친구고 너는 내 동생이고. 그런데 너랑 연희랑 친구 하면.”
“아, 몰라, 그런 거. 본인은 괜찮다는데 별걸 다 트집이야. 간다.”
우수는 정말 바쁜 건지 고다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짜식이 수상하단 말이야.”
우수가 허둥지둥 급하게 가는 모습을 보던 고다는 씽긋 웃으며 병원 밖을 나왔다. 그리고 아빠가 있는 곳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서울을 벗어나 한 시간쯤 걸려 고다는 조용한 추모 공원에 도착했다.
“아빠, 나 왔어.”
한적한 그곳에 고다의 서글픈 목소리만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고다의 아빠, 무진은 대답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게 고작이었다.
“아빠는 뭐가 그리 좋아서 매일 웃는 얼굴이야? 딸이 회사 그만둔 거는 알고 있어?”
말을 걸어 보지만 사진 속의 무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 * *
고다가 대학 합격을 확인한 날 고다의 아버지, 무진은 급성뇌출혈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의 도움을 받아 119 구급차로 병원에 긴급하게 후송이 되었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의사가 없어 얼마간 시간이 지체되었다. 골든타임을 놓친 무진은 수술은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허망하게 떠나고 말았다.
고다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무진과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고다에게 가장 기쁜 날은 고다의 가족에게 가장 절망스러운 날로 바뀌었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무진의 죽음은 순식간에 고다 가족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형수님, 이런 상황에서 죄송합니다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장례식장을 찾아온 무진의 후배는 황망한 마음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정애에게 그동안 무진이 혼자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정애 모르게 무진이 친구 보증을 섰다는 것도, 그로 인해 무진이 갚아야 할 사채가 있다는 것도 고다네 식구들은 무진의 장례식 날 알게 되었다.
삼 일 동안 물 한 모금, 쌀 한 톨 넘기지 못했던 정애는 무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팍팍한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고다는 대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연년생인 우수는 고3이 되었다. 돈이 들어갈 일이 앞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정애는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고다네는 식탁에 차려져 있는 저녁상을 보았다. 고다의 대학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저녁. 행복하리라 기대했던 저녁 식사는 손도 대지 못한 채였다.
정애는 식탁에 놓인 반찬 그릇을 하나 들어 싱크대에 부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전은 그대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싱크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평소에도 먹을 복 없더니 이 맛있는 걸 먹지도 못하고. 딸밖에 모르던 사람이 고다 대학 합격한 거 확인도 못 하고. 불쌍해서 어떡해. 가엾어서 어떡해. 여보……, 여보…….”
정애는 싱크대 앞에 서서 울었다.
“우리 아빠 추운 거 싫어하는데. 혼자 거기 두면 엄청 추울 텐데. 아빠…….”
고다는 정애의 곁에 가지도 못하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정애 옆에 선 우수는 자신의 뺨을 적시는 눈물은 닦지도 못한 채 정애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무진을 가슴에 묻고 온 세 사람은 밤새 울어도 한스러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정애는 무진의 옷가지를 하나씩 정리했다.
무진의 옷을 보자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또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다와 우수에게 안 보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난 건지 눈물을 참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
고다의 인기척에 정애는 얼른 눈물을 닦아 냈다.
“왜, 고다야.”
고다가 정애 옆에 앉아 무진의 옷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빠 냄새 나는 것 같다. 아빠가 나 안으면 내가 아저씨 냄새 난다고 아빠 구박했었는데.”
“맞다. 네가 구박하면 네 아빠는 너 더 꼭 안아서 도망 못 가게 했지?”
무진과의 소소한 일상이 벌써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 또한 더욱 서글펐다.
“응.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아빠 많이 안아 줬을 텐데.”
정애가 고다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아빠, 그런 걸로 속상해하신 적 없다. 맘에 두지 마.”
“응.”
고다가 잠시 머뭇거리다 정애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빚도 많고 우수도 내년에 대학 가야 하는데. 엄마, 나 대학 어떡하지?”
고다의 말에 정애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맥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무진을 대신하여 고다와 우수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된 것이다.
“고다야, 당연히 너 대학 가야지.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공부만 해. 알았지?”
“하지만 엄마 혼자 무슨 수로…….”
“고다야.”
정애가 고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엄마는 엄마야.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야.”
정애는 고다를 보고 웃었다.
“그러니까 엄마만 믿어.”
“응.”
그때부터 정애는 달라졌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다. 산 사람은 내일을 생각하며 그래도 살아야 했다.
정애는 무진의 퇴직금과 살고 있던 집을 팔아 급한 빚을 먼저 청산했다. 남아 있는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고다와 우수를 키우기 위해 정애는 시장 안 골목길에 작은 콩나물국밥집을 차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정애는 나름 장사가 잘되었지만 빚을 매달 조금씩 갚고 나면 살림은 항상 빠듯했다. 정애 혼자 벌어서는 갚아야 할 빚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고다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정애의 가게 일을 도왔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도 했다.
정애와 고다의 유일한 목표는 우수가 휴학하지 않고 계속 의대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수는 그런 정애와 고다의 마음을 잘 알기에 학교 병원에 남기 위해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 * *
고다와 고다의 가족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렵게, 어렵게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고다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휴학을 하는 것도, 정애를 도와 식당 일을 하는 것도, 몸이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
고다는 그저 아빠가 보고 싶었다. 무진의 허허 웃는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미친 듯이 듣고 싶고, 무진의 사람 좋은 미소가 지금도 몸서리쳐지게 보고 싶었다.
무진의 추모함 앞에 선 고다는 물끄러미 무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앳된 얼굴의 고다와 그런 고다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무진. 10년이 지난 오늘, 고다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지만 무진은 여전히 1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봐도 아빠는 예전이나 변한 게 없네. 좀 있으면 딸보다도 젊어 보이겠어.”
무진은 고다의 농담을 알아들은 것마냥 웃고 있었다.
“나 많이 바빴어요. 회사가 나를 너무 못살게 굴었어. 얼마나 달달 볶았는지. 아빠도 다 보고 있었지? 그래서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잘한 걸까?”
대답도 없는 무진을 보며 고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빠랑 술 한잔하면서 이런 말 해야 하는데 나 혼자 중얼중얼이네.”
고다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무진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가운 유리에 고다의 손가락이 가로막혔다. 고다의 얼굴에는 허한 웃음만 감돌았다.
“아빠는 회사생활이 힘들어도 힘들다 내색조차 하지 못했죠? 아빠,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텼어요? 내가 힘든 것보다 아빠는 더 괴로웠을 텐데.”
어깨에 잔뜩 짊어진 책임감은 무거웠지만 그러한 고충조차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외로운 가장.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고 속으로 곪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모진 사회생활을 혹독하게 경험한 고다는 무진이 홀로 했을 속앓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회사 다녀 보니까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돼요. 나는 고작 3년 참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아빠는 20년을 넘게 참고 다녔으니.”
고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고 싶다, 아빠. 너무 보고 싶어.”
적막한 추모 공원에 가슴을 적시는 고다의 작은 흐느낌이 조용하게 울렸다.
진욱의 마음을 대변하듯 나직하게 울리는 슬픈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울고 있는 그 사람도 진욱의 아픔과 같은 아픔을 겪었으리라 짐작했다.
“아버지, 나처럼 누군가도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나 봐요.”
진욱은 아버지의 사진을 애잔하게 바라보다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버지, 또 올게요.”
진욱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추모공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연 진욱의 눈에 추모공원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옆모습이 설핏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고다?”
차를 타려다 말고 문득 떠오른 이름에 진욱은 여자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걸음이 빠른 건지 시야에서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닌가.”
진욱은 방금 전 고다를 떠올리게 만든 여자를 벌써 기억에서 지워 버린 듯 무심히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 어제 오디션 봤어. 처음으로 이름 있는 배역이었지. 친구1이 아니라 ‘이미소’라는 배역. 그래서 캐스팅되려고 나 열심히 노력했다.”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려는 하나를 연희가 말렸다. 그리고 대신 소주병을 들어 술잔에 따라 주었다.
“그 캐릭터에 맞는 옷부터 말투, 동작, 시선 처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서 오디션 봤어. 오디션 끝내고 감독님이 흡족하다고. 다음 주에 보자고 약속도 했어. 그래서 무조건 된다고 생각했지.”
하나는 소주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너 틀림없이 잘했을 거야. 그런데 뭐가 잘못됐어?”
하나가 연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잘못됐지. 우리 순진한 연희는 절대 모를 비열한 어둠의 음모가 있었지.”
“음모라니?”
연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빈 소주잔에 소주를 또 채워 주었다.
“그게 말이야, 이쪽 세상에도 수저가 있더라고.”
하나는 소주를 조금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 프로였는데 오늘 일이 틀어졌어. 다른 사람으로 정해졌다고,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 받았거든.”
“뭐?”
“어떻게 그래?”
놀란 고다와 연희가 하나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젠장.”
하나가 술잔을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소주잔이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게, 영화 투자자 사돈의 조카가 연기자 해 보는 게 꿈이래.”
“설마?”
“그래, 그 설마가 현실이 됐다. 투자자 사돈의 조카를 내 배역에 꽂은 거야.”
“세상에.”
“감독도 어쩔 수 없었겠지. 영화가 투자를 못 받으면 제작 자체가 힘드니까. 비중 크지 않은 조연 배우 하나 넣어 주고 맘 편하게 투자받는 게 훨씬 이득이겠지. 덕분에 나는 미끄러졌고.”
고다와 연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기를 하는 나에게도, 원하는 광고를 찍고 싶은 너에게도 금수저가 필요한 세상이야. 그러니 열정만으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고.”
참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다. 나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 뒤를 받쳐 주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시대이다.
“하나야…….”
연희의 애달픈 부름에 하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연희, 너 그렇게 나 부르지 마. 닭살 돋아.”
“그래도…….”
연희의 안타까운 눈빛에 하나는 그녀의 눈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스탑, 거기까지. 나 송하나야. 그까짓 일로 기 죽지 않아. 또 기회를 기다려 봐야지. 오늘 기분이 개 같은 거지, 세상 무너진 건 아니니까.”
“그래, 너 송하나야.”
씩씩한 하나의 말에 연희가 생긋 웃어 보였다.
“고다, 너도 쉽지는 않을 거다. 일이 안 풀려도 회사 그만둔 거 후회하지 않겠어?”
하나의 물음에 고다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만졌다.
“응. 후회 안 해. 내가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숨 쉬고 살고 싶어서였으니까.”
“뭔 소리래?”
“회사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말고 그저 시키는 것만 하라고 강요하는데,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어. 그렇게 살다가 내가 원하는 광고는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더 이상 필요 없는 부품이라고 폐기 처분 될까 봐.”
고다가 앞에 놓인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가 들으면 복에 겨웠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못 견디게 힘들었어.”
“고다야…….”
연희가 이번에는 고다가 걱정스러운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연희의 손을 고다가 힘주어 다시 잡고는 씨익 웃으며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인디언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죽은 말을 타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당장 내려라’. 나는 더 늦기 전에 당장 내렸을 뿐이야.”
“알았다, 기지배야. 자기 일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나도 내 코가 석 자야. 이 판국에 남의 일 걱정하게 생겼어? 자, 술이나 마셔.”
하나가 고다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뭔지 모르지만 네가 결정했다면 그게 맞는 거야. 우리 건배하자, 고다의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연희가 잔을 들었다.
“그래, 그래. 부디 우리 고다가 직장을 다시 가지기를.”
하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다의 몸을 슬쩍 밀었다.
“오냐, 부디 내가 직장 생활을 다시 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나의 멋진 배우 생활을 위해서. 제발 조연 좀 해 봐라. 내가 주인공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래, 나도 제발이다. 하나님, 친구2 말고 이름으로 불리는 배역으로 부탁합니다!”
소주가 담긴 술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와 세 여자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한 술집에 울렸다.
오늘 회사를 그만둔 고다는 손에 쥐고 있던 겉으로는 화려하고 커다란 선물 상자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부럽기만 한 선물 상자를.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선물 상자를 손에 넣었다. 어떤 선물이 들어 있을까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이다.
비록 새로운 선물 상자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녀는 예전 선물 상자에는 절대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다.
늦은 아침, 고다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속 쓰려.”
정애는 벌써 가게에 나갔는지 집 안은 조용했다.
고다가 주방으로 나가 보니 식탁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고다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정애의 메모를 읽었다.
<회사 때려치운 게 무슨 자랑이냐? 대충 해라. 늙은 어미가 해장국까지 끓여야겠어?>
정애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잘해 주면서 툴툴거리기는. 귀엽게.”
고다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풀리는 콩나물북엇국이었다.
“맛있겠다.”
고다는 국을 데우기 위해 가스 불을 켠 뒤 핸드폰을 들어 정애에게 전화했다.
“엄마, 고마워.”
― 이년아, 이게 마지막이야. 작작 마셔.
“네, 어제가 마지막이에요.”
― 오늘은 뭐 할 거야?
“슬슬 다른 회사 알아봐야지. 계속 놀 수는 없잖아.”
― 빨리 먹으면 체한다. 고작 하루 쉬어 놓고는 뭐가 또 바쁘다고.
정애가 툭툭 던지는 말속에 고다에 대한 걱정이 녹아 있었다.
“네. 오후에는 아빠한테도 가 보려고.”
― 그래, 잘 보고 와. 우수한테도 갈 거지?
“응. 집에를 안 들어오니 나라도 가서 얼굴 봐야지.”
― 그럼, 갈아입을 속옷이랑 옷, 우수 방에 챙겨 뒀으니까 갖다 줘.
“그럴게.”
어느새 북엇국이 팔팔 끓었다.
“국 끓네. 해장국, 고맙습니다.”
― 밥 먹어. 전화 끊는다.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고 엄마의 해장국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백수 첫날이었다. 또한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간만의 여유로운 아침이기도 했다.
저 멀리 우수가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고다가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어이, 최우수!”
훤칠한 키에 하얀 가운마저도 멋스럽게 보이는 잘생긴 의사 선생님은 한 살 어린 남동생 최우수였다.
하지만 우수는 고다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다.
“어, 그냥 가네? 야, 최우수! 최우수야!”
고다가 손나팔까지 만들어 큰 소리로 부르자 우수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좀…….”
고다가 방긋 웃으며 우수의 앞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왜, 최우수?”
“내가 병원에서는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면 최 선생으로 부르든지. 환자들도 듣는데.”
우수의 말대로 ‘최우수’라는 이름이 우스운지 근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우수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고다는 그저 재미있을 뿐이었다.
“좋잖아, 최우수. ‘최고다’보다는 덜 튀는데. 아빠는 이왕 이름을 지을 거면 나를 최우수로 해 주지. 최고다는 너무하셨어.”
“아, 제발!”
학교 다닐 때부터 이름 때문에 어지간히 놀림을 받던 최고다, 최우수 남매였다.
“알았어요, 최 선생님. 그만할게. 자, 잘생긴 내 동생 얼굴이나 제대로 보자.”
고다가 우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오랜만에 우리 동생 얼굴 보네.”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 차가 된 우수는 일이 바빠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누나도 참.”
우수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간만에 보는 고다가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수야, 나 회사 때려치웠다.”
“정말?”
“응.”
갑작스러운 고다의 고해성사에 놀라는 것도 잠시, 우수는 고다의 어깨를 힘주어 토닥였다.
“잘했어. 누나 그동안 너무 힘들었잖아. 매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이제는 나도 버니까 쉬면서 누나 하고 싶은 거 해.”
동생이라 항상 어리게만 봤는데 어느새 우수는 고다 앞에 듬직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고맙다.”
고다는 집에서 들고 나온 가방을 우수에게 건넸다.
“갈아입을 옷이야. 집에는 못 와도 엄마한테 전화는 자주 해라. 엄마가 말은 안 해도 너 궁금해 하셔.”
“그럴게. 차라도 마시면 좋은데 나는 수술 바로 들어가야 해서.”
“바쁜데 얼른 가. 연희는?”
“연희는 나이트 근무라 병원에 없는데.”
고다가 우수의 등짝을 퍽 소리가 나게 세게 때렸다.
“아야. 왜?”
“또, 또. 이 녀석이 누나 친구 이름 막 부를래? 연희가 네 친구야? 내 친구지.”
“으, 아파. 연희는 재수해서 나랑 같은 학번이잖아. 연희도 별말 안 하는데 누나는 왜 그래?”
우수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우수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인 연희를 자꾸 반말에 이름까지 부르는 건 불편했다.
“야야, 족보가 꼬이잖아. 나는 연희랑 친구고 너는 내 동생이고. 그런데 너랑 연희랑 친구 하면.”
“아, 몰라, 그런 거. 본인은 괜찮다는데 별걸 다 트집이야. 간다.”
우수는 정말 바쁜 건지 고다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짜식이 수상하단 말이야.”
우수가 허둥지둥 급하게 가는 모습을 보던 고다는 씽긋 웃으며 병원 밖을 나왔다. 그리고 아빠가 있는 곳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서울을 벗어나 한 시간쯤 걸려 고다는 조용한 추모 공원에 도착했다.
“아빠, 나 왔어.”
한적한 그곳에 고다의 서글픈 목소리만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고다의 아빠, 무진은 대답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게 고작이었다.
“아빠는 뭐가 그리 좋아서 매일 웃는 얼굴이야? 딸이 회사 그만둔 거는 알고 있어?”
말을 걸어 보지만 사진 속의 무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고다가 대학 합격을 확인한 날 고다의 아버지, 무진은 급성뇌출혈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의 도움을 받아 119 구급차로 병원에 긴급하게 후송이 되었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의사가 없어 얼마간 시간이 지체되었다. 골든타임을 놓친 무진은 수술은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허망하게 떠나고 말았다.
고다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무진과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고다에게 가장 기쁜 날은 고다의 가족에게 가장 절망스러운 날로 바뀌었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무진의 죽음은 순식간에 고다 가족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형수님, 이런 상황에서 죄송합니다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장례식장을 찾아온 무진의 후배는 황망한 마음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정애에게 그동안 무진이 혼자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정애 모르게 무진이 친구 보증을 섰다는 것도, 그로 인해 무진이 갚아야 할 사채가 있다는 것도 고다네 식구들은 무진의 장례식 날 알게 되었다.
삼 일 동안 물 한 모금, 쌀 한 톨 넘기지 못했던 정애는 무진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팍팍한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고다는 대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연년생인 우수는 고3이 되었다. 돈이 들어갈 일이 앞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정애는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고다네는 식탁에 차려져 있는 저녁상을 보았다. 고다의 대학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저녁. 행복하리라 기대했던 저녁 식사는 손도 대지 못한 채였다.
정애는 식탁에 놓인 반찬 그릇을 하나 들어 싱크대에 부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전은 그대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싱크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평소에도 먹을 복 없더니 이 맛있는 걸 먹지도 못하고. 딸밖에 모르던 사람이 고다 대학 합격한 거 확인도 못 하고. 불쌍해서 어떡해. 가엾어서 어떡해. 여보……, 여보…….”
정애는 싱크대 앞에 서서 울었다.
“우리 아빠 추운 거 싫어하는데. 혼자 거기 두면 엄청 추울 텐데. 아빠…….”
고다는 정애의 곁에 가지도 못하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정애 옆에 선 우수는 자신의 뺨을 적시는 눈물은 닦지도 못한 채 정애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무진을 가슴에 묻고 온 세 사람은 밤새 울어도 한스러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정애는 무진의 옷가지를 하나씩 정리했다.
무진의 옷을 보자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또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다와 우수에게 안 보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난 건지 눈물을 참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
고다의 인기척에 정애는 얼른 눈물을 닦아 냈다.
“왜, 고다야.”
고다가 정애 옆에 앉아 무진의 옷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빠 냄새 나는 것 같다. 아빠가 나 안으면 내가 아저씨 냄새 난다고 아빠 구박했었는데.”
“맞다. 네가 구박하면 네 아빠는 너 더 꼭 안아서 도망 못 가게 했지?”
무진과의 소소한 일상이 벌써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 또한 더욱 서글펐다.
“응.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아빠 많이 안아 줬을 텐데.”
정애가 고다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아빠, 그런 걸로 속상해하신 적 없다. 맘에 두지 마.”
“응.”
고다가 잠시 머뭇거리다 정애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빚도 많고 우수도 내년에 대학 가야 하는데. 엄마, 나 대학 어떡하지?”
고다의 말에 정애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맥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무진을 대신하여 고다와 우수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된 것이다.
“고다야, 당연히 너 대학 가야지.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공부만 해. 알았지?”
“하지만 엄마 혼자 무슨 수로…….”
“고다야.”
정애가 고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엄마는 엄마야.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야.”
정애는 고다를 보고 웃었다.
“그러니까 엄마만 믿어.”
“응.”
그때부터 정애는 달라졌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다. 산 사람은 내일을 생각하며 그래도 살아야 했다.
정애는 무진의 퇴직금과 살고 있던 집을 팔아 급한 빚을 먼저 청산했다. 남아 있는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고다와 우수를 키우기 위해 정애는 시장 안 골목길에 작은 콩나물국밥집을 차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정애는 나름 장사가 잘되었지만 빚을 매달 조금씩 갚고 나면 살림은 항상 빠듯했다. 정애 혼자 벌어서는 갚아야 할 빚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고다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정애의 가게 일을 도왔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도 했다.
정애와 고다의 유일한 목표는 우수가 휴학하지 않고 계속 의대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수는 그런 정애와 고다의 마음을 잘 알기에 학교 병원에 남기 위해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고다와 고다의 가족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렵게, 어렵게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고다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휴학을 하는 것도, 정애를 도와 식당 일을 하는 것도, 몸이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
고다는 그저 아빠가 보고 싶었다. 무진의 허허 웃는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미친 듯이 듣고 싶고, 무진의 사람 좋은 미소가 지금도 몸서리쳐지게 보고 싶었다.
무진의 추모함 앞에 선 고다는 물끄러미 무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앳된 얼굴의 고다와 그런 고다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무진. 10년이 지난 오늘, 고다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지만 무진은 여전히 1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봐도 아빠는 예전이나 변한 게 없네. 좀 있으면 딸보다도 젊어 보이겠어.”
무진은 고다의 농담을 알아들은 것마냥 웃고 있었다.
“나 많이 바빴어요. 회사가 나를 너무 못살게 굴었어. 얼마나 달달 볶았는지. 아빠도 다 보고 있었지? 그래서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잘한 걸까?”
대답도 없는 무진을 보며 고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빠랑 술 한잔하면서 이런 말 해야 하는데 나 혼자 중얼중얼이네.”
고다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무진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가운 유리에 고다의 손가락이 가로막혔다. 고다의 얼굴에는 허한 웃음만 감돌았다.
“아빠는 회사생활이 힘들어도 힘들다 내색조차 하지 못했죠? 아빠,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텼어요? 내가 힘든 것보다 아빠는 더 괴로웠을 텐데.”
어깨에 잔뜩 짊어진 책임감은 무거웠지만 그러한 고충조차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외로운 가장.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고 속으로 곪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모진 사회생활을 혹독하게 경험한 고다는 무진이 홀로 했을 속앓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회사 다녀 보니까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돼요. 나는 고작 3년 참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아빠는 20년을 넘게 참고 다녔으니.”
고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고 싶다, 아빠. 너무 보고 싶어.”
적막한 추모 공원에 가슴을 적시는 고다의 작은 흐느낌이 조용하게 울렸다.
진욱의 마음을 대변하듯 나직하게 울리는 슬픈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울고 있는 그 사람도 진욱의 아픔과 같은 아픔을 겪었으리라 짐작했다.
“아버지, 나처럼 누군가도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나 봐요.”
진욱은 아버지의 사진을 애잔하게 바라보다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버지, 또 올게요.”
진욱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추모공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연 진욱의 눈에 추모공원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옆모습이 설핏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고다?”
차를 타려다 말고 문득 떠오른 이름에 진욱은 여자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걸음이 빠른 건지 시야에서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닌가.”
진욱은 방금 전 고다를 떠올리게 만든 여자를 벌써 기억에서 지워 버린 듯 무심히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