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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
애사지장(愛思之章)
마염기 1권(1화)
第一章 새벽이슬같이(1)
하늘을 가득 덮은 흑운(黑雲)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무거웠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서늘한 기운이 무풍(無風) 속에서 사위(四圍)를 거칠게 휘감아 돌았다.
우거진 수림(樹林)까지 더해져 한낮임을 잊은 듯 어스름한 고적한 산속.
부드럽게 흩날리는 백발 아래 세월의 경륜이 새겨진 이마와 불을 뿜는 호목(虎目), 풍염하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인구에 회자되는 신선의 풍모를 가진 노인이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뒷짐을 진 노인의 평온한 표정과 달리 둘러싼 많은 무인은 도검을 다잡으며 긴장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보는 일촉즉발의 흉험(凶險)한 상황.
하늘로 향했던 노인의 시선이 서서히 인계로 하강했다. 시선을 받은 무인이 움찔거리며 게걸음을 걸어 눈길을 피했다.
파르르 파락.
무풍(無風) 속에서 펄럭이는 청삼(靑衫)을 보니 흙이 곳곳에 묻었고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허. 내가 어쩌다…….’
곤경에 처한 지금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음에도, 노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그의 시선은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일순 노인이 둘러싼 무인들에게 일갈(一喝)이 터뜨렸다.
“왜 노부를 이리도 핍박하느냐!”
만인을 압도하는 절대자의 기개(氣槪).
둘러싼 무인들이 고막을 때리는 일갈에 담긴 공력의 웅강함에 잠시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포위망을 풀 생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무인들의 복장은 승도속(僧道俗)을 총망라한 듯 다양했고, 손에 든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단 한 사람, 자신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少林)의 영각이라 하외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외다. 하나 시주께서 익히신 무공은 인세(人世)에 있어서는 안 되기에 부득불 손을 쓴 것이니 너무 야박하다 탓하지 마시구려.”
무정금강승(無情金剛僧) 영각(影覺).
소림의 장로이자 십계십승(十戒十僧) 중 살계승(殺戒僧)으로 단호한 손속으로 널리 알려진 무승(武僧).
노인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녀자를 희롱하는 정파의 제자를 가볍게 훈계하며 손을 쓴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니…….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겠구나.’
“노부는 여태 강호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다. 누구와 싸운 적도, 누구를 해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단지 내가 익힌 무공 때문에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냐?”
노인의 담담한 말에 짙은 노기가 물씬 풍겼다. 소림승 옆으로 한 노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본도는 화산의 심월이라 하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인장의 생명이 아니외다. 그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도록 단전(丹田)만 폐(閉)하면 되니 순순히 협조를 해 주시면, 큰 어려움은 겪지 않으실 거외다.”
지난 삼 주야(晝夜)를 돌이켜 보면 몇 번이나 조우하였음에도 손속에 사정을 두어 아무도 상하게 하지 않은 탓에 지금 저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리라.
노인의 다소 여윈 듯하지만 단단하고 굳센 기상이 보이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화산일검향(華山一劍香) 심월(心月). 매화삼십육검(梅花三十六劍)을 극성으로 연성한 화산의 장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껏 자신의 뒤를 쫓는 무인들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지만, 손을 섞은 상대는 각 파의 일대 제자들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몸을 뺄 수 있었다.
화산의 장로와 소림의 살계승.
일대일의 대결이라면 필승의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모인 수많은 무인의 합공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무인과 손을 섞은 경험이 별반 없어 이룬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자신으로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평생 무공을 수련한 무인으로 단전을 폐하도록 순순히 내줄 수도 없는 일. 노인의 가슴은 큰 돌을 올려놓은 듯 무거워졌다.
화산일검향은 노인이 가진 무공을 직접 목도(目睹)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문인으로부터 그 위력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장문인의 말을 떠올리는 그의 마음에 슬그머니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진정한 위력과 이름이야 알 길이 없지만, 과거 잔심혈도(殘心血刀) 곡요(曲耀)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강호에 혈풍(血風)을 휘몰아 왔을 때 처음 강호에 알려진 악마의 도법(刀法)이었다.
잔심혈도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를 추살(追殺)하려 나선 구대 문파의 무인 중 살아 돌아온 이들이 일 할에 불과했다. 희생된 무인 중에는 구파의 장로들도 대거 포함되었었다.
검은 초승달 강기(|氣)가 닿는 모든 것을 잘라 버렸고, 스치기만 해도 닿은 곳이 심한 화상을 입게 되는 무공. 살아 돌아온 자들이 전하는 도법의 위력은 듣는 이들의 소름을 돋게 할 정도였다.
각 파 장로들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으로 겨우 그의 움직임을 막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합공(合攻)으로 겨우 그를 죽일 수 있었다고 전해졌다. 장로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그를 막기는커녕 전멸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정파의 무인들은 심장이 떨리는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 무공이 지금 펼쳐지려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인성을 상실한 잔심혈도의 손에서 펼쳐졌지만, 지금은 그 경지를 넘은 듯한 노인이 펼치려는 것이 아닌가.
격렬하게 넘실거리던 분노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노인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워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예기(銳氣)를 흘리는 날렵한 안시도(雁翅刀)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노부도 이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펼친 적이 없었네. 오랜 수련으로 교유(矯?)하고 기쁜 마음으로 강호를 유람하러 나왔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기실 나도 내 무공의 위력을 정확하게 모르니 다들 조심하시게.”
차분히 가라앉은 노인의 말에 그를 둘러싼 무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병기를 다잡았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을 뒤덮었고, 끌어올린 내공의 강한 기파가 거칠게 휘감아 돌았다.
이를 악문 화산일검향은 평생을 함께한 자신의 매화문검(梅花紋劍)을 노인에게 겨누었다.
“두렵습니다. 하나 인세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무공을 모른 체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벌주를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전에 노인이 펼칠 무공 명을 들을 수 있겠소이까?”
곧 펼쳐질 지옥도(地獄圖)를 떠올린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생(死生)의 관두(關頭)에서 무공의 이름이 무에 그리 중할까. 그래도 그대가 알기를 원한다면 일러 주겠네. 묵월마염도(墨月魔炎刀)라 한다네.”
묵월마염도.
그 이름이 무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졌다.
무정금강승이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그의 말이 신호였는가.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돌아보던 노인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화악―
묵월마염도의 현신.
도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나더니 피를 갈구하는 듯 넘실거렸다. 그를 둘러싼 무인들의 눈에 잠시 두려움이 피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안시도가 비스듬히 지면에 드리워졌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흐르고 살짝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사위에 그득하였다.
“탓.”
촤악―
어느 순간, 움직임이 없던 노인의 몸에서 검은 강기가 빛살처럼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후두두. 툭. 툭.
하늘이 펼쳐질 참상을 보기 싫었던가!
굵은 빗방울이 우거진 숲을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장대비로 변해 무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
“할아버지!”
귀청을 울리는 밝고 낭랑한 목소리에 노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자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상긋거리는 소동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병색이 완연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예끼, 이놈아. 놀라 간 떨어질 뻔했다.”
얼른 미소를 지운 노인이 짐짓 화난 듯 음성을 높였지만, 이미 걸렸던 미소를 본 소동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치. 할아버지께서 놀라실 때가 있나요?”
열 살 남짓 되었을까. 크고 또랑또랑한 눈이 귀엽게 보일 뿐 딱히 잘생긴 구석이 없는 소동은 냉큼 달라붙어 노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또래의 아이들보다 작아 보이는 소동의 힘으로는 파리한 안색의 노인조차 당할 수 없었던가. 오히려 소동이 노인의 품으로 끌려와 안겼다.
“요놈아, 나는 사람이 아니냐?”
노인이 간지럼을 태우는 것인지, 소동이 몸을 바동거리며 깔깔거렸다.
“헤헤헤. 할, 할아버지, 헤헤, 저 죽어요. 헤헤헤.”
“이놈아, 다시 또 그럴 테냐?”
“헤헤, 안, 헤헤, 그럴게요. 헤헤, 용서해 주세요.”
노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자 소동은 발딱 일어나 후다닥 멀어졌다. 귀여운 눈에 물기가 조금 맺히고, 얼굴은 발그레 달아오른 채 제법 매섭게 노려보았다.
“할아버지, 죽을 뻔했잖아요.”
“이놈아, 그 정도로 죽을 거 같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지. 대체 왜 댓바람에 귀찮게 구는 거냐?”
소동은 잠시 잊었던 용무를 떠올리고, 냉큼 다가와 노인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오늘 용소(龍沼)에 함께 낚시하러 가기로 하셨잖아요. 어서 가요.”
그제야 약속이 기억난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오냐, 오냐. 그만 당겨라. 늙은이 넘어지겠구나.”
노인의 손을 놓은 소동이 한달음에 밖으로 나가 낚시 도구를 챙겨 어깨에 둘러메고 노인을 기다렸다. 나릿나릿 문밖으로 나선 노인은 눈이 아렸던지 손을 들어 쏟아지는 햇볕을 가렸다.
너무도 환한 세상 풍경에 노인은 칙칙했던 마음조차 하얗게 밝아지는 듯했다. 불어오는 춘풍(春風)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간질이고, 눈을 시원하게 하는 파릇파릇한 녹음이 가득한 정경을 잠시 음미하던 노인이 온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구는 다 챙겼느냐?”
평소보다 더 기력이 왕성한 듯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기꺼웠던 소동이 얼굴이 만개하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그럼 가자.”
노인의 신형이 마당에 내려서자 소동이 몸을 돌려 깡창거리며 앞장섰다. 나풀나풀 뛰어가는 소동의 모습이 노인의 얼굴에 생기를 더했다. 두 노소의 여유로운 걸음이 용소에 도착하고 우르르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그들의 귀를 시원하게 했다.
“할아버지, 여기예요.”
넓적한 바위로 사부랑삽작 뛰어오른 소동이 노인을 향해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간 노인이 소동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기가 네가 말한 명당이냐?”
소동이 팔을 활짝 벌리며 조그만 입으로 조잘거렸다.
“네. 여기서 정말 이따만 한 놈을 놓쳤어요.”
노인이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내가 왔으니 그놈을 꼭 잡을 게다. 어디 보자.”
바위 가장자리에 스르륵 걸터앉은 노인은 낚시 도구를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제법 굵은 죽간(竹竿)을 꺼내 바늘에 밥알을 뭉쳐 만든 미끼를 끼웠다.
“할아버지, 작은 물고기를 미끼로 쓰는 것이 좋지 않아요?”
“이걸로 충분하다. 조인(釣人)은 떡밥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노인이 즉흥적으로 만든 말이지만, 소동이 알 턱이 있는가. 소동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죽간에 미끼를 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방.
노인이 죽간을 용소에 드리웠다.
참방.
소동의 죽간도 노인이 던진 곳의 바로 옆에 드리워졌다.
두 노소는 서로에게 뱅싯 웃고는 죽간 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애사지장(愛思之章)
마염기 1권(1화)
第一章 새벽이슬같이(1)
하늘을 가득 덮은 흑운(黑雲)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무거웠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서늘한 기운이 무풍(無風) 속에서 사위(四圍)를 거칠게 휘감아 돌았다.
우거진 수림(樹林)까지 더해져 한낮임을 잊은 듯 어스름한 고적한 산속.
부드럽게 흩날리는 백발 아래 세월의 경륜이 새겨진 이마와 불을 뿜는 호목(虎目), 풍염하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인구에 회자되는 신선의 풍모를 가진 노인이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뒷짐을 진 노인의 평온한 표정과 달리 둘러싼 많은 무인은 도검을 다잡으며 긴장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보는 일촉즉발의 흉험(凶險)한 상황.
하늘로 향했던 노인의 시선이 서서히 인계로 하강했다. 시선을 받은 무인이 움찔거리며 게걸음을 걸어 눈길을 피했다.
파르르 파락.
무풍(無風) 속에서 펄럭이는 청삼(靑衫)을 보니 흙이 곳곳에 묻었고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허. 내가 어쩌다…….’
곤경에 처한 지금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음에도, 노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그의 시선은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일순 노인이 둘러싼 무인들에게 일갈(一喝)이 터뜨렸다.
“왜 노부를 이리도 핍박하느냐!”
만인을 압도하는 절대자의 기개(氣槪).
둘러싼 무인들이 고막을 때리는 일갈에 담긴 공력의 웅강함에 잠시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포위망을 풀 생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무인들의 복장은 승도속(僧道俗)을 총망라한 듯 다양했고, 손에 든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단 한 사람, 자신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少林)의 영각이라 하외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외다. 하나 시주께서 익히신 무공은 인세(人世)에 있어서는 안 되기에 부득불 손을 쓴 것이니 너무 야박하다 탓하지 마시구려.”
무정금강승(無情金剛僧) 영각(影覺).
소림의 장로이자 십계십승(十戒十僧) 중 살계승(殺戒僧)으로 단호한 손속으로 널리 알려진 무승(武僧).
노인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녀자를 희롱하는 정파의 제자를 가볍게 훈계하며 손을 쓴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니…….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겠구나.’
“노부는 여태 강호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다. 누구와 싸운 적도, 누구를 해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단지 내가 익힌 무공 때문에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냐?”
노인의 담담한 말에 짙은 노기가 물씬 풍겼다. 소림승 옆으로 한 노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본도는 화산의 심월이라 하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인장의 생명이 아니외다. 그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도록 단전(丹田)만 폐(閉)하면 되니 순순히 협조를 해 주시면, 큰 어려움은 겪지 않으실 거외다.”
지난 삼 주야(晝夜)를 돌이켜 보면 몇 번이나 조우하였음에도 손속에 사정을 두어 아무도 상하게 하지 않은 탓에 지금 저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리라.
노인의 다소 여윈 듯하지만 단단하고 굳센 기상이 보이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화산일검향(華山一劍香) 심월(心月). 매화삼십육검(梅花三十六劍)을 극성으로 연성한 화산의 장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껏 자신의 뒤를 쫓는 무인들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지만, 손을 섞은 상대는 각 파의 일대 제자들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몸을 뺄 수 있었다.
화산의 장로와 소림의 살계승.
일대일의 대결이라면 필승의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모인 수많은 무인의 합공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무인과 손을 섞은 경험이 별반 없어 이룬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자신으로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평생 무공을 수련한 무인으로 단전을 폐하도록 순순히 내줄 수도 없는 일. 노인의 가슴은 큰 돌을 올려놓은 듯 무거워졌다.
화산일검향은 노인이 가진 무공을 직접 목도(目睹)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문인으로부터 그 위력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장문인의 말을 떠올리는 그의 마음에 슬그머니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진정한 위력과 이름이야 알 길이 없지만, 과거 잔심혈도(殘心血刀) 곡요(曲耀)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강호에 혈풍(血風)을 휘몰아 왔을 때 처음 강호에 알려진 악마의 도법(刀法)이었다.
잔심혈도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를 추살(追殺)하려 나선 구대 문파의 무인 중 살아 돌아온 이들이 일 할에 불과했다. 희생된 무인 중에는 구파의 장로들도 대거 포함되었었다.
검은 초승달 강기(|氣)가 닿는 모든 것을 잘라 버렸고, 스치기만 해도 닿은 곳이 심한 화상을 입게 되는 무공. 살아 돌아온 자들이 전하는 도법의 위력은 듣는 이들의 소름을 돋게 할 정도였다.
각 파 장로들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으로 겨우 그의 움직임을 막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합공(合攻)으로 겨우 그를 죽일 수 있었다고 전해졌다. 장로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그를 막기는커녕 전멸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정파의 무인들은 심장이 떨리는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 무공이 지금 펼쳐지려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인성을 상실한 잔심혈도의 손에서 펼쳐졌지만, 지금은 그 경지를 넘은 듯한 노인이 펼치려는 것이 아닌가.
격렬하게 넘실거리던 분노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노인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워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예기(銳氣)를 흘리는 날렵한 안시도(雁翅刀)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노부도 이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펼친 적이 없었네. 오랜 수련으로 교유(矯?)하고 기쁜 마음으로 강호를 유람하러 나왔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기실 나도 내 무공의 위력을 정확하게 모르니 다들 조심하시게.”
차분히 가라앉은 노인의 말에 그를 둘러싼 무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병기를 다잡았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을 뒤덮었고, 끌어올린 내공의 강한 기파가 거칠게 휘감아 돌았다.
이를 악문 화산일검향은 평생을 함께한 자신의 매화문검(梅花紋劍)을 노인에게 겨누었다.
“두렵습니다. 하나 인세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무공을 모른 체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벌주를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전에 노인이 펼칠 무공 명을 들을 수 있겠소이까?”
곧 펼쳐질 지옥도(地獄圖)를 떠올린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생(死生)의 관두(關頭)에서 무공의 이름이 무에 그리 중할까. 그래도 그대가 알기를 원한다면 일러 주겠네. 묵월마염도(墨月魔炎刀)라 한다네.”
묵월마염도.
그 이름이 무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졌다.
무정금강승이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그의 말이 신호였는가.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돌아보던 노인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화악―
묵월마염도의 현신.
도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나더니 피를 갈구하는 듯 넘실거렸다. 그를 둘러싼 무인들의 눈에 잠시 두려움이 피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안시도가 비스듬히 지면에 드리워졌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흐르고 살짝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사위에 그득하였다.
“탓.”
촤악―
어느 순간, 움직임이 없던 노인의 몸에서 검은 강기가 빛살처럼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후두두. 툭. 툭.
하늘이 펼쳐질 참상을 보기 싫었던가!
굵은 빗방울이 우거진 숲을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장대비로 변해 무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
“할아버지!”
귀청을 울리는 밝고 낭랑한 목소리에 노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자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상긋거리는 소동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병색이 완연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예끼, 이놈아. 놀라 간 떨어질 뻔했다.”
얼른 미소를 지운 노인이 짐짓 화난 듯 음성을 높였지만, 이미 걸렸던 미소를 본 소동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치. 할아버지께서 놀라실 때가 있나요?”
열 살 남짓 되었을까. 크고 또랑또랑한 눈이 귀엽게 보일 뿐 딱히 잘생긴 구석이 없는 소동은 냉큼 달라붙어 노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또래의 아이들보다 작아 보이는 소동의 힘으로는 파리한 안색의 노인조차 당할 수 없었던가. 오히려 소동이 노인의 품으로 끌려와 안겼다.
“요놈아, 나는 사람이 아니냐?”
노인이 간지럼을 태우는 것인지, 소동이 몸을 바동거리며 깔깔거렸다.
“헤헤헤. 할, 할아버지, 헤헤, 저 죽어요. 헤헤헤.”
“이놈아, 다시 또 그럴 테냐?”
“헤헤, 안, 헤헤, 그럴게요. 헤헤, 용서해 주세요.”
노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자 소동은 발딱 일어나 후다닥 멀어졌다. 귀여운 눈에 물기가 조금 맺히고, 얼굴은 발그레 달아오른 채 제법 매섭게 노려보았다.
“할아버지, 죽을 뻔했잖아요.”
“이놈아, 그 정도로 죽을 거 같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지. 대체 왜 댓바람에 귀찮게 구는 거냐?”
소동은 잠시 잊었던 용무를 떠올리고, 냉큼 다가와 노인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오늘 용소(龍沼)에 함께 낚시하러 가기로 하셨잖아요. 어서 가요.”
그제야 약속이 기억난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오냐, 오냐. 그만 당겨라. 늙은이 넘어지겠구나.”
노인의 손을 놓은 소동이 한달음에 밖으로 나가 낚시 도구를 챙겨 어깨에 둘러메고 노인을 기다렸다. 나릿나릿 문밖으로 나선 노인은 눈이 아렸던지 손을 들어 쏟아지는 햇볕을 가렸다.
너무도 환한 세상 풍경에 노인은 칙칙했던 마음조차 하얗게 밝아지는 듯했다. 불어오는 춘풍(春風)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간질이고, 눈을 시원하게 하는 파릇파릇한 녹음이 가득한 정경을 잠시 음미하던 노인이 온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구는 다 챙겼느냐?”
평소보다 더 기력이 왕성한 듯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기꺼웠던 소동이 얼굴이 만개하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그럼 가자.”
노인의 신형이 마당에 내려서자 소동이 몸을 돌려 깡창거리며 앞장섰다. 나풀나풀 뛰어가는 소동의 모습이 노인의 얼굴에 생기를 더했다. 두 노소의 여유로운 걸음이 용소에 도착하고 우르르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그들의 귀를 시원하게 했다.
“할아버지, 여기예요.”
넓적한 바위로 사부랑삽작 뛰어오른 소동이 노인을 향해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간 노인이 소동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기가 네가 말한 명당이냐?”
소동이 팔을 활짝 벌리며 조그만 입으로 조잘거렸다.
“네. 여기서 정말 이따만 한 놈을 놓쳤어요.”
노인이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내가 왔으니 그놈을 꼭 잡을 게다. 어디 보자.”
바위 가장자리에 스르륵 걸터앉은 노인은 낚시 도구를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제법 굵은 죽간(竹竿)을 꺼내 바늘에 밥알을 뭉쳐 만든 미끼를 끼웠다.
“할아버지, 작은 물고기를 미끼로 쓰는 것이 좋지 않아요?”
“이걸로 충분하다. 조인(釣人)은 떡밥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노인이 즉흥적으로 만든 말이지만, 소동이 알 턱이 있는가. 소동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죽간에 미끼를 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방.
노인이 죽간을 용소에 드리웠다.
참방.
소동의 죽간도 노인이 던진 곳의 바로 옆에 드리워졌다.
두 노소는 서로에게 뱅싯 웃고는 죽간 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