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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2화)
第一章 새벽이슬같이(2)


두 사람의 귀청을 울리던 육십여 자나 되는 높이의 비폭(飛瀑)에서 날아 내리는 우렁찬 낙수 소리도 미소지각(微小知覺)으로 점차 잦아들었고, 꼴꼴거리는 물 흐르는 소리도, 지지배배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도 들리지 않는 몰아(沒我)의 경지에 들어섰다.
한참을 무심한 눈길로 죽간의 끝만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듯 미동이 없던 노인의 어깨가 일순 살짝 움찔했다.
어신(漁信).
소동의 숨죽인 시선이 노인의 죽간 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
노인이 살짝 손을 챘다. 미약한 움직임처럼 보였지만, 죽간 끝에 이르렀을 때는 제법 강한 반탄력으로 튕겨 올랐다.
“흡.”
묵직한 손맛. 죽간이 부러질 듯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휘어졌다. 제법 큰 놈인지 손끝으로 전해지는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손가락질하며 촐싹대는 소동의 입에서 호들갑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그놈, 그놈이에요!”
노인은 짐짓 힘든 듯 잠시 승강이를 벌이다 살짝 내공을 끌어올려 죽간을 슬쩍 챘다.
쉬익―
커다란 잉어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더니 뭍에 털퍼덕 떨어져 퍼덕거렸다. 그러자 소동이 냉큼 달려가 퍼덕이는 잉어를 끌어안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 자기 키만큼 큰 잉어를 안아 든 소동이 활짝 웃으며 호들갑 떨었다.
“할아버지, 이놈이 그놈이에요.”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이 맞는 듯하구나.”
노인의 장단에 소동이 퍼덕이는 잉어를 꼭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즐거워했다.
“오늘 저녁에는 고기반찬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노인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흘끔흘끔 소동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까지 휘우뚱거리면서도 새실대던 소동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어두워졌다. 뻐끔거리는 잉어를 잠시 바라본 소동이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놔주면 안 돼요?”
노인이 짐짓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는 산채 반찬만 먹는 것이 질리지도 않느냐?”
소동이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백 날 천 날 산채만 먹어도 맛있어요. 그러니 이 녀석은 그냥 놓아줘요. 네?”
더 놀렸다간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듯한 소동의 표정에 애써 웃음을 감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노인의 승낙에 소동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며 뒤뚱뒤뚱 물가로 걸어가 살며시 잉어를 풀어 주었다. 잉어는 화난 듯 거칠게 물을 튀기며 용소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튀어 오른 물에 흠뻑 젖었음에도 소동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소동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녀석. 맑게 자랐구나.’
근처 가장 가까운 인가가 백여 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산속에 작은 초옥을 짓고 살아온 지도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뀌었다. 자신이 갓난아기를 데려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자랐다는 것을 불현듯 느낀 노인은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른 채 지난 시간을 더듬었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갓난애를 발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지난 시간에 만감이 교차하던 노인은 생글거리며 달려온 소동을 팔 벌려 품에 안았다.
“잘 가더냐?”
“네. 할아버지.”
잠시 소동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집에 가자꾸나. 할아비가 조금 피곤하구나.”
발딱 고개를 든 소동의 눈이 커지고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많이 아파요?”
노인은 일희일비하는 소동의 모습에 손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다. 그저 조금 피곤하구나.”
소동이 재빨리 움직여 낚시 도구를 챙기더니 선뜻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 어깨를 짚으세요.”
작은 몸으로 할아버지를 등에 업지는 못할 것이기에 어깨를 내놓은 것이다.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소동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맙구나.”
노인은 소동의 어깨에 살짝 올린 손을 그대로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손으로 전해지는 소동의 따스한 체온을 즐기며 슬며시 미소를 지은 노인은 평화로운 행복감을 즐겼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천하를 울리는 명성, 천지를 가르는 무공을 이룬 것보다 더 행복했다.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 준 소동이 사랑스러운 노인은 한시도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단지 조금 걱정되는 것은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한 듯한 소동의 몸이었다. 자신의 몸이 정상이라면 서슴지 않고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해 주었겠지만, 돌이킬 수 없으리만치 깊은 내상을 입은 몸으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한없이 다정해 보이는 조손의 모습은 주위의 평화로운 풍광과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변하며 점점 작아졌다.

시간은 졸졸 흘러 해가 두 번 바뀌었다.
같이 뛰어놀 또래 아이들은 없지만, 조금 더 자란 소동의 하루는 바쁘고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병색이 짙은 할아버지가 드실 소반(小盤)을 차리고, 식사를 마치면 놀이터인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매일 보는 풍광명미(風光明媚)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소동의 즐거움이었다. 새싹이 파릇파릇 피어나는 춘경(春景)의 산하는 소동에게 축복이었다. 스치는 이름 모를 들꽃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비와 풀벌레들에게도 반가움을 전했다.
풀밭에 누워 향기로운 풀 내음을 음미하거나 흐르는 구름을 감상하고, 때로는 따스한 햇볕의 부드러운 손길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도 아니면 거목의 굵은 가지에 올라 눈을 감은 채 시원하고 상큼한 바람과 지지배배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도 비단 금침처럼 부드러운 언덕에 팔베개하고 누운 소동은 할아버지의 상세가 나빠지기 전에 겨우 천자문을 떼 까막눈을 면한 정도지만, 귀동냥으로 배운 이백의 시를 조용히 읊조렸다.

위초당작란 爲草當作蘭
위목당작송 爲木當作松
란유향풍원 蘭幽香風遠
송한불개용 松寒不改容

풀이 되려면 난초가 되어야 하고,
나무가 되려면 소나무가 되어야지.
난초의 그윽한 향기는 바람에 멀리 날고,
소나무는 추워도 용모를 고치지 않으니.

그 깊은 의미야 알 수 없지만, 그저 좋았다. 소동은 중천을 지나친 해가 서녘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저녁에 할아버지의 반상에 올릴 산채를 캐러 산등성이를 더듬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손을 타지 않은 산야 곳곳에는 두 노소가 먹을 산채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다 소동은 산채들이 서식하는 곳을 훤히 알았다. 금세 한 망태의 산채를 얻은 소동은 만면에 가득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초막으로 강중거리며 달음박질쳤다.

찬이라고는 산채 몇 가지가 전부인 단출한 반상을 앞에 두었지만, 노인과 소동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진수성찬을 앞에 둔 것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으마.”
“많이 드세요.”
노인이 힘겨운 듯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하자 소동이 산채 한 점을 노인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허허.”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탄식을 토하자 소동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왜 그러세요?”
노인이 짐짓 눈을 부라렸다.
“예끼, 인석아, 산채를 올린다면 내가 마땅히 그래야지 어찌 네놈이 할아비의 그릇에 산채를 올리는 게냐.”
소동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여태 할아버지께서 저를 키워 주셨으니 이제 제가 봉양할 차례인 듯해서요. 주제넘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제법 철이 든 듯 말하는 소동의 모습에 노인은 내심 놀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아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훌쩍 자라 제법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다. 노인은 오랫동안 고민했던 바를 결정 내릴 수 있었다.
반상을 물린 노인은 소동을 불러 앞에 앉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할아비가 하는 말을 단단히 기억해 두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네, 할아버지.”
잠시 호흡을 고른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건강을 지켜 줄 호흡법이다. 구결(口訣)을 일러 줄 터이니 잘 기억해 매일 힘써 수련해야 한다. 잘 들어라.”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대저 만물의 근본은 하나에 이르니 명유(明惟)로 그 이치를 득하면, 극(極)에 달할 수 있을지니 그 방도는 이러하니라. 천존지공(天尊地쭪) 건곤정의(乾坤定矣) 재천유상(在天有象) 재지유형(在地有形) 변화존의(變化存矣)…….”
노인의 암송은 길게 이어지더니 마지막 구결을 마쳤을 때는 거의 한 식경이 홀딱 지난 후였다. 긴 구결을 외운 탓인지 노인의 안색은 파리했고, 호흡은 거칠었다. 그래도 전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노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다 외웠느냐?”
노인의 기대에 찬 시선에 소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소손이 우둔하여 앞부분만 조금 알 뿐 모두 얻지를 못했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다시 구결을 전해야 하는 탓이리라. 속으로 크게 탄식한 노인은 금세 마음을 다스려 안정을 찾았다. 하긴 구결은 천고의 기재가 아닌 다음에야 한 번 듣고 모두 기억하기에는 길었다.
노인이 눈을 감고 구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식경이 훌쩍 지나가고 노인이 다소 힘겨운 음성으로 물었다.
“다 외웠느냐?”
소동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흠.”
노인은 헛기침을 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귀여운 손자는 천고의 기재가 아닌 범재(凡才)였다. 그리 쉽게 구결을 암기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기력이 부친 탓에 또 구결을 암송할 수는 없었다.
“내일 다시 하자꾸나. 좀 피곤하구나.”
머리는 뛰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효성은 지극한 소동이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노인을 부축해 자리에 눕도록 도왔다. 소동의 행동에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천고의 기재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지. 암!’
긴 구결을 두 번이나 읊조렸던 노인은 피곤했던지 금세 잠들었다. 잠이 든 노인은 평온해 보였으나 그럼에도 소동은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금방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자리를 지켰다.

범재인 소동이 구결을 완벽하게 암기한 것은 석 달이 훌쩍 지난 후였다.
소동이 구결 암송을 마치자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어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을 흘렸다.
“수고했다. 이제는 구결의 의미를, 쿨럭, 일러 줄 터이니 잘 명심하며 수련하여야 한다.”
“네.”
“대저 하늘은 존귀하고, 땅은 이를 받드니. 건곤(乾坤)이 이에서 나온다. 하늘에는 상(象)이 있고, 땅에는 형(形)이 있으니 변화는 이에 기인(起因)하는 것이다. ……중략……알았느냐?”
“네, 할아버지.”
소동이 어찌 그 의미를 모두 알겠는가. 단지 할아버지께서 그 긴 의미를 다시 설명하실까 걱정한 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노인도 소동이 다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득을 얻고 얻지 못하고는 소동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일러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노인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로 소동과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소동은 심법(心法)을 수련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시때때로 물어오는 할아버지에게 실망을 드리기 싫었던 탓에 그저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아 구결을 암송할 뿐이었다.
구결을 암송하는 것만으로 심법을 수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법의 효용을 맛보지 못했는데 수련이 즐거울 리가 있겠는가. 자질도 뛰어나지 않는데다 건성건성 수련하는 소동은 해가 지나도록 기감(氣感)조차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산천을 누비며 노는 것에 여념이 없는 소동을 지켜보는 노인은 안타까운 마음이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건강하다면 기를 불어넣어 기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었고, 도인(導引)해 운기의 기초를 잡아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소망과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한 줄기 남은 내공으로는 병세의 발작을 막기에도 버거웠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동이 험한 강호에 뛰어드는 것보다 차라리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며 위안을 삼은 노인은 소동의 수련에 일체 잔소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다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 구결을 잊지 않도록 때때로 구결 암송을 시키는 것이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