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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2화
Chapter 1. 끝의 시작 (2)
타닥, 하고 장작에서 불티가 튀었다. 활활 타오르는 열기로 인해 하얀 머리카락이 초저녁 붉은 노을처럼 물들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임에도 편하게 기댄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턱을 괸 얼굴이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시선을 건넨다. 오만하다고까지 할 법한 자세인데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역시 귀족은 귀족이었다. 태어나기를 귀하게 나고, 오만하게 자라고, 화려하게 일생을 마친다. 레나트의 행동 하나하나엔 그런 귀족의 생리가 묻어 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레나트의 입이 열리자 시모네가 시선을 던졌다.
“……?”
“다리를 절게 된 것. 부모가 죽은 것. 미래가 망가진 것. 이 모든 것이 너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
시모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쏟아지는 비난이 감당하기 힘들어 숨을 들이켰다.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들려던 찻잔이 차 받침대와 부딪쳐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헛기침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떨리는 손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 위를 큼지막한 손이 감쌌다.
레나트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과해야 할까. 내 사과를 받아 주기는 할까. 찾아갈까. 찾아가지 말까.”
“그만! 그만해.”
속내가 까발려지는 것 같았다. 시모네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곤 고개를 숙였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모든 비난을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아팠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슥, 하고 의자가 밀렸다. 테이블을 짚은 레나트가 허리 숙여 상체를 가까이했다. 숨이 얽힐 정도의 거리에서 검은 눈동자가 냉혹하게 빛났다.
“시모네. 내가 복수하기를 바라?”
“……!”
시모네의 눈이 삽시간에 젖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는 닦을 새도 없이 새로운 눈물로 덮였다. 채 답도 못하고 끅끅대며 목울음을 뱉는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시모네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비참했다. 이런 처지가 참담한 게 아니라 비틀린 자신의 마음이 비참했다. 내심 레나트가 용서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잘못을 해도 절대 떠나지 않던 과거의 그를 기억하기에.
염치없게도. 파렴치하게도.
예전 같았으면 없던 손수건도 만들어 와 눈물을 닦아 줬을 레나트는 그저 무심한 모습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시모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려는 찰나였다. 그의 볼에 입술이 닿았다.
“흐…흡. 흑. 으읍.”
눈물로 시야가 흐렸지만, 따뜻한 위로를 못 알아챌 만큼은 아니었다. 촉, 하고 한 번 더 닿은 입술이 미련 없이 멀어졌다.
“울지 마. 지금은 손수건 따위 없어.”
“으, 으응. 흑. 으…응.”
“꿈 깨. 네가 바란 것과 달리 나는 아직도 천하의 바보라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아.”
무슨 말일까. 제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을 용서한다는 걸까. 아직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시모네는 눈물을 훔쳤다. 머리가 복잡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네가 어떤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단호한 말에 시모네는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불긋하게 달아올랐을 얼굴이 부끄러웠지만 애써 당당하려 했다. 서로가 공평했던 그때로 돌아갈 순 없어도 비루하게 동정받고 싶진 않았다.
그때 누레딘이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각하.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대답과 달리 시모네는 선뜻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레나트의 대답은 들었다. 원망은 하지 않지만 용서할 마음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인연은 이로써 끊긴 것이다. 마치 삶의 한 자락이 잘린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적미적 몸을 일으키는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다. 사랑한 것도, 부모를 버리고 널 선택한 것도, 내 몸이 이렇게 된 것 모두가 말이다.”
레나트는 의자에 떨어진 담요를 들어 다시 시모네의 어깨에 둘렀다. 멀어질 줄 알았던 손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니 넌 내게 사과할 것이 없어. 시모네.”
“레나트. 난!”
항의를 묵살하듯 몸이 툭 밀렸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시모네를 향해 레나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넌 아직도 모르고 있어. 레나트 라우리드센을.”
그대로 떠밀린 시모네는 문밖까지 나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레나트의 하얀 머리카락이 너풀거렸다.
“다음엔 오늘보단 오래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시모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다정한 인사였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 시모네는 멍하니 앞만 응시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누레딘이 걱정 어린 얼굴로 손을 뻗었다. 시모네는 달콤한 기대를 깨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
“치워.”
누레딘의 투덜거림 따위는 시모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레나트의 말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다정하게. 무척이나 달콤하게.
다시 와도 된다고 했다.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다고. 상상이 아닌 현실의 레나트가 그랬다. 그 사실만이 시모네를 설레게 했다. 그리고 아프게도 했다.
곧장 저택으로 돌아온 시모네는 바로 황궁으로 갈 차비를 했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황제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레나트와 오래 있을 수 없어 약간의 원망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레나트와의 시간은 꿈처럼 달콤했지만, 그만큼 짧게 느껴졌다. 서로의 침묵이 길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발렌드. 약속 시각은?”
“오후 두 시입니다.”
“빠듯하군.”
지금 바로 옷을 갈아입고 황궁으로 가도 아슬아슬한 시각이었다. 시모네는 언뜻 아데마르 영지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을 떠올렸지만, 황제의 최측근을 포기할 정도로 원하진 않았다.
귀족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조건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높은 작위, 세를 많이 걷을 수 있는 넓은 영지 그리고 황제의 총애다. 그래서 시모네와 같은 고위 귀족은 영지를 믿을 만한 경영인에게 맡기고 수도의 저택을 빌려-수도의 땅은 황제 소유라 살 수 없다- 장기간 머물렀다.
수도에 머무는 귀족이 하는 일은 다양했다. 삼 일에 한 번 열리는 황궁 대회의에 참석해 국정을 논의하고 중요한 사교장에 수시로 참석해 폭넓은 인맥을 쌓는다. 이는 커다란 영지를 보유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 말고도 레나트를 떠날 수 없다는 가장 큰 이유가 버티고 있지만.
“주인님. 출타하신 사이에 노빌리 백작 영애가 접견 신청을 했습니다. 돌려보낼 수 없어 응접실로 들였습니다만.”
“뭐?”
뜬금없는 소리에 시모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소매를 정리하던 시녀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가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노려보는 시선에도 노집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발렌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막무가내로 주인님을 뵈어야겠다고 우기는 통에 비천한 제 신분으로는 말릴 수 없었습니다.”
“흥. 말리지 않은 거겠지. 발렌드. 수작 부리지 마라.”
“……외모는 아름다우셨습니다.”
“아. 그러셔?”
시모네는 한껏 비꼬곤 시녀에게서 팔을 빼 직접 단추를 잠갔다. 아름답기는 무슨. 외모는 둘째 치고 하는 짓이 깜찍했다. 초청도 없이 감히 상위 귀족의 집에 들어오다니.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소녀라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시모네는 그런 식으로 제 영역에 들어오는 자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이건 무례요, 발칙한 도전이었다.
시모네는 응접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발렌드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스물 후반의 미혼 후작. 높은 작위로도 모자라 대영지를 소유해 거대한 부를 쌓았고 황제와도 친분이 깊으니 누구나 탐낼 만했다. 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이 그랬다.
그런 주인이 누구도 만나지 않으니 집사로선 안타까웠을 터다. 그게 시모네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비극이었지만.
구역질이 난다거나 진저리쳐진다는 극렬한 혐오의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상급 귀족은 권력의 중심이란 의미와도 같았다. 아무리 황제의 후광이 비추고 있어도 자신의 권력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시모네 또한 진창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남을 탓할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해.”
다만 사교장에 갈 때마다 수많은 귀족이 제 딸을 앞세우니 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푸줏간에 걸린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시모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종들이 서둘러 응접실 문을 열었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던 어린 소녀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이제 열여덟쯤 되었을까. 슬슬 약혼자와 결혼할 나이었다. 어려서 내정한 약혼자가 있을 텐데도 용감하게 후작가의 문을 두드린 거로 보아 가문의 압박이 있었거나 본인이 원했든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어찌 되었든 사람을 잘못 골랐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허리를 살짝 굽히는 그를 향해 시모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주인 없는 저택에 무례하게 침입하는 몰염치는 어디에서 배웠지?”
“전 노빌리…… 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도 들은 양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긴 해도 좋은 말로 돌려보냈을 테지만, 오늘은 시모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옛 연인을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해서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오후엔 황제를 만나 그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온 영애에겐 안됐지만 그를 계속 저택에 머물게 할 인내심이 시모네에겐 남아 있지 않단 소리였다. 그는 당황하는 영애를 보며 문을 가리켰다. 괜히 여인과 얽혔다가 사교계의 씹을 거리로 전락하는 건 사양이었다.
냉혹한 오델르의 뱀이 드디어 피앙세를 만났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란 말인가! 눈앞의 창창한 소녀의 앞날은 철저히 파괴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 파괴자는 시모네가 될 터였다.
“주제에 눈치도 없는 것인가? 내가 반갑게 인사나 하자고 그대를 찾아온 줄 아나? 초청도 받지 못한 영애가 이렇게 태연히 저택에 쳐들어올 줄이야. 무척이나 불쾌하군.”
“아, 저. 각하. 저는…….”
“노빌리라면 서부 쪽의 백작가일 텐데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새파랗게 젊은 영애가 이렇게 천지 분간을 못 하고 날뛰는지 모르겠어.”
“각하!”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나! 발렌드!”
노성에 굳어 버린 영애를 뒤로하고 발렌드에게 손짓했다. 노집사는 한숨 한 번 쉬는 것으로 미련을 떨쳤다. 그는 시종에게 손짓해 백작가의 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오늘 일은 덮을 테니 영애를 데리고 가라.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내 저택에 발을 들였다간 뱀의 혓바닥이 노빌리로 향하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라고 전해라.”
영애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렸다. 당황한 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영애를 데리고 나갔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움츠린 어깨가 가녀린 새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시모네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응시했다.
노련한 사교계 여인은 어떤 모욕에도 의연히 대처한다. 가슴에 독을 품고 후일 복수할지언정 동요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 여인이 되기 위해 귀족 여식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자신을 가꾸기 마련이었다. 이는 귀족 영식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빌리 영애는 이 정도의 모욕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생각보다 심약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좀 더 노련하고 영악했다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도도하게 이 공간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근 시일에 시모네의 악명이 은은하게 퍼졌을 테지. 그럴 주제까지 없다니 더 최악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바로 황궁으로 출발하겠다.”
“예. 주인님.”
“황제의 기분이 좋기만을 바랄 뿐이야.”
황제는 관대할 때는 한없이 자비롭지만, 황가 특유의 고집 때문에 화가 나면 주위를 피곤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그 못지않게 날카로운 성미를 지닌 시모네로선 좋은 말로 달래 주는 게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잔인하고 오만했으며 욕심까지 많았던 선황제에 비하면 나았다. 그를 쏙 빼닮았다면 현 황제를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간 시모네가 마차에 올랐다. 이번엔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카발리가 호종했다. 황궁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시모네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짚었다.
“레나트.”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일 줄 알았는데. 서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뿌리박혀 있는 죄책감이 없어진 건 아니나 살짝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따뜻한 손, 따뜻한 말, 따뜻한 눈, 그리고…….
시모네는 손가락으로 더듬듯이 볼을 매만졌다. 미처 챙기지 못한 장갑 때문에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분명 이보다는 훨씬 온기 있고 부드러웠다.
……따뜻했던 입술.
“흠. 으흠.”
괜히 목이 메어 시모네는 크게 헛기침했다. 부끄러운 상상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차는 황궁 외궁에 도착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시모네가 궁 입구까지 서둘러 걸어가자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궁인들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볼과 손을 보아하니 기다린 지 꽤 된 듯싶었다.
“서두르지.”
시모네는 그들을 지나쳐 대기하고 있던 황궁 마차에 탔다. 궁에서 회의할 때야 내궁까지 가문 소유 마차를 타고 가면 되지만, 개인적으로 초대받았을 때는 안전을 위해 황궁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야 했다.
다행히 내궁 안쪽까지 도착했을 무렵엔 약속 시각까지 십여 분이 남았다. 시모네가 뛰듯이 걸어가자 뒤에서 쫓는 궁인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카발리만이 익숙한 호흡으로 느긋하게 따랐다.
시모네가 응접실에 당도하자 카발리는 황궁 기사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시종이 문 안쪽을 향해 고했다.
“폐하. 아데마르 후작 각하 드셨습니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자 거대한 응접실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라 시모네는 감탄성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열린 문 정면으로 소파에 앉은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아이네아스 드 아르스란.
서국을 양분하는 두 제국 중 아르스란 제국을 통치하는 단 한 명의 황제였다. 황가 특유의 금발과 금안을 지녔지만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던 선황과 달리 유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턱을 뒤덮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제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시모네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신 아데마르 후작.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존귀하신 존안을 뵙습니다. 아르스란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존안은 무슨. 앉게.”
황제가 대각선에 위치한 소파를 가리키자 시모네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황제가 피식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짐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러 번 그대를 보았지만, 장갑 끼지 않은 손은 오랜만일세.”
시모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쁘게 오느라 의장을 점검할 새도 없었다. 꼼꼼한 발렌드가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 마차 어디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을 게 분명했다.
슬쩍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신체적 약점인 새끼와 약지를 내보이기 싫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귀하신 분을 뵈어야 했기에 서둘러서 오느라 손이 시린 줄도 몰랐습니다. 타박하실 줄 알았으면 털장갑이라도 끼고 올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그대의 손이 시린 게 짐의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대의 게으름을 탓하려 했더니 오히려 이리 서둘러 왔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놀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역시 말로는 그대를 당할 수가 없네.”
잠시의 틈을 타 시녀장이 찻잔에 따뜻한 찻물을 채웠다. 시모네는 잔을 들어 시린 속을 데웠다. 움직이지는 않는 손가락에 맞춰 나머지 세 손가락도 살짝 굽혔다. 그래 봤자 귀족 대부분이 그의 신체 결함을 알고 있지만, 이것은 오기와도 같은 자존심이었다.
차를 들이켜는 황제를 보던 시모네는 몰래 실소를 들이켰다. 덩치가 곰과 같다 보니 그 손에 들린 잔이 참으로 앙증맞았다. 이래서 죽은 황태자가 크게 경계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겉보기에 아이네아스는 호인에다 전형적인 기사여서 일황자였음에도 황태자의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일후궁 소생이자 장자라는 신분만으로도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제왕학보다는 검술에 더 소질을 보여 일찌감치 황위 계승권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알고 있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용이 미꾸라지를 낳을 리 없다. 용이 낳는 것 또한 용이다. 그토록 잔혹하고 냉정한 황제의 아들이 착하고 순할 리 있겠는가. 황태자가 유달리 선황을 닮았던 것뿐이지 지금의 황제 또한 냉정하고 야심 많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했다. 다른 후궁의 아이들은 계승권과 거리도 멀거니와 아이네아스만큼 능숙하게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시모네에게 필요했던 건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원조해 줄 수 있는 야심가였다. 그 외의 이유도 있었지만.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건 노인네나 할 법한 일이지 않나?”
“그럴 리가요. 그저 세월이 무상하니 간혹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더군요.”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사람 파악하는 데는 도가 텄다. 잠시 지난 일을 떠올렸을 뿐인데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시모네는 황제가 과거를 상기하는 걸 싫어하는 게 우스웠다. 그렇다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시모네는 황제 위에 오르게 해 준 은인이면서 스스로 황위를 쟁취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시모네가 손을 내밀었고 아이네아스가 손을 잡았으나 온전히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근간이기도 했다.
“요즘 황태자가 자네를 보고 싶다고 은근히 압박을 넣어. 자주 황궁에 들르지 그러나?”
“요하네스 전하를 뵙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황궁이 거대하긴 하나 아데마르 저택과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린 안개를 헤치고 자주 들르기에는 제 몸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제국의 겨울은 혹독하니까요.”
“흐음.”
시모네는 가늘어진 황제의 눈을 외면했다. 약점까지 내보이며 거부하는데 설마 강요하진 않을 테지. 회의가 없는데도 황궁에 불려 오는 건 사양이었다.
요하네스 황태자가 그를 찾는 이유야 뻔했다. 시모네가 동국(東國)과의 중개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그곳의 얘기를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이야 이야기꾼을 불러 들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황제가 허락지 않으니 시모네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일 테다. 제국을 물려받을 고귀한 아들 곁에 황제가 천한 이야기꾼을 들일 리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 준비한 것을 들고 와라.”
“……?”
황제의 손짓에 시녀장이 구석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왔다. 뚜껑엔 아르스란 황가의 문장인 황금 용이 새겨져 있었다. 시녀장은 그것을 시모네 앞에 내려놓았다. 화려한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으니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생일이 지난달에 있지 않았나. 참석은 못 했지만 뒤늦게 귀한 진상품이 들어와 그대에게 내리는 거라네.”
“……이것은.”
시모네가 상자를 열자 눈처럼 새하얀 장갑이 드러났다. 무슨 모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기설기 촘촘히 짜인 모양새가 한눈에도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생일 선물이라면 당일에 귀한 것을 받지 않았습니까.”
분명 생일날 레드 다이아몬드가 박힌 커프스를 받았다. 황실 소유 광산에서도 자주 캘 수 없는 다이아몬드를 다듬어 최상품으로 세공한 보물이었다.
시모네는 당시 그 선물을 개봉했을 때 놀라움과 질투로 신음하던 귀족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보물을 무사히 전달한 황실 시종장의 뿌듯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그건 자네에 대한 짐의 총애를 드러내고자 보낸 것일 뿐이고. 이것이 진짜지. 어때. 마음에 드나?”
“무척 마음에 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폐하.”
계산적인 마음만 치운다면 실제로 마음에 쏙 들었다. 시모네는 장갑을 들어 손가락에 끼웠다. 착용감도 부드럽고 예상보다 더 따스했다. 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후작의 입가에 웃음이 맺힐 정도면 선물한 보람이 있군. 그대가 기뻐한다니 그걸로 되었네.”
“그럼 오늘 저를 부르신 까닭은 이 선물을 주기 위해……?”
“그런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 그를 들이라.”
“……?”
문이 열리고 새하얀 법복을 걸친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주름이 미세하게 잡힌 중년의 남자였다. 옅을 갈색빛의 머리카락은 흔하디흔했지만, 법복은 그렇지 않았다. 놀란 시모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Chapter 1. 끝의 시작 (2)
타닥, 하고 장작에서 불티가 튀었다. 활활 타오르는 열기로 인해 하얀 머리카락이 초저녁 붉은 노을처럼 물들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임에도 편하게 기댄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턱을 괸 얼굴이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시선을 건넨다. 오만하다고까지 할 법한 자세인데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역시 귀족은 귀족이었다. 태어나기를 귀하게 나고, 오만하게 자라고, 화려하게 일생을 마친다. 레나트의 행동 하나하나엔 그런 귀족의 생리가 묻어 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레나트의 입이 열리자 시모네가 시선을 던졌다.
“……?”
“다리를 절게 된 것. 부모가 죽은 것. 미래가 망가진 것. 이 모든 것이 너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
시모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쏟아지는 비난이 감당하기 힘들어 숨을 들이켰다.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들려던 찻잔이 차 받침대와 부딪쳐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헛기침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떨리는 손까진 어쩔 수 없었다. 그 위를 큼지막한 손이 감쌌다.
레나트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과해야 할까. 내 사과를 받아 주기는 할까. 찾아갈까. 찾아가지 말까.”
“그만! 그만해.”
속내가 까발려지는 것 같았다. 시모네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곤 고개를 숙였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모든 비난을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아팠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슥, 하고 의자가 밀렸다. 테이블을 짚은 레나트가 허리 숙여 상체를 가까이했다. 숨이 얽힐 정도의 거리에서 검은 눈동자가 냉혹하게 빛났다.
“시모네. 내가 복수하기를 바라?”
“……!”
시모네의 눈이 삽시간에 젖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는 닦을 새도 없이 새로운 눈물로 덮였다. 채 답도 못하고 끅끅대며 목울음을 뱉는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시모네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비참했다. 이런 처지가 참담한 게 아니라 비틀린 자신의 마음이 비참했다. 내심 레나트가 용서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잘못을 해도 절대 떠나지 않던 과거의 그를 기억하기에.
염치없게도. 파렴치하게도.
예전 같았으면 없던 손수건도 만들어 와 눈물을 닦아 줬을 레나트는 그저 무심한 모습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시모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려는 찰나였다. 그의 볼에 입술이 닿았다.
“흐…흡. 흑. 으읍.”
눈물로 시야가 흐렸지만, 따뜻한 위로를 못 알아챌 만큼은 아니었다. 촉, 하고 한 번 더 닿은 입술이 미련 없이 멀어졌다.
“울지 마. 지금은 손수건 따위 없어.”
“으, 으응. 흑. 으…응.”
“꿈 깨. 네가 바란 것과 달리 나는 아직도 천하의 바보라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아.”
무슨 말일까. 제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을 용서한다는 걸까. 아직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시모네는 눈물을 훔쳤다. 머리가 복잡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네가 어떤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단호한 말에 시모네는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불긋하게 달아올랐을 얼굴이 부끄러웠지만 애써 당당하려 했다. 서로가 공평했던 그때로 돌아갈 순 없어도 비루하게 동정받고 싶진 않았다.
그때 누레딘이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각하.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알겠다.”
대답과 달리 시모네는 선뜻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레나트의 대답은 들었다. 원망은 하지 않지만 용서할 마음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인연은 이로써 끊긴 것이다. 마치 삶의 한 자락이 잘린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적미적 몸을 일으키는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다. 사랑한 것도, 부모를 버리고 널 선택한 것도, 내 몸이 이렇게 된 것 모두가 말이다.”
레나트는 의자에 떨어진 담요를 들어 다시 시모네의 어깨에 둘렀다. 멀어질 줄 알았던 손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니 넌 내게 사과할 것이 없어. 시모네.”
“레나트. 난!”
항의를 묵살하듯 몸이 툭 밀렸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시모네를 향해 레나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넌 아직도 모르고 있어. 레나트 라우리드센을.”
그대로 떠밀린 시모네는 문밖까지 나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레나트의 하얀 머리카락이 너풀거렸다.
“다음엔 오늘보단 오래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시모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다정한 인사였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 시모네는 멍하니 앞만 응시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누레딘이 걱정 어린 얼굴로 손을 뻗었다. 시모네는 달콤한 기대를 깨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
“치워.”
누레딘의 투덜거림 따위는 시모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레나트의 말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다정하게. 무척이나 달콤하게.
다시 와도 된다고 했다.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다고. 상상이 아닌 현실의 레나트가 그랬다. 그 사실만이 시모네를 설레게 했다. 그리고 아프게도 했다.
곧장 저택으로 돌아온 시모네는 바로 황궁으로 갈 차비를 했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황제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레나트와 오래 있을 수 없어 약간의 원망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레나트와의 시간은 꿈처럼 달콤했지만, 그만큼 짧게 느껴졌다. 서로의 침묵이 길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발렌드. 약속 시각은?”
“오후 두 시입니다.”
“빠듯하군.”
지금 바로 옷을 갈아입고 황궁으로 가도 아슬아슬한 시각이었다. 시모네는 언뜻 아데마르 영지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을 떠올렸지만, 황제의 최측근을 포기할 정도로 원하진 않았다.
귀족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조건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높은 작위, 세를 많이 걷을 수 있는 넓은 영지 그리고 황제의 총애다. 그래서 시모네와 같은 고위 귀족은 영지를 믿을 만한 경영인에게 맡기고 수도의 저택을 빌려-수도의 땅은 황제 소유라 살 수 없다- 장기간 머물렀다.
수도에 머무는 귀족이 하는 일은 다양했다. 삼 일에 한 번 열리는 황궁 대회의에 참석해 국정을 논의하고 중요한 사교장에 수시로 참석해 폭넓은 인맥을 쌓는다. 이는 커다란 영지를 보유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 말고도 레나트를 떠날 수 없다는 가장 큰 이유가 버티고 있지만.
“주인님. 출타하신 사이에 노빌리 백작 영애가 접견 신청을 했습니다. 돌려보낼 수 없어 응접실로 들였습니다만.”
“뭐?”
뜬금없는 소리에 시모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소매를 정리하던 시녀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가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노려보는 시선에도 노집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발렌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막무가내로 주인님을 뵈어야겠다고 우기는 통에 비천한 제 신분으로는 말릴 수 없었습니다.”
“흥. 말리지 않은 거겠지. 발렌드. 수작 부리지 마라.”
“……외모는 아름다우셨습니다.”
“아. 그러셔?”
시모네는 한껏 비꼬곤 시녀에게서 팔을 빼 직접 단추를 잠갔다. 아름답기는 무슨. 외모는 둘째 치고 하는 짓이 깜찍했다. 초청도 없이 감히 상위 귀족의 집에 들어오다니.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소녀라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시모네는 그런 식으로 제 영역에 들어오는 자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이건 무례요, 발칙한 도전이었다.
시모네는 응접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발렌드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스물 후반의 미혼 후작. 높은 작위로도 모자라 대영지를 소유해 거대한 부를 쌓았고 황제와도 친분이 깊으니 누구나 탐낼 만했다. 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이 그랬다.
그런 주인이 누구도 만나지 않으니 집사로선 안타까웠을 터다. 그게 시모네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비극이었지만.
구역질이 난다거나 진저리쳐진다는 극렬한 혐오의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상급 귀족은 권력의 중심이란 의미와도 같았다. 아무리 황제의 후광이 비추고 있어도 자신의 권력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시모네 또한 진창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남을 탓할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해.”
다만 사교장에 갈 때마다 수많은 귀족이 제 딸을 앞세우니 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푸줏간에 걸린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시모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종들이 서둘러 응접실 문을 열었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던 어린 소녀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이제 열여덟쯤 되었을까. 슬슬 약혼자와 결혼할 나이었다. 어려서 내정한 약혼자가 있을 텐데도 용감하게 후작가의 문을 두드린 거로 보아 가문의 압박이 있었거나 본인이 원했든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어찌 되었든 사람을 잘못 골랐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허리를 살짝 굽히는 그를 향해 시모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주인 없는 저택에 무례하게 침입하는 몰염치는 어디에서 배웠지?”
“전 노빌리…… 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도 들은 양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긴 해도 좋은 말로 돌려보냈을 테지만, 오늘은 시모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옛 연인을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해서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오후엔 황제를 만나 그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온 영애에겐 안됐지만 그를 계속 저택에 머물게 할 인내심이 시모네에겐 남아 있지 않단 소리였다. 그는 당황하는 영애를 보며 문을 가리켰다. 괜히 여인과 얽혔다가 사교계의 씹을 거리로 전락하는 건 사양이었다.
냉혹한 오델르의 뱀이 드디어 피앙세를 만났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란 말인가! 눈앞의 창창한 소녀의 앞날은 철저히 파괴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 파괴자는 시모네가 될 터였다.
“주제에 눈치도 없는 것인가? 내가 반갑게 인사나 하자고 그대를 찾아온 줄 아나? 초청도 받지 못한 영애가 이렇게 태연히 저택에 쳐들어올 줄이야. 무척이나 불쾌하군.”
“아, 저. 각하. 저는…….”
“노빌리라면 서부 쪽의 백작가일 텐데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새파랗게 젊은 영애가 이렇게 천지 분간을 못 하고 날뛰는지 모르겠어.”
“각하!”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나! 발렌드!”
노성에 굳어 버린 영애를 뒤로하고 발렌드에게 손짓했다. 노집사는 한숨 한 번 쉬는 것으로 미련을 떨쳤다. 그는 시종에게 손짓해 백작가의 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오늘 일은 덮을 테니 영애를 데리고 가라.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내 저택에 발을 들였다간 뱀의 혓바닥이 노빌리로 향하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라고 전해라.”
영애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렸다. 당황한 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영애를 데리고 나갔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움츠린 어깨가 가녀린 새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시모네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응시했다.
노련한 사교계 여인은 어떤 모욕에도 의연히 대처한다. 가슴에 독을 품고 후일 복수할지언정 동요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 여인이 되기 위해 귀족 여식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자신을 가꾸기 마련이었다. 이는 귀족 영식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빌리 영애는 이 정도의 모욕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생각보다 심약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좀 더 노련하고 영악했다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도도하게 이 공간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근 시일에 시모네의 악명이 은은하게 퍼졌을 테지. 그럴 주제까지 없다니 더 최악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바로 황궁으로 출발하겠다.”
“예. 주인님.”
“황제의 기분이 좋기만을 바랄 뿐이야.”
황제는 관대할 때는 한없이 자비롭지만, 황가 특유의 고집 때문에 화가 나면 주위를 피곤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그 못지않게 날카로운 성미를 지닌 시모네로선 좋은 말로 달래 주는 게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잔인하고 오만했으며 욕심까지 많았던 선황제에 비하면 나았다. 그를 쏙 빼닮았다면 현 황제를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간 시모네가 마차에 올랐다. 이번엔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카발리가 호종했다. 황궁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시모네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짚었다.
“레나트.”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일 줄 알았는데. 서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뿌리박혀 있는 죄책감이 없어진 건 아니나 살짝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따뜻한 손, 따뜻한 말, 따뜻한 눈, 그리고…….
시모네는 손가락으로 더듬듯이 볼을 매만졌다. 미처 챙기지 못한 장갑 때문에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분명 이보다는 훨씬 온기 있고 부드러웠다.
……따뜻했던 입술.
“흠. 으흠.”
괜히 목이 메어 시모네는 크게 헛기침했다. 부끄러운 상상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마차는 황궁 외궁에 도착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시모네가 궁 입구까지 서둘러 걸어가자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궁인들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볼과 손을 보아하니 기다린 지 꽤 된 듯싶었다.
“서두르지.”
시모네는 그들을 지나쳐 대기하고 있던 황궁 마차에 탔다. 궁에서 회의할 때야 내궁까지 가문 소유 마차를 타고 가면 되지만, 개인적으로 초대받았을 때는 안전을 위해 황궁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야 했다.
다행히 내궁 안쪽까지 도착했을 무렵엔 약속 시각까지 십여 분이 남았다. 시모네가 뛰듯이 걸어가자 뒤에서 쫓는 궁인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카발리만이 익숙한 호흡으로 느긋하게 따랐다.
시모네가 응접실에 당도하자 카발리는 황궁 기사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시종이 문 안쪽을 향해 고했다.
“폐하. 아데마르 후작 각하 드셨습니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자 거대한 응접실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라 시모네는 감탄성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열린 문 정면으로 소파에 앉은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아이네아스 드 아르스란.
서국을 양분하는 두 제국 중 아르스란 제국을 통치하는 단 한 명의 황제였다. 황가 특유의 금발과 금안을 지녔지만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던 선황과 달리 유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턱을 뒤덮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제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시모네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신 아데마르 후작.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존귀하신 존안을 뵙습니다. 아르스란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존안은 무슨. 앉게.”
황제가 대각선에 위치한 소파를 가리키자 시모네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황제가 피식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짐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러 번 그대를 보았지만, 장갑 끼지 않은 손은 오랜만일세.”
시모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쁘게 오느라 의장을 점검할 새도 없었다. 꼼꼼한 발렌드가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 마차 어디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을 게 분명했다.
슬쩍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신체적 약점인 새끼와 약지를 내보이기 싫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귀하신 분을 뵈어야 했기에 서둘러서 오느라 손이 시린 줄도 몰랐습니다. 타박하실 줄 알았으면 털장갑이라도 끼고 올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그대의 손이 시린 게 짐의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대의 게으름을 탓하려 했더니 오히려 이리 서둘러 왔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놀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역시 말로는 그대를 당할 수가 없네.”
잠시의 틈을 타 시녀장이 찻잔에 따뜻한 찻물을 채웠다. 시모네는 잔을 들어 시린 속을 데웠다. 움직이지는 않는 손가락에 맞춰 나머지 세 손가락도 살짝 굽혔다. 그래 봤자 귀족 대부분이 그의 신체 결함을 알고 있지만, 이것은 오기와도 같은 자존심이었다.
차를 들이켜는 황제를 보던 시모네는 몰래 실소를 들이켰다. 덩치가 곰과 같다 보니 그 손에 들린 잔이 참으로 앙증맞았다. 이래서 죽은 황태자가 크게 경계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겉보기에 아이네아스는 호인에다 전형적인 기사여서 일황자였음에도 황태자의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일후궁 소생이자 장자라는 신분만으로도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제왕학보다는 검술에 더 소질을 보여 일찌감치 황위 계승권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알고 있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용이 미꾸라지를 낳을 리 없다. 용이 낳는 것 또한 용이다. 그토록 잔혹하고 냉정한 황제의 아들이 착하고 순할 리 있겠는가. 황태자가 유달리 선황을 닮았던 것뿐이지 지금의 황제 또한 냉정하고 야심 많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했다. 다른 후궁의 아이들은 계승권과 거리도 멀거니와 아이네아스만큼 능숙하게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시모네에게 필요했던 건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원조해 줄 수 있는 야심가였다. 그 외의 이유도 있었지만.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건 노인네나 할 법한 일이지 않나?”
“그럴 리가요. 그저 세월이 무상하니 간혹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더군요.”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사람 파악하는 데는 도가 텄다. 잠시 지난 일을 떠올렸을 뿐인데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시모네는 황제가 과거를 상기하는 걸 싫어하는 게 우스웠다. 그렇다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시모네는 황제 위에 오르게 해 준 은인이면서 스스로 황위를 쟁취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시모네가 손을 내밀었고 아이네아스가 손을 잡았으나 온전히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근간이기도 했다.
“요즘 황태자가 자네를 보고 싶다고 은근히 압박을 넣어. 자주 황궁에 들르지 그러나?”
“요하네스 전하를 뵙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황궁이 거대하긴 하나 아데마르 저택과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린 안개를 헤치고 자주 들르기에는 제 몸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제국의 겨울은 혹독하니까요.”
“흐음.”
시모네는 가늘어진 황제의 눈을 외면했다. 약점까지 내보이며 거부하는데 설마 강요하진 않을 테지. 회의가 없는데도 황궁에 불려 오는 건 사양이었다.
요하네스 황태자가 그를 찾는 이유야 뻔했다. 시모네가 동국(東國)과의 중개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그곳의 얘기를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이야 이야기꾼을 불러 들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황제가 허락지 않으니 시모네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일 테다. 제국을 물려받을 고귀한 아들 곁에 황제가 천한 이야기꾼을 들일 리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 준비한 것을 들고 와라.”
“……?”
황제의 손짓에 시녀장이 구석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왔다. 뚜껑엔 아르스란 황가의 문장인 황금 용이 새겨져 있었다. 시녀장은 그것을 시모네 앞에 내려놓았다. 화려한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으니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생일이 지난달에 있지 않았나. 참석은 못 했지만 뒤늦게 귀한 진상품이 들어와 그대에게 내리는 거라네.”
“……이것은.”
시모네가 상자를 열자 눈처럼 새하얀 장갑이 드러났다. 무슨 모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기설기 촘촘히 짜인 모양새가 한눈에도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생일 선물이라면 당일에 귀한 것을 받지 않았습니까.”
분명 생일날 레드 다이아몬드가 박힌 커프스를 받았다. 황실 소유 광산에서도 자주 캘 수 없는 다이아몬드를 다듬어 최상품으로 세공한 보물이었다.
시모네는 당시 그 선물을 개봉했을 때 놀라움과 질투로 신음하던 귀족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보물을 무사히 전달한 황실 시종장의 뿌듯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그건 자네에 대한 짐의 총애를 드러내고자 보낸 것일 뿐이고. 이것이 진짜지. 어때. 마음에 드나?”
“무척 마음에 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폐하.”
계산적인 마음만 치운다면 실제로 마음에 쏙 들었다. 시모네는 장갑을 들어 손가락에 끼웠다. 착용감도 부드럽고 예상보다 더 따스했다. 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후작의 입가에 웃음이 맺힐 정도면 선물한 보람이 있군. 그대가 기뻐한다니 그걸로 되었네.”
“그럼 오늘 저를 부르신 까닭은 이 선물을 주기 위해……?”
“그런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 그를 들이라.”
“……?”
문이 열리고 새하얀 법복을 걸친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주름이 미세하게 잡힌 중년의 남자였다. 옅을 갈색빛의 머리카락은 흔하디흔했지만, 법복은 그렇지 않았다. 놀란 시모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