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염기 1권(4화)
第二章 싹트는 연심(戀心)(2)


먹보가 단물이 빠진 갈근을 탁 뱉으며 대꾸했다.
“난 객잔 주인이 될 거야. 그러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촉새가 그의 뒤를 이었다.
“난 아마 채소가게를 물려받을 거야.”
단소소가 말이 없던 효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효로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더니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고 조용하게 한시(漢詩)를 읊조렸다.

위초당야초 爲草當野草
위화당야방 爲花當野芳
초유향방심 草幽香放心
화심향안심 花深香安心

풀이 되려면 들풀이 되고,
꽃이 되려면 들꽃이 되어야지.
들풀의 그윽한 향기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들꽃의 깊은 향기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니.

이백의 시를 고쳐 자신의 마음을 담은 것이지만, 글을 배운 적이 없는 아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처음 듣는 한시였고, 처음 보는 효로의 모습에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의미야 알 길이 있으랴만은 한시라는 사실만으로도 효로의 위상은 높아만 갔다.
단소소는 효로의 새로운 모습에 작은 가슴이 콩콩거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효로의 작은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가 너무 자랑스러웠던 그녀는 효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여봐란듯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효로는 속으로 부끄러웠다. 왜 자신이 그렇게 과하게 대답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소소가 옆에 있어 마음 깊은 곳에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다른 아이들처럼 간단하게 대답하였더라면 하는 후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시에 담긴 효로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자신은 그저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루하루 새롭게 다가오는 만물의 변화를 즐기고,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좋아하는 이들과 알콩달콩 흙냄새에 묻혀 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에 간간이 흐르는 새털구름의 한가로움이 잘 어울리는 평화로운 하루가 또 그들의 곁을 스르륵 지나갔다.

***

퍽―
“야! 그렇게 굼떠서 측간은 언제 치울 거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해?”
구레나룻 덥수룩한 푸줏간 정가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볼통스런 발길질로 효로의 등에 발자국을 남겼다. 충격에 효로가 든 장작들이 우르르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느껴지는 격통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금세 안색을 바로 하고 효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부터 말을 잊은 그의 입에서는 비명도 대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일을 당해도 그의 입에 걸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정가는 여전한 효로의 미소에 기분이 더러웠는지 비아냥거렸다.
“퉤, 쪼개기는……. 재수 없는 놈.”
침을 탁 뱉은 정가는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휘적휘적 멀어졌다. 정가의 발길질로 바닥에 뒹굴던 땔감을 주섬주섬 주워 든 효로는 입가에 여전한 미소를 매단 채 장작더미가 쌓인 곳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중으로 측간을 치울 수 없을 듯했다.

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흘러 할아버지가 떠난 지 어느덧 몇 해가 훌쩍 지나갔지만, 할아버지에게서 소식 한 자락 없었다.
인심막측(人心莫測)이라 했던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동안 친손자보다 더 챙겨 주며 살갑게 굴던 홍 노파의 태도와 눈길이 변해 갔다.
효로의 끼니도 잘 챙겨 주지 않았고, 시시때때로 집을 비우며 밖으로 나돌아 다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귀가하는 홍 노파의 몸에는 주향이 짙게 풍겼다.
효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급기야 주객이 전도되어 효로의 거처가 본관에서 대문 옆 구석방으로 옮겨졌고, 본관은 홍 노파가 차지하였다.
홍 노파는 노인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든 까닭에 노인이 남긴 은자가 탐이 났다. 남아 있는 은자를 효로를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더해 장원마저 차지하고 싶었다. 효로만 없어지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목숨을 해칠 용기는 없었기에 그를 모질게 대하기만 했다.
그래도 효로는 행복했다. 아이들과 뛰어노느라면 주린 배조차 느낄 수 없었고, 산천에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와 때때로 아이들이 가져온 주전부리로 허기를 면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단소소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그녀의 영롱한 목소리와 다정한 손길에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조차 희석되어 마치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할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홍 노파의 구박은 심해져 마치 하인을 다루듯 호되게 효로를 다그쳤고, 온갖 잡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술이라도 먹은 날이면 술기운에 효로에게 손찌검하기도 했고, 험한 욕을 달고 살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홍 노파의 강요에 떠밀린 효로는 이제 집안일뿐 아니라 마을의 온갖 잡일을 도와야 했다. 그가 받을 품삯은 고스란히 홍 노파의 손으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어린 채 지워지지 않았다.
옷은 점차 남루해졌으니 군데군데 허름하게 기워진 옷은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을 막을 수 없었고, 주린 배가 추위를 더하게 했다. 아이들은 그를 고아라며 구박하기 시작했고, 같이 놀지 않으려 했다.
아이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다. 처음에 그의 처지를 안쓰러워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당연하다는 듯 동전 몇 푼을 홍 노파에게 쥐어 주고 그를 마을 공동의 하인으로 치부하며 거칠게 다루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변한 모습에 효로는 당황스러웠고 가슴이 아팠다.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린 그로서는 변해 가는 그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단소소는 효로의 처지를 눈치채고 매번 먹을 것을 싸 와 그와 나누었고, 효로는 어린 마음에도 그녀에 대한 연모(戀慕)의 씨앗을 심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아무리 효로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곁에 단소소가 있었기에 갖은 고초에도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어린 채 지워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땔감을 옮기고, 측간을 비운 효로가 자신의 작은 방으로 발걸음을 떼 놓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지 오래였고, 둥실 떠오른 달이 하얗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 건강하시죠?’
살짝 물기 어린 그의 눈에 둥근 달 위로 할아버지의 온화한 미소가 덧보이는 듯했다. 그의 강파른 얼굴에 희미하게 맺혔던 미소가 달빛에 파르족족하게 부서졌다.
“효로야.”
마을에서 가장 듣기 좋은 음성이 들려오자 효로의 얼굴에 매달렸던 살짝 일그러진 미소가 환하게 피어나며 눈부신 변신을 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미소. 비록 깡마른 얼굴이었지만, 그의 순한 눈동자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미소는 사람을 끄는 진한 매력을 풍겼다.
“소소 누님.”
그동안 고초에 단련된 탓인가. 예전의 앳되고 부드러운 음성이 아닌 꺽센 음성이 단단하게 흘러나왔다.
한때 천방지축이었다가 이제 막 피어오르는 모란꽃 같은 여인으로 변한 단소소가 안타까운 시선과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자신을 가려 준 그늘에서 벗어나 사뿐거리며 다가왔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복숭아 향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를 볼 때마다 자신의 변한 모습도 떠오르는 효로의 미소가 씁쓸하게 변했다. 깡마른 몸에 거친 피부. 손은 거북등처럼 갈라졌고, 곳곳에 새겨진 생채기에 자신이 초라했고 창피하였다.
“늦었는데 들어가 쉬시지 않고…….”
도톰한 볼에 오목한 보조개를 만들며 피어나는 여미한 미소가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였다.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가슴을 간질이는 감미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모습을 못 보면 잠이 오질 않아.”
속내를 밝힌 단소소가 부끄러운지 도톰한 볼을 살며시 붉혔고, 그런 모습은 천계에서 방금 하강한 선녀 같았다.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효로의 조금 쉰 듯하며 거칠고 단단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사실 저도 그렇기는 해요.”
그 말에 단소소의 샛별눈에 행복감이 떠올랐고,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뿐히 다가선 단소소가 살포시 효로의 손을 감싸며 따스한 온기를 전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수줍은 정을 나누었다.
그들의 모습을 시샘한 듯 달조차 구름으로 얼굴을 가렸고, 조금 더 짙어진 어둠이 포근히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달콤한 이 순간을 단단히 가슴에 담아 두려는 듯 두 사람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

아무리 때리고 구박해도 지워지지 않는 효로의 미소.
사람들은 그가 조금 모자란 탓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단가장(端家莊)에 글 선생으로 초빙된 초관(礎貫)이라는 유생이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불혹을 갓 넘긴 듯한 청수한 모습과 글 선생이라는 직함을 가진 그는 빠른 속도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었다.
‘저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커다란 맑은 눈을 보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심성이 곱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초관은 자신할 수 없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자주 보아 온 그의 눈에 효로는 단순한 범재에 불과했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미소는 무슨 이유인지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네가 효로냐?”
똥지게를 지고 움직이던 효로가 들려온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초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발치서 본 적이 있는 사내였던지라 고개가 끄덕여졌다.
“글을 아느냐?”
다시 효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라는 듯 초관의 눈이 이채를 드러냈다. 묻기는 했지만, 훈장도 없는 작은 마을인지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마을의 천덕꾸러기인 그가 글을 안다는 것은 생각 밖이었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공부했느냐?”
“겨우 천자문을 뗐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초관이 다시 물었다.
“내 시자(侍子)가 필요한데 네가 하겠느냐?”
시자라면, 똥지게를 지는 일보다는 편한 것이 분명했다. 일이 편하고 힘들고를 떠나 글을 더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혹했지만, 그리 하려면 홍 노파의 허락이 필요했다.
“할머니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그 일이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초관도 효로의 처지를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재물을 좋아하는 홍 노파를 구워 삼는 일이야 전표만 조금 쥐어 주면 다 해결될 수 있을 일. 초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지금 가서 네 할머니의 허락을 구해 둘 터이니, 내일 진시에 내게 오너라.”
“네.”
대답을 들은 초관이 멀어지자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효로는 다시 똥지게를 출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자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내일 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들을 수 있을 것이기에 떠오르는 상념을 떨쳐 버렸다.

다음 날, 홍 노파의 이른 새벽 지른 고함 소리에 효로가 단잠에서 깨어났다.
“야, 이 게으른 놈아! 얼른 일어나 마당이라도 쓸지 않고 아직 처자빠져 자고 있어?”
효로는 벌떡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쌍심지를 켠 홍 노파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할머니.”
머리를 조아린 효로가 얼른 싸리비를 들고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으로 홍 노파가 목청을 높였다.
“마당 다 쓸면 단가장에서 네 녀석이 필요하다니 가서 시키는 일을 도와라. 행여 그들의 눈에 벗어나는 일은 하지 마라.”
어제 일이 떠오른 효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허름한 조반을 물린 효로는 단가장으로 걸음 했다. 단가장 밖에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반가운 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제법 쌀쌀한 날씨에 꽤 오래 기다렸던지 그녀의 입술이 파랬다.
“누님, 왜 나와 계세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걱정이 그득 담긴 그의 말에 단소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초관 글 스승의 시자 일을 할 거라고?”
“네.”
효로가 시자 일을 한다면 그를 볼 기회가 많아지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잘됐네.”
그녀의 마음을 전해진 탓인가. 효로의 마르고 거친 얼굴에 미소가 스르르 생겼다. 그녀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