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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5화)
第二章 싹트는 연심(戀心)(3)
그녀와 나란히 단가장 안으로 들어간 효로는 초관의 거처 앞에서 자신이 왔음을 고했다.
“효로입니다.”
“들어오거라.”
눈짓으로 단소소와 헤어진 효로는 안으로 들어섰다.
난(蘭)을 치는 모양인지 묵향(墨香)이 가득한 방 한편에 놓인 서탁 가득 화폭이 펼쳐져 있었다. 고아한 품격이 풍기는 가구들이 단출하게 배치되어 그의 정갈한 품성을 드러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효로는 초관의 움직이는 붓끝만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초관이 아무런 말 없이 난을 치는 것에 열중하는 탓에 혹여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던 초관이 그림을 완성했는지 붓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어떠냐? 네가 보기에 잘 그린 것 같으냐?”
효로는 건성으로 그림에 시선을 흘깃 주고는 고개를 숙였다.
“소인 같은 무지렁이가 본다고 무엇을 알겠습니까.”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고 싶은 탓인가. 초관은 효로를 손짓해 가까이 부르더니 다시 물었다.
“자세히 보아라. 그저 네 생각을 알고 싶을 뿐이니 느끼는 대로 말해 보아라.”
하는 수 없이 주춤거리며 다가간 효로가 잠시 그림을 보고 봄에 산의 양지바른 곳에서 많이 보았던 식물임을 알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봄을 알린다는 보춘란(報春蘭)인 듯합니다. 잎의 끝이 뾰족한 것부터 함초롬한 꽃잎까지 잘 나타나 있으니 무지한 제가 봐도 대단한 작품이라 느껴집니다.”
보춘란은 잎의 끝이 뾰족하고 측면은 약간 도돌도돌하며 꽃은 하얀 바탕에 분홍의 고운 빛을 띠는 것이 마치 새색시 같은 자태를 지닌 난이다.
자신의 그림을 칭찬하는 말이 싫을 까닭이 있겠는가. 만면에 가득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초관이 헛기침을 거듭하며 그림과 효로를 번갈아 보았다.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과한 칭찬이긴 하다만, 기분은 좋구나.”
다시 효로의 입이 열렸다.
“저는 시자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일러 주시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초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 이놈 봐라.’
시자로 쓸 작정이라 핑계하며 다른 목적으로 부른 것이지만, 그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말하는 효로의 모습은 마치 학문을 오래 갈고닦은 유생의 모습이 아닌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난 초관이 입을 열었다.
“지금 네 녀석의 태도는 ‘문(文)을 아니 제대로 대접해 주십시오’ 하는 듯하구나. 하하하.”
초관의 말에 효로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어렴풋이 알기로 시자는 그저 시중을 드는 아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마치 자신이 ‘저는 무지(無知)합니다’라고 크게 외친 듯 부끄러웠다.
효로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초관은 피식 웃음을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먹을 갈아라. 다음 일은 나중에 알려 주마.”
“네.”
할 일을 일러 주고 초관이 방을 나서자 효로는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켜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창피냐. 정신 차려라, 효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효로는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소장주인 단소운에게 글을 가르치려 걸음을 옮기던 초관은 효로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뛰어난 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기특한 것은 고생을 심하게 겪은 아이치고는 마음 씀씀이가 그리 강파르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이다.
‘일단 내가 필요한 것은 그의 심성(心性)과는 상관없으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겠군.’
그에게는 감추어야 하는 다른 신분이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임무도. 그 임무를 위해 효로를 선택한 것이다.
너무 어리석어도, 너무 똑똑해도, 무공을 익힌 적이 있어도 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아이가 필요했다.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아이가 필요했고 효로는 그에 딱 적합한 아이였다.
아직 글공부를 가르칠 시간에 여유가 있는 탓인지 그의 걸음은 느긋했고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나치는 이들이 그에게 모두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했고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맴돌았다.
도대체 효로에게 어떤 일을 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효로에게 득이 될 것인가? 실이 될 것인가? 그것을 아는 이는 초관밖에 없었다. 지켜보는 이가 없자 그의 얼굴에 걸렸던 상냥한 미소가 음험하게 변했다.
‘흐흐흐.’
***
효로가 단가장 글 선생의 시자가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그동안 그가 했던 갖가지 궂은 일이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온 탓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는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 처죽일 놈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거 봐. 재수 없어.”
“어미 아비도 없는 놈이 벼락출세했구먼. 귀신은 뭐 하누. 저런 놈 안 잡아가고.”
그들의 악담이 효로의 등 뒤에서 퍼부어졌지만, 효로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변함없이 머물고 있었다. 효로가 왜 등 뒤에서 자신을 욕하는 것을 모르겠는가.
왜 그리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미움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러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는 수밖에.
단가장의 식솔들은 효로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효로가 거의 온종일 초관의 거처에서 머물다 나와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무심함에 효로는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행복과 평화가 가득했던 그의 마음은 실망과 공허와 참담함이 대신 차지해 어릴 때 느꼈던 평화는 이제 없는 듯했다. 아니, 아직 가느다랗게 끝을 잡은 단소소가 있으니 조금은 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소소와 연결된 작은 평온만이 간신히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이 입가에 맺힌 지워지지 않는 미소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입은 상처를 단소소가 화사한 미소로 보듬어 안고 치료해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효로의 마음은 예전으로 달려가 행복했던 순간에 계속 머무르는 듯 즐겁고 기뻤다. 그 순간만큼은 둘 사이에 아무도,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었다.
서로 마음을 잘 아는 그들은 매일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만물이 간직한 눈부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시자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았기에 단소소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가깝고 깊어졌다.
하늘도 부러워할 그들의 사이가 어디 감춰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단가장주인 단소소의 아비는 처음에는 떠도는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글 선생인 초관까지 걱정을 전하자 딸을 불러 앉히고 사실을 물었다.
“네가 효로라는 아이와 연모한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던데 사실이냐?”
아비의 어투에 담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단소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 용기를 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가 그를 연모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딸의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대답에 장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혼례를 올려도 부족하지 않을 나이인 딸의 입에서 용납할 수 없는 말이 나오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어디 남자가 없어 동네 하인이나 다름없는 효로를 마음에 두고 있단 말인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딸이었다.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은 딸이었다. 그런 딸아이가 안겨 준 실망에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고, 전에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네가, 네가…….”
아비의 격한 분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단소소였지만,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소중한 감정을, 소중한 사람을.
그가 처한 처지가 어떻든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이였기에 자신이 겪는 지금의 곤경이 오히려 달갑게까지 생각되었다. 단소소는 용기를 내 애절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제 마음은 확고해요. 제발 아버지,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세요.”
딸자식을 둔 아비로서 아무리 뛰어난 놈이라 하더라도 딸을 빼앗기는 듯한 서운한 마음이 들 판국에 턱없이 부족한 효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말조차 뱉지 못하고 얼굴이 벌게지며 부들거리고만 있던 장주가 급기야 극에 달한 분을 터뜨렸다.
“썩 네 방으로 돌아가 근신하여라. 내가 허락하기 전에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라. 내 말을 어길 시에는 딸자식이라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냉큼 눈앞에서 사라지지 못할까!”
장주의 호령이 장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나 있는 단소소의 오라비가 아비의 호령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려왔다.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장주는 분이 그득한 눈으로 단소소를 쏘아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기에 오라비는 단소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왜 아버님께서 저리 진노하신 게냐?”
단소소가 무어라 입을 열겠는가. 그녀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비는 노려보기만 하고, 동생은 그저 묵묵부답(默默不答) 침묵을 고수하니 오라비는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영문을 알아내려 하였다.
장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소소를 자기 방에 가두고 문밖출입을 하지 못하게 감시해라!”
아비가 저리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오라비가 그녀를 밖으로 끌었다. 단소소는 너무도 큰 아비의 진노에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걸음으로 오라비의 채근을 받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문간에 기대 멍하니 서 있던 단소소는 오라비의 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사랑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 눈으로 보듯 훤했다.
자신의 처지와 효로의 처지가 머릿속에서 교차하며 그녀의 슬픔은 점점 짙어졌고,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는 자꾸만 커졌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다시 돌아왔던 오라비는 방 밖에서 누이동생의 숨죽인 오열을 듣고 가슴이 멨다. 여태 단 한 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 없이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동생이 무슨 일로 슬퍼하는지는 몰랐지만, 동생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누구든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왜 아파하느냐?’
단소운은 누이동생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동생의 오열을 가슴에 새겼다.
슬픔과 노기로 가득한 단가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은 초관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효로에게 하려는 일에 장애가 될 것이 뻔한 단소소를 그에게서 떼어 내려 꾸민 일이 성공했으니 이제 자신의 일을 시작해도 문제가 없었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군.’
第三章 시련은 안개처럼(1)
단가장에 들어선 효로는 만나는 이마다 보내는 적의를 느끼고 당혹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록 환대는 아니었지만, 단가장의 사람들에게서 이토록 심한 적대감은 받은 적이 없었다. 단소소가 그의 곁에 있기도 했었지만, 그들과 척을 진 일이 없었다.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단소소의 모습도 볼 수 없었고, 평소 냉랭하기는 했지만 그냥 스쳐 지나던 이들이 그를 흘겨보았고, 그가 인사라도 건넬 양이면 고개를 팩 돌렸다. 그동안 조금은 익숙해졌던 단가장이 다시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만 물어볼 사람도, 알아볼 방도도 없었던 효로는 답답한 가슴으로 초관의 거처로 갔다.
“효로입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간 효로는 여전한 미소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인 초관의 변하지 않은 태도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친근한 미소를 머금은 초관이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
“이리 와 차 한잔 하여라.”
초관의 친절에 효로는 잠시 당황했지만, 불렀으니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초관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차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였지만, 단 한 번도 이런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맑은 차에서 풍기는 향긋한 다향(茶香)에 이끌린 효로는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