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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3화
Chapter 1. 끝의 시작 (3)
“주신의 종이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르스란 제국에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그대의 은총을 기꺼이 받겠다. 자리에 앉으라.”
신관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시모네는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의문 어린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입가가 쓰게 비틀렸다.
“그대를 위해 불렀네. 요즘 몸이 좋지 않다지?”
“……!”
시모네는 볼 안쪽을 아득 깨물었다. 숨긴다고 숨겼건만 황제가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다. 좀 전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한 얘기는 그저 겨울을 탄다는 단순한 의미였다면, 지금 황제가 의미하는 바는 그보다 더 깊고 은밀했다.
“……신관은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르스란 주신의 은총은 제국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거부하시기 전에 그저 저에게 손 한 번만 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시모네의 날카로운 거부에도 신관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밀 뿐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거친 손이지만 저 손으로 수십, 수백의 생명을 살렸을 터다. 그러나 시모네는 그 누가 와도 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데마르 후작.”
황제의 단호한 부름에 시모네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아무리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도 명을 거부할 정도로 무엄할 수는 없었다.
내민 손을 신관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눈이 감기고 몸에서 찬란하지만 따스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신관의 빛은 아직 제국이 아르스란 주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였다.
“으음…….”
신관의 입에서 의미 불명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얕은 탄식만으로도 시모네는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력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면 진작 거액을 기부하고 신관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은, 아니 병이라고 하기엔 좀 더 깊고 음습한 이 저주는 신력과는 상극이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신관이 눈을 떴다. 황제의 재촉에도 그의 입은 선뜻 열릴 줄 몰랐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시모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벗어 놓은 장갑을 도로 꼈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켜자 쓴맛에 속까지 떨떠름했다.
“각하. 혹여 인외의 것에 손을 대셨습니까?”
“…….”
신관의 말에 황제의 눈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그를 일별한 시모네가 신관에게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그대는 이 나라의 후작이 비인(非人)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무례하군.”
“……그런 말이 아닙니다. 각하의 몸은 소신의 신력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의 물음에 신관이 살짝 침을 삼켰다.
“폐하. 모든 생명엔 정해진 수명이 있습니다. 주신께서 정하신 생명은 결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관은 설명하면서도 힐끔거리며 시모네의 기색을 살폈다. 그 뒤에 나올 말을 알기에 시모네는 아무렇지 않게 시녀장에게 손짓해 빈 찻잔을 채우게 했다.
“각하의 몸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기(氣)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말을 하라.”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풋, 하고 시모네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비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신관의 어리석음에 손뼉을 치고 싶었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아데마르 후작 각하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을 해?”
날카로운 하대에 신관의 몸이 움찔했다. 기실 신전의 신관은 정치권과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발언이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귀함에 경애를 보내야 할지, 시류에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 비웃어야 할지 간혹 헷갈리곤 했다.
시모네는 지난날 배운 술법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따끔거리는 속을 참으며 이번엔 그쪽에서 신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신 아르스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나 시모네 아데마르 후작은 결코 부정한 것에 손대지 않았음을 맹세한다.”
비틀린 그의 웃음에 신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신관을 통해 선언하는 주신을 향한 맹세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면 온몸이 불타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시모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응접실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짝! 짝! 주위를 환기하듯 황제가 손뼉을 쳤다. 그로 인해 기묘한 긴장이 흐트러졌다. 신관에게서 손을 뗀 시모네가 몸을 바로 했다. 놀랐는지 신관이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차하면 연약한 신관 하나 잡아먹겠군. 어쨌든 후작의 몸이 지금 당장 큰 이상이 있을 만큼 아픈 건 아니겠지?”
“……예. 폐하.”
생명력이니 어쩌니 해도 현재 시모네의 상태는 지극히 멀쩡했다. 그러니 신관은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꺼림칙한 얼굴을 한 신관을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자리를 뜨는 그에게 시모네가 나직이 경고했다.
“주신의 종은 청빈하고 평등하겠으나 속세의 권력층은 그렇지 못하니 그 입의 무게가 황금보다 무거워야 할 것이오.”
“예. 각하.”
신관이 나가자마자 황제가 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협박 한번 살벌하게 하는군.”
“아시지 않습니까. 별일 아니라도 그것이 여러 입을 거치면 나라 하나 말아먹을 정도로 커진다는 것을요.”
“하하. 그렇긴 하네. 소문이 커지면 나라를 뒤흔들기도 하지.”
시모네는 이참에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간혹 제가 쓰러지는 이유는 저의 삶이 예전보다 편해져 긴장이 풀려서일 것입니다.”
“후작.”
“이제 겨우 숨 돌리고 삽니다. 깊은 병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새하얀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황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신하의 피로를 외면했다. 레나트만큼은 아니라도 그 또한 시모네의 지난했던 과거를 잘 아는 탓이었다.
시모네는 악귀가 되어 스스로 불을 삼켰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전진했다. 그 대가가 이거였다.
영혼까지 망가진 몸.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아아. 레나트.
시모네는 탄식을 삼켰다. 세상엔 법칙이 있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했다. 복수한 대가로 몸이 망가진 건 감내할 수 있었으나 레나트를 잃은 건 심장이 저밀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제 와선 쓸모없는 후회였다. 저지른 짓이 있으니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짐의 치세에 그대는 영원한 충신이고 총신일세. 짐은 그대가 아프면 언제든지 저명한 의원을 부를 것이야. 그때 그대가 짐에게 손을 뻗었듯.”
“…….”
시모네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황제의 말은 천금과 같지만, 그 약속만큼 허망한 거짓도 없었다.
“물론 그대는 믿지 않겠지만.”
그리고 황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가차 없이 충신을 내칠 만큼 잔혹하진 않았다. 제 편이라도 겨우 충언 몇 번 했다고 잔인하게 시모네의 부모를 내쳤던 선황과는 달랐다.
“신관의 말엔 신경 쓰지 말게. 그로 인해 불편한 마음이 짐의 선물로 달래지길 바라지.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해야겠어. 겨울이 와서 빈둥거리는 건 좋으나 날이 일찍 저무니 좋은 사람과 오래 있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저 또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있을 회의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모네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예를 갖췄다. 그리고 돌아보는 일 없이 황궁을 빠져나갔다.
***
“각하.”
붉은 머리카락이 불쑥 창가에 드리워졌다. 백사자단 내에서 적발의 기사로 불리는 카발리였다. 마차가 저택으로 향하지 않고 외각으로 빠지는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행선지를 마부에게만 말한 터라 시모네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다시 얘기하기 귀찮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도착하고 나면 저절로 알 터였다.
불안하게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시모네는 숨을 골랐다. 레나트를 만나러 갈 때 느꼈던 조바심과는 다른 불길하고도 음습한 느낌이었다. 술법으로 숨기긴 했으나 신관에게 의심의 꽃이 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저를 어찌하진 못하겠지만 의심하는 이가 많을수록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큰일 날 뻔했어…….”
이 비밀은 레나트만이 알고 있었다. ‘오델르의 뱀’이라 불릴 만큼 잔혹했던 과거의 진실은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황제 또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지금은 애써 태연하게 넘기고 있지만, 생명이 불확실하다는 걸 알았을 때 주신 아르스란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온몸을 뒤틀며 발광하다가, 미친 듯이 웃다가, 술독에 빠져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복수를 꿈꾸지도 못했던 시기에 보였던 추한 행동을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그땐 과거와 달리 레나트가 없었기에 더 절망했는지도 몰랐다.
레나트는 시모네가 필요로 할 때 없던 적이 없었다. 시모네가 그를 외면했을 때마저 단 한 번도 연인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떻게 그리 헌신적인지 아직도 잘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시모네만을 위해 살아왔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오전에 와 봤던 곳이라 수월하게 길을 찾은 마부가 천천히 마차를 세웠다. 발판을 밟고 내린 시모네가 카발리에게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이곳에 내 지인이 있다. 오늘은 여기에서 밤을 보낼 테니 그대는 기사단을 이끌고 근처 여관에 묵도록 해.”
“하지만 각하.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는 한때 뛰어난 기사였고 나를 위해선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자다. 일이 생기면 그대가 달려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는 이야. 걱정할 것 없다.”
“……예.”
명령이라 대답했지만,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시모네는 나직이 속삭였다.
“안에 있는 이는 레나트다.”
“……!”
카발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를 무시하고 시모네는 몸을 돌렸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도 폐인데 기사단까지 레나트에게 책임지라 할 수는 없었다. 잘 알아들었는지 카발리를 제외한 기사들은 각자 여관으로 흩어졌다.
“각하께서 안으로 들어가면 저도 물러나겠습니다.”
고집스러운 충신의 말에 시모네는 한숨 섞인 웃음을 삼켰다. 그는 아침과 달리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쿵쿵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층에 불빛이 들어왔다. 문 안쪽에서 일정한 타격음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이리라.
이윽고 낡은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시모네를 발견한 까만 눈이 크게 뜨였다. 왼손에 들고 있는 등이 어두운 골목을 은은하게 비췄다.
시모네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오고 말았어.”
유리등 안의 촛불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서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모네는 흐트러진 은발을 귀 뒤로 넘기며 침을 삼켰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레나트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던 레나트의 따뜻함을. 염치없지만 도저히 그 말고는 온기 어린 품을 찾을 수 없었다.
“레나트.”
기어코 울먹이는 소리가 시모네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동도 하지 않던 레나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힘없이 내려가려던 손이 단단한 손아귀에 빈틈없이 얽혔다.
“너는 겨울을 많이 타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랬잖아.”
시모네는 억센 힘에 이끌려 넉넉한 품에 갇혔다. 등과 함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레나트가 단단히 지탱했다.
아직도 겨울은 차갑고 가슴 또한 그만큼 시렸다. 그러나 레나트와 닿은 곳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졌다. 시모네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터졌다.
그대로 몸이 들렸다. 작은 체구도 아닌 몸을 레나트는 한 손으로만 지탱했다. 절뚝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에서 카발리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고 썰렁한 거리엔 불이 꺼진 등과 널브러진 지팡이만이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
「레나트와의 첫 만남은 특별했다. 여느 귀족이 그렇듯이 귀족가의 장남이 아니면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백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시모네도 마찬가지였다. 작위와 영지 모두 장남이 물려받으니 다른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기사의 길은 무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국에서 알아주는 기사였고 형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으나 시모네는 몸 약한 어미를 닮아 체구가 왜소하고 허약했다.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마법사나 신관, 또는 행정관 같은 관리의 길뿐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마법사나 신관은 무리였다. 그나마 행정관이 가장 현실적이었기에 아카데미에도 행정학부로 지원했다. 그곳에서 레나트를 처음 만났다.
레나트 라우리드센.
레나트는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검의 명가 라우리드센 공작가의 장남으로 아카데미 최고의 유명인이었다. 시모네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길쭉한 키에 탄탄한 몸은 누가 봐도 타고난 기사 체질이었고 외모 또한 수려했다. 일자로 뻗은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이 일견 고집 있어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모난 데 없이 단정했다.
처음 레나트를 봤을 땐 시모네도 살짝 놀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이었다. 라우리드센 공작가의 선조 중에 동국인과 결혼한 이가 있을 거라는 소문만큼 제국에서 특이한 외향이긴 했다.
레나트와의 인연은 그의 일방적인 인사로 시작되었다. 기사학부와 마법학부, 행정학부는 모두 배우는 건물이 달랐다. 다만 겹치는 교양 과목이 많아 과제를 함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레나트와의 인연 또한 그렇게 얽혔다.
“시모네 아데마르지? 레나트 라우리드센이다.”
환한 미소만큼이나 밝은 인사에 시모네는 속으로 한껏 당황했다. 아카데미의 인기인이 건네는 인사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민 손을 잡지 않자 레나트는 자연히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민망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너도 동부 쪽 조사단이지? 같은 팀이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응.”
“너 꽤 조용하구나. 뭐. 상관없지. 내가 말이 많으니까.”
레나트가 흰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문제는 시모네에겐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는 거다. 초면부터 반말에, 친한 척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레나트와 한 팀이 된 건 행정학부와 기사학부의 공동 실습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행정학부 학생들은 졸업하기에 앞서 배당받은 영지로 비밀 시찰을 나가는데 그 지역의 기후부터 시작해 평민들의 삶, 자금의 흐름 등 간단한 것을 조사했다. 당연히 영주가 좋아할 리 없으니 행정학부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학부 학생과 짝을 지어 보내는 것이다.
“차분한 게 네 장점이지. 행정관으로서는 그것이 큰 이점으로 작용할 거야.”
시모네의 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부서졌다. 진심 어린 칭찬은 날카로운 성정도 무디게 만들었다. 레나트의 너그러운 성품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시모네의 투정을 부드럽게 넘겼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먼저 해결해 화낼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한 달에 걸친 실습에서 두 사람은 친우라고 불릴 만큼 가까워졌고, 후일 신분이 달라져도 사석에서는 말 놓자는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먼저 애정을 품은 건 레나트였다. 시모네는 그의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간혹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긴 하나 티를 내진 않았기 때문이다.
“너를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면 좋겠어.”
다만 그가 유일하게 집착했던 게 호칭이었다. 가족만이 부르는 시모네의 이름을 자신이 독점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 그건 부탁이 아닌 강요였다. 가족은 어쩔 수 없지만, 후일 친우가 생겨도 이름만은 허락하지 않길 바란 것이다.
시모네는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어차피 사교성이 좋지도 않거니와 평생 친우라고는 레나트밖에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레나트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여길 만큼 시모네를 특별하게 대우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시모네만은 예외였다. 서로의 일상을 넘나들며 친우라기엔 무척 친밀하고 연인이라기엔 약간은 미흡한 애매한 상태가 이어졌다.
아마 그대로 삶이 평탄하게 이어졌다면 두 사람은 여느 연인처럼 자연히 사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른 척 손을 잡거나 뒤에서 껴안는 레타트의 짓궂은 행동에 시모네 또한 가슴이 뛰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시모네!”
갑자기 닥친 가족의 부고에 시모네는 정신없이 아카데미를 뛰쳐나갔다. 레나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쫓아와 시모네를 인적 없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에게 잡힌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가쁜 호흡만을 내뱉자 레나트를 그를 껴안고 끊임없이 이름을 불렀다.
“시모네. 시모네. 시모네…….”
나직한 부름에 시모네의 떨림이 점점 멎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레나트가 조심스레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고개 숙여 살며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시모네의 심장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잠시간 닿았던 체온은 아쉬움을 남기고 서서히 멀어졌다. 생애 첫 입맞춤이었지만 설렘보다는 위로처럼 따스하게 다가왔다.
시모네는 멀거니 레나트를 올려다봤다.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을 한 레나트가 두 손으로 양 뺨을 붙잡았다. 둘의 이마가 툭 맞닿았다. 낮은 저음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나를 불러.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줄 테니,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를 불러.”
그때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에 큰 위안을 얻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레나트에게는 그 약속이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레나트는 재차 약속을 속삭였다.
“나를 부르면 나 또한 네 이름을 부르며 달려갈게.”
스스로 다짐하듯. 무척이나 다정하게.」
Chapter 1. 끝의 시작 (3)
“주신의 종이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르스란 제국에 신의 은총이 깃들기를.”
“그대의 은총을 기꺼이 받겠다. 자리에 앉으라.”
신관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시모네는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의문 어린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입가가 쓰게 비틀렸다.
“그대를 위해 불렀네. 요즘 몸이 좋지 않다지?”
“……!”
시모네는 볼 안쪽을 아득 깨물었다. 숨긴다고 숨겼건만 황제가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다. 좀 전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한 얘기는 그저 겨울을 탄다는 단순한 의미였다면, 지금 황제가 의미하는 바는 그보다 더 깊고 은밀했다.
“……신관은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아르스란 주신의 은총은 제국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거부하시기 전에 그저 저에게 손 한 번만 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시모네의 날카로운 거부에도 신관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밀 뿐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거친 손이지만 저 손으로 수십, 수백의 생명을 살렸을 터다. 그러나 시모네는 그 누가 와도 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데마르 후작.”
황제의 단호한 부름에 시모네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아무리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도 명을 거부할 정도로 무엄할 수는 없었다.
내민 손을 신관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눈이 감기고 몸에서 찬란하지만 따스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신관의 빛은 아직 제국이 아르스란 주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였다.
“으음…….”
신관의 입에서 의미 불명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얕은 탄식만으로도 시모네는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력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면 진작 거액을 기부하고 신관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은, 아니 병이라고 하기엔 좀 더 깊고 음습한 이 저주는 신력과는 상극이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신관이 눈을 떴다. 황제의 재촉에도 그의 입은 선뜻 열릴 줄 몰랐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시모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벗어 놓은 장갑을 도로 꼈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켜자 쓴맛에 속까지 떨떠름했다.
“각하. 혹여 인외의 것에 손을 대셨습니까?”
“…….”
신관의 말에 황제의 눈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그를 일별한 시모네가 신관에게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그대는 이 나라의 후작이 비인(非人)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무례하군.”
“……그런 말이 아닙니다. 각하의 몸은 소신의 신력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의 물음에 신관이 살짝 침을 삼켰다.
“폐하. 모든 생명엔 정해진 수명이 있습니다. 주신께서 정하신 생명은 결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관은 설명하면서도 힐끔거리며 시모네의 기색을 살폈다. 그 뒤에 나올 말을 알기에 시모네는 아무렇지 않게 시녀장에게 손짓해 빈 찻잔을 채우게 했다.
“각하의 몸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기(氣)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말을 하라.”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풋, 하고 시모네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비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신관의 어리석음에 손뼉을 치고 싶었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아데마르 후작 각하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을 해?”
날카로운 하대에 신관의 몸이 움찔했다. 기실 신전의 신관은 정치권과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발언이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귀함에 경애를 보내야 할지, 시류에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 비웃어야 할지 간혹 헷갈리곤 했다.
시모네는 지난날 배운 술법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따끔거리는 속을 참으며 이번엔 그쪽에서 신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신 아르스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나 시모네 아데마르 후작은 결코 부정한 것에 손대지 않았음을 맹세한다.”
비틀린 그의 웃음에 신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신관을 통해 선언하는 주신을 향한 맹세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면 온몸이 불타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시모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응접실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짝! 짝! 주위를 환기하듯 황제가 손뼉을 쳤다. 그로 인해 기묘한 긴장이 흐트러졌다. 신관에게서 손을 뗀 시모네가 몸을 바로 했다. 놀랐는지 신관이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차하면 연약한 신관 하나 잡아먹겠군. 어쨌든 후작의 몸이 지금 당장 큰 이상이 있을 만큼 아픈 건 아니겠지?”
“……예. 폐하.”
생명력이니 어쩌니 해도 현재 시모네의 상태는 지극히 멀쩡했다. 그러니 신관은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꺼림칙한 얼굴을 한 신관을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자리를 뜨는 그에게 시모네가 나직이 경고했다.
“주신의 종은 청빈하고 평등하겠으나 속세의 권력층은 그렇지 못하니 그 입의 무게가 황금보다 무거워야 할 것이오.”
“예. 각하.”
신관이 나가자마자 황제가 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협박 한번 살벌하게 하는군.”
“아시지 않습니까. 별일 아니라도 그것이 여러 입을 거치면 나라 하나 말아먹을 정도로 커진다는 것을요.”
“하하. 그렇긴 하네. 소문이 커지면 나라를 뒤흔들기도 하지.”
시모네는 이참에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간혹 제가 쓰러지는 이유는 저의 삶이 예전보다 편해져 긴장이 풀려서일 것입니다.”
“후작.”
“이제 겨우 숨 돌리고 삽니다. 깊은 병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새하얀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황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신하의 피로를 외면했다. 레나트만큼은 아니라도 그 또한 시모네의 지난했던 과거를 잘 아는 탓이었다.
시모네는 악귀가 되어 스스로 불을 삼켰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전진했다. 그 대가가 이거였다.
영혼까지 망가진 몸.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아아. 레나트.
시모네는 탄식을 삼켰다. 세상엔 법칙이 있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했다. 복수한 대가로 몸이 망가진 건 감내할 수 있었으나 레나트를 잃은 건 심장이 저밀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제 와선 쓸모없는 후회였다. 저지른 짓이 있으니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짐의 치세에 그대는 영원한 충신이고 총신일세. 짐은 그대가 아프면 언제든지 저명한 의원을 부를 것이야. 그때 그대가 짐에게 손을 뻗었듯.”
“…….”
시모네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황제의 말은 천금과 같지만, 그 약속만큼 허망한 거짓도 없었다.
“물론 그대는 믿지 않겠지만.”
그리고 황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가차 없이 충신을 내칠 만큼 잔혹하진 않았다. 제 편이라도 겨우 충언 몇 번 했다고 잔인하게 시모네의 부모를 내쳤던 선황과는 달랐다.
“신관의 말엔 신경 쓰지 말게. 그로 인해 불편한 마음이 짐의 선물로 달래지길 바라지.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해야겠어. 겨울이 와서 빈둥거리는 건 좋으나 날이 일찍 저무니 좋은 사람과 오래 있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저 또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있을 회의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모네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예를 갖췄다. 그리고 돌아보는 일 없이 황궁을 빠져나갔다.
“각하.”
붉은 머리카락이 불쑥 창가에 드리워졌다. 백사자단 내에서 적발의 기사로 불리는 카발리였다. 마차가 저택으로 향하지 않고 외각으로 빠지는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행선지를 마부에게만 말한 터라 시모네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다시 얘기하기 귀찮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도착하고 나면 저절로 알 터였다.
불안하게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시모네는 숨을 골랐다. 레나트를 만나러 갈 때 느꼈던 조바심과는 다른 불길하고도 음습한 느낌이었다. 술법으로 숨기긴 했으나 신관에게 의심의 꽃이 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저를 어찌하진 못하겠지만 의심하는 이가 많을수록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큰일 날 뻔했어…….”
이 비밀은 레나트만이 알고 있었다. ‘오델르의 뱀’이라 불릴 만큼 잔혹했던 과거의 진실은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황제 또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지금은 애써 태연하게 넘기고 있지만, 생명이 불확실하다는 걸 알았을 때 주신 아르스란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온몸을 뒤틀며 발광하다가, 미친 듯이 웃다가, 술독에 빠져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복수를 꿈꾸지도 못했던 시기에 보였던 추한 행동을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그땐 과거와 달리 레나트가 없었기에 더 절망했는지도 몰랐다.
레나트는 시모네가 필요로 할 때 없던 적이 없었다. 시모네가 그를 외면했을 때마저 단 한 번도 연인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떻게 그리 헌신적인지 아직도 잘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시모네만을 위해 살아왔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오전에 와 봤던 곳이라 수월하게 길을 찾은 마부가 천천히 마차를 세웠다. 발판을 밟고 내린 시모네가 카발리에게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이곳에 내 지인이 있다. 오늘은 여기에서 밤을 보낼 테니 그대는 기사단을 이끌고 근처 여관에 묵도록 해.”
“하지만 각하.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는 한때 뛰어난 기사였고 나를 위해선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자다. 일이 생기면 그대가 달려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는 이야. 걱정할 것 없다.”
“……예.”
명령이라 대답했지만,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시모네는 나직이 속삭였다.
“안에 있는 이는 레나트다.”
“……!”
카발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를 무시하고 시모네는 몸을 돌렸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도 폐인데 기사단까지 레나트에게 책임지라 할 수는 없었다. 잘 알아들었는지 카발리를 제외한 기사들은 각자 여관으로 흩어졌다.
“각하께서 안으로 들어가면 저도 물러나겠습니다.”
고집스러운 충신의 말에 시모네는 한숨 섞인 웃음을 삼켰다. 그는 아침과 달리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쿵쿵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층에 불빛이 들어왔다. 문 안쪽에서 일정한 타격음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이리라.
이윽고 낡은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시모네를 발견한 까만 눈이 크게 뜨였다. 왼손에 들고 있는 등이 어두운 골목을 은은하게 비췄다.
시모네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오고 말았어.”
유리등 안의 촛불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서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모네는 흐트러진 은발을 귀 뒤로 넘기며 침을 삼켰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레나트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던 레나트의 따뜻함을. 염치없지만 도저히 그 말고는 온기 어린 품을 찾을 수 없었다.
“레나트.”
기어코 울먹이는 소리가 시모네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동도 하지 않던 레나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힘없이 내려가려던 손이 단단한 손아귀에 빈틈없이 얽혔다.
“너는 겨울을 많이 타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랬잖아.”
시모네는 억센 힘에 이끌려 넉넉한 품에 갇혔다. 등과 함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레나트가 단단히 지탱했다.
아직도 겨울은 차갑고 가슴 또한 그만큼 시렸다. 그러나 레나트와 닿은 곳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졌다. 시모네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터졌다.
그대로 몸이 들렸다. 작은 체구도 아닌 몸을 레나트는 한 손으로만 지탱했다. 절뚝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에서 카발리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고 썰렁한 거리엔 불이 꺼진 등과 널브러진 지팡이만이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레나트와의 첫 만남은 특별했다. 여느 귀족이 그렇듯이 귀족가의 장남이 아니면 스스로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백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시모네도 마찬가지였다. 작위와 영지 모두 장남이 물려받으니 다른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기사의 길은 무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국에서 알아주는 기사였고 형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으나 시모네는 몸 약한 어미를 닮아 체구가 왜소하고 허약했다.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마법사나 신관, 또는 행정관 같은 관리의 길뿐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마법사나 신관은 무리였다. 그나마 행정관이 가장 현실적이었기에 아카데미에도 행정학부로 지원했다. 그곳에서 레나트를 처음 만났다.
레나트 라우리드센.
레나트는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검의 명가 라우리드센 공작가의 장남으로 아카데미 최고의 유명인이었다. 시모네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길쭉한 키에 탄탄한 몸은 누가 봐도 타고난 기사 체질이었고 외모 또한 수려했다. 일자로 뻗은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이 일견 고집 있어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모난 데 없이 단정했다.
처음 레나트를 봤을 땐 시모네도 살짝 놀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밤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이었다. 라우리드센 공작가의 선조 중에 동국인과 결혼한 이가 있을 거라는 소문만큼 제국에서 특이한 외향이긴 했다.
레나트와의 인연은 그의 일방적인 인사로 시작되었다. 기사학부와 마법학부, 행정학부는 모두 배우는 건물이 달랐다. 다만 겹치는 교양 과목이 많아 과제를 함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레나트와의 인연 또한 그렇게 얽혔다.
“시모네 아데마르지? 레나트 라우리드센이다.”
환한 미소만큼이나 밝은 인사에 시모네는 속으로 한껏 당황했다. 아카데미의 인기인이 건네는 인사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민 손을 잡지 않자 레나트는 자연히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민망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너도 동부 쪽 조사단이지? 같은 팀이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응.”
“너 꽤 조용하구나. 뭐. 상관없지. 내가 말이 많으니까.”
레나트가 흰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문제는 시모네에겐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는 거다. 초면부터 반말에, 친한 척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레나트와 한 팀이 된 건 행정학부와 기사학부의 공동 실습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행정학부 학생들은 졸업하기에 앞서 배당받은 영지로 비밀 시찰을 나가는데 그 지역의 기후부터 시작해 평민들의 삶, 자금의 흐름 등 간단한 것을 조사했다. 당연히 영주가 좋아할 리 없으니 행정학부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학부 학생과 짝을 지어 보내는 것이다.
“차분한 게 네 장점이지. 행정관으로서는 그것이 큰 이점으로 작용할 거야.”
시모네의 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부서졌다. 진심 어린 칭찬은 날카로운 성정도 무디게 만들었다. 레나트의 너그러운 성품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시모네의 투정을 부드럽게 넘겼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먼저 해결해 화낼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한 달에 걸친 실습에서 두 사람은 친우라고 불릴 만큼 가까워졌고, 후일 신분이 달라져도 사석에서는 말 놓자는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먼저 애정을 품은 건 레나트였다. 시모네는 그의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간혹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긴 하나 티를 내진 않았기 때문이다.
“너를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면 좋겠어.”
다만 그가 유일하게 집착했던 게 호칭이었다. 가족만이 부르는 시모네의 이름을 자신이 독점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래. 그건 부탁이 아닌 강요였다. 가족은 어쩔 수 없지만, 후일 친우가 생겨도 이름만은 허락하지 않길 바란 것이다.
시모네는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어차피 사교성이 좋지도 않거니와 평생 친우라고는 레나트밖에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레나트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여길 만큼 시모네를 특별하게 대우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시모네만은 예외였다. 서로의 일상을 넘나들며 친우라기엔 무척 친밀하고 연인이라기엔 약간은 미흡한 애매한 상태가 이어졌다.
아마 그대로 삶이 평탄하게 이어졌다면 두 사람은 여느 연인처럼 자연히 사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른 척 손을 잡거나 뒤에서 껴안는 레타트의 짓궂은 행동에 시모네 또한 가슴이 뛰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시모네!”
갑자기 닥친 가족의 부고에 시모네는 정신없이 아카데미를 뛰쳐나갔다. 레나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쫓아와 시모네를 인적 없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에게 잡힌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가쁜 호흡만을 내뱉자 레나트를 그를 껴안고 끊임없이 이름을 불렀다.
“시모네. 시모네. 시모네…….”
나직한 부름에 시모네의 떨림이 점점 멎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레나트가 조심스레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고개 숙여 살며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시모네의 심장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잠시간 닿았던 체온은 아쉬움을 남기고 서서히 멀어졌다. 생애 첫 입맞춤이었지만 설렘보다는 위로처럼 따스하게 다가왔다.
시모네는 멀거니 레나트를 올려다봤다.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을 한 레나트가 두 손으로 양 뺨을 붙잡았다. 둘의 이마가 툭 맞닿았다. 낮은 저음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나를 불러.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줄 테니,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를 불러.”
그때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에 큰 위안을 얻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레나트에게는 그 약속이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레나트는 재차 약속을 속삭였다.
“나를 부르면 나 또한 네 이름을 부르며 달려갈게.”
스스로 다짐하듯. 무척이나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