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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변방의 후미진 시골 마을을 벗어나자 가도가 훨씬 반듯해졌다. 마티유는 한숨을 쉬었다. 멀미가 심한 체질이라 장거리 여행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 아닙니다. 레이디야말로 불편하신 점 없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는 얼굴이 무척 단아하고 예뻐서 마티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아스트라 윈터’. 왕실 기사단에서 복무했던 퇴역 기사 ‘헤슬러 윈터’의 외동딸이다. 헤슬러는 은퇴한 뒤로 하나뿐인 딸을 키우며 적적히 살다 2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마티유는 윈터 부녀를 조사하던 도중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헤슬러에게 상당한 퇴직금이 돌아갔을 텐데도, 그는 저택을 매입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는커녕 변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은거하다시피 살았다.
게다가 아내를 맞이했다는 이력도 없는데 어느 날 딸 하나가 덜렁 생긴 것이다. 어디서 수양딸이라도 데려왔나 싶었지만, 주변인들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부녀지간인 만큼 아주 똑 닮았다고 했다.
마티유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준귀족에 해당하는 아스트라는 하녀를 고용하지 않고 홀로 제 손으로 모든 살림을 해결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산속의 약풀을 캐며 평범한 약초꾼으로 살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지적 수준이나 기품은 어느 귀족 영애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준수했다. 글을 읽고 쓸 줄도 알았으며 몸짓에도 귀족적인 예의범절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렇다면 윈터 경이 따로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 되겠군.’
마티유는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앞으로 데본 공작의 성에서 보호를 받는 동안 아스트라에게 어려운 교양 수업을 듣게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임시 거처라고 해도 데본 공작의 비호 아래에 있는데 예법도 없이 추잡하게 먹고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아리따운 레이디에게 그런 품위 없는 행동거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손은 약간 거칠지만 피부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처럼 새하얗고, 밤색 머리카락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시골 처녀라기보다 부유한 귀족의 자제에 더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꽃잎같이 선명한 분홍색이었는데, 마티유도 이런 색을 가진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
마침 아스트라가 저를 훑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마티유 쪽을 돌아보았다. 동그란 눈과 마주치자 마티유는 수줍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공작 성에 돌아간 이후의 일정을 되새겨 보았다. 우선 고급 의상점에 들러서 치수를 재고, 드레스부터 새로 맞추자.
지금 당장 아스트라가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한 천 재질의 원피스였다. 아무리 그녀가 사랑스럽다고는 하지만 저 꼴로 성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소매 밖으로 보이는 가냘픈 손목에 눈길을 두었다. 세게 움켜쥐면 부러질 것처럼 덧없이 연약해 보였다. 가느다란 몸체가 몹시도 안쓰러웠다.
그래, 성에 도착하면 일단 맛있는 것부터 배 터질 때까지 실컷 먹게 해 주자.
* * *
“오를리에 대공국에서도 외교 문서가 도착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쉐인은 입구가 뜯어진 봉투를 레녹스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레녹스는 읽어 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헤슬러 윈터 경이 그 지방 출신이라는 근거를 내세우며 아스트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이지.”
쉐인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레녹스의 표정은 메마른 사막처럼 삭막해 보였으나, 쉐인은 그가 지금 ‘소유권’이라는 단어를 듣고 옅은 경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소문이라는 게 참 무서워. 벌써 대륙 전역에 ‘바틴 왕국에 권능이 내려진 여인이 나타났다’며 파다하게 퍼졌어.”
소문의 발단은 대략 석 달 전에 일어났다.
어느 용병단이 왕국의 동녘에 있는 산맥을 횡단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그들 앞에 사자와 용의 형상을 반반씩 닮은 성수(聖獸)가 나타났는데, 용병들은 그만 성수를 마물로 착각해서 칼을 겨누고 말았다.
성수는 만생물의 균형을 위해 신의 정기를 나눠 받고 이 땅에 내려온 존재다. 일개의 부족조차 성수를 공격하는 행위는 금하고 있었으며, 항적한다고 해도 인간의 손에 당할 종족이 아니었다.
그때 전멸당할 위기에 몰린 용병단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어떤 여인’이었다.
능란한 산지기도 오가기 힘든 그곳에 웬 가녀린 여인이 나타나서 날뛰는 성수를 진정시켰다. 놀랍게도 성수는 그녀가 타이르자, 거짓말같이 얌전해져서 다시 산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용병들은 무사히 산에서 내려온 직후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그때의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확산되면서, 소문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여인의 정체는 의외로 싱거웠다. 그녀는 외진 마을에서 사는 지극히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쯤을 연상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실망했다. 그렇게 불거진 소문이 종식되려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성수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낭설로 치부하기 어려웠던 추기경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제들을 보냈다. 그러나 여인은 성수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마다, 그런 소문은 무근하다며 사제들을 포함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파견된 사제들은 그녀가 성수를 부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마물을 유도하는 향갑을 마을 곳곳에 숨겨 두고 때를 기다렸다. 마물들이 마을을 습격하면 여인이 성수를 불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윽고 마물들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치기 바빴다. 사태를 지켜보던 여인은 발 빠르게 산속으로 향했다. 사제들은 바삐 그녀를 뒤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여인이 성수를 불러내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말로 그녀는 성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성수는 곧장 마을로 내려가 마물들을 제압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사제들은 감격스러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번에는 ‘성수를 순치(馴致)하는 권능을 타고난 성녀’가 내려왔다며 숭상하는 기미까지 보였다.
“우리 아스트라 양은 어떠신가?”
“그렇지 않아도 마티유가 무사히 데려왔다면서 서신을 보냈더군.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레녹스가 감히 쉐인을 가리켜서 ‘너’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바틴 왕국의 국왕인 쉐인에게 이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왕국 안에서 레녹스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잘 모셔 둬. 소중한 이 땅의 성녀님이시라고.”
여타 짐승과는 다르게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 성수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생물이다. 억지로 성수를 붙잡아 우리에 가두기라도 하면 격노한 그들은 천지를 뒤흔들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성수는 인간이 절대로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수를 부릴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다. 바로 ‘아스트라’라는 여인을 통해.
벌써 간사한 이들은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접근하고 있었다. 종국에는 납치를 꾀하는 무뢰배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레녹스 데본 공작이 나서서 아스트라의 신변을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왕국 밖에서는 아스트라를 데려가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 내며 외교 문서를 보내는 실정이었다. 모두 흰자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외교가 비틀리면 곧 전장의 도화선에 불이 붙을 것이다.
5년 전, 지긋지긋한 전란을 겨우 해결하고 왕위에 오른 쉐인으로서는 골머리깨나 앓을 수밖에 없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쉐인은 좋은 최선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 굴면서, 레녹스에게 일단 아스트라를 공작령에 붙잡아 두라고 명령했다.
왕국 최강의 검인 레녹스 데본 공작이 왕국의 땅에 내려온 성녀를 지킨다. 쉐인이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없었다.
“마티유가 잘 챙겨 주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
“그 애라면 잘하겠지. 그래도 여인이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존재라네.”
쉐인의 걱정이 끊이지 않자, 레녹스는 품 안에서 곱게 접힌 양피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티유의 친필이 담긴 서신이었다. 그 안에는 레녹스의 성으로 피신한 아스트라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얼마 후면 성녀의 신변을 누가 보호할 것인가를 두고 회담이 열린다. 모두 아스트라를 데려가기 위해 아귀처럼 덤벼들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쉐인은 아스트라를 이 나라에 묶어 둘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대체 무슨 대단한 수단을 강구해 둔 건지는 귀띔도 해 주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뭐야?”
“레녹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쓰여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별안간 쉐인이 다급하게 편지의 어느 부근을 짚으며 레녹스에게 따졌다.
“아스트라 양이 대단한 미인이라잖아!”
“…….”
변방의 후미진 시골 마을을 벗어나자 가도가 훨씬 반듯해졌다. 마티유는 한숨을 쉬었다. 멀미가 심한 체질이라 장거리 여행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 아닙니다. 레이디야말로 불편하신 점 없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는 얼굴이 무척 단아하고 예뻐서 마티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아스트라 윈터’. 왕실 기사단에서 복무했던 퇴역 기사 ‘헤슬러 윈터’의 외동딸이다. 헤슬러는 은퇴한 뒤로 하나뿐인 딸을 키우며 적적히 살다 2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마티유는 윈터 부녀를 조사하던 도중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헤슬러에게 상당한 퇴직금이 돌아갔을 텐데도, 그는 저택을 매입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는커녕 변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은거하다시피 살았다.
게다가 아내를 맞이했다는 이력도 없는데 어느 날 딸 하나가 덜렁 생긴 것이다. 어디서 수양딸이라도 데려왔나 싶었지만, 주변인들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부녀지간인 만큼 아주 똑 닮았다고 했다.
마티유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준귀족에 해당하는 아스트라는 하녀를 고용하지 않고 홀로 제 손으로 모든 살림을 해결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산속의 약풀을 캐며 평범한 약초꾼으로 살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지적 수준이나 기품은 어느 귀족 영애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준수했다. 글을 읽고 쓸 줄도 알았으며 몸짓에도 귀족적인 예의범절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렇다면 윈터 경이 따로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 되겠군.’
마티유는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앞으로 데본 공작의 성에서 보호를 받는 동안 아스트라에게 어려운 교양 수업을 듣게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임시 거처라고 해도 데본 공작의 비호 아래에 있는데 예법도 없이 추잡하게 먹고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아리따운 레이디에게 그런 품위 없는 행동거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손은 약간 거칠지만 피부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처럼 새하얗고, 밤색 머리카락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시골 처녀라기보다 부유한 귀족의 자제에 더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꽃잎같이 선명한 분홍색이었는데, 마티유도 이런 색을 가진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
마침 아스트라가 저를 훑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마티유 쪽을 돌아보았다. 동그란 눈과 마주치자 마티유는 수줍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공작 성에 돌아간 이후의 일정을 되새겨 보았다. 우선 고급 의상점에 들러서 치수를 재고, 드레스부터 새로 맞추자.
지금 당장 아스트라가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한 천 재질의 원피스였다. 아무리 그녀가 사랑스럽다고는 하지만 저 꼴로 성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소매 밖으로 보이는 가냘픈 손목에 눈길을 두었다. 세게 움켜쥐면 부러질 것처럼 덧없이 연약해 보였다. 가느다란 몸체가 몹시도 안쓰러웠다.
그래, 성에 도착하면 일단 맛있는 것부터 배 터질 때까지 실컷 먹게 해 주자.
* * *
“오를리에 대공국에서도 외교 문서가 도착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쉐인은 입구가 뜯어진 봉투를 레녹스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레녹스는 읽어 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헤슬러 윈터 경이 그 지방 출신이라는 근거를 내세우며 아스트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이지.”
쉐인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레녹스의 표정은 메마른 사막처럼 삭막해 보였으나, 쉐인은 그가 지금 ‘소유권’이라는 단어를 듣고 옅은 경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소문이라는 게 참 무서워. 벌써 대륙 전역에 ‘바틴 왕국에 권능이 내려진 여인이 나타났다’며 파다하게 퍼졌어.”
소문의 발단은 대략 석 달 전에 일어났다.
어느 용병단이 왕국의 동녘에 있는 산맥을 횡단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그들 앞에 사자와 용의 형상을 반반씩 닮은 성수(聖獸)가 나타났는데, 용병들은 그만 성수를 마물로 착각해서 칼을 겨누고 말았다.
성수는 만생물의 균형을 위해 신의 정기를 나눠 받고 이 땅에 내려온 존재다. 일개의 부족조차 성수를 공격하는 행위는 금하고 있었으며, 항적한다고 해도 인간의 손에 당할 종족이 아니었다.
그때 전멸당할 위기에 몰린 용병단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어떤 여인’이었다.
능란한 산지기도 오가기 힘든 그곳에 웬 가녀린 여인이 나타나서 날뛰는 성수를 진정시켰다. 놀랍게도 성수는 그녀가 타이르자, 거짓말같이 얌전해져서 다시 산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용병들은 무사히 산에서 내려온 직후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그때의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확산되면서, 소문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여인의 정체는 의외로 싱거웠다. 그녀는 외진 마을에서 사는 지극히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쯤을 연상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실망했다. 그렇게 불거진 소문이 종식되려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성수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낭설로 치부하기 어려웠던 추기경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제들을 보냈다. 그러나 여인은 성수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마다, 그런 소문은 무근하다며 사제들을 포함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파견된 사제들은 그녀가 성수를 부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마물을 유도하는 향갑을 마을 곳곳에 숨겨 두고 때를 기다렸다. 마물들이 마을을 습격하면 여인이 성수를 불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윽고 마물들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치기 바빴다. 사태를 지켜보던 여인은 발 빠르게 산속으로 향했다. 사제들은 바삐 그녀를 뒤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여인이 성수를 불러내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말로 그녀는 성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성수는 곧장 마을로 내려가 마물들을 제압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사제들은 감격스러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번에는 ‘성수를 순치(馴致)하는 권능을 타고난 성녀’가 내려왔다며 숭상하는 기미까지 보였다.
“우리 아스트라 양은 어떠신가?”
“그렇지 않아도 마티유가 무사히 데려왔다면서 서신을 보냈더군.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레녹스가 감히 쉐인을 가리켜서 ‘너’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바틴 왕국의 국왕인 쉐인에게 이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왕국 안에서 레녹스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잘 모셔 둬. 소중한 이 땅의 성녀님이시라고.”
여타 짐승과는 다르게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 성수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생물이다. 억지로 성수를 붙잡아 우리에 가두기라도 하면 격노한 그들은 천지를 뒤흔들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성수는 인간이 절대로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수를 부릴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다. 바로 ‘아스트라’라는 여인을 통해.
벌써 간사한 이들은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접근하고 있었다. 종국에는 납치를 꾀하는 무뢰배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레녹스 데본 공작이 나서서 아스트라의 신변을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왕국 밖에서는 아스트라를 데려가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 내며 외교 문서를 보내는 실정이었다. 모두 흰자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외교가 비틀리면 곧 전장의 도화선에 불이 붙을 것이다.
5년 전, 지긋지긋한 전란을 겨우 해결하고 왕위에 오른 쉐인으로서는 골머리깨나 앓을 수밖에 없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쉐인은 좋은 최선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 굴면서, 레녹스에게 일단 아스트라를 공작령에 붙잡아 두라고 명령했다.
왕국 최강의 검인 레녹스 데본 공작이 왕국의 땅에 내려온 성녀를 지킨다. 쉐인이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없었다.
“마티유가 잘 챙겨 주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
“그 애라면 잘하겠지. 그래도 여인이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존재라네.”
쉐인의 걱정이 끊이지 않자, 레녹스는 품 안에서 곱게 접힌 양피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티유의 친필이 담긴 서신이었다. 그 안에는 레녹스의 성으로 피신한 아스트라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얼마 후면 성녀의 신변을 누가 보호할 것인가를 두고 회담이 열린다. 모두 아스트라를 데려가기 위해 아귀처럼 덤벼들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쉐인은 아스트라를 이 나라에 묶어 둘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대체 무슨 대단한 수단을 강구해 둔 건지는 귀띔도 해 주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뭐야?”
“레녹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쓰여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별안간 쉐인이 다급하게 편지의 어느 부근을 짚으며 레녹스에게 따졌다.
“아스트라 양이 대단한 미인이라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