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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1화
Chapter 0. 프롤로그
기나긴 복수를 마쳤다. 가문을 흔들고 부모를 죽이고 자긍심마저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원수들을 지옥 밑바닥으로 처박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았을 때 문득 깨달았다.
나로 인해 삶이 파괴된 한 남자가 있었음을.
Chapter 1. 끝의 시작 (1)
서국(西國) 최북단에 위치한 아르스란 제국의 겨울은 타국에 비해 유달리 혹독했다. 새파랗게 질려 곱은 손가락, 여러 번 찡긋거려야 움직이는 볼, 옷을 겹겹이 싸매도 움츠러드는 어깨까지.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계절이었다.
밤의 여신이 옷자락을 접고 여명이 터 오는 새벽.
귀족가라면 하인들이나 움직일 법한 시간이지만 아데마르 후작가는 갑작스러운 주인의 외출에 이르게 아침을 맞이했다.
“발렌드. 마차는?”
노집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세웠다. 가늘게 뻗은 눈주름을 접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전 일정은 비워 뒀겠지?”
“노빌리 백작 영애의 방문 요청이 있었습니다만 병환을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흥. 아직도 헛꿈을 꾸는 계집이 있나 보군.”
시모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년 사이에 백작가에서 후작가로 승작되는 바람에 달라붙는 벌 떼가 없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영애들 때문에 골치 아팠다.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렸던 시모네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의 감촉에 멈칫했다. 살짝 비틀린 채 굳은 새끼손가락과 약지. 제국의 매서운 북풍 때문이었다면 혀를 차며 데운 돌을 가져오라 했을 터다. 하지만 이 두 손가락은 지난 세월의 아픈 흔적이라 어떤 수를 써도 다시 예전처럼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요 며칠 눈이 계속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마부에게 각별히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그리고 기사단은……”
“기사단까지는 필요 없어. 굳이 데려간다면 누레딘과 그 휘하의 몇이면 되겠지.”
“……대기시키겠습니다.”
발렌드의 미간이 살짝 주름졌다. 그렇다고 시모네의 명에 토를 달진 않았다. 후작가 최고의 기사단을 붙여 주고 싶지만, 번거로운 걸 질색하는 주인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능한 노집사는 시모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질을 현명하게 받아넘기는 놀라운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시모네가 손을 휘휘 내젓자 발렌드는 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별다른 명이 없어도 그가 분주히 움직이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한 주인을 위해 추위를 막을 수 있게 마차 내부를 한껏 꾸밀 테고, 후작가의 유능한 기사 중 한 명인 누레딘을 호출할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았나.”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은 시모네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가 김 서린 곳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얕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른 시각부터 서둘렀는데도 이미 해가 산등성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라앉은 기온으로 안개가 옅게 꼈지만, 이 정도면 마차가 움직이는 데엔 지장이 없을 터였다.
그를 만난다. 그 사실에 시모네의 심장이 크게 울렁거렸다. 이것이 설렘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복수를 끝낸 후 몇 개월간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를 찾아갈 시간이 없었다.
“…….”
아니.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이기적인 핑계였다. 단지 그를 만나기 두려웠을 뿐이다. 복수를 위해 실컷 이용하고, 정작 그에게 자신이 필요할 땐 외면해 버렸다.
“너는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와 자신의 유년은 해질 대로 해어져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이것이 적들의 잘못인지, 미쳐 버렸던 자신의 잘못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주인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상념을 깨는 소리에 시모네는 발걸음을 돌렸다. 체온이 사라진 창은 다시 뿌옇게 변했다.
어차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상대는 어떨지 몰라도 시모네는 그를 봐야만 했다. 이것이 죄책감을 덜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일지라도.
일단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망가진 자신의 손가락처럼 영원히 어긋날지, 아니면 여전히…….
시모네는 시녀가 준비한 두꺼운 외투를 꼼꼼히 껴입었다. 걷는 걸음에 맞춰 발렌드는 뒷자락을 정리했다. 다소 빠른 속도로 저택을 나선 그는 입구에 세운 마차 앞에 다다라서야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시종에게서 털목도리를 받아 들 수 있었다.
“각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제국의 겨울치고는 바람도 덜 불고, 눈도 안 올 것 같습니다.”
거구의 기사가 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을 들녘 같은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접근에 시모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단단한 어깨를 쿡 찔렀다.
“누레딘 경. 경의 경솔한 언행과 시도 때도 없는 친근함을 조금 줄인다면 나 또한 피곤한 아침이라도 반갑게 맞아 줄 텐데 말이지.”
“하하! 여전히 냉정하십니다. 각하께선 항상 저혈압이시고 이른 시간에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이진 않으시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게 아닙니까.”
“쯧. 바로 출발할 테니 바닥 미끄럽다고 마차 하나 따라오지 못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
시모네는 더 타이르는 것보다 무시를 택했다. 누레딘은 가문의 비극 이후 수가 모자란 기사단의 공백에 그가 직접 기용한 인사였다. 전직 용병은 자유분방한 티를 숨기지 않고 때때로 버릇없이 굴었다. 이제 와선 시모네도 포기할 지경이었다. 꼴에 실력은 있어서 부단장까지 꿰찬 게 용했다. 아데마르 가문의 충신이자 단장인 카발리가 있어 그 위로 올라가긴 힘들 테지만.
발판을 밟고 마차 내부로 들어서니 예상대로 잔뜩 꾸민 실내가 보였다. 양털로 뒤덮인 의자와 냉기를 차단하는 두꺼운 암막 커튼까지. 바람이 잔잔한 날이라 추위를 막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장갑까지 손에 끼고서야 출발 신호를 보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시모네는 마차를 닫는 발렌드를 힐끔 일별했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자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서서히 마차가 움직였다. 하체를 타고 올라오는 진동을 느끼며 시모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오른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왼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무의식적으로 까닥거리려는 다리를 멈추고 목 뒷부분을 꾹꾹 누르며 주물렀다.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시모네는 답답한 마음에 커튼을 걷었다. 마침 수도 아르스라나의 중앙 시계탑을 지나는 중이라 현재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7시.
귀족들이 움직이는 시간은 아니었다. 오전 9시는 지나서야 느지막이 일어나는 그들과 달리 수도 평민들은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택을 나설 때면 항상 보는 거지만, 아침의 정경은 새삼스러웠다. 꽃 파는 것이 직업인지 품 안 가득 꽃 뭉치를 안고 가던 아이가 미끄덩한 길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시모네는 무심코 입꼬리를 올렸다.
혹독한 겨울도 하루를 준비하는 이들의 분주함을 늦추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와 같이 미끄러지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상점의 앞을 쓸고 닦는 여러 군상을 보다 보니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어? 마차다.”
이른 아침엔 보기 힘든 귀족가의 마차라 그런지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혔다. 하지만 마차의 문양을 확인한 후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입맛이 써 시모네는 커튼을 쳤다. 그들의 눈에 비친 두려움을 확연히 읽은 까닭이다. 타인의 눈 따윈 신경 쓰지 않지만, 정보가 느린 평민에게까지 악명이 퍼졌음에 껄끄러운 기분은 들었다.
“각하. 말씀하신 곳에 곧 도착합니다.”
마부석 쪽에 난 창을 연 마부가 상념을 깨웠다. 그가 언급하지 않아도 서서히 인적이 줄어든지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 시간여를 지치지 않고 달린 마차가 멈췄다. 찬 바람 때문에 빨간 볼을 한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발판을 밟고 내려오자 확 하고 냉기가 끼쳤다. 여우의 털도 뼈를 에는 추위를 온전히 막아 주진 못했다. 내뱉는 숨마다 입김이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시모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인가?”
“예. 각하.”
“물러가.”
시모네는 손을 휘저어 기사들과 마부를 멀찍이 물렸다. 물론 안전을 위해 시야 밖으로 벗어나진 않겠지만, 대화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홀로 남은 시모네는 천천히 눈앞의 건물을 훑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고서점은 낡은 골목과 잘 어울렸다. 붉은 벽돌 사이에 낀 역사처럼 간판 또한 군데군데 나뭇결이 갈라져 있고 일 층 외벽에 늘어선 화단은 겨울이라 그런지 식물이 바짝 말라 있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골목이라 여름이라 해도 화사하게 꽃을 피울지는 의문이지만.
흔적이 머무는 곳.
고서점 이름치고는 소박했다. 예술엔 별 관심 없는 그다웠다. 외벽을 문지르던 시모네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애써 외면하던 출입문에 다가섰다. 이제 이 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
시모네는 몇 번이나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다 겨우 용기 내어 손때 묻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턱, 걸렸다. 막힌 숨이 터졌다. 애써 끌어낸 용기가 스르르 땅으로 꺼졌다. 단단하게 잠긴 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모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부츠 굽이 사납게 바닥과 마찰했다. 너무 일찍 온 것일까. 기사인 만큼 여느 귀족처럼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당연히 이 시간이면 깨어 있을 줄 알았다.
시모네는 시간을 가늠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어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이후엔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후엔 황제와의 약속이 있어 시간을 뺄 수 없었다.
“다른 날에 올까…….”
오늘이 아니면 또 망설이다가 한참 후에야 찾아올 듯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모네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았다. 용기가 사라지니 서둘러 도망치고 싶었다. 손을 들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마부와 기사들을 부르려던 때였다.
탁.
둔탁한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갈랐다. 본능적으로 시모네의 등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예감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무시하고 마차로 돌아가 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으나 몸은 본능에 따라 소리가 난 방향을 찾았다.
탁. 탁. 탁.
일정한 둔탁음과 함께 옅은 안개를 헤치며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민의 평균 신장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법한 사내는 시린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무저갱의 어둠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지녔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모습일 터였다.
남자의 손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은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좀 전의 둔탁음은 저 지팡이에서 난 소리이리라.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점차 가까워지던 남자의 눈이 드디어 시모네에게 닿았다.
목구멍이 바짝 조이고 눈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시모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모네.”
남자의 입에서 안개보다 더 짙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옛 연인의 부름에 시모네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이야.”
남자의 눈이 동요로 흔들렸다. 예전의 쾌활하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시모네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레나트 라우리드센.”
탄식처럼 불린 이름에 남자, 레나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만 응시했다. 조용한 골목의 낡은 고서점 앞에서 대치한 두 남자. 누가 보면 참으로 어색한 모습이겠지만, 그런 것 따윈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시선에 얽매였다.
시모네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이곳에 올 용기를 가지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날 보자마자 주먹을 날리는 너. 외면하는 너. 저주를 퍼붓는 너 등등. 잔혹한 상상 속에서 시모네는 항상 약자였고 레마트는 그를 파멸시키는 강자였다.
“레나트. 난…….”
“각하.”
더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시모네가 입을 열었지만, 곧 말문이 막혔다. ‘각하’라고 했다.
“레나트?”
“이 골목은 해가 진 이후엔 무척이나 위험한 거리로 변합니다. 물론 지금은 아침입니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
살짝 열렸던 시모네의 입술이 매서운 추위에 강타당한 듯 얼어붙어 닫힐 줄 몰랐다. 거대한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각하. 각하라니. 각하라니!
레나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작 작위를 받아 최고위 권력자가 되었지만, 레나트에게 시모네는 유년의 친우이고 애정의 대상이다. 물론 그 애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리라 확신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공간이 유리된 듯 사이가 멀어졌을 줄은 몰랐다.
시모네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태연하게 뒷짐 지려고 했지만, 예리한 레나트의 눈엔 그 모습이 확연히 보였을 것이다. 아린 눈을 꾹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실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상상하지 않았던가. 사정없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곤 감았던 눈을 떴다.
“아…….”
시모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단한 어깨가 코에 닿고 그리운 체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무심코 얼굴을 묻은 시모네가 천천히 볼을 비볐다. 레나트의 길쭉한 손가락이 흐트러진 목도리를 여몄다. 두꺼운 외투로도 막지 못한 추위가 천천히 스러졌다.
시모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좀 전과 달리 온기를 품은 눈동자가 닿았다. 까만 동공에 비친 얼굴은 절박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애원을 하고 있었다.
“올해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해.”
“…….”
“다음엔 여우털이 아닌 양털로 목도리를 하는 게 좋겠어. 여우는 희귀하고 값비싸지만 흔한 양보다도 보온성이 떨어지지. 추위를 많이 타는 네게는 양모가 좋을 거야.”
손가락이 떨어지자 시모네는 아쉬운 탄성을 삼켰다. 이런 친절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시모네.”
나직한 부름에 시모네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제 귀에 닿은 부름이 믿기지 않았다. 냉막했던 첫 부름과는 달리 다정하다고까지 여겨질 만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심호흡이 무색하게도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나트는 다시금 거리를 벌리곤 열쇠를 꺼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손쉽게 열렸다.
“누추하지만 손님을 내쫓을 순 없으니 안으로 들어와.”
살짝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레나트는 먼저 들어갔다. 그를 놓칠세라 시모네는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쫓았다. 내부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끼쳤다. 서점 내부는 외부에서 봤을 때보다 공간이 꽤 넓었다. 건물 자체가 가로 보다는 세로로 더 긴 형식인지 시야가 닿는 먼 곳까지 책장이 빼곡했다.
“시모네. 밖의 일행도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라 해.”
“……어. 응.”
벽난로에 불을 지피려는지 잔가지를 집어넣던 레나트가 침묵을 깼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시모네가 문밖으로 손짓했다. 눈치 빠른 누레딘이 일행을 데리고 들어와 얌전히 서점 구석으로 피했다.
레나트는 능숙하게 불을 피웠다. 화력이 오르자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시모네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도…와줄까?”
“손에 익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곱게 자란 귀족은 더하지.”
“…….”
시모네의 볼이 무안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몰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어도 그는 허드렛일을 한 적 없었다. 그건 시모네뿐만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시중인만 있어도 귀족은 천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레나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한다는 게 시모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순리대로라면 공작가의 가주가 되어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랐을 그였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일정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하고 레나트는 구석에 있는 두 개의 의자를 가져왔다.
“앉아.”
팔목을 잡은 손에 이끌려 시모네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오르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아직도 등 부분은 시리지만 추위에 오그라든 손만큼은 확실히 온기에 녹았다. 긴장으로 꼿꼿하게 세운 상체마저 살짝 굽어질 정도였다.
멀뚱하게 앉아 있는 시모네와 달리 레나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다리를 저는데도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시모네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건 결코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칼날을 막으며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군분투하던 레나트를. 가문의 기사들도 채 막지 못했던 적들 앞에서 레나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대가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시모네 홀로 그 비극을 넘겼다면 지금에 와선 대수롭지 않은 기억이련만, 대가는 그가 아닌 레나트가 받았다. 그게 아파서 차마 사죄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기억은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터였다.
“너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 보인다.”
등 뒤로 포근한 것이 닿았다. 시모네의 입에서 얕은 탄성이 터졌다. 넋을 놓은 사이에 레나트에게 뒤를 내주고 말았다. 어깨 위에 둘린 담요 덕에 시렸던 등이 따뜻해졌다. 고마운 배려였으나 염치가 없어 손으로 담요만 꾹 쥐었다.
레나트가 티 테이블을 끌어왔다. 나뭇결이 거친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였다.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에 시모네는 나직이 미소 지었다. 그가 평소에 즐겨 먹는 차였다.
기름진 음식 때문에 쓴 차를 즐겨 먹는 여타 귀족과 달리 시모네는 단 차를 좋아했다. 항상 수제 초콜릿을 상비해 뜨거운 차에 풀어 먹기도 했다. 레나트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음에 시모네는 살짝 기분이 들떴다.
“제국의 겨울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길지. 움직이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럴까. 상념에 잠긴 사람을 깨우는 건 꽤 힘든 일이야.”
맞은편에 앉은 레나트가 여상이 중얼거렸다.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싶어 시모네는 어색하게 웃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니 풍부한 단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레나트는 무심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고 시모네는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만 봤다.
“흠! 흠!”
정적을 가른 건 누레딘의 헛기침이었다. 시모네가 힐끗 노려보니 눈짓으로 빠르게 레나트를 가리키며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린다. 답답해 죽겠다는 거겠지. 그야말로 답답했다. 누레딘의 눈치에도 섣불리 입을 못 여는데 레나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시모네. 너는 어려서부터 얌전한 아이였지.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레나트. 너는 잘 웃는 아이였어.”
뜬금없는 과거사에 시모네는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레나트는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아이였다. 지금과 달리 새까맸던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밤의 색이라 칭송받았고 외모까지 수려해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지 함께 걷기만 해도 질투를 받을 정도였다.
“벌써 십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열세 살에 처음 만나 지금은 스물여덟 해가 되었지. 세월만 놓고 보자면 가족보다 더 오래 보았어.”
“레나트.”
“오델르의 뱀이라 불리는 냉혹한 아데마르 후작이 여전히 내 앞에선 얌전한 아이가 되고, 가문을 배신한 라우리드센의 탕아가 여전히 네 앞에선 밝은 아이가 되는구나. 시모네.”
날카로운 시선과 달리 예전과 같은 부드러운 웃음에 시모네는 숨이 막혔다. 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시모네’구나. 이젠 아데마르 후작으로 불리는 그를 레나트만이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은 그 누구도 시모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수 없었다. 가족은 죽었고 또래의 사내 귀족 중엔 친우가 없었다. 황제조차 그를 작위로 불렀다. 물론 시모네가 허락지도 않을 터였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눈앞의 남자가 유일했다.
Chapter 0. 프롤로그
기나긴 복수를 마쳤다. 가문을 흔들고 부모를 죽이고 자긍심마저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원수들을 지옥 밑바닥으로 처박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았을 때 문득 깨달았다.
나로 인해 삶이 파괴된 한 남자가 있었음을.
Chapter 1. 끝의 시작 (1)
서국(西國) 최북단에 위치한 아르스란 제국의 겨울은 타국에 비해 유달리 혹독했다. 새파랗게 질려 곱은 손가락, 여러 번 찡긋거려야 움직이는 볼, 옷을 겹겹이 싸매도 움츠러드는 어깨까지.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계절이었다.
밤의 여신이 옷자락을 접고 여명이 터 오는 새벽.
귀족가라면 하인들이나 움직일 법한 시간이지만 아데마르 후작가는 갑작스러운 주인의 외출에 이르게 아침을 맞이했다.
“발렌드. 마차는?”
노집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세웠다. 가늘게 뻗은 눈주름을 접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전 일정은 비워 뒀겠지?”
“노빌리 백작 영애의 방문 요청이 있었습니다만 병환을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흥. 아직도 헛꿈을 꾸는 계집이 있나 보군.”
시모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년 사이에 백작가에서 후작가로 승작되는 바람에 달라붙는 벌 떼가 없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영애들 때문에 골치 아팠다.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렸던 시모네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의 감촉에 멈칫했다. 살짝 비틀린 채 굳은 새끼손가락과 약지. 제국의 매서운 북풍 때문이었다면 혀를 차며 데운 돌을 가져오라 했을 터다. 하지만 이 두 손가락은 지난 세월의 아픈 흔적이라 어떤 수를 써도 다시 예전처럼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요 며칠 눈이 계속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마부에게 각별히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그리고 기사단은……”
“기사단까지는 필요 없어. 굳이 데려간다면 누레딘과 그 휘하의 몇이면 되겠지.”
“……대기시키겠습니다.”
발렌드의 미간이 살짝 주름졌다. 그렇다고 시모네의 명에 토를 달진 않았다. 후작가 최고의 기사단을 붙여 주고 싶지만, 번거로운 걸 질색하는 주인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능한 노집사는 시모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질을 현명하게 받아넘기는 놀라운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시모네가 손을 휘휘 내젓자 발렌드는 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별다른 명이 없어도 그가 분주히 움직이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한 주인을 위해 추위를 막을 수 있게 마차 내부를 한껏 꾸밀 테고, 후작가의 유능한 기사 중 한 명인 누레딘을 호출할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았나.”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은 시모네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가 김 서린 곳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얕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른 시각부터 서둘렀는데도 이미 해가 산등성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라앉은 기온으로 안개가 옅게 꼈지만, 이 정도면 마차가 움직이는 데엔 지장이 없을 터였다.
그를 만난다. 그 사실에 시모네의 심장이 크게 울렁거렸다. 이것이 설렘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복수를 끝낸 후 몇 개월간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를 찾아갈 시간이 없었다.
“…….”
아니.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이기적인 핑계였다. 단지 그를 만나기 두려웠을 뿐이다. 복수를 위해 실컷 이용하고, 정작 그에게 자신이 필요할 땐 외면해 버렸다.
“너는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와 자신의 유년은 해질 대로 해어져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이것이 적들의 잘못인지, 미쳐 버렸던 자신의 잘못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주인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상념을 깨는 소리에 시모네는 발걸음을 돌렸다. 체온이 사라진 창은 다시 뿌옇게 변했다.
어차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상대는 어떨지 몰라도 시모네는 그를 봐야만 했다. 이것이 죄책감을 덜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일지라도.
일단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망가진 자신의 손가락처럼 영원히 어긋날지, 아니면 여전히…….
시모네는 시녀가 준비한 두꺼운 외투를 꼼꼼히 껴입었다. 걷는 걸음에 맞춰 발렌드는 뒷자락을 정리했다. 다소 빠른 속도로 저택을 나선 그는 입구에 세운 마차 앞에 다다라서야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시종에게서 털목도리를 받아 들 수 있었다.
“각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제국의 겨울치고는 바람도 덜 불고, 눈도 안 올 것 같습니다.”
거구의 기사가 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을 들녘 같은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접근에 시모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단단한 어깨를 쿡 찔렀다.
“누레딘 경. 경의 경솔한 언행과 시도 때도 없는 친근함을 조금 줄인다면 나 또한 피곤한 아침이라도 반갑게 맞아 줄 텐데 말이지.”
“하하! 여전히 냉정하십니다. 각하께선 항상 저혈압이시고 이른 시간에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이진 않으시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게 아닙니까.”
“쯧. 바로 출발할 테니 바닥 미끄럽다고 마차 하나 따라오지 못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
시모네는 더 타이르는 것보다 무시를 택했다. 누레딘은 가문의 비극 이후 수가 모자란 기사단의 공백에 그가 직접 기용한 인사였다. 전직 용병은 자유분방한 티를 숨기지 않고 때때로 버릇없이 굴었다. 이제 와선 시모네도 포기할 지경이었다. 꼴에 실력은 있어서 부단장까지 꿰찬 게 용했다. 아데마르 가문의 충신이자 단장인 카발리가 있어 그 위로 올라가긴 힘들 테지만.
발판을 밟고 마차 내부로 들어서니 예상대로 잔뜩 꾸민 실내가 보였다. 양털로 뒤덮인 의자와 냉기를 차단하는 두꺼운 암막 커튼까지. 바람이 잔잔한 날이라 추위를 막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장갑까지 손에 끼고서야 출발 신호를 보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시모네는 마차를 닫는 발렌드를 힐끔 일별했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자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서서히 마차가 움직였다. 하체를 타고 올라오는 진동을 느끼며 시모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오른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왼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무의식적으로 까닥거리려는 다리를 멈추고 목 뒷부분을 꾹꾹 누르며 주물렀다.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시모네는 답답한 마음에 커튼을 걷었다. 마침 수도 아르스라나의 중앙 시계탑을 지나는 중이라 현재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7시.
귀족들이 움직이는 시간은 아니었다. 오전 9시는 지나서야 느지막이 일어나는 그들과 달리 수도 평민들은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택을 나설 때면 항상 보는 거지만, 아침의 정경은 새삼스러웠다. 꽃 파는 것이 직업인지 품 안 가득 꽃 뭉치를 안고 가던 아이가 미끄덩한 길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시모네는 무심코 입꼬리를 올렸다.
혹독한 겨울도 하루를 준비하는 이들의 분주함을 늦추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와 같이 미끄러지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상점의 앞을 쓸고 닦는 여러 군상을 보다 보니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어? 마차다.”
이른 아침엔 보기 힘든 귀족가의 마차라 그런지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혔다. 하지만 마차의 문양을 확인한 후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입맛이 써 시모네는 커튼을 쳤다. 그들의 눈에 비친 두려움을 확연히 읽은 까닭이다. 타인의 눈 따윈 신경 쓰지 않지만, 정보가 느린 평민에게까지 악명이 퍼졌음에 껄끄러운 기분은 들었다.
“각하. 말씀하신 곳에 곧 도착합니다.”
마부석 쪽에 난 창을 연 마부가 상념을 깨웠다. 그가 언급하지 않아도 서서히 인적이 줄어든지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 시간여를 지치지 않고 달린 마차가 멈췄다. 찬 바람 때문에 빨간 볼을 한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발판을 밟고 내려오자 확 하고 냉기가 끼쳤다. 여우의 털도 뼈를 에는 추위를 온전히 막아 주진 못했다. 내뱉는 숨마다 입김이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시모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인가?”
“예. 각하.”
“물러가.”
시모네는 손을 휘저어 기사들과 마부를 멀찍이 물렸다. 물론 안전을 위해 시야 밖으로 벗어나진 않겠지만, 대화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홀로 남은 시모네는 천천히 눈앞의 건물을 훑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고서점은 낡은 골목과 잘 어울렸다. 붉은 벽돌 사이에 낀 역사처럼 간판 또한 군데군데 나뭇결이 갈라져 있고 일 층 외벽에 늘어선 화단은 겨울이라 그런지 식물이 바짝 말라 있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골목이라 여름이라 해도 화사하게 꽃을 피울지는 의문이지만.
흔적이 머무는 곳.
고서점 이름치고는 소박했다. 예술엔 별 관심 없는 그다웠다. 외벽을 문지르던 시모네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애써 외면하던 출입문에 다가섰다. 이제 이 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
시모네는 몇 번이나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다 겨우 용기 내어 손때 묻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턱, 걸렸다. 막힌 숨이 터졌다. 애써 끌어낸 용기가 스르르 땅으로 꺼졌다. 단단하게 잠긴 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모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부츠 굽이 사납게 바닥과 마찰했다. 너무 일찍 온 것일까. 기사인 만큼 여느 귀족처럼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당연히 이 시간이면 깨어 있을 줄 알았다.
시모네는 시간을 가늠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어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이후엔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후엔 황제와의 약속이 있어 시간을 뺄 수 없었다.
“다른 날에 올까…….”
오늘이 아니면 또 망설이다가 한참 후에야 찾아올 듯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모네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았다. 용기가 사라지니 서둘러 도망치고 싶었다. 손을 들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마부와 기사들을 부르려던 때였다.
탁.
둔탁한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갈랐다. 본능적으로 시모네의 등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예감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무시하고 마차로 돌아가 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으나 몸은 본능에 따라 소리가 난 방향을 찾았다.
탁. 탁. 탁.
일정한 둔탁음과 함께 옅은 안개를 헤치며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민의 평균 신장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법한 사내는 시린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무저갱의 어둠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지녔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모습일 터였다.
남자의 손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은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좀 전의 둔탁음은 저 지팡이에서 난 소리이리라.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점차 가까워지던 남자의 눈이 드디어 시모네에게 닿았다.
목구멍이 바짝 조이고 눈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시모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모네.”
남자의 입에서 안개보다 더 짙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옛 연인의 부름에 시모네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이야.”
남자의 눈이 동요로 흔들렸다. 예전의 쾌활하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시모네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레나트 라우리드센.”
탄식처럼 불린 이름에 남자, 레나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만 응시했다. 조용한 골목의 낡은 고서점 앞에서 대치한 두 남자. 누가 보면 참으로 어색한 모습이겠지만, 그런 것 따윈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시선에 얽매였다.
시모네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이곳에 올 용기를 가지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날 보자마자 주먹을 날리는 너. 외면하는 너. 저주를 퍼붓는 너 등등. 잔혹한 상상 속에서 시모네는 항상 약자였고 레마트는 그를 파멸시키는 강자였다.
“레나트. 난…….”
“각하.”
더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시모네가 입을 열었지만, 곧 말문이 막혔다. ‘각하’라고 했다.
“레나트?”
“이 골목은 해가 진 이후엔 무척이나 위험한 거리로 변합니다. 물론 지금은 아침입니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
살짝 열렸던 시모네의 입술이 매서운 추위에 강타당한 듯 얼어붙어 닫힐 줄 몰랐다. 거대한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각하. 각하라니. 각하라니!
레나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작 작위를 받아 최고위 권력자가 되었지만, 레나트에게 시모네는 유년의 친우이고 애정의 대상이다. 물론 그 애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리라 확신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공간이 유리된 듯 사이가 멀어졌을 줄은 몰랐다.
시모네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태연하게 뒷짐 지려고 했지만, 예리한 레나트의 눈엔 그 모습이 확연히 보였을 것이다. 아린 눈을 꾹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실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상상하지 않았던가. 사정없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곤 감았던 눈을 떴다.
“아…….”
시모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단한 어깨가 코에 닿고 그리운 체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무심코 얼굴을 묻은 시모네가 천천히 볼을 비볐다. 레나트의 길쭉한 손가락이 흐트러진 목도리를 여몄다. 두꺼운 외투로도 막지 못한 추위가 천천히 스러졌다.
시모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좀 전과 달리 온기를 품은 눈동자가 닿았다. 까만 동공에 비친 얼굴은 절박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애원을 하고 있었다.
“올해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해.”
“…….”
“다음엔 여우털이 아닌 양털로 목도리를 하는 게 좋겠어. 여우는 희귀하고 값비싸지만 흔한 양보다도 보온성이 떨어지지. 추위를 많이 타는 네게는 양모가 좋을 거야.”
손가락이 떨어지자 시모네는 아쉬운 탄성을 삼켰다. 이런 친절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시모네.”
나직한 부름에 시모네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제 귀에 닿은 부름이 믿기지 않았다. 냉막했던 첫 부름과는 달리 다정하다고까지 여겨질 만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심호흡이 무색하게도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나트는 다시금 거리를 벌리곤 열쇠를 꺼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손쉽게 열렸다.
“누추하지만 손님을 내쫓을 순 없으니 안으로 들어와.”
살짝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레나트는 먼저 들어갔다. 그를 놓칠세라 시모네는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쫓았다. 내부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끼쳤다. 서점 내부는 외부에서 봤을 때보다 공간이 꽤 넓었다. 건물 자체가 가로 보다는 세로로 더 긴 형식인지 시야가 닿는 먼 곳까지 책장이 빼곡했다.
“시모네. 밖의 일행도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라 해.”
“……어. 응.”
벽난로에 불을 지피려는지 잔가지를 집어넣던 레나트가 침묵을 깼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시모네가 문밖으로 손짓했다. 눈치 빠른 누레딘이 일행을 데리고 들어와 얌전히 서점 구석으로 피했다.
레나트는 능숙하게 불을 피웠다. 화력이 오르자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시모네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도…와줄까?”
“손에 익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곱게 자란 귀족은 더하지.”
“…….”
시모네의 볼이 무안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몰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어도 그는 허드렛일을 한 적 없었다. 그건 시모네뿐만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시중인만 있어도 귀족은 천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레나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한다는 게 시모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순리대로라면 공작가의 가주가 되어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랐을 그였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일정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하고 레나트는 구석에 있는 두 개의 의자를 가져왔다.
“앉아.”
팔목을 잡은 손에 이끌려 시모네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오르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아직도 등 부분은 시리지만 추위에 오그라든 손만큼은 확실히 온기에 녹았다. 긴장으로 꼿꼿하게 세운 상체마저 살짝 굽어질 정도였다.
멀뚱하게 앉아 있는 시모네와 달리 레나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다리를 저는데도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시모네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건 결코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칼날을 막으며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군분투하던 레나트를. 가문의 기사들도 채 막지 못했던 적들 앞에서 레나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대가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시모네 홀로 그 비극을 넘겼다면 지금에 와선 대수롭지 않은 기억이련만, 대가는 그가 아닌 레나트가 받았다. 그게 아파서 차마 사죄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기억은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터였다.
“너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 보인다.”
등 뒤로 포근한 것이 닿았다. 시모네의 입에서 얕은 탄성이 터졌다. 넋을 놓은 사이에 레나트에게 뒤를 내주고 말았다. 어깨 위에 둘린 담요 덕에 시렸던 등이 따뜻해졌다. 고마운 배려였으나 염치가 없어 손으로 담요만 꾹 쥐었다.
레나트가 티 테이블을 끌어왔다. 나뭇결이 거친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였다.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에 시모네는 나직이 미소 지었다. 그가 평소에 즐겨 먹는 차였다.
기름진 음식 때문에 쓴 차를 즐겨 먹는 여타 귀족과 달리 시모네는 단 차를 좋아했다. 항상 수제 초콜릿을 상비해 뜨거운 차에 풀어 먹기도 했다. 레나트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음에 시모네는 살짝 기분이 들떴다.
“제국의 겨울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길지. 움직이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럴까. 상념에 잠긴 사람을 깨우는 건 꽤 힘든 일이야.”
맞은편에 앉은 레나트가 여상이 중얼거렸다.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싶어 시모네는 어색하게 웃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니 풍부한 단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레나트는 무심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고 시모네는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만 봤다.
“흠! 흠!”
정적을 가른 건 누레딘의 헛기침이었다. 시모네가 힐끗 노려보니 눈짓으로 빠르게 레나트를 가리키며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린다. 답답해 죽겠다는 거겠지. 그야말로 답답했다. 누레딘의 눈치에도 섣불리 입을 못 여는데 레나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시모네. 너는 어려서부터 얌전한 아이였지.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레나트. 너는 잘 웃는 아이였어.”
뜬금없는 과거사에 시모네는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레나트는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아이였다. 지금과 달리 새까맸던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밤의 색이라 칭송받았고 외모까지 수려해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지 함께 걷기만 해도 질투를 받을 정도였다.
“벌써 십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열세 살에 처음 만나 지금은 스물여덟 해가 되었지. 세월만 놓고 보자면 가족보다 더 오래 보았어.”
“레나트.”
“오델르의 뱀이라 불리는 냉혹한 아데마르 후작이 여전히 내 앞에선 얌전한 아이가 되고, 가문을 배신한 라우리드센의 탕아가 여전히 네 앞에선 밝은 아이가 되는구나. 시모네.”
날카로운 시선과 달리 예전과 같은 부드러운 웃음에 시모네는 숨이 막혔다. 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시모네’구나. 이젠 아데마르 후작으로 불리는 그를 레나트만이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은 그 누구도 시모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수 없었다. 가족은 죽었고 또래의 사내 귀족 중엔 친우가 없었다. 황제조차 그를 작위로 불렀다. 물론 시모네가 허락지도 않을 터였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눈앞의 남자가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