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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3화)
第一章 새벽이슬같이(3)


“할아버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느 때와 달리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길 떠날 채비를 한 할아버지를 따라 강중강중 뛰며 걷던 소동이 자그마한 입술을 놀려 재잘거렸다.
“우리도 이제 마을로 내려가 살자꾸나.”
노인의 말에 소동의 눈이 커졌다.
“우리 집은요?”
“네 녀석이 지고 갈 테냐?”
“…….”
노인이 뱅싯 웃고는 훌쩍 커 버린 소동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가끔 와서 잘 있는지 둘러보면 되지 않느냐.”
무엇이 그리 서운한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던 소동이 발딱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약속하시는 거죠?”
“그래. 약속하마.”
그제야 약간 안색이 밝아진 소동이 등에 멘 작은 등짐을 한번 추스르고는 앙큼상큼 발을 내디뎠다. 소동은 길을 가는 내내 마치 주인을 따라 걷는 강아지가 발발거리듯 노인의 주위를 졸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한편 귀엽기도 하고 한편 안쓰럽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라 동무가 없었기에 혼자 노는 것에 익숙해진 소동이 분잡한 곳에 잘 적응할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도 없이.
노인은 오랜 고민 끝에 소동을 믿을 만한 이에게 맡기고 자신의 친우를 찾아 병을 치료하기로 했다. 사실 친우라 할 것도 없는 겨우 면식만 튼 의원이었지만, 겨우 그의 존재를 떠올린 노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찾을 생각이었다.
혼자 남을 소동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길어야 한두 해를 겨우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로서는 지금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리라.
그리고 지금 찾으려는 의원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까닭에 그를 찾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터였고, 설혹 찾는다고 하더라도 의원이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기에 소년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데려갔다가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 혼자 남을 소동이 어떻게 되겠는가. 마을 촌장에게 믿을 만한 찬모를 구해 달라 부탁했으니 그 여인에게 생활할 충분한 돈을 주고 손자를 부탁하면 어느 정도 자랄 동안 잘 보살펴 줄 터였다. 그것이 자신이 데리고 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리라.
의원이 자신을 완치시켜 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소동의 곁에 더 머물며 지켜볼 수 있다면 하는 욕심이 노인의 결정을 도왔다.
할아비의 걱정을 알 길이 없는 소동은 노인의 건강이 나아진 것처럼 보였기에 기분이 한없이 좋았다. 그리고 금세 살랑살랑 불어오는 감미로운 바람과 수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들꽃, 하늘거리는 우거진 연녹색 들풀이 전하는 평화로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또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모습이 언제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했다. 팔을 벌려 손끝을 스치는 산들바람을 느끼기도 하고, 코를 벌렁대며 들꽃이 전하는 그윽한 향기를 맡기도 하며, 때론 팔을 뻗어 들풀을 부드럽게 스치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간지러움에 해죽거렸다.
앞으로 머물 소방(疏放)까지 제법 먼 거리였고, 중간에 쉬지도 않았지만, 이 산 저 산 뛰어놀며 단련된 소동의 탄탄한 다리는 거뜬히 견뎌 주었다.
조손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여전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면 된다.”
오랜만에 먼 길을 걸은 탓인지 안색이 약간 창백해진 노인의 말에 우뚝 선 장원을 바라본 소동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지내 왔던 초막과 비교할 때 작은 장원은 그에게 대궐과 다름없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즐거워하는 소동의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짐 정리를 마친 노인은 잠시 외출하더니 나이 지긋한 아낙과 함께 돌아왔다. 가끔 할아버지와 함께 먹을거리를 구하러 마을에 들르면 평소 받은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대해 왔기에 소동은 예를 갖춤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효로(曉露)라고 해요.”
식모로 들어온 노파가 황급히 효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도련님, 홍 노파라 불러 주세요. 그리고 말씀을 낮추세요. 이 늙은이가 부담스러워요.”
귀천(貴賤)에 대해 알 리 없는 효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하자 노인이 온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할머니라 부르고, 자네는 손자처럼 대해 주시게.”
두 사람의 관계를 정해 준 노인이 쪼그려 앉으며 효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 효로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차례였다.
“효로야, 지금부터 할아비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내내 즐거워하던 효로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효로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아끼던 노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할아비가 아프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손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손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도 할아비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지?”
효로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지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아비가 병을 치료하러 잠시 어디로 다녀와야겠구나. 혼자서도 밥 잘 먹고, 잘 잘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효로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금세 또르르 굴러 내렸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소동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금방 올 수 있을 게다. 그동안 밥 잘 먹고, 할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알았느냐?”
딴에는 씩씩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지 소동은 제법 의연하게 대답했다.
“네. 효로는 밥 잘 먹고, 할머니 말씀 잘 들을 테니 할아버지께서도 진지 잘 드시고 금방 오세요. 네?”
노인이 연방 효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꼭 그리 하마.”
효로가 노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조손은 한동안 꼭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노인의 손이 효로의 머리를 연방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날 밤, 효로는 할아버지와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던 그가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놀란 마음에 서둘러 할아버지의 침소를 찾았을 때는 주인을 잃은 덩그런 빈방만이 그를 맞았다.
“주인께서는 새벽에 길을 떠나셨어요. 쇤네가 깨워 드리려 하자 도련님이 곤히 주무신다며 그냥 두라고 하셔서 깨우지 않았어요. 하지만,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도련님.”
홍 노파는 효로가 멍한 표정으로 대문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서 있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홍 노파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효로가 축 처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죠? 곧 돌아오시겠죠?”
홍 노파가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도련님. 주인님께서 금방 돌아오실 거라 약속하셨잖아요. 자자, 이제 아침을 드셔야죠. 어서 세안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쇤네가 얼른 음식을 내어오겠어요.”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효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물가에서 세안을 하고 식탁에 가 기운 없이 털퍼덕 주저앉았다. 홍 노파가 맛깔스러운 음식을 여러 가지 내왔지만, 효로는 젓가락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할머니.”
식탁에서 몸을 일으킨 효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의 뒷모습에 홍 노파의 안쓰러움이 가득한 시선이 내내 뒤따랐다.
침상에 몸을 던진 효로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북받친 설움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숨죽인 오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할아버지. 흑흑흑.’



第二章 싹트는 연심(戀心)(1)


할아버지가 떠나고 칠 주야가 지나도록 효로는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얼굴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홍 노파의 성화에 대문 밖으로 쫓겨난 효로는 양지바른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묻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따스한 햇볕 속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던 그는 문득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느끼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예쁘고 동그란 눈동자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앵두같이 붉은 입술이 열리며 영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 거지니?”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아니었기에 효로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새로 이사 왔니?”
효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음의 주인은 계속 물었다.
“집이 어디야?”
효로가 손을 들어 자신이 기댄 벽을 가리켰다. 소녀는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담벼락을 가리키며 짓궂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여기가 네 집이야?”
조금 귀찮은 듯 소리 내어 중얼거리는 효로의 음성이 작았다. 마음은 매사가 싫어도 어쩐지 소녀의 말에는 곧이곧대로 대답이 나왔다.
“아니 담장 안.”
처음으로 효로가 입을 열어 대답하자 소녀가 손바닥을 짝 치며 즐거워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아! 난 단소소야. 넌?”
그제야 효로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소녀는 자신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은 눈과 오목하게 팬 예쁜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효로가 힘없이 우물거렸다.
“효로.”
마치 보물을 얻은 기분이라 단소소는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그 기분이 무언지도 모른 채 들떠서 단소소는 효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효로구나. 아이들이랑 냇가로 놀러 가려는데 너도 같이 갈래?”
효로는 눈앞에 디밀어진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느껴지는 보드라운 느낌에 효로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영차.”
단소소가 그를 채자 효로가 허깨비처럼 가볍게 끌려왔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단소소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내달렸다.
한동안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효로가 활기찬 그녀의 힘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꽁무니에 매달린 채 끌려 다니기 시작했다.
온종일 단소소에게 이끌려 아이들과 놀고 해거름 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효로의 얼굴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동안만은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잠들기 전에 잠시 숨었던 그리움이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지만, 온종일 천방지축 뛰어노느라 쌓인 피로에 금세 잠에 빠져 버렸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던 효로는 아이들과 가까워질수록 본연의 활달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산천을 누비고 다니며 깔깔거리는 효로의 천진한 모습이 밝은 햇살 아래 환하게 빛났다.
효로와 아이들은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까만 얼굴로 즐거워했고, 가을의 풍요로운 산야(山野)가 주는 다양한 열매를 입에 가득 물고 행복해했다.
아이 중 나이가 제일 많았던 단소소가 은연중 아이들의 대장이 되었기에 그녀와 제일 가까운 효로는 저절로 그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효로가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산과 들에서 먹을거리를 찾는 효로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산속에 지낼 때 혼자 놀아야만 했고, 자연히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찬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산채를 채집하느라 알게 된 식용 가능한 열매와 산채를 찾아내는 방법은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 줄 주전부리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움움, 이번 갈근(葛根)은 제법 단데.”
제법 큼지막한 갈근을 찢어 입에 넣은 먹보가 우물거렸다. 말이 빠른 촉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눈이가 맛있을 거라 그랬어. 그렇지?”
눈이 크다고 왕눈이로 불리는 효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소도(小刀)를 꺼내 갈근 껍질을 조심스럽게 깎았다. 그의 곁에 바짝 앉은 단소소가 눈을 반짝이며 침을 삼켰다.
눈부신 햇빛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변(川邊) 작은 둔덕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갈근을 음미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어렸다. 겨울이 멀지 않은 탓인지 스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한참 뛰어놀던 아이들에게는 땀을 식혀 주는 시원함에 불과했다.
효로가 건네준 갈근을 오물거리던 단소소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특별히 누군가를 지목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단소소는 효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