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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데본 공작의 성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다. 호화로운 식사 후에도 맛좋은 과일과 차가 끊이지 않았고, 심심할 틈 없이 말동무를 해 주는 하녀들이 뒤를 따랐다.

아스트라는 여태껏 아버지와 단둘이 소박한 집에서 살았다. 제 손으로 빨래와 요리를 했으며, 날이 밝으면 행장을 챙겨서 산에 올랐다. 억센 약풀의 뿌리를 끊어 내고, 절구질을 반복하다 보니 손끝에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다. 어렵고 외로운 일도 많았지만, 보람이 가득한 삶이었다.

그래서 성의 고용인들을 부리는 게 영 어색했다. 아스트라는 한동안 도망치다시피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마티유가 여기 있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읽어도 좋다고 말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음 책장을 넘기다 말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성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의 삶은 다사다난하게 뒤바뀌었다. 오래전부터 결코 이 능력을 남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가 신신당부했었다. 그 말씀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어야만 했다.

하지만 용병들과 마을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온갖 일을 당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한당에게 납치당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 데본 공작이 일대에 수색대를 풀어서 구조해 준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스트라는 이곳으로 옮겨졌다. 맞이하러 와 준 마티유의 말에 따르면, 국가에서 앞으로의 처우를 결정하고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주기 전까지 이곳이 임시 거처라고 했다.

여태껏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아스트라는 사실 내내 불안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겨진 그 집을 지키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허나 성수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킨 이상, 그녀를 노리는 이들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졌다.

어쩌면 공작도 아스트라의 권능을 노리고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장 데본의 성에 은신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일이 완만하게 풀리면 좋으련만.’

레녹스 데본 공작. 왕국 최강의 검. 5년 전에 종결된 전장에서 왕국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으로, 전 국민에게 칭송받고 있는 남자였다. 워낙 외진 곳에 살았기에 들려오는 풍문이 옅어서 아스트라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다만 딱 하나, 데본 공작가가 한번 멸문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왕국의 건립 이래 동쪽을 수호하던 데본 가문은, 주변 가문의 봉기로 오래전에 일족이 말살당한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그렇게 왕국의 동쪽은 데본 가문을 대신해 코트네이 가문에 의해 통치되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데본 가문의 마지막 후예, 레녹스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왕세자를 도와 승전고를 울렸고, 그 포상으로 가문의 영토를 돌려받기를 원했다. 전쟁이 끝나고 왕위를 이어받은 젊은 왕, 쉐인 가스티온은 논공행상하여 훈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레녹스가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당당히 공작 작위를 되찾았다는 소문만 익히 들었다.

공작의 성에 당도했을 무렵에 그는 부재중이었다. 마티유는 그가 국왕의 명령으로 수도에 소환되었다고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뻔질나게 그의 훈신을 수도로 불러들인다며 마티유가 넋두리처럼 덧붙였다.

“레이디 아스트라, 여기 계십니까?”

때마침 아스트라를 찾는 마티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이 마티유의 발걸음에 맞춰서 굽실굽실 흔들거렸다. 강아지 같은 동그란 눈이 도서관 구석에 앉아 있는 아스트라를 발견하자 금세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티 없이 맑은 그의 미소에 조금 전까지 쌓였던 근심이 햇살을 마주한 눈처럼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안 보여서 걱정했습니다.”

“찾아다니게 해서 미안해요.”

“여기 계실 거라 생각했는걸요. 혹시 모르니 하녀를 꼭 대동하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레이디를 노리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저를 데려가려고 안달이 났을까요?”

“성수를 다루는 건 성력이 높은 교황도 해내지 못하는 일입니다. 레이디는 이제 성녀와 같이 추앙받는 몸이에요.”

성녀. 그 단어가 다시금 아스트라의 마음을 후볐다.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마티유는 좋은 사람이다. 그녀의 안색이 바뀌기만 해도 어찌할 줄 모르고 쩔쩔맨다.

“제가 레이디를 찾은 건 다름이 아니라, 조만간 공작님이 돌아오신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공작님께서요?”

이 성의 주인이 돌아온다.

아스트라는 그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납치되었던 그녀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보내고 성에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직접 만나서 그가 자신에게 단순히 호의를 베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흑심을 감추고 위선을 행한 것인지 판단하고 싶었다.

“수도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리니까, 금방 도착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공작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먼저 주변 사람에게 물어서 그를 알아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스트라의 질문에 마티유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본성이 나쁜 분은 아니세요.”

“솔직하고 애매한 답이네요.”

“레이디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만나 보면 어떤 분인지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마티유는 싱긋 웃으며 빈말조차 섞지 않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만큼 그가 정직한 사람일 수도 있었으나, 반대로 데본 공작이라는 자가 포장조차 안 되는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아스트라는 되도록 마티유가 정직한 사람인 쪽이기를 바랐다.



* * *



이튿날이 지나고, 계절은 한껏 푸근하건만 아스트라는 때아닌 감기로 앓아누웠다. 그녀가 아프기 시작하자, 마티유는 걱정으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스트라는 보기에는 연약해도 건강한 체질이었다. 웃풍이 천장과 벽에 찌들 정도로 지독한 겨울 날씨가 찾아와도 아무렇지 않게 산을 탈 정도로 튼튼했다. 따듯한 봄 날씨가 이어지는 마당에 감기에 걸리다니 저조차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전신의 근육이 상당히 긴장한 상태입니다. 혹시 염려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데본 공작가의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염려스러운 일을 묻는다면 요즘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스트라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다 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레스의 영향이 큰 것 같네요. 당분간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면 금방 나으실 것입니다.”

“어휴, 정말 다행이에요.”

병상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마티유가 주치의의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아스트라가 앓는 것을 보면서 마티유는 내내 그녀가 곧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티유 도련님이 하도 난리를 피우셔서 성녀님께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그려.”

“소란을 피워서 정말 미안해요, 휴버트 영감. 하지만 저는 정말 레이디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요.”

“약도 처방해 주셨으니까 이걸 마시고 푹 자면 괜찮아질 거예요.”

“아아, 이게 다 저의 불찰입니다. 레이디가 스트레스를 받고 계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스트라가 구태여 ‘성녀’라는 이명을 가졌기 때문에 잘 돌봐 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이 정 많은 성격이었다. 자신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기에 친근하게 다가올 뿐, 별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마티유는 아무 잘못 없어요. 갑자기 고향을 떠나 심란해져서 그런가 봐요.”

“앞으로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마티유 도련님은 이 방에서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성녀님께서 쉬지를 못하시잖습니까?”

데본가의 주치의, 휴버트는 생긴 대로 아주 꼬장꼬장한 노인이었다. 마티유는 기가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후훗.”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마티유와 휴버트가 거의 동시에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민망해져서 아스트라는 얼른 웃음을 거뒀다.

“아, 아무튼 하루빨리 침대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컨디션을 조절해 볼게요. 공작 각하께서 오시면 인사를 드려야 하니까.”

아무리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이 성의 주인이 도착하는데 마중을 나가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레이디. 몸도 좋지 않으신데 일부러 나오실 것까지 없어요.”

“하지만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공작님은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세요. 아픈 사람에게 억지로 예의를 차리게 하시지 않아요. 오히려 이 상태로 마중을 나가시면 저만 꾸중을 듣게 될걸요?”

“그런…….”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디는 쾌차하시고 난 다음에 인사드리시면 됩니다.”

아스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버트가 약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아스트라는 쓴 약을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 누웠다. 마티유가 푹신한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꾸세요, 레이디. 주무시고 나면 훨씬 개운해질 거예요.”



* * *



데본 공작 가문의 역사는 대대로 그 고성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들 가문의 시조는 고성이 지어진 이곳을 거점으로 대륙의 평정을 꾀한 호걸이라고 한다. 그것이 건국의 근간이 되었고, 곧 데본 가문의 시초를 열기도 했다.

시조는 유명한 전쟁광으로 전술 또한 능란한 인물이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 고성과 성벽을 완성시키기 위해 굉장한 공을 들였다. 가진 재산을 전부 쏟아서, 지금은 대륙에서 광맥이 말라 구할 수 없다고 전해지는 ‘용의 비늘’로 벽돌을 만들었다.

검은 광택이 흐르는 그 광물은 웬만한 강철보다 단단해서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지만, 지금은 매우 희귀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기반을 닦아 준 덕에 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도 불린다.

레녹스는 시조를 닮아서 용암처럼 끓는 호전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데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가문을 재건할 목적으로 전장에 나가 칼을 휘둘렀다. 쉐인은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던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짐승이 따로 없다고 평했다.

5년 전 처음으로 데본의 고성을 방문했을 때는 신기하게도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시 돌아왔다고 느끼다니, 감성적이지 않은 그도 놀랍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